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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권중형(權重衡) |
| 본명 | 권중환(權重煥) |
| 이명 | 권중석(權重錫)·강병수(姜炳秀)·진민각(陳民覺) 장종화(張從化)·장수화(張樹華)·권문술(權文述) 권무산(權武山)·권중산(權中山)·양무(楊武) |
| 자 | 계언(季彦) |
| 호 | 백인(百忍)·양무(揚武) |
| 본관 | 안동 권씨[1] |
| 출생 | 1895년 5월 2일 |
| 안동부 함창군 북면 척동리 (현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척동리) | |
| 사망 | 1959년 10월 27일 (향년 64세)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02호 |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 군사 경력 | |
| 임관 | 신흥무관학교 황포군관학교 육군사관학교 (8기) |
| 복무 | 조선의용대 |
| 1937년 ~ 1942년 | |
| 한국광복군 | |
| 1942년 ~ 1945년 | |
| 대한민국 육군 | |
| 1948년 ~ 1956년 | |
| 최종 계급 | 소장 (대한민국 육군) |
| 주요 보직 | 광복군 제5지대장 수도경비사령관 제3군관구사령부 사령관 |
| 참전 | 북벌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중일전쟁) 6.25 전쟁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의열단의 창시자이자 중국군 장교로 항일전쟁에 참전, 광복군 지대장 및 임정 내무차장 등의 공로로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광복후에는 국군 창설에 참여하여 초대 수도경비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육군소장으로 예편하였으며 을지, 충무, 화랑 무공훈장 등을 수여받았다.독립유공자 권태휴는 그의 장남이며, 제2대 국가보훈부장관을 역임한 강정애는 손주 며느리이다.
2. 생애
1895년 5월 2일 경상북도 상주군(尙州郡) 함창면(咸昌面) 척동리(尺洞里)에서 아버지 권석주(權錫周, 1844 ~ 1899. 4. 1.)[2]와 어머니 함창 김씨(1852 ~ 1927. 10. 23.)[3] 사이의 5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백인(百忍)이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권중환(權重煥)·권중석(權重錫)·강병수(姜炳秀)·진민각(陳民覺)·장종화(張從化)·양무(楊武)·장수화(張樹華)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1917년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한 다음, 상하이(上海) 퉁지대학(同濟大學) 공과에서 수학하였다.
3. 의열단 결성
1919년 11월 중국 지린성(吉林省)에서 김원봉·윤세주·이성우·곽재기·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하였다. 의열단의 활동 자금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아 의열 투쟁을 지원하였고, 김원봉·오성륜·김성숙·장지락(김산)·최원·이영준·강세우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의열단 활동의 핵심적인 임무를 수행하였다.1924년 1월 김원봉 등과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소집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여기서 반봉건(反封建)·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라는 당면과제를 수행하려고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라는 이질적인 두 세력이 단결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이를 통해 ‘민중직접혁명’이 최우선 과제임을 깨닫고, 스스로 이를 선도할 정치·군사 간부가 되기 위해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입교를 결정하였다.
4. 황포군관학교 입학/교관
1926년 김원봉 등 의열단원을 비롯한 24명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4기생(1926.3.8~1926.10)으로 입교하였다. 『황포동학록(黃埔同學錄)』의 4기생 신상 기록에 의하면, 재학 시 “소속은 보병 7련(連)이었고, 별명은 무산(武山), 나이는 27세, 국적은 한국(韓國), 통신처는 장쑤성(江蘇省) 금산수경서시(金山洙涇西市) 508호 팽(彭)씨 댁”이었다.졸업 후에는 중국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장교로 임관되어 북벌전(北伐戰)에 참전하였고, 황포군관학교 우한분교(武漢分校) 교관으로 배속되었다.
이후 중국군 장교의 신분으로 한인 독립운동의 주요 현장에 참여하였다. 국민당의 1차 북벌 투입할 국민혁명군을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황포군관학교 우한분교에서는 중국국민당 지부 조직을 이용하여 입교생을 모집하였다. 이때 유악한국혁명청년회(留鄂韓國革命靑年會, 약칭 유악청년회)에 입교생 모집을 위탁하여 이들이 모집한 한인 청년을 입교시켰다.
