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12:10:05

신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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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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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 월북, (日): 친일반민족행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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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2년 3월 1일
충청도 문의현 동면 대1리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상대리)
3.1 운동 당시 신문조서[1]
사망 1939년 3월 18일[2] (향년 68세)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
동오(東吾)
직업 독립운동가, 목사
국적 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
본관 고령 신씨[3]
종교 개신교(감리회)

[clearfix]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기독교에 입교하다2.3. 목회 활동2.4. 3.1 운동2.5. 이후의 경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감리회 목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신홍식은 1872년 3월 1일 충청도 문의현 동면 대1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상대리)에서 부친 신기우(申驥雨)와 모친 경주 최씨 최살랍(崔撒拉)[4]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고령 신씨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서얼 출신이라서 관직에 진출할 가망이 희박했다.[5] 하지만 그 자신이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원근 인사들로부터 '대재(大材)', '신동(神童)', '천재(天材)'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영민하고 재질이 뛰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의지가 굳어 무엇이든지 한 번 하고자 하면 기어코 관철했다고 한다.

신홍식은 유년시절부터 청소년 때까지 여느 양반 가문의 자제들처럼 사숙(私塾)을 통해 한학을 수학했다. 그는 13세 때 율시(律詩)를 지었고 16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했으며 유학의 이론을 꿰뚫었다고 한다. 이후 1891년 전주 이씨와 결혼했고 가덕면 계산기로 분가해 거주한 그는 25세까지 과거 공부에 전념했다. 하지만 그는 서얼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사회의 제약을 많이 받아야 했다. 그는 후에 당시의 자신은 "국가를 위해 진취하려는 뜻이 없고 민족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는 것도 없었으며 다만 자신주의로 과거나 하여서 부귀안락을 누리려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가 응시한 과거는 실력보다는 뇌물이 우선이 된 지 오래였고, 서울에 거주하는 권세가 자제들이 급제를 독점하는 게 당연시되어 있었다. 결국 청주에서 애써 올라와서 과거에 응시했으나 더러운 꼴만 보고 떨어진 그는 절망에 빠졌다. 이후 그는 과거엔 아예 미련을 두지 않고 장사꾼으로 변신했다. 당시 양반이 장사꾼을 하는 것은 상업을 천시하는 분위기상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상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약간의 돈을 들여 뛰어든 장사마저 실패하고 모든 돈을 탕진해버렸다.

이후 그는 8~9년간 각지를 방랑하면서 술에 쩔어 지냈고,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불량가장이 되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일장통곡을 하고 일장대소도 했으며 홀연히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다가 갑자기 고함을 질러대 아내를 괴롭게 했고 노모를 근심에 빠뜨리게 만들었다고 한다. 결국 전주 이씨는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와 이혼했고, 그는 1901년 6월 15일 청주군 남일면(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두산리 출신의 김해 김씨 김이백가(金利百加)[6]와 재혼했다.

또한 그는 유망한 친구들을 유인해 술과 여자에 빠지게 만들어 그들의 재산을 낭비하게 만들었고, 도박장을 배회하며 풍기를 문란케 해 주변인들로부터 못쓸 놈이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신동'에서 '낙오자'로 전락했고,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채 매일을 무익하게 보냈다.

2.2. 기독교에 입교하다

그러던 1904년, 신홍식은 청주읍의 기독교 모임에 들어갔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신앙생활을 한 동기는 "예수교회는 권세가 있어서 토색하기에 기탄이 없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 돈이나 떼먹으려고 찾아간" 것이었다고 한다. 사실 한국교회 선교 초기 기독교에 입교한 자들이나 기독교인을 사칭한 자들이 각지에서 순진한 이들로부터 재산을 갈취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기에 헛소문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현상은 청주 지역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청주 일대의 선교사업을 진행하던 북 장로회나 미 감리회 전도인에게서도 종종 벌어졌다 청주 일대에서 처음으로 전도 사업을 시작한 북장로회의 박감출 전도인은 자신의 입지를 이용해 토색 행위를 하려다가 잘 안 되자 개신교를 떠나 천주교로 넘어가버리겠다고 엄포하다가 실제로 개신교를 떠났다. 그리고 당시 청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미 감리회 전도인 박해숙도 토색 행위를 벌이다가 출교조치되기도 했다.

