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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84년 7월 21일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산현 오미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1] 369번지)[2] | |
사망 | 1928년 2월 20일 (향년 43세) |
일본 제국 치바 치바형무소 | |
본관 | 풍산 김씨(豊山 金氏)[3] |
자 | 위경(衛卿) |
호 | 추강(秋岡) |
가족 | 남동생 김희섭, 아들 김재휴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122호 |
상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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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884년 7월 21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산현 오미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369번지)에서 아버지 김병규(金秉奎, 1857 ~ 1916.3.9.)[4]와 어머니 신천 강씨(信川 康氏, ? ~ ?.5.9.)[5]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 김병두(金秉斗, 1850 ~ 1879.3.4.)[6]에게 입양되었다. 일찍이 25촌 지간의 족숙(族叔) 운재(雲齋) 김병황(金秉璜, 1845.12.11. ~ 1914.4.18.)[7]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여 사서삼경에 능통하였다. 1898년 15세 때 예천군 제고면 죽림동[8] 예천 권씨 가문의 권석희(權錫禧, 1881.11.3. ~ 1972.11.30.)[9]와 결혼하였다.젊어서 일본어를 2개월 만에 익혀 1907년 5월 1일 공립상주보통학교[10] 부교원(副敎員)에 임용되었고[11], 1908년 1월 28일에는 같은 학교의 전과(專科) 부훈도(副訓導)에 임용되었다.[12] 이후 독학으로 1909년 8월 3일 전주구(全州區)재판소 번역관보(補)에 임용되었고[13], 1909년 10월 1일 금산구(錦山區)재판소 번역관보에 보임되었다.[14] 1909년 10월 29일에는 금산구재판소 서기에 겸임 발령되었고[15], 1910년에는 금산구재판소 서기과 통역생 겸 서기, 1911년 영동구(永同區)재판소 서기 겸 통역생, 1912년 공주지방법원 영동지청 서기과 서기 겸 통역생 등으로 재직하다가 1913년 1월 8일 사직하였다.[16]
그러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같은 집안 사람 김재봉·김만수·김응섭(金應燮, 1878.11.15. ~ 1957.5.29.)[17]과 함께 독립운동만을 할 것을 결심하였고, 중화민국 베이징시로 건너가 의열단과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이때 의열단원에게 "일제가 보낸 첩자가 아닌가?"하는 의심을 받았다고 한다. 의열단에 가입한 뒤 1921년경 단장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 내의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찰서, 재판소 등을 비롯한 일제 주요 관서를 폭파하기 위해 국내로 30여 개나 되는 폭탄의 반입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간신히 빠져나와 다시 상하이시로 피신했다.[18]
이후 의열단은 도쿄에서 열리는 일본 고관들이 대거 참석하는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기로 계획했는데 이를 위해 의열단은 일본어에 능통하고 외모가 일본인과 닮은 김지섭을 도쿄 특파원에 임명하여 일본에 보냈다. 당연히 폭탄을 소지하고는 정상적인 경로로 일본에 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조력자의 도움을 받았다.[19]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석탄 운반선 '텐죠야마마루(天上山丸)'를 통해 1923년 12월 21일 일본으로 밀항하여 12월 31일 일본 후쿠오카현 야와타 제철소에 도착했다. 10일 동안 배 밑의 창고에서 지내면서 하루에 주먹밥 1~2개로 끼니를 때우는 바람에 쇠약해진 데다 자금마저 녹록지 않아 교토부 야와타시(市) 여관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그러다 1월 3일에서야 도쿄로 출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 사실은 '제국 의회'가 무기한 휴회되었다는 것이었다. 밀항인 신분인 데다가 폭탄을 소지하고 다니면 발각될 위험이 크고 '제국 의회'가 언제 다시 열리는지 일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김지섭 의사는 목표를 황거(천황의 궁성)로 바꿨다.