유악청년회는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승인 이래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지역의 한인 관련 사무 일체를 처리하던 단체다. 여기에는 황포군관학교 졸업생, 그리고 유자명과 김원봉 등 당시 우한에 머문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이때 유악청년회의 비서(秘書) 직을 맡아 운영을 주관하였다. 아울러 5인 상무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서무부를 관장하였다. 당시 국민혁명군 제6군 포병영 부영장(副營長)으로 재직하면서 우한분교 훈련부 교관으로도 활동하였다.
1927년 상반기 한커우(漢口)에서 개최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에 참석하였다.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는 1927년 2월 중국·한국·인도·베트남 등 동방 민족이 공동 전선을 구축하여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각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추진하고자 결성된 조직이다. 초대 회장은 김규식, 상무에는 중국인 목광록(睦光錄), 인도인 간타싱, 한국인 유자명 등이었고, 본부는 한커우시에 두었다. 이들은 중국국민당의 지원 아래 기관지 『동방민족』을 발간하여 홍보 활동을 펼쳤다. 이 단체가 조직되는 과정에서 김규식과 함께 간사로 활동하면서 안재환(安載煥) 등을 가입시켰다.
1927년 9월 27일 창립된 한국유일독립당 난징촉성회(南京促成會) 회원으로도 활동하는 등 중국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 세력뿐 아니라 동아시아 피압박민족운동 세력의 단결과 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1928년 무렵 난징(南京)에 체류 중 베이징(北京)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열단과 중국 국민당정부의 교섭에 진력하였다.
5.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한편,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을 계기로 활성화된 재중 한인 독립운동 진영의 재정비 움직임과 한중 연합 전선의 결성이 구체화하였다. 그 일환으로 의열단이 중국 정부의 비밀결사인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와 합작하여 청년군사간부 양성에 착수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설립이 그것이다.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 6대’였고 설립 목표는 한국의 절대 독립과 만주국의 탈환이었다. 간부학교 졸업생들의 활동 방침으로는,1. 일만요인(日滿要人)의 암살
2. 재만 항일 단체와의 제휴
3. 국내와 만주 지역 노동, 농민층에 대한 혁명적 준비 공작
4. 위조지폐 남발을 통한 만주국의 경제 교란
5. 특무활동에 의한 물자 획득
등이 결정되었다.2. 재만 항일 단체와의 제휴
3. 국내와 만주 지역 노동, 농민층에 대한 혁명적 준비 공작
4. 위조지폐 남발을 통한 만주국의 경제 교란
5. 특무활동에 의한 물자 획득
훈련 장소로는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난징(南京) 교외의 탕산(湯山)에 있는 선사묘(善祠廟)라는 사찰을 이용하였다. 당시 이곳은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통신대 관리하에 있었다. 간부훈련반은 6개 대로 편제되어 제5대까지는 중국인이 수용되었고, 제 6대에 한인이 수용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였다. 운영 전반에 관한 사항은 교장 김원봉을 정점으로 의열단 지도부가 관리하였다. ‘군사조(軍事組)’ 교관으로서 학생들에게 축성학(築城學)을 가르쳤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서 한국 독립의 사명을 짊어질 청년 투사 양성에 진력하던 중 김원봉과의 의견 차이로 그만두었다. 일제 자료에 따르면, 1933년 1월경 김원봉과 의견을 달리하여 의열단을 탈퇴하고 한커우로 가서 중국군에 복귀하였다고 한다.