어쨋든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기독교에 입문한 신홍식은 성경을 읽고 회심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훈'이 담겨있다는 신약 성서를 읽고 엄숙히 상고하는 중에 인격적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회개라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그는 <기독신보> 1935년 5월 29일자 기사에 '은퇴수감'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하면서 성서를 통독한 직후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성경을 상고하여 본 결과 하느님의 존재도 거기서 찾아냈고 인도도 거기서 찾아냈고 정의도 거기서 깨달았다. 그러므로 목적을 변하여 참신자가 되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로 하여금 나를 불의에서 정의로 불러주시고 죽음에서 살길로 인도하여 주신 줄 확신한다.

1906년 11월, 신홍식은 W.C 스웨러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 감리회에 정식으로 입교했다. 그는 이때부터 목회 활동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시작한다.

2.3. 목회 활동

신홍식은 보은 구역에서 3,4년 남짓 사역한 후 1910년 직산 구역으로 옮겨서 목회 사역을 했다. 이후 1910년 이전 협성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신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7] 1913년 6월 제2회 졸업생으로 졸업했다. 이때 그는 종로교회 예배당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졸업생을 대표해 연설했다. 그는 졸업식에 참여한 모든 선교사들과 형제 자매들, 특히 졸업생들 모두가 종교적 기관이므로 후진들이 상고할 만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는 종교적 기관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직산 구역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한 이래 1911년 입장 양대리 지역에 양대교회를 신설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1912년에 입장과 목천 구역에 파견되어 직산 입장교회에 기거하면서 목회활동을 전개했다. 1912년 6월 30일자 <그리스도회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입장교회에서 술 백잔을 마신다하여 '박주백'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술주정꾼이었던 박재근이라는 성도가 신홍식에게 설복되어 금주와 단연을 실천하고 헌신과 구제를 실천하는 성숙된 신앙인이 되었다고 한다.

1913년, 신홍식은 정동예배당에서 개최된 미 감리회 제6회 조선연회에서 일본과 한국의 선교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던 해리스의 주례로 변학용, 한창섭, 방족신, 정재관, 이진형 등과 함께 집사 목사 안수를 받았다. 또한 그는 이 연회에서 기존 목회지였던 직산 구역에 진천 구역까지 부여받았다. 이듬해인 1914년 미 감리회 제6회 연회에서는 연기 구역 담당자를 맡는 동시에 공주 동쪽 구역을 순회하여 지방을 관리하는 '순행 목사'의 직임을 부여받았다. 이후 그는 연기 구역의 봉암리 교회에 거처하면서 공주 동쪽의 여러 교회들을 순행했다.

1915년, 신홍식은 미 감리회 제8회 조선연회에서 장로 목사 안수를 받았고 구역 담당자의 자리를 떠나 공주 동쪽 지방 순행 목사로 완전히 임명되었다. 그는 의형제를 맺은 오익표[8], 김인권과 함께 온양 구미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전개했고, 그 결과 충청도 일대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나 신도들이 크게 늘어났다. 이렇듯 충청도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그는 1916년 3월 서울 이남의 선교 거점인 공주읍 교회에 부임했다. 공주읍 교회는 공주 동, 서 양 지방을 통틀어 가장 큰 규모와 교세를 자랑하던 교회로 서울 이남에선 가장 영향력 있는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 일했고 1916년 9월 17일 자신에게 세례를 줬고 나흘 전에 사망한 W.C 스웨러 선교사를 추모하는 예배를 거행했다.

이후 신홍식은 1917년 6월 20일에서 26일까지 평양 남산현 교회에서 개최된 미 감리회 제10회 조선연회에 참석해 평양 남산현 교회로 파송되어 동년 7월에 부임했다. 당시 평양은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주역 길선주가 담임 목사로 봉직하고 있던 장대현 교회를 중심으로 장로회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감리회 역시 남산현 교회를 중심으로 만만치 않은 교세를 이루고 있었다. 신홍식은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재임하면서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이며 감리회의 교세를 키우고자 노력했다.

이렇듯 목회 활동을 정력적으로 추진한 그는 미 감리회 조선연회 안에서도 그 영향력이 커져갔다. 1917년 개최된 제10회 미 감리회 조선 연회에서, 신홍식은 사회개량위원, 연회재정유사부위원, 선교백주념기념위원회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또한 1918년 제11회 미 감리회 조선연회에서는 연회원과정조사위원, 재정유사부위원, 사회풍기개량위원, 내외국선교회위원, 미국 미감리회 외방 선교 백년 기념회 협찬위원 등 여러 위원회에 위원으로 두루 참석했다.

