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0 18:01:48

김동삼

파일:대통령장 약장.png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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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동삼
金東三 | Kim Dong-sam
파일:김동삼.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김긍식(金肯植)
이명 김종식(金宗植)
자 / 호 한경(漢卿) / 일송(一松)
본관 의성 김씨[1]
출생 1878년 6월 23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현내면 천전동
(現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2] 내앞마을 278번지)
사망 1937년 4월 13일[3] (향년 58세)
경기도 경성부 현저정 서대문형무소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11호[4]
직업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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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47a0> 부모 아버지 김계락[5]
어머니 평산 신씨
배우자 광산 김씨[6]
박순부[7]
가족 남동생 김동만[8]
장남 김정묵[9], 차남 김용묵[10], 딸
며느리 이해동[11]
종교 유교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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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김장식(金章植)은 6촌 재종제(再從弟)이다.

2. 생애

1878년 6월 23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현내면 천전동(現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 278번지)에서 아버지 김계락(金繼洛, 1848 ~ 1885)과 어머니 평산 신씨(1845 ~ ?)[12]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한학과 유학을 공부하였지만, 문명의 개화로 신학문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신교육의 중요성을 보게 되었으며, 1907년 안동에 협동중학을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교감직을 맡았다.

1909년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힘썼고, 이듬해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되자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1911년 남만주 삼원보에 머물게 되었고 만주 한인단체인 부민단(扶民團)을 결성하여 한인들의 단결을 강조하였다. 1914년 백두산에 있는 백서농장을 운영하였는데, 사실은 독립운동가들의 집결지로 일본의 눈을 피하기 위해 농장으로 가장하고 비밀적으로 독립운동과 독립투사 양성에 힘써왔으나 열악한 환경으로 4년 후 폐지되었다.

1918년에는 김좌진, 서일 등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1919년 독립운동 군정부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정 휘하로 편입하여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김좌진의 청산리 대첩 당시 이를 지원하였다.

1927년 김좌진, 지청천 등과 민족유일당촉진회를 결성하여 위원장이 되었다가 1931년 만주사변일본군에 체포되어 강제송환되었다. 평양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현재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이감되었다가 1937년 끝내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감옥 안에서 순국하였다. 이 당시 시신을 찾아가라고 형무소 측이 유족이나 지인들에게 통보하였지만 일제의 감시를 받을까봐 누구도 나서지 못했으나, 바로 만해 한용운 선생이 소식을 듣고 와서 정중히 시신을 모셔가 장례를 치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유해는 1993년 11월 9일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이장되었다.

현재 안동시 안동댐 공원에는 김동삼 선생의 유언이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3. 여담

김동삼의 손녀 김복생, 김갑생 할머니는 궁핍한 삶을 노인연금 월 20만원으로 연명하는 처지라고 한다. 그나마도 김갑생 할머니는 3급 지체장애를 앓고 있어 연금의 절반 이상을 통원 치료비로 써야 한다고 한다. 이들이 이처럼 어려운 처지에 놓인 것은, 현행 독립유공자 유족 예우에 관한 법률상 손자녀 중 1명만 보상금을 받을 수 있어 오빠만 독립유공자 예우를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 며느리 이해동 여사의 부친은 진성 이씨 원일이며, 이육사의 친형이니 그야말로 독립운동가 집안 끼리 맺어진 혼약인셈.


[1] 이른바 내앞김씨. 전서공파(典書公派)-청계공파(靑溪公派)-귀봉공파(龜峯公派) 28세 식(植) 항렬.[2] #. 의성 김씨 집성촌이다. 김길홍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음력 3월 3일.[4] 가묘이다.[5] 金繼洛[6] 김노창(金魯昌)의 딸이다.[7] 朴順夫. 1884년생. 반남 박씨 박제희(朴濟禧)의 딸이다.[8] 金東滿[9] 金定默. 1905년생[10] 金容默[11] 李海東. 진성 이씨 이원일(李源一)의 딸이다.[12] 판사공파(判事公派=영해파寧海派) 신태영(申泰永)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