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3 16:14:20

김재봉(독립운동가)

파일:김재봉2.jpg
1928년 1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주서(周瑞) / 근전(槿田)
본관 풍산 김씨[1]
출생 1891년 5월 19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산현 오미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2]
사망 1944년 3월 22일[3]
경상북도 안동군
학력 대구 계성학교 (졸업)
경성공업전습소 (염직과 / 졸업)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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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1 운동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군자금모집 활동에 참여하고 제1차 조선공산당 결성을 주도해 책임비서로 활동했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2. 생애

1891년 5월 19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양반 유생 집안에서 태어나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8년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에는 경성공업전습소 염직과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만성일보의 경성지사 기자로 지내면서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하였다. 이 시기 비밀 공산주의 단체에도 참여하였고 그러던 중 1921년 조선독립단의 문서를 전달하다가 체포되어 6개월간 수감되었다.[출처]

출옥 후 그는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여운형, 김규식 등과 함께 조선노동대회 대표자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통합 대회에 참여하였고, 대회가 결렬되자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위원으로 피선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23년 2월에는 코민테른의 지시로 고려공산당 중앙총국 국내 파견원으로 부임해 귀국하였고 신철, 이봉수, 윤덕병, 신백우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의 국내부를 결성하고 책임비서로 부임하였다. 1923년 7월에는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하였고 지방을 돌며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강연을 하며 계급의식과 항일의식을 설파하고, 조직확대를 위해 각 지역의 단체들과 연대해나갔다. 1924년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서울파 등과 조선공산당을 창립하기 위해 13인회를 구성했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조선노농총동맹의 결성을 주도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고 제1대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제1차 조선공산당은 조동호와 조봉암을 코민테른에 파견하였고 조직을 확대하며 대내외적인 활동을 이어가다가 신의주사건으로 조직이 발각되고 말았다. 김재봉은 1925년 12월 체포되어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1931년 11월에 출옥하였다. 그 후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1944년 3월 사망하였다.[출처]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 심곡공파 28세 재(在) 재(載) 재(裁) 항렬.[2] 풍산 김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김지섭·김만수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음력 2월 28일.[출처]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