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원훈(元勳) |
본관 | 원주 원씨[1] |
출생 | 1906년 12월 1일[2] |
충청남도 평택군 남면 안현리 (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안현마을) | |
사망 | 1971년 7월 4일 |
일본 도쿄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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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원균의 셋째 동생 원전(元㙉)의 13대손이다.
2. 생애
2.1. 초년기
원심창은 1906년 12월 1일 충청남도 평택군 남면 안현리(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안현마을)에서 아버지 원흥본(元興本)과 어머니 청해 이씨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의협심이 강했다고 한다.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흑색공포단원으로서 그와 함께 활동하고 아리요시 아키라 암살 미수 사건에서도 같이 참여했던 동지 이강훈은 1917년 7월 7일 <통일조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원심창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그는 남을 위해 자기를 바치고 희생하려는 봉사정신이 어느 누구에게도 찾을 수 없으리만치 독특한 마음씨의 소유자였다.
원심창은 9살 때인 1914년 3월 평택 성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18년 2월에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생활하다가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만세시위에 가담했고, 이후 1920년 3월 경성부 중동학교에 입학했다. 1922년 중동학교를 중퇴한 그는 그해 12월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막노동을 하며 학자금을 마련한 원심창은 1925년 4월 니혼대학 전문부 사회학과에 입학했지만 뜻대로 학비를 조달하지 못해 더이상 학업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그해 9월 대학을 자퇴했다. 하지만 그는 그 짧은 기간 동안 무산학생학우회의 주요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아나키스트 성향의 여러 한인 유학생들과 교류했다.
2.2. 아나키스트
1925년 11월, 동경조선무산자동맹에 가입한 그는 교양부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아나키즘 운동에 전념했다. 그는 평소 아나키즘과 관련된 서적을 탐독하면서 무산자들을 위한 혁명을 꿈꾸는 아나키즘의 정신에 매료되었다. 그가 대표적인 조선인 아나키스트 단체였던 흑우회에 언제 가입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통일조선신문> 1971년 7월 7일자 기사에는 원심창이 1922년경에 흑우회에 가담했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그의 흑우회에서의 활동은 1926년 전에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일제 측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장상중, 이홍근 등과 함께 침체되었던 흑우회를 부흥시켰다고 하니 그가 흑우회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흑우회 재건에 앞장섰던 이홍근의 회고에 따르면, 1926년 초 무렵 흑우회는 몇몇 회원만 남아있을 뿐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이홍근은 김정근, 원심창, 장상중과 함께 재건문제를 상의해 2층 건물을 얻어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고 한다. 이후 원심창은 1926년 1월 삼중현(三重縣) 조선인 피살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장상중과 전득을 파견했고, 이어 1월 30일에는 일본인들이 구성한 아나키스트 단체 흑색청년연맹에 가입하여 긴밀한 연대를 가지면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1926년 2월 10일에는 임시총회를 개최했으며, 동지의 규합과 아나키즘 선전에 관해 협의한 결과 기관지를 발행하기로 했다.
1926년 5월, 원심창은 장상중, 육홍근, 김정근, 정태성, 한예상, 최규종, 이홍근, 최규동, 이원세 등과 함께 '흑색운동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이어 7월 11월에는 흑색청년연맹이 주최하는 무산정당비판박멸설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가해 연설했다가 '불온언사'로 간주되어 잠시 검거됐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그해 7월, 기관지 <흑우(黑友)>와 선전용 소책자 <소작농>이 원심창의 주도하에 간행되었다. 그러나 당국은 이들의 내용이 아나키즘을 선전, 고취시키는 것으로 간주하고 발매와 배포를 금지했다.
