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서상용(徐相庸) |
생몰 | 1873년 5월 16일 ~ 1961년 11월 25일 |
출생지 | 함경북도 길주군 동해면 사계리 |
사망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빙고동 |
매장지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서상용은 1873년 5월 16일 함경북도 길주군 동해면 사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2년경에 간도로 이주했으며, 1911년 서일 등과 함께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했고, 1912년에 길림성 화룡현의 향정관(鄕正官) 및 덕신사(德新社) 사장 등을 역임했고, 1914년에 한족생계회(韓族生計會)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15년 광동학교(光東學校) 교장으로 부임해 교민 자제들에게 독립사상을 가르쳤으며, 1918년 여준, 김좌진, 박찬익, 유동열, 신채호, 김동삼 등 38명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1919년 5월에는 대한군정사(大韓軍政司) 군사부 위원으로 부임했으며, 그해 11월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의 회장 임시 대리 및 부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920년 4월에 특파원을 국내로 파견해 군자금 및 장정을 모집했다. 1920년 10월에는 간도 소재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여 임시정부 직속으로 편입된 남부총판부(墾北南部總辦部)의 참사(參事)를 맡아 총판(總辦) 구춘선, 부총판 방우룡(方雨龍) 등과 함께 일했으며, 1922년에는 노령 화부성 한인조직부장을 맡았고, 1925년 한국독립의용군의 군사위원과 서무부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1929년 화부성의 한인정치학교를 수료했으며, 만주사변 이후엔 중국 관내로 피신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40년에 충칭으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력했다. 8.15 광복 후에는 김일성이 북한에서 집권한 뒤 급격한 공산화가 이뤄지자 이에 반감을 품고 월남했으며, 1949년 2월부터 1960년 1월까지 함경북도지사를 지냈다. 이후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에 거주하던 중 1961년 11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에 서상용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78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