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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군정부 초대 정통령 | |
헤이그 특사 | |
대한제국 의정부 참찬 이상설 李相卨 | |
<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출생 | 1871년 1월 27일[1] |
충청도 진천군 덕문면 산직리 (현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 | |
사망 | 1917년 3월 2일 (향년 46세) |
러시아 제국 프리모리예주 니콜스크우수리스키 (現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프리모리예 지방 우수리스크) | |
국적 | 조선 → 대한제국 → 러시아 제국(망명) |
본관 | 경주 이씨(慶州 李氏)[2] |
자 | 순오(舜五) |
아호 | 보재(溥齋) |
신장 | 162cm[3] |
직업 | 독립운동가, 외교관, 교육자, 정치인 |
가족 | 양부: 이용우(李龍雨) 생부: 이행우(李行雨) 생모: 벽진 이씨 |
종교 | 유교 |
경력 | 식년시 문과 급제 (1894) 성균관 대사성 (1896) 한성사범학교 교관 (1896) 궁내부 특진관 (1903) 외부 교섭국장 (1904) 학부 협판 (1905) 법부 협판 (1905) 의정부 참찬 (1905) 서전서숙 교장 (1906) 헤이그 특사 정사 (1907) 권업회 의장 (1911) 대한광복군정부 정통령 (1914) 신한혁명당 본부장[4] (1915) |
조직 | 대한협동회 성명회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신한혁명당 |
상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 |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1차 이사회 기념사진. 앞줄 세 번째 인물이 이상설. |
[clearfix]
1. 개요
조선과 대한제국의 문신이자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며, 최초의 근대 수학교육 및 근대수학교과서를 최초로 집필한 교육자다.[5] 국권 회복 운동에 힘쓰다 1917년 망명지인 연해주에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2. 생애
1870년 12월 7일(음력) 충청도 진천군 덕문면 산직리(현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아버지 이행우(李行雨)와 어머니 벽진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복남. 당시에는 아들이 없는 경우 대를 잇기 위해 아들뻘 항렬의 집안 아이들 중 총명한 아이를 골라 양자로 들이는 경우가 흔했는데 이상설 역시 정3품 동부승지를 지낸 이용우(李龍雨)의 양자로 입적됐다. 이용우가 똑똑한 아이를 가리기 위해 대추 무더기를 주고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세어 놓으라고 했는데 이상설은 해가 질 무렵까지 놀다가 이용우가 돌아올 때쯤 되로 대추를 퍼서 1되에 몇 개까지 담기는지 세고 남은 대추를 되에 담아 몇 되나 되는지 헤아렸다. 곱셈을 이용하여 계산한 이상설에게 지켜보던 어른은 놀랐고 이용우도 이상설을 받아들이게 된다.13살인 1882년 4월 양부 이용우와 생부 이행우가 연이어 사망하였다. 16살에 참판 서공순의 장녀 달성 서씨와 결혼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자인 우당 이회영과 함께 공부하여 20살에 이미 학자로 명망이 있었고 1894년 25살에 조선 시대 마지막 과거인 갑오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 2위로 급제했다.# 한림학사에 제수된 후 이어 세자시독관이 되었으며, 1895년에는 좌비서원랑에 제수되었지만 조정에 들어가지 않아 6월 17일 해임되었다. 1896년 27세의 나이로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었다.[6][7] 하지만 오래 근무하지 못하고 한 달만에 한성사범학교 교관직을 담임하게 되었으나, 낡은관습을 강요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3월 25일 사임하였다. 이후 탁지부 재무관이 되며 이 시기에 호머 헐버트와 가까워져 근대 서양 학문을 접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주로 연구했던 근대 학문은 수학, 화학, 법학 쪽으로 보이며 수학의 이치와 연구를 이르는 수리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 근대 학문은 거의 독학으로 익혔으며 특히 '국제 정치와 법률의 대가'로 통해 <대한매일신보>(광무 9년 11월 24일자)는 “이상설은 원래 대한 학문학의 제일류(第一流)니 재성(才性)이 절륜(絶倫)하고 조예가 심독(深篤)하여 동서학문을 실개통효(悉皆通曉) 연정(硏精)”하다고 평가하였고, 구한말의 유학자 이건창은 율곡을 이을 대학자라 칭했다. 또한 영어, 프랑스어 등 7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해 박승봉과 연명으로 반대 상소를 올려 침략성과 부당함을 지적했고 1904년 8월 보안회[8]의 후신인 대한협동회의 회장에 선임된다. 1905년 법부 협판, 의정부 참찬을 지냈고 이 시기에 만국 공법 등 법학을 연구하고 번역하기 시작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 대신회의 실무자[9]였으므로 조약 체결 저지를 시도했으나 일본군에 가로막혀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못했고 참정대신 한규설과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을사조약은 고종의 정식 인준 절차를 거친 조약이 아니었는데 이상설은 고종에게 같은 상소를 5번이나 올려 "을사조약은 인준해도 나라가 망하고 인준 안 해도 망한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나라와 같이 죽는게 낫지 인준하시면 안 된다"고 요구했다. 1905년 11월 30일 민영환이 순국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종로 거리에 나가 시민들을 상대로 국권 회복 운동에 나서자는 연설을 한 뒤 땅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을 시도했으나 주변 시민들이 뜯어말려 실패했다. 이상설은 1906년 4월 18일 국외 망명을 결정하고 이동녕, 정순만 등과 함께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연해주 연추로 가서 이범윤과 만난 뒤 다시 만주로 떠난다. 1906년 8월 간도 연길현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직접 수학을 가르치던 중 1907년 4월 3일 고종이 밀서를 통해 헤이그특사로 이상설을 발탁하여 보냈는데 은밀히 진행된 부분이라 이상설이 분교를 낸다는 명목으로 학교를 떠난 후 돌아오지않자 재정 지원이 끊어져 재정압박과 일제의 탄압으로인해 결국 1907년 9,10월경 문을 닫게 되었다.
