<colbgcolor=#000><colcolor=#fff> 일본 제국 제18·20대 중의원 의원 박춘금 朴春琴[1] | |
출생 | 1891년 4월 17일 |
경상도 양산군 (現 경상남도 양산시)[2] | |
사망 | 1973년 3월 31일 (향년 81세) |
도쿄도 신주쿠구 시나노마치 게이오기주쿠대학 부속병원 | |
본관 | 밀양 박씨[3] |
학력 | 없음 |
직업 | 정치깡패 |
가족 | 아내 딸 박성례[4] |
주요 경력 | 나고야조선인 회장 상구회 회장 일선기업주식회사 상무취제역 노동봉사대 대표 상애회 회장 일본 제국 중의원 의원 대화구락부 회장 야마토동맹 이사 대의당 당수 도쿄 아세아상사 사장 |
비고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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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을 당시.[5] |
2. 생애
1891년 4월 17일 경상도 양산군(現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태어나 어려서 밀양군 부내면 삼문리(現 밀양시 삼문동)로 이주해 그곳에서 자랐다.[6] 밀양군의 상한서당(上漢書堂)을 잠시 다니면서 까막눈을 겨우 면했고, 14살이었던 1904년경 경상북도 대구군으로 가서 일본군 병영에서 급사로 일하면서 일본어를 배워, 1907년 일본에 건너가 막노동, 광부 일 등을 하면서 살았다.재일교포 폭력조직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나고야에서 조선인회장으로 취임하는 등 거물로 성장했다. 당시 일본 극우파 및 야쿠자의 원조이자 흑룡회의 막후실세였던 도야마 미츠루의 밑으로 들어갔다.
1920년에는 30살의 나이로 이기동과 함께 도쿄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을 규합한 상구회(相救會)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회장직에 취임했다. 상구회는 곧 상애회(相愛會)로 개편되었으며 일본 자본가들을 위해 노조 파업을 분쇄하는 등 극우 폭력조직으로 기능하였다.
1923년이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는 시체 처리와 한국인 색출 등 일본 극우파들의 선동질에 적극 협력하였다. 이후 일본 정객들의 도움을 받아 상애회 조직을 일본 전역으로 확대했고 1924년 한국에도 지부 개념으로 '노동상애회'를 조직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동아일보에서는 사설을 통해 격렬하게 비판했다. 이에 열이 뻗친 그는 1924년 4월 2일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를 식도원이라는 요정으로 불러 포박하고 거침없는 발길질과 오물을 퍼붓는 야만성과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이때 김성수와 송진우는 꽁꽁 묶인 채 그에게 무려 3시간 동안이나 머리, 얼굴, 가슴, 배 등을 두드려 맞았고 그가 인촌 김성수의 목을 칼로 내리찍으려고 하자 송진우가 급하게 동아일보 사설 내용에 대해 사과하여 김성수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7] 김성수와 송진우는 무려 3천 원이나 되는 거금을 그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8]
조선에서도 온갖 극우 테러에 앞장섰다. 1924년 전라남도 하의도[9] 소작쟁의가 있었을 때에는 깡패들을 몰고 가서 진압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 이외에도 이 사람이 저지른 깡패질은 수없이 많은데 주로 노동쟁의, 소작쟁의 활동이 있을 때마다 깡패들을 동원해서 농민, 노동자들을 때려잡았다. 1928년 4월 하의도에서 또 한번 소작쟁의가 일어났을 때는 무장경찰 20여 명을 대동하고 하의도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다가 주민들에게 붙잡혀서 몰매를 맞는 굴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일본의 수족노릇을 하며, 온몸을 던져 싸우던 그의 노력에 일본 정객들은 감동했는지 1932년에는 일본 제국의회 18대 중의원 선거에서 도쿄시 제4구(혼죠구, 후카가와구)[10]에 무소속 후보로 나서서 당선되었다.[11] 1936년 19대 선거에서는 떨어졌지만 1940년 20대 선거에서 다시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일본 제국 시대 중의원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조선의 네임드 친일파들이 임명되었던 귀족원 의원도 아니고 무려 도쿄 한복판의 일본인 유권자들이 뽑는 중의원에 2번이나 조선인으로서 당선된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골수 친일파였는지 알 수 있다. [12] 1942년 선거에는 대정익찬회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중의원 의원 시절 "조선인과 내지인의 동등한 권리 실현"이나 "참정권, 자치권 획득"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고 한다. 쉽게 말해 독립운동 대신 자치론 운동을 한 것이다. 참고로 당시 조선인들은 식민지의 2등 국민 위치였기 때문에 국가운영에 전혀 참여할 수 없었고, 조선의 지배는 전적으로 내지(일본)에서 파견된 조선총독부 관료들에 의해 행해졌다. 여기에 대항하여 꽤 많은 사람들이 조선인 협의회를 설립하고 지역마다 조선인 자치기구를 만들려고 하였다. 사실 불행하게도 1930년대 중반쯤 가면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노선으로 전향하게 되었는데 특히 민족개량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이러한 경향이 많이 보였다. 대표적으로는 춘원 이광수나 최남선 같은 경우가 그러했다. 당시 그들의 눈에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자였고, 국제연맹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한 열강의 일원이었다. 일본이 망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박춘금 같은 인물을 자치론 옹호자들은 고평가했다.