1934년 6월 난징에 있는 중국군 부대의 연장(連長)으로 근무하였다. 또 1937년 12월에는 중국군 상교(上校)[4]로 근무하였다. 삼민주의역행사 서기로 활동한 덩지에(滕傑)의 회고에 따르면, 삼민주의역행사의 우한(武漢) 및 장시성(江西省) 지역의 정보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 합류하여 내무부 차장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6. 8.15 광복 이후
1945년 8.15 광복 직후 우한 지역 교포선무단(僑胞宣撫團) 단장과 한국광복군 제 5지대장[5]에 임명되어 혼란기 중국 사회에서 동포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진력하였다.1946년 12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국군 창설에 도움을 아끼지 않았으며, 1948년 12월 7일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1반에 입교, 약 3주 간의 훈련을 수료하고 이듬해 1월 1일에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다.[6]#
| 부대명 | 직책 | 기간 |
| 육사 8기 임관 | 1949.1.1. | |
| 106여단 | 미상 | 1949.1.7.~ |
| 6사단 | 미상 | 1949.6.1.~ |
| 수도경비사령부 | 사령관 | 1949.7.1.~1950.6.10. |
| 육군본부 | 편제위원장 | 1950.6.10.~ |
| 청년방위대 고문단 | 미상 | 1950.8.23.~1950.9.3. |
| 제 5교육대 | 고문관 | 1950.9.3.~ |
| (성명불상)사령부 | 사령관 | 1950.9.25.~1951.1. |
| 국민방위대 제 3사단 | 사단장 | 1951. 1.6.~1951.4.25. |
| 예비군 103사단 | 사단장 | 1951.4.25.~1951.6.16. |
| 5군단 3사단 | 사단장 | 1951.5.2.~ |
| (성명불상)지구 위수사령부 | 사령관 | 1951.5.20.~1951.8.8. |
| 육군본부 | 미상 | 1951.10.13~ |
| 제 1훈련소 | 부소장(소장대리) | 1952.9.13.~1953.9.25 |
| 북부지구경비사령부 | 사령관 | 1953.9.25.~1954.11.15 |
| 제 3관구사령부 | 사령관 | 1954.11.15.~1955.6.20. |
| 제 50사단 | 사단장 | 1955.6.20.~1956.6.14. |
| 예편 | 1956.6.14 |
임관한 후에는 제106여단장, 초대 수도경비사령관, 103사단장, 북부지구경비사령관, 서부지구경비사령관, 육군훈련소장, 초대 제3군관구사령부 사령관, 초대 제50보병사단장 등을 지냈다. 6.25 전쟁 중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1956년 김석원, 오광선 등 군 원로들과 함께 전역하였으며, 전역과 함께 소장에 진급했다.
한편 독립유공자의 업적을 기리거나 문화재 재정비하는데도 힘썼는데 1954년 민긍호 의병장의 묘를 이장하고 추모비를 건립하였으며, 1958년에는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던 안동 권씨 시조 권행의 묘인 태사묘를 재정비했는데, 이 사실은 족보에도 수록되어 있다.
1959년 10월 27일 별세하였으며,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70년 11월 17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7.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63~264p
-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思想彙報』 19, 1939.
- 추헌수, 『자료한국독립운동』 3, 연세대출판부, 1973.
- 社會問題資料硏究會 편, 『思想情勢視察報告集』 3·9, 京都 : 東洋文化社, 1976.
- 한시준,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1993.
- 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 문학과지성사, 1994.
- 김승곤, 「조선의열단의 창립과 투쟁」, 『軍史』 5,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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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검교공파 수경(守經)계 32세 중(重) 종(宗) 인(仁) 무(武) 항렬.[2] 초명 권홍일(權弘鎰).[3] 김리(金履)의 딸이다.[4] 육군 대령에 해당하고 부대하나 지휘할 수 있는 중국군 계급[5] 원래 제 5지대는 1942년 이후, 나월환 암살사건으로 제 2지대로 개편되었고 제 3전구에 있던 제 3징모분처가 제 5지대로 재편성하려다 광복을 맞았다.[6] 당시 대령으로 함께 임관한 김석원·오광선·이준식, 준장으로 임관한 김홍일, 중령으로 임관한 안춘생, 소령으로 임관한 전성호 등의 동기가 있었다.[7] 출전 : 박동휘, 「창군 원로 권준 장군 재조명: 대한민국 육군 장교 시절을 중심으로」, 『제 18회 상주역사문화학술대회 발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