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12 18:24:31

주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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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주시경 (周時經)
본명 주상호 (周相鎬)
가계 상주 주씨[1]
출생 1876년 12월 22일 (음력 11월 7일)
조선 황해도 봉산군
사망 1914년 7월 27일 (향년 37세, 총 13776일)
학력 배재학당 만국지지 특별과
종교 개신교(감리회) → 대종교개신교(감리회)
직업 언어학자, 한글학자
가족 배우자 김명훈, 슬하 3남 2녀
한힌샘

1. 소개2. 생애
2.1. 갑작스러운 사망
3. 기타

1. 소개

말이 오르면 나라가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가 내리나니라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 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 주시경의 저서 <국어문전음학> 중에서-

한국의 국어학자이며, 언어 민족주의자이다. 호는 '한힌샘', '한흰매'이며 초명은 '상호' 이다.
 
'한글'이라는 말부터 주시경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한글을 창제한 건 세종대왕이지만 그때는 '한글'이라고 하지 않았고 '훈민정음' 또는 '언문'이라고 하였다. 심지어 소위 선비들 사이에선 "암클"[2]이라는 모욕적인 명칭이 많이 쓰였다고 한다.

주시경의 제자들 또한 뒤이어 국어 연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한국어를 연구하고 한글을 쓰기 쉽게 다듬어, 한국어를 근대성을 지닌 언어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이바지했다.

2. 생애

황해도 봉산군 출생, 본관은 상주이며 아버지는 주면석(周冕錫), 어머니는 연안 이씨이며 주시경은 상주 주씨 17세손이다.

주시경이 국어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한문 강독법에 의문을 품은 데서 비롯된다. 당시 한문 강독법은 한문 원문을 그대로 음독하여 달달 외우게 한 뒤, 나중에 우리말 를 붙여 무슨 뜻인지 풀어 주는 방식이었다.

이를테면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와 같은 것.

주시경은 마지막 우리말 단계에서야 애들이 말귀를 알아듣는 것을 보고 한문과 우리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말의 중요성을 깨달아 그 길로 국어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한다. 신학문을 접하여 그때부터 국어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독립신문이 출간될 때 순한글로 교정 보는 일을 했으며, 독립협회에도 참여했다가 서재필이 떠난 후에는 제국신문에 글을 싣거나 이화학당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의 한국어 강사, 상동청년학원 강사로 취직해서 살았다. 그 와중에 배재 학당을 졸업하였으나 높은 학구열로 흥화학교 양지과(量地科), 정리사 수물학(數物學)을 3년 동안 공부했다. 양지과는 지리학, 수물학은 수학 분야를 의미한다.

그 엄청난 학구열로 여러 학교에서 강사를 맡게 되었다. 간호 학교, 공옥 학교, 명신 학교, 숙명여학교, 서우 학교의 교원이었으며 협성 학교, 오성 학교, 이화학당, 흥화 학교, 기호학교, 융희학교, 중앙학교, 휘문의숙, 보성중학교, 사범강습소, 배재학당의 강사를 맡았다.

국어 교사만 했을 것 같지만 양지과, 수물학을 나왔기에 주산, 지리에도 능했다. 책가방을 쓰지 않고 보따리에 책을 넣고 다녔는데, 빡빡한 수업 일정 때문에 늘 바삐 뛰어다녔고, 그로 인해서 보따리가 대차게 휘날리는 탓에 별명이 '주보따리'였다.

1907년 창립된 국문 연구소 등에서 활동했다. 호인 한힌샘을 비롯하여 문법 용어, 학술 용어들을 토박이말로 지으려는 시도를 처음으로 시도하였는데, 이를 두고 한문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 '두루때글'이라며 비웃기도 했다. 두루때글은 주시경의 한자를 새김(훈)으로 읽은 것. 주시경의 이름에 쓰인 한자들인 두루 주(周)/때 시(時)/ 글 경(經)의 훈독 부분을 차례로 붙이면 두루때글이 된다.

