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신철(辛鐵, 申鐵) |
호 | 포석(抱石) |
본관 | 영산 신씨[2] |
출생 | 1901년[3] 6월 1일 |
경상남도 거제군 하청면 창동리 (現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 하청리[4] 창동마을)[5] | |
사망 | 1948년 5월 14일[음력][7] (향년 46세) |
서울특별시 | |
학력 | 북간도 사숙 (한문 / 수학) 거제공립보통학교 (졸업)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 / 중퇴) 대구고등보통학교 (제적) 길림성립사범학교 (속성과 / 졸업) 중국공학 (1학년 / 중퇴) 중화민국대학원 (정치경제학 / 1학년 / 중퇴) 상해법률전문학교 (3학년 / 중퇴) 메이지대학 (경제학 / 1학년 / 중퇴) 이르쿠츠크 군정학교 (졸업) 규슈제국대학 (의학 / 학사)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15호 |
상훈 |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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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1년 6월 1일 경상남도 거제군 하청면 창동리(現 거제시 하청면 하청리 창동마을)에서 초대 하청면장을 지낸 아버지 신주병(辛周柄, 1876. 4. 14 ~ ?)과 어머니 의령 옥씨(? ~ 1909. 3. 11)[8] 사이에서 5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거제군 하청면 하청리 중리마을 244번지[9]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일찍이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죽첨정1정목(現 서울특별시 중구 충정로1가)과 장교정(現 중구 장교동), 황금정4정목(現 중구 을지로4가), 원정2정목(現 용산구 원효로2가), 관철동(現 종로구 관철동) 등지에 거주했으며, 1919년에 잠깐동안 경상북도 대구부 덕산정(現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에 거주한 적도 있다.어려서 중화민국 길림성으로 건너가 그곳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다시 귀국하여 고향에서 거제보통학교(現 거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상경하여 경성부 양정고등보통학교(現 양정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에 중퇴하였다. 이후 대구고등보통학교(現 경북고등학교)에 편입했고,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동맹휴학을 주도했다가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돼 투옥되었다. 1919년 3월 2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했으나[10] 학교 당국으로부터는 제적당했다. 이후 다시 북간도로 건너간 그는 국자가(局子街)[11] 길림성립사범학교(吉林省立師範學校)[12] 속성과[13]를 졸업하였다.
이후 상하이 중국공학(中國公學)[14]을 6개월 다니다가, 난징 중화민국대학원(中華民國大學院)[15] 정치경제과에 편입하여 1년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곧 다시 상해 법률전문학교[16] 법과에 전학하였으나 마찬가지로 2년을 수료하고 중퇴하였으며, 마지막으로 1922년 4월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의 메이지대학 경제과에 입학하였다가 2개월을 다니던 중 중퇴하면서 마침내 학업을 포기하였다.#
1923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동양대학 문과에 입학하기 위해 러시아로 건너갔으나, 러시아의 중등학교 졸업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했다. 이후 북성회(北星會)의 김찬(金燦)과 만나 이르쿠츠크의 고려공산당 총국과 연락하였다가 이르쿠츠크로 건너가서 조국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소련이 설립한 이르쿠츠크 군정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졸업 후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을 전전하다가 1923년 3, 4월경 코민테른 극동총국 민족부 산하 고려국, 즉 꼬르뷰로의 국내 공작원에 선임되어 공산주의 선전비 2,000엔을 받아 경성부에 잠입하였다. 그후 김찬의 집에 임시로 머물면서 잡지 <신민사(新民社)> 기자를 가장하며 살았다. 이때 세브란스병원에서 간호부로 일하며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던 정종명(鄭鍾鳴)과 알게 되어 연인관계로 발전하였다.
같은 해 4월 경성부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책임비서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김재봉(金在鳳)·김찬·신백우(申伯雨)·윤덕병(尹德炳)·원우관(元友觀)·이영(李英) 등과 비밀결사 조직을 토의하였다. 그해 6월경 서울청년회계를 제외한 화요회(火曜會)와 북풍회(北星會) 간부들과 함께 경운동(現 종로구 경운동) 김찬의 집에 모여서 꼬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고 그 위원이 되었다. 그해 7월경에는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후기 청년뷰로와 그 경과를 이동휘·정재달(鄭在達)·한명서(韓明瑞)에게 보고하고 귀국하였다.
그해 여름, 이호(李浩)·민태흥(閔泰興)과 함께 토요회(土曜會)를 조직하여 공산주의 선전 활동을 전개했으며, 조선 전역 각지의 유력자들과 밀약을 통해 공산주의 선전을 공동으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여자고학생상조회(女子苦學生相助會) 회장 정종명과 같이 경상남도 지역을 순회하며 강연하던 중, 그달 22일 김해군(現 김해시)에서 경성부 종로경찰서 출장원에게 공산주의 선전 혐의로 체포되어 구류 15일 처분을 받았다가, 11월 2일 무혐의로 방면되었다.