1926년 7월 23일, 박열과 함께 구속된 가네코 후미코가 의문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일본 당국은 그녀가 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이에 의문을 품은 원심창은 최규종, 육홍균 등과 함께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이들은 7월 27일 목검을 휴대한 채 지소장 집으로 달려가 사건 경위를 확인한 후 형무소에서 관리하는 공동묘지에 가매장된 유해를 발굴하여 화장한 후 박열의 선산인 문경에 안치했다. 이후 1926년 11월, 원심창은 육홍균과 함께 흑색운동사를 '흑색전선연맹'으로 변경하고 흑색청년연맹에 가입해 한일 아나키즘 운동의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이어 그해 12월에는 장상중, 이홍근, 박망 등과 함게 박열의 사업을 계승한다는 목적으로 흑색전선연맹을 불령사(不逞社)로 개편하고 기관지 <흑우(黑友)>를 계속 발행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갈수록 거세지자, 원심창은 1927년 2월 단체 이름을 '흑풍회'로 개칭하고 조선노동총동맹계의 동흥노동동맹을 세포조직으로서 산하에 두었다. 또한 그해 2월 말에는 오우영 등이 중심이 되어 별동대로 조선자유노동자연맹을 조직했다. 원심창은 노동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1926년 9월 10일 최낙종, 김상렬 등과 함께 조선인 위생인부를 결속시켜 동흥노동동맹을 조직했다. 이때 그는 이홍근, 장상중과 함께 선전대에 편성되어 조선인 노동자들의 숙소를 순방하면서 책자 <자유사회>를 배부했다. 원심창 등이 중심이 된 별동대 조선자유노동자연맹은 우의단체로 1927년 6월 조선인신문배달인조합을 비롯하여 조선자유노동자 연맹 강동부와 산수부, 조선인일반노동조합 등을 산하에 두었다.
1928년 1월 15일, 원심창은 장상중, 한하연, 이시우, 최낙종, 정태성 등과 함께 흑풍회를 흑우연맹(黑友聯盟)으로 개칭하고 기관지로 <호조운동(互助運動>을 발행하여 조직과 선전을 강화했다. 흑우연맹은 조직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반대파를 습격하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 1927년 2월 친일단체인 상애회 회원들이 우의단체인 자유노조연맹원의 일터에서 폭력을 행사했다. 이에 원심창 등은 1928년 2월 상해회 행동대장 하고봉(河古奉)을 폭행했다. 이에 상애회는 경찰에 후원을 받아 권총,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고 흑우연맹과 아나키스트의 회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던 계림장을 습격했다. 상애회 회원의 습격 사건으로 한하연 등 일부가 일경에 피체되고 여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은 정당방위로 인정되면서 모두 무죄로 풀려났지만, 원심창은 5월에 이혁과 함께 재동경조선노동조합 북부지부를 습격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1929년 6월 7일, 원심창 등은 도쿄유학생학우회가 민족주의계와 공산주의계의 연합으로 춘계대운동회를 개최하기 위해 협의중이던 신간회동경지회 사무소를 습격했다. 이 습격으로 흑우연맹원 권상근이 사망했고 신간회 측의 유원우, 김기석 등 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원심창, 최복선, 한하현, 백병련, 정진모, 정찬진, 유종기 등 7명이 체포되었다. 그가 학우회를 습격한 이유는 민족엔 관심 없고 운동회 개최에만 열중하는 이들에게 반성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원심창 등은 예심에 회부되었고, 백병련은 옥중에서 사망하고 나머지 6명은 1930년 4월 29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더이상 일제 당국의 감시 속에서 일본에서 활동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보다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다.
2.3.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흑색공포단
1930년 베이징에 가서 몇달간 머물다가 1931년 4월 상하이로 간 원심창은 지난해에 결성되었지만 유명무실했던 남화한인청년연맹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그해 6월에 가맹한 뒤 재북경동북의용군후원회 등 항일단체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고, 1931년 10월부터 서기를 맡아 각종 정보와 연맹원에 대한 보고 및 연구회의 개최를 담당하는 한편,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정책을 실현 및 확대 강화를 위해 적극 활동했다.또한 그는 남화한인청년연맹과 아나키즘을 선전하는 격문 또는 선전문을 제작, 배포했다. 1931년 8월 29일에 한일병합 21주년을 맞이해 남화한인청년연맹 명의로 "8월 29일은 조선민족이 다른 민족의 노예가 된 날이다. 분발하여 적의 아성을 추부수자"는 내용의 격문을 1백매 등사하여 상하이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 배포했다. 또한 1932년 5월 1일에는 노동절을 즈음해 노동절의 의의와 무정부주의 내용을 담은 선전문 약 1백매를 제작해 상하이 조선인들에게 우송했으며, 1933년 3월 1일엔 3.1절을 맞이하여 "일본제국주의를 저주하며 모든 사유재산제도와 권력을 파괴하고 무정부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려는 취지로" 쓴 선전문 70매를 등사해 프랑스 조계 내에 있는 조선인에게 우송했다.