천황을 향해 의거하기로 한 이유는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들을 일본인들이 사냥하고 학살하는 모습에서 충격을 받고 격노하여 의거를 결심했다고 한다. 1924년 1월 5일 오후 거사를 계획하고 폭탄 3개를 품 속에 숨긴 채 천황이 사는 궁성 앞으로 가서 니주바시(二重橋, 이중교) 건너편 정문 앞까지 가서 보초병들과 싸우고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탄[20][21]이 2개씩이나 나와 결국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4년 1월 6일 도쿄도 히비야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곧 도쿄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1924년 1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총포화약류취체령 시행규칙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22] 이후 예심에 회부되면서 이치가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4년 4월 24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강도미수, 선박침입 혐의로 도쿄지방재판소 공반에 회부되었고, 검사 측으로부터 사형이 구형되었다. 이때 후세 다쓰지가 김지섭의 변호인을 맡아 "김지섭은 조선 민중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 사람"이고 "폭탄이 불발되었으니 불능범"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고 한다. 1924년 11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위 혐의들에 대해 무기징역이 선고되었고, 1925년 8월 12일 공소심에서도 원심 판결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에 변호인 측에서 상고하였으나, 얼마 뒤 상고를 취하하는 서면을 제출하였다.[23]
1924년 4월 29일, 모 경찰서 형사과에서 복사된 사진. |
이후 도쿄 외곽의 치바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이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만리창파에 한 몸 맡겨 원수의 배 속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기구한 세상 분분한 물정 촉도(蜀道, 중국 사천성 촉 지방으로 통하는 험난한 길)보다 험하고 태나라보다 더욱 무섭구나.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 평생 뜻한바 갈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그러던 1928년 2월 20일 옥중에서 뇌일혈로 순국했다.[24] 향년 43세. 이후 일본 제국 경찰은 멋대로 시신을 화장했고, 유족들이 이를 수습해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안장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안동시에 있던 묘소는 이후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에 이장하였다. 이 묘는 예천 청주정씨 재실(유형문화재 제315호), 대지재사(유형문화재 제173호)와 함께 '감자'라는 프로젝트에 의해 보존되고 있었다가 2004년 11월 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으로 유해가 이장되었다.
3. 여담
엄청난 일을 해낸 독립운동가지만 이름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유는 김지섭 의사의 의거를 일본 정부가 철저히 묻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천황을 신성시하고 있는 일본에서 이런 습격 사건은 고위층 수십 명의 옷을 벗길 수 있을 정도로 큰 사건이기 때문이다.[25] 실제로 사건 이후 내무차관 스카모토가 책임을 추궁당했으며 교토 지방의 경시총감과 경찰부장이 파면당하는 여파가 있었다.하지만 그가 잘 거론되지 않는 이유는 다른 의열단원들과는 다르게 천황 암살 "미수"에 그쳤기 때문이라는 반론도 있다. 테러에 성공한 다른 의열단원들도 일일이 거론되지는 않는 판국에 거사를 성공시키지 못한 김지섭이 잘 거론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위에 일본 정부가 철저히 묻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등도 일본 정부가 철저히 거론하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럼에도 안중근 의사의 의거나 다른 거사는 성공하였기 때문에 당시 일본 사회는 물론이고 조선인 사회에 큰 반향을 주었고 이후로도 꾸준히 거론되게 되었지만 김지섭의 거사는 불발되며 그럴 기회를 얻기 못했기 때문이다.
'감자'는 생전 김지섭의 별명으로 김지섭의 '김지'를 잘못 읽어 '감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의열단원들은 모두 그를 '감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3.1. 2012학년도 9월 모의평가 11번 문항
201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9월 모의평가 한국 근·현대사 11번 문항에 김지섭을 엮은 문제가 출제되었다. 문제 원본은 이곳 참조. 대개 교과서나 문제집에선 의열단의 일원으로서 김원봉은 대문짝만하게 거론되면서 직접 거사를 일으키던 장본인인 김상옥, 나석주 등 의열 단원들에 비해서도 김지섭의 이름은 스쳐지나가듯 언급되는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시험 핵심 사항으로 여겨지는 이름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갑작스런 생소한 이름의 출시로 대다수의 학생들은 혼란에 빠졌다. 더구나 김지섭은 김상옥, 나석주와는 다르게 대중매체를 통한 노출도 거의 없는 편이라 인지도도 비교적 떨어지는 편이었다.게다가 이 문제는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다.'는 희대의 낚시까지 걸어 놨다.[26] 김지섭을 몰라보고 김원봉과 황포군관학교라는 키워드만 보고 (나) , (라)를 고른 학생들은 낭패였다. 당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우수한 표본 학생들을 변별하기 위해 얼마나 지엽적이고 치사한 함정문제를 많이 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27]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수능 한국사가 필수로 전환되고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평가 방식이 바뀌어 난이도가 폭락한 이래로는 기조가 바뀐 편이다.