1924년 2월 10일에는 조봉암·백광흠(白光欽)·박일병(朴一秉)·이호·민태흥·최현(崔鉉)·윤덕병 등과 함께 토요회와 무산청년회(無産靑年會)를 합병하여 신흥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창립총회에서 '조선청년총동맹'조직을 위한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3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직에서 사보타주 혐의로 해임되었다. 4월에는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통일을 위해 개최된 '13인회'에 참석했고, 7월에는 해방운동사(解放運動社) 결성에 참여했다. 9월 20일에는 최창익·김병로·이승훈·한용운·이상재·안재홍 등과 함께 종로중앙청년회관에서 개최된 기근대책대연설회(飢饉對策大演說會)에 참여, 연사로 나섰으며, 11월에는 김약수·송봉우(宋奉禹)·김종범(金鍾範) 등과 함께 북풍회(北風會)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1월 24일 평양 각 사상단체의 연합 주최로 평양천도교당 내에서 개최된 노동운동자간친회(勞動運動者懇親會)에 참가하였다.# 4월에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6월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 문제에 대한 북풍회의 견해를 제출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건너가 10월경 도착하였다. 그러나, 11월 조선공산당내에서 북풍회의 종파행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권한 정지 처분을 받았다.
1926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북풍회 공산주의자그룹의 연락책임자로 일했다. 그해 5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이제(李濟)의 집에서 채성룡(蔡成龍)·정운해(鄭雲海)와 함께 국내에 들어와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신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해 방법을 협의하였다. 그후 귀국하여 북풍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8월 경남 마산의 사각동맹(四角同盟) 회원 김상주(金尙珠) 등 4명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동지의 일치단결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신용기는 검찰에 기소되었으나, 소재 불명으로 기소중지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1928년 5월 8일 체포되어 그해 11월 19일 공판에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929년 2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 150일 통산)[17]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0년 9월 28일 만기출옥하였다.#
1929년 2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이후 신간회 해소위원으로 있으면서 정희찬(鄭喜燦)·정종명 등 16명과 함께 1931년 4월 23일, 노동무산소년동맹을 조직하여 어린이날에 거사를 일으킨다는 모종의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되어 용산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같은 해 7월 2일 석방되었다.# 이어 8월 초 종로경찰서 관내 학생 격문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다가 8월 23일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규슈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했고, 규슈제국대학 부속병원 연구교수로 활동했다. 귀국 후 고향 거제에 내려와 한방연구소를 개소하고 한의사로서 의료봉사에 전념하였다.# 이후 거제경찰서에서 의원자격증이 없다며 그를 검거했고, 거물이라는 이유로 경상남도경찰부에 연락해 처분을 기다리다가, 당시 경상남도지사가 신용기의 능력과 활동을 높이 평가해 의원 개업을 허락하기도 했다. 1938년 6월경에는 정식으로 의사면허를 얻어 동래군 남면 광안리(現 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동)에 '대방의원(大邦醫院)'을 개업하고 일반 시민과 극빈자, 소작농 등에 무료 진료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41년 1월 30일 폐업한 뒤 조용히 지내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8.15 광복 후 잡지사를 경영했으며 1945년 11월 조선인민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정치위원으로 선출되는 한편, 1946년 8월 5일 조선인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조선신민당과 조선공산당에 정식으로 합당을 제안하는 결의안이 가결되었을 때, 여운형·장건상 등과 함께 합당교섭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정치활동을 하다가 1948년 5월 14일 서울특별시에서 사망하였다.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본래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 공원에 안장되었다가 2009년 4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 맏형 소남(蘇南) 신용우(辛容禹, 1895 ~ 1960. 5. 30)[18]는 1937년부터 1940년까지 통영군 하청면장을 지내고, 해방 후 1952년 경상남도의회 의원을 지낸 인물#로서, 아이러니하게도 동생과는 달리 일제 말 지방 유지로서 국민정신총동원연맹 통영군 하청면 이사장, 국민총력통영연맹 하청면 이사장을 지내는 등 친일단체에 가입하였으며 1937년 12월 15일 애국전투기 헌납운동에 면장으로서 참여하여 애국전투기를 '경남호'로 명명하고 통영 유지들에게 10,400여원의 헌금을 모집하고 1939년 4월 26일 거제 육군지원병 후원회에 평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일제 협력 행적이 있다.#
[1] 문헌에 따라 辛[2]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30세손 용○(容○) 항렬.(족보)[3] 192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0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4] 영산 신씨 집성촌이다.[5] #[음력] 4월 6일.[7] 대전현충원묘적부 및 족보상 1949년 4월 7일.[8] 옥길륵(玉吉玏)의 딸이다.[9] 이 지번에는 현재 중리소류지가 들어서 수몰된 상태이다.[10] 집행원부 기록, 형사사건부 기록[11]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의 옛 이름이다.[12] 現 연길시제1고급중학(延吉市第一高級中學).바이두백과 연길시제1고급중학[13] 3개월 과정[14] 1906년 상하이에 설립된 대학으로,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때 일본군의 포격으로 파괴된 후 1937년 충칭에서 재개교하였으며, 1951년 충칭재경학원(重慶財經學院)과 합병되어 서남인민혁명대학(西南人民革命大學)이 되었다. 서남인민혁명대학은 현재 서남정법대학(西南政法大學)으로 남아 있다.바이두백과 중국공학[15] 차이위안페이가 초대 교장으로 있었다.[16] 1926년 설립된 상해법과대학(上海法科大學)으로 추정된다. 이후 상해법학원(上海法學院)으로 교명을 변경하여 법과 이외에도 정치·경제·회계·은행 등의 학과를 신설하였으나, 1949년 5월 27일 제2차 국공내전 때 상하이가 함락된 직후 폐교되어 법과는 상해재정경제학원에 합병되었고, 다른 학과들은 상해학원에 합병되었다.바이두백과 상해법학원[17] 다만, 김재봉 외 12명을 조선공산당에 가입시켜 당원이 되게 했다는 점은 무죄를 인정받았다.[18] 초명 신용만(辛容萬), 신용상(辛容祥), 창씨명 시라야마 요우(白山容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