한편, 남화한인청년연맹은 무정부 사회건설을 위해 행동실천을 목적으로 하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했다. 흑색공포단은 원심창 등 남화한인청년연맹원 뿐만 아니라 대만인, 일본인, 중국인, 미국인 등으로 조직된 국제적 테러단체였다. 그는 이 단체의 지도자로 부임하여 1932년 12월 16일 유기석 등에게 상하이의 일본 주둔군 병영과 일본 총영사 관저에 폭탄을 투척하게 했다. 폭탄은 예정된 대로 폭발했지만 위력이 떨어졌기에 건물 일부만 파괴시켰다. 이후 그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일제 관원을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1933년 3월 중순경, 원심창은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가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 만주 포기를 종용하기 위해 국민당 주요 인사를 초청하여 육삼정에서 연회를 개최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백정기, 이강훈 등과 함께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암살을 시도했다. 그들은 3월 14일 연회장소인 육삼정을 답사하고, 원심창은 3월17일 육삼정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미리 준비했던 폭탄과 권총을 백정기에게 건네주고 최종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실행 직전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어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면서 거사는 불발에 그쳤다. 다음날 아침, 상하이와 베이징, 난징 등 각 신문에 일제히 이 암살계획이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 상해의 국제 흑(黑) 테로단’이라고 크게 대서특필돼 한국인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이후 원심창 등은 7월 10일 일본으로 압송되었고, 원심창과 백정기는 무기징역형, 이강훈은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백정기는 복역 중 모진 고문을 받고 1934년 6월 5일 39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다. 그는 원심창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얼마 살지 못할 것 같다. 동지는 몸이 건강하니 자중자애 하라. 자네가 출옥한 후에도 만일 독립이 안 됐으면 나를 조국 땅에 묻지 말고, 독립이 됐으면 나의 유해를 조국 땅에 묻어주어 무덤위에 꽃 한 송이만 꽂아주기 바란다.
그 후 감옥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원심창은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한 뒤 1945년 10월 10일에 석방되었다.
2.4. 해방 후 경력
감옥에서 풀려난 원심창은 귀국선을 타고 조국으로 귀환했다. 그는 조국에서 신국가 건설운동에 참여하고자 했고 미국과 소련이 한국을 신탁통치하는 것에 반발해 반탁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신탁통치의 찬반으로 대립이 심화되자, 그는 귀환한 지 3개월 만인 1946년 2월 초 일본으로 도로 건너갔다. 이후 그는 재일한인사회의 안정과 수습에 진력했고 신조선건설동맹 결성을 주도하고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당시 당시 재일한인사회에서 대세를 모으고 있던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과 '재일본조선인연맹'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재일본조선인연맹'이 사회주의에 경도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에 친일인사들이 참여한 것 역시 불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신조선건설동맹은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과 함께 "신탁통치반대 민중대회"를 개최하는 등 반탁운동을 적극 전개했으며 1946년 8월 15일 8.15 해방 1주년을 맞이하여 성명과 기본 강령을 새로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행동 강령에는 '민족통일선전'의 구축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원심창의 심중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조선건설동맹은 재정과 지방조직의 취약성 때문에 조직체가 잘 정비되지 못했고, 이때문에 독자적으로 조직을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다. 결국 원심창 등은 1946년 8월 31일 동맹청년학교에서 개최된 제2회 전체대회에서 재일한인의 생활을 보호하고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거류민단'을 조직한다는 안건을 결의하고 신조선건설동맹을 사실상 해체시켰다.