[28]
그렇게 고난이도 문제라는 가십거리로 여겨질 법할 이 사건은 최태성 강사가 개인적 일화와 엮어 쓴소리를 하면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결국 이 악명 높던 시험이 끝난 뒤 시험을 망친 듯한 한 학생이 시험지를 찢고 김지섭을 욕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는 일화를 강의와 방송에서 수차례 소개하면서[29]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처럼 본래 역사 교육의 본질을 망각시키고 독립운동가마저 욕보이도록 만드는 지엽적 출제 기조가 얼마나 부작용을 낳는지 여실히도 보여주는 사건이며 국사 교육계의 반성점으로 자주 거론되는 건이기도 하다.[30]
그래도 덕분에 대중적으로 김지섭을 각인하게 되는 순기능도 있는 듯. '최태성 강의 듣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저 썰이다.', '최태성 강의 듣고 김지섭 문제 틀리면 사람도 아니다.'라든가. 실제로 최태성 강사는 필수 한국사 난이도에 대해서 필수적인 요소만을 추려서 쉽게 내야 한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첫 필수 한국사 킬러 문제인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한국사 18번 문제를 해설하면서도 이런 문제 냈어야 했나, 필수 한국사는 1번부터 20번까지 모두 쭉 풀리게 내야 한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1] #. 풍산 김씨(豊山 金氏)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김구현·김만수·김재봉도 이 마을 출신이다.[2] #[3] 설송공파(雪松公派) 27세 섭(燮) 항렬.[4] 자는 성오(星五).[5] 강극주(康極周)의 딸이다.[6] 자는 성칠(星七). 김병두(金秉斗)는 족보상으로는 아버지 김병규의 6촌 형으로 재종숙(再從叔)이 되어야 하지만 본래 김병규는 김병두의 친동생으로, 5촌 아저씨 되는 김낙구(金洛九)에게 입양된 것으로 본래는 김지섭에게 큰아버지가 되는 것이 맞다.[7] 자는 위서(渭瑞).[8] 현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9] 권문해의 후손으로, 권형원(權亨遠)의 딸이다.[10] 현 상주초등학교[11] 1907년 5월 29일 대한제국 관보 제3778호[12] 1908년 1월 1일 대한제국 관보[13] 1909년 8월 9일 대한제국 관보 제4450호[14] 1909년 10월 6일 대한제국 관보 제4498호[15] 1909년 11월 2일 대한제국 관보 제4520호[16] 1913년 1월 9일 조선총독부 관보 정규호 제130호[17] 자는 경장(景章), 호는 동전(東田).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차 임시의정원 의원 및 법무차장을 지냈다.[18] 1921년 형사사건부에 따르면 김지섭은 국내에 있을 당시 경상북도 대구부 경정2정목(현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2가)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1921년 8월 26일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소재 불명으로 부친 촉탁이 반려되었으므로 1921년 8월 이전에 이미 중국으로 피신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지린성 괴천점 객잔(客棧)에 머물렀다.#[19] 아편과 코카인을 밀수하는 일본인으로 가장했다고 한다.[20]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건너갈 때 밀항하느라 배 밑의 창고에서 숨어 있었다. 배 아래쪽이라 습한 창고에서 10일이나 있게 되는 바람에 폭탄에 습기가 스미어 불발탄이 났다고 하며 나머지 2개는 안전핀도 안 뽑고 던졌다고 한다.[21] 자료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대일본 제국의 모던 보이는 어떻게 한인애국단 제1호가 되었는가」의 저자 배경식이 기재한 당시 자료에 따르면 불발되었다고 알려진 수류탄 중에 안전핀을 뽑지도 않고 던진 것도 있다고 한다.[22] 1924년 형사사건부[23] #[24] #[25] 1932년 이봉창이 쇼와 천황에게 투탄하였을 때는 도심 한복판에서 폭탄이 터졌기 때문에 묻을 수 없었고 실제로 고위층 수십 명이 책임을 통감하며 옷을 벗었다.[26] 황포군관학교는 쑨원이 이끈 중국국민당이 설립했고 김원봉은 여기에 입교한 것이다.[27] 당시 수능에서 한국사는 서울대학교 문과계열에서 필수로 지정해 두고 있었기 때문에 수험생 표본의 수준이 굉장히 높았고 이 때문에 등급컷이 한 문제만 틀려도 1, 2등급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잦아 서울대학교 입시 등락을 좌우했다. 이런 엘리트들의 변별력을 더 챙기기 위해서라도 출제진들도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고난이도로 출제하는 기조가 강했기 때문에 이런 지엽적인 문제가 출제될 수 밖에 없었다.[28] 21:44부터[29] 옥탑방의 문제아들과 어쩌다 어른 등[30] 당장 전한길의 난으로 알려진 2018년도 3월에 치러진 서울시 7급 한국사 시험에서의 지엽적문제 출제건으로 인사혁신처가 공개적 사과까지 한것을 생각해본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