1928년 박기성 등 제일 한인 아나키스트 단체인 자유청년연맹 단원들이 습격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반민특위에서 반민족행위 1급 피의자로 지목해 연합군 최고사령부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에 '박춘금을 체포하여 강제 국내송환 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부가 응하지 않고 반민특위도 해산되면서 유야무야되었다. 이후 박춘금은 일본에 남아 평생 기거하게 되었다.
이후로도 도쿄 민단 중앙본부 고문을 맡는 등 재일교포 사회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13] 1955년 6월 조국통일촉진협의회를 조직했으며 1957년에는 일한문화협회를 설립하고 상임고문을 맡았다. 1962년에는 도쿄 아세아 상사의 사장으로 재직했다. 1962년 한일회담이 진행될 무렵 잠깐 한국으로 귀국하기도 했다. 이렇듯 그는 동족을 핍박하여 얻은 권세로 마지막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1973년 3월 31일 도쿄도 신주쿠구 시나노마치 게이오기주쿠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81세.
사후 그의 유해는 밀양시 교동 900번지[14] 선산 아버지 묘 아래에 몰래 안장되었으며, 1992년에는 딸 박성례(1925. 10. 2 ~ )[15]에 의해 묘소가 새로 단장되었고 송덕비까지 세워졌다. 이후 이를 알게 된 밀양시민들의 항의 끝에 파묘되었고 송덕비도 철거되었다.
친일인명사전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의 생애를 다룬 기사
3. 평가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그는 아시아주의라든가 오족협화 사상을 진짜로 믿은 악랄한 동시에 순진한 친일파였다고 한다. 이미 1910년대부터 한일합방 자체가 1:1의 동등한 합방이 아니고 일본 주도의 일방적인 병합, 병탄임이 드러났고 당시 일진회의 주도자였던 이용구 같은 경우 나중에 속았다고 할 정도였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일본인들 조차도 박춘금에 대해서 기겁할 정도로 극렬 친일파였다.4. 관련 문서
[1] 친일파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 일본식 이름은 없다.[2] #[3] 무덤 앞 상석에 밀성박공휘춘금지묘(密城朴公諱春琴之墓)라고 새겨져 있다.#[4] 1925년 10월 2일생.[5] 가운데에 있는 남자가 박춘금이다.[6] 이후에는 밀양군 밀양면 내일동(현 밀양시 내일동) 613번지에 거주하기도 했다.[7] "인신공격한 것은 온당하지 못한 줄로 증함"이라는 사과문을 써 주었다고 한다.[8] 여담으로 송진우는 나중에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발뺌했다가 거짓말이 탄로나서 후배 기자들에게 사임 요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렀다.[9]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난 그곳이다. 그해 1월에 김대중이 태어났다.[10] 혼죠구는 현재의 스미다구 남부, 후카가와구는 현재의 고토구 북서부 일대에 해당한다.[11] 당시 조선인과 대만인도 일본에 체류할 경우 남성에 한해서 선거권/피선거권이 있었다. 심지어 내무성은 투표지에 한글로 써도 유효 투표로 인정하였는데, 1930년경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인의 규모는 30만 정도였다.[12] 현대 한국인들도 "대체 이런 놈한테 밀린 후보는 어떤 놈이었길래...." 라는 등 경이롭다는 반응을 내비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입헌민정당에 대한 당시 일본인들의 반감으로 인한 어부지리와 중선거구제의 특성이 복합적으로 작용된 결과이다. 한편 전후에 한국계 아라이 쇼케이도 중의원이 된 적이 있지만 일본으로 귀화한 후에 중의원이 되었다.[13] 당시 민단에는 의외로 파시스트나 친일파 내지는 친일 경력자들이 많았으며 삼무사건이나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에도 관여했다. 사실 박열이 민단 초대 단장이었으나 민단 내부의 파시스트나 친일파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생전에 민단에서 나갔다.[14] 1926년 2월 18일 박춘금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1989년 12월 4일 딸 박성례에게 소유권이 이전되기까지 약 60년간 박춘금의 소유였다.[15] 2002년 당시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에 거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