1907년 고종은 용정촌에 있는 이상설을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정사로 파견한다. 이상설은 부사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났으나 일제의 방해로 공식 참석 국가 명단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 석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상설은 1907년 7월 5일 회의장에서 호소문을 발표했으며 1907년 7월 9일 각국 신문 기자단의 국제 협회에 이상설과 함께 초청됐다. 이 자리에서는 이위종[10]이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라는 연설을 해 주목받았다.
우리들은 삼가 황제의 뜻을 받들고 귀국 총통과 대표에게 눈물로써 고하나니 우리 한국이 1884년에 자주 독립국이 된 것은 공인된 사실이고 이로써 각국과 수교를 계속해 온 것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 나라를 압박하여 각국에 대한 국제 교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현재 일본이 우리 나라에 대해 취하는 사례를 두세 개 열거해보면,
* 모든 정무를 우리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시행하는 것
* 일본이 육해군의 세력을 믿고 한국을 압박하는 것
* 일본이 한국의 모든 법률과 풍속을 파괴하는 것
등이니 총통께서는 정의에 근거하여 처단하라.
한국은 자주국인데 어째서 일본이 한국의 국제 교섭에 간여하여 우리 나라 황제의 명을 받든 사절단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가?
귀국 총통 및 대표는 위기에 빠진 약소국을 돕고 조력을 베풀어 우리 사절단을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시키고 모든 호소를 허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11]
현재 일본이 우리 나라에 대해 취하는 사례를 두세 개 열거해보면,
* 모든 정무를 우리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시행하는 것
* 일본이 육해군의 세력을 믿고 한국을 압박하는 것
* 일본이 한국의 모든 법률과 풍속을 파괴하는 것
등이니 총통께서는 정의에 근거하여 처단하라.
한국은 자주국인데 어째서 일본이 한국의 국제 교섭에 간여하여 우리 나라 황제의 명을 받든 사절단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가?
귀국 총통 및 대표는 위기에 빠진 약소국을 돕고 조력을 베풀어 우리 사절단을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시키고 모든 호소를 허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11]
1908년 7월, 콜로라도 주 덴버 시에 있는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열린 애국 동지 대표회. 2번째 줄 왼쪽 4번째부터 박용만, 이승만, 윤병구. 이 대회에 헤이그에서 돌아와 미주를 순방 중이었던 이상설도 참가하였다.[12] |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위기를 공론화하고 구미 언론에서 이 문제를 보도하게 만드는 성과는 있었으나 끝내 공식 회의 석상에는 참석하지 못했고 이준이 순국하자 헤이그 니우 에이컨 다위넌(Nieuw Eiken Duinen) 공동묘지에 가매장했다.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트집잡혀 강제 퇴위당했으며 헤이그 밀사 사건이 실패한 뒤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덴버, 콜로라도 주에서 개최된 애국 동지 대표회에 연해주 한인 대표로 참석하며 한인 교포를 결속시켰다.
1909년 이위종과 함께 러시아-만주 국경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독립운동 기지인 한흥동을 건설했다. 이어 1910년 유인석, 이범윤, 이남기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을 편성했는데 퇴위당한 고종에게도 13도의군의 편성을 상주하고 도총재 유인석과 함께 고종 망명을 시도했다. 경술국치 이후 연해주와 간도 등의 한인들을 규합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를 조직하여 한일 합병 반대 운동을 전개했는데 독립 결의를 담은 성명회 취지문을 발표하고 미국, 러시아, 청나라 등에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며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밝히는 선언서를 보냈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에 주요 인물들의 체포와 인도를 요구했고 러시아는 성명회와 13도의군 주요 인물 42명을 체포했다. 이상설은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으나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해 신한촌에서 다시 권업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권업회는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간했으며 교민 지위 향상, 반일 투쟁을 위한 경제적 실력 배양, 민족 의식 고취 등 활발한 활동으로 인근의 거의 모든 한인 거주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1914년 회원 수 8,500명에 달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이상설은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과 중국과 러시아 제국령 내 한인들을 규합해 우리나라 최초의 망명 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출됐다.[13] 그러나 권업회 및 대한광복군정부는 러시아 정부의 공인을 받았던 처음과 달리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일본의 항의로 1914넌 8월 7일 러시아 당국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했다.