국어 음운 연구와 국어 문법 등을 짜임새 있게 정리한 최초의 인물. 황무지에서 국어학을 개척하였다고 표현해도 된다. 마지막 저술서인 <말의 소리>에서는 서구 언어학보다 앞서간 발견을 하였는데, 구조 언어학적 논리를 자세히 창안한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음운론에서 음소에 해당하는 '고나'의 발견, 형태론에서 어소로 해당되는 '늣씨'의 발견이 그 좋은 예이다. 근대 한국어에서 그 존재가 희미해진 아래아의 공식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근대화에 상당히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배재학당에 입학할 적 가족과 의절까지 하며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앞장서서 머리를 깎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진취적인 성격이었기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이겠지만...

2.1. 갑작스러운 사망

1914년 7월 급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다가 사망하였다.[3] 향년 39세라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요절이었다. 이로 인해 한국 국어학계는 정말 아까운 인재를 일찍 보내야 했다. 제자인 한글학자 열운 장지영[4]은 '주시경 선생 50주기 추도식'에서 대놓고 통곡하며 스승의 요절을 애석해 했다. 장지영이 쓴 주시경 회고록은 1990년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는데, 여기서도 너무나도 가난했던 주시경 이야기를 언급했다.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서대문 밖 수색 고택골(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신사동)에 안장하였다가 1960년에 한글학회의 주선으로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로 이장하였고, 다시 1981년 12월 12일에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

3. 기타

주시경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북한의 초대 수령 겸 한글학자인 김두봉이다. 문화어의 기반을 닦았는데, 서울에 남았던 동문 최현배를 보면 남북한 모두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사람이 언어 정책을 맡아 남북의 언어가 지금까지도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다른 유명한 제자로는 이규영 김윤경 권덕규 등 550명 정도 있다.

한글날에 세종 대왕에게 밀려 어째 언급이 안되는 인물 중 하나다. 물론 한글의 창시자야 세종 대왕이 맞지만 현대한글의 아버지는 주시경이다. 그리고 맞춤법도 주시경이 만든 것이므로, 사실 맞춤법이 틀리는 상황에선 세종이 아니라 주시경을 소환하는 것이 옳다.

서구권 알파벳의 영향인지 풀어쓰기를 주장했었다. 이는 이후 최현배 등의 국어학자들에 의해 실험되었으나,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모아쓰기 / 분철법의 승리. 자세한 것은 풀어쓰기 참조

본래는 개신교 신자였지만 대종교로 개종했다고 하는데, 그러다가 다시 개신교로 돌아왔다고도 한다.[5] 한때 종교적인 주제로 주시경과 논쟁을 벌인 전덕기라는 감리회 목사도 있었으나, 전덕기 목사 역시 주시경 선생처럼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였다.

배재학당의 졸업생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배재고등학교에는 주시경관이라는 건물이 세워져 있다.

1980년에 건국 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2019년에는 그의 제자들이 모여서 만든 학회가 시련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 말모이가 세상에 나왔다.


[1] 17세손 시(時)자 항렬이다.[2] 여성을 뜻하는 '아ᇡ'에 글이 붙은 것이다. 즉, 여자들이나 쓰는 글이라는 것.[3]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급성 체증이라고 서술되어 있으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콘텐츠에 이정선 박사가 집필한 주시경 항목(링크)에는 사인에 대해서 정확히 표기되어 있지 않다. 사인을 정확히 아는 위키러는 수정바람.[4] 1887.? ~ 1976. 3.15.. 주시경 탄생 100주년에 맞춰 만 88?89세로 별세했다.[5] 실제로 말년에 별세할 때까지 상동 청년 학원, 배재 학교, 이화 학교 등 기독교 계통 학교 교사로 꾸준히 활동했으며, 그의 장례식 또한 감리회인 상동교회에서 거행됐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