2.4. 3.1 운동

1919년 2월 초, 신홍식은 손정도와 함께 기휼병원에 입원해 있던 이승훈의 병문안을 갔다. 이승훈으로부터 3.1 독립선언에 참여해달라는 권유를 받은 신홍식은 그 자리에서 바로 승낙했다. 그는 감리회 인사 가운데 독립선언에 가담하기로 한 첫번째 인물이었다. 2월 19일, 신홍식은 서울로 상경해 이승훈과 감리교 측과의 연결을 위해 중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YMCA 간사로 있던 박희도를 찾아가 이승훈이 독립운동 건으로 서울에 체류 중이라고 알려줘서 두 사람이 만나게 해줬다.

2월 20일 오후 7시 30분경, 신홍식은 이승훈, 정춘수, 오화영, 박희도, 오기선 등과 함께 수창동 박희도의 자택에 모여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했다. 그들은 조선 독립을 위해 다함께 나서자는 데 의견일치를 이루었고, 독립을 청원할 지, 선언할 지를 놓고 격론을 벌인 끝에 오화영의 제안에 따라 독립청원서를 일본정부에 보내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천도교와의 연대 문제를 놓고는 의견이 엇갈렸다. 박희도는 양측의 제휴가 교리상으로 부합되지 않으며 양 교단 사이에 그간 교류가 없었으니 행동 통일이 원활하지 않을 거라며 반대 입장을 폈다. 정춘수 역시 천도교 측이 위험할 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반면 신홍식과 이승훈은 좀더 지켜보자는 신중론을 제시했다.

2차 모임은 2월 21일 오후 2시에 남대문 이갑성의 자택에서 열렸다. 함태영, 이승훈, 안세환, 김필수, 오상근 등 장로교 인사와 박희도, 오화영, 신홍식, 오기선 등 감리교 측의 인사가 함께 모인 이날 모임에서 청원서 초안 작성 문제가 거론되었다. 또 천도교와의 연대 문제는 종파를 초월해 거족적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지면서 천도교와 힘을 합치는 쪽에 힘이 실렸다. 이밖에도 국제정세와 강화회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대표를 상하이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3차 모임은 2월 21일 저녁 7시 이갑성의 집에서 열렸다. 이때도 천도교와의 연대 문제에 대한 확실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천도교의 독립 출원 방식을 확인한 후에 결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일제에게 독립을 청원하기로 했으며, 기독교와 천도교 간의 역할 분담, 전국 각지에서의 동지 모집 문제 등을 논의했다. 신홍식은 평안남도를 맡아 동지를 모으기로 했다.

이후 신홍식은 여비가 부족하고 2월 23일 주일 예배를 집행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돌아왔다. 2월 26일 안세환을 통해 천도교와 연대할 것이며 독립 청원 대신 독립 선언을 하기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이에 따르기로 하고 평양 일대 감리교회 교역자들과 접촉했다. 우선 평양성 내에 위치한 아펜젤러 기념교회의 김찬홍 목사, 이문리교회의 주기원 목사, 신양리교회의 김홍식 목사등과 만나 평양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들로부터 승인을 얻어낸 그는 뒤이어 숭덕여학교 교사로 있던 박현숙을 찾아가 태극기 제작을 요청했고, 남산현교회 부담임 박석훈 목사에게도 300장의 태극기를 제작하게 했다.

2월 28일 박석훈에게 평양의 만세 운동을 맡긴 뒤 서울로 올라온 신홍식은 3월 1일 오후 1시 30분 경 최성모, 이필주 등과 함께 태화관에 도착해 독립선언식에 참여했다. 독립선언식이 끝난 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그는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가 3월 14일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한편, 평양에서는 3월 1일 오후 1시에 남산현 교회와 숭덩학교 교정, 그리고 벽암리 천도교에서 일제히 독립선언서 낭독이 개최되었고 교인과 학생 등 800여 명이 움집해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후 평양성 내 다섯 교회의 목회자 6명이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신홍식 대신 만세 운동을 이끌었던 박석훈은 1919년 11월 16일 옥중에서 사망했다.