이상설은 권업회 및 대한광복군정부 해산 후 상하이로 이동해 활로를 찾았으며 이 과정에서 1914년 박은식, 신규식, 이동휘, 성낙형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 창설에 참여해 본부장을 맡았다. 신한혁명당은 베이징에 본부를 두고 상하이에 지부를 두어 대체로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14] 중국과 독일 등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였다. 같은 맥락에서 당수로 고종을 추대할 것을 결의했고 외교부장 성낙형이 국내에 파견되어 고종 망명을 추진했으나 성낙형은 중국(위안스카이 정부)과 동맹을 맺자는 조약안을 들고 고종을 알현하기 직전 발각되었고 망명이 수포로 돌아갔다. 국내 조직원들이 전원 체포당했고 신한혁명당도 활동이 중지되었으며 당 조직 자체도 무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상설은 건강이 악화되어 1916년 초 하바롭스크에서 병석에 누웠으며 차도가 없자 기후가 온화한 니콜스크우수리스키로 옮겼지만 끝내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이상설의 임종을 지켰던 이동녕, 백순, 조완구, 이민복 등은 이상설의 유언대로 아무르 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이상설의 유해를 화장했으며 문고와 유품도 함께 거두어 불살라 바다에 날렸다. 다음은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남긴 유언.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3. 저서
- 1886년, 수리
- 1900년, 산술신서[15]
- 1901년, 신정산술
4. 기타
실패가 내 운명일 수는 있어도, 내 조국의 실패는 될 수 없으리라.
일평생을 실패만 반복하고 산 사람인데 젊어서는 공직에 출사했으나 곧 나라가 망했고 헤이그 특사 사건은 회의 참석도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으며 동료 이준은 헤이그에서 순국하기까지 했다.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열었지만 다음 해 일제가 간판을 떼버렸고 성명회와 권업회는 동맹국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인 제정 러시아 당국이 뭉개버렸다. 신한혁명당은 고종 망명 성공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 조직이 와해됐고 결국 48세에 만리 타국 추운 땅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야말로 한창 일할 장년의 나이에 분사(憤死)한 것. 그의 일생을 생각하면 이상설의 유언은 서리서리 맺힌 한과 비애가 느껴진다.[16]
- 구한말부터 1910년대 만주와 연해주 독립운동에 발을 안 뻗은 데가 없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한국사 근현대사 파트의 독립운동에 그의 이름이 빠질 수가 없으니 관련 시험을 준비한다면 이상설이 활동한 내역을 알고 있는 게 좋다.
- 엄청난 독서량으로도 유명했는데 당시에 이미 집에 수천 권을 가진 장서가였고 이회영 등과 함께 집에서 스터디 모임을 결성해 국제법, 국제정치 등을 공부했다. 이 책들은 나중에 초대 부통령 이시영이 수습해 국회 도서관에 넘긴다.
-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이상설 선생 기념 사업 추진 위원회에서 1971년 숭모비, 1975년 숭렬사를 건립했다. 충북 진천에 위치한 그의 생가에 세워졌다.
- 2001년 10월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우수리스크에 유허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유허비가 매년 여름에 수몰되는 일이 발생하자 러시아 교민과 고려인들이 관리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 2005년 12월 국가보훈처에서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 1층의 역대 성균관장 목록에 적혀있다.
5. 대중매체에서
[1] 음력 1870년 12월 7일.[2] 익재공파 39세손 상(相)○ 항렬이다.[3] #[4] 신한혁명당의 대표이다. 명목상 당수는 고종.[5] 한국 근대수학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6] 이후 관직개편으로 성균관 관장으로 변경[7] 지금으로 말하면 서울대학교 총장이다. 그만큼 뛰어났다는 말도 되지만 이 시절 얼마나 개판이었으면 20대에 성균관 대사성이 나오는 꼴이 벌어졌다는 것도 된다.[8]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 운동을 펼친 단체.[9] 의정부 참찬[10] 이위종은 주러시아 대한제국 공사였던 아버지 이범진의 영향으로 미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를 떠돌며 컸고 특히 프랑스에서 초급 장교 교육을 받았다.[11] 박은식 <한국통사>, 위키피디아에서 재인용.#[12] 해당 사진은 《Daily Rocky Mountain News》 1908년 7월 13일자 7면에 기사에 실린 사진이다.[13] 전성기 대한 광복군 정부에 훈련되어 배치된 병력은 수만 명, 심지어 기초적 군사 훈련만 받은 이들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14] 자세한 것은 여기 참조[15] 최초의 근대 수학교과서[16] 다만 이상설에게 1가지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를 "가장 존숭(尊崇, 존경하고 숭모하다)하는 인물"이라고 밝혔던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그가 평생을 두고 증오했을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