거류민단 결성대회는 10월 3일에 개최되었다. 2천 명이 참석한 결성대회는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 기획부장 김용태의 사회로 진행되었고, 의장에는 고순흠, 부위원장에는 홍현기와 원심창이 각각 담당했다. 또한 원심창은 거류민단의 실무를 관장하는 사무총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거류민단은 곧 재일본조선인연맹과 격렬한 대립을 벌였고, 원심창은 거듭된 분쟁에 지칠대로 지쳐서 1948년 3차 전체대회에서 이강훈과 함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다가 1949년 4월 제6회 임시대회에서 부단장으로 복귀했고, 1951년 4월 3일 제11회 임시대회에서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1952년 4월 3일 제12회 전체대회에서는 김재화, 김광남과 함께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해 거류민단을 이끌었고, 10월 3일에 개최된 제13회 전체대회에서는 일선에서 물러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한편, 원심창은 국내의 정당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아나키즘을 내세우는 독립노동당에 참여해 1947년 중앙감찰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48년에는 독립노동당 일본특병당부를 결성했다. 또한 한국 전쟁이 발발한 지 1년 후인 1951년 4월 거류민단 단장에 선임된 그는 거류민단 산하에 전재원호사업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인들에게 구호 물자를 전달했으며, 좌우합작으로 동화신용조합을 창설했다.
이후 그는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을 촉구하며 재일한인사회의 통일운동을 추진했다. 그는 남북통일운동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1955년 1월 17일 <매일신문>을 통해 통일 방안을 밝혔다.
첫째, 조선의 통일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민족의 대국에 서서 대동단결을 할 것.
둘째, 통일중앙정부는 남북 조선을 통한 자유총선거에 의해 옹립할 것.
셋째, 자유총선거와 조선의 통일독립은 국제적으로 보장할 것.
둘째, 통일중앙정부는 남북 조선을 통한 자유총선거에 의해 옹립할 것.
셋째, 자유총선거와 조선의 통일독립은 국제적으로 보장할 것.
그러나 원심창이 속해 있던 거류민단은 원심창의 통일 촉진운동에 우려를 표했다. 거류민단은 "통일은 좋으나 본국(대한민국)이 거부했으니 우리도 거부한다."고 하여 남북통일운동준비를 반대했다. 그러나 원심창이 듣지 않자, 결국 거류민단은 그를 제명 처분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통일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55년 1월 30일 남북통일촉진협의회 전국발기인대회를 개최하고 <남북통일촉진협의회>를 결성했다. 원심창은 남북통일촉진협의회 중앙대표위원 겸 사무국장으로 선임되었으며, 뒤이어 전문위원회 섭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곧 한계에 부딪쳤다. 그들은 1955년 6월 25일에 '6.25 기념평화제'를 3.1절 행사처럼 전국적인 행사와 평화데모를 치르려 했지만 거류민단과 재조선인연맹의 저조한 참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북한이 1955년 8월 15일에 남북통일촉진협의회 대표를 초청하자,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삼무국장 원심창을 비롯해 권일, 박춘금, 정인훈, 남호영, 이희원 등 6명을 파견하려 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이에 그들은 일본에서 3일간 8.15 해방 10주년 기념행사를 거족적으로 치루려 했지만 재조선인연맹의 방해로 끝내 제대로 기념행사를 치르지 못했다.
결국 거듭된 훼방에 의욕을 상실한 인사들은 하나둘씩 떠나갔고, 원심창 만이 남북통일촉진협의회에 계속 남아 명맥을 이어갔다. 그는 1959년 이승만의 독재 정치에 반대해 일본으로 건너온 이영근과 함께 <통일조선신문>을 창간해 대표상임고문을 맡아 평화적 자주통일운동을 추진했다. 그리고 1965년에는 한국민족자주통일동맹 일본본부를 설치하고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어 통일운동을 지속했다. 이렇듯 한국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1971년 7월 4일 도쿄에서 사망했다. 향년 66세.
그의 유해는 도쿄 이카루노시 훗사역 근처 다이교지에 매장되었다가 1976년 10월 2일 철원군으로 이장되었고, 1992년 7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원심창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