신홍식은 경찰 조사를 받는 내내 시종일관 당당했다. 그는 "경성에 무슨 목적으로 왔느냐?"는 질문을 받자 "다른 용무는 없고 조선독립운동에 참가하려고 왔다."고 밝혔다. 그리고 3월 12일 경무총감부에서 "조선의 독립이 될 줄로 생각했느냐"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될 줄로 알고 있다. 그 이유는 하늘은 조선을 독립시켜줄 것이며 또한 우리는 정의를 주장하고 있으므로 일본은 당연히 조선을 독립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일본은 동양의 평화를 역설하고 있으나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려면 조선의 독립이 필요한 것이다. 또 우리가 이번 일을 하는 것은 일본을 배척하자는 것이 아니고 온화한 수단으로 독립을 청원함으로써 일본은 이것을 양해하고 허용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4월 25일 경서지방법원에서 검사로부터 "어떠한 일에 불평불만이 있어 조선을 독립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한일이 합병된 후 나는 종교 신앙으로 볼 때 이것도 하느님의 뜻인가 생각하였다. 그 후 망국의 민족이 되고 보니 일본 사람이 우리를 보기를 얕게 보고 있어 차별대우가 심하므로 민족자결 문제가 제창되고 있는 이번 기회에 조선도 하느님의 의사로 독립국이 되리라고 믿고 가담하였다. 그러나 일본을 배척하기 위해 독립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신홍식에게 징역 2년형을 선고했다.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1921년 2월 마포 공덕동 경성감옥으로 이감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지내면서 하루에 세번씩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감옥 안에서 영적 재판을 받는 신비로운 종교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1921년 11월 4일 경성 감옥에서 만기 출옥한 그는 평양으로 돌아가 평양역에서 가족과 남산현교회 교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2.5. 이후의 경력

신홍식은 출옥 후 평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1922년 초 인천 내리교회 제9대 담임복사로 부임했다. 이듬해, 그는 <인천 내리교회의 역사>를 했고 1927년에는 <기독신보>에 '신통여행'이라는 동화를 연재해 금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1929년에는 당시 기독교계가 전개한 절제운동에 참여해 저서 <장수옹>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방탕했던 과거를 적나라하게 밝히며 술과 여색에 탐닉하는 것이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망칠 수 있는지를 상세하게 묘사했다.

신홍식은 이외에도 청년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설교를 통해 기독청년들이 함정에 빠진 민족과 혼돈에 빠진 교회를 위해 나설 때라고 호소했다. 그는 감리교회 청년공동체인 엡윗청년회와 교계 매체인 <기독신보>를 이용해 청년운동을 전개했고 인천 내리교회, 횡성 등지에 청년회를 조직해 야학과 주일학교를 열게 했다. 또한 농무회(農務會)를 조직해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운동을 펴기도 했다.

신홍식은 1927년부터 1935년까지 원주와 강릉에서 감리사로 시무하다가 1935년 원주읍교회에서 은퇴를 발표했다. 은퇴 후 원주에서 지내던 그는 1937년 고향 청주로 낙향했으나 신경질환에 걸려 여러날 혼수상태에 빠지는 등 병마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1939년 3월 18일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서 사망했다. 향년 68세. 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하나님을 잘 믿고 충성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신홍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 제적등본 상에는 충청북도 청주군 문의면 문산리(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문산리)가 출생지로 기재되어 있다고 하며, 이전에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가 출생지로 알려져 있었다. 가덕면 인차리는 인근의 청용리·행정리와 함께 고령 신씨 집성촌이기도 하다.#[2]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1월 27일 별세했다고 기재되어 있다.[3] 소안공파 25세 식(植) 항렬.[4] 본래 이름이 없었지만 교회에 출석하면서 '사라'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사라의 한문음역이 바로 살랍(撒拉)이다.[5] 아버지 신기우는 부인 두 명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 연안 이씨 이한기(李漢基)의 딸로 슬하에 장남 신도식(申道植)을 두었고, 둘째 부인 경주 최씨 슬하에 신홍식을 둔 것이다.[6] 이백가는 이삭의 아내였던 리브가의 한문음역이다.[7] 1911년 신학회 춘기시험 결과를 적은 기록이 현재까지 남아있는데, 이에 따르면 신홍식은 86점을 획득해 최성모와 공동 5등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다.[8]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오익표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