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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36회 총회 회의록 PDF에서 확인가
| <colbgcolor=#000><colcolor=#FFF> 정춘수 鄭春洙 | [ruby(禾谷春洙, ruby=かたに しゅんじゅ)] | 카타니 슌주 | |
| | |
| 출생 | 1875년 2월 11일 |
| 충청도 청주목 남일상면 두산리[1] (現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두산리) | |
| 사망 | 1951년 10월 27일[2] (향년 76세) |
|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 (現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궁평리) | |
| 묘소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저산리 은적산 |
| 본관 | 광주 정씨(光州 鄭氏)[3] |
| 자 / 호 | 명옥(明玉) / 청오(靑吾) |
| 가족 | 아버지 정석준[4] 형 1명 남동생 1명 숙부 정석영[5] 배우자 임눌리 |
| 학력 | 협성신학교 (졸업) |
| 종교 | 개신교 (감리회) → 가톨릭 (세례명: 바오로) |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종교인, 친일반민족행위자. 기독교대한감리회의 대표적인 흑역사로 꼽히기도 한다.한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으나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변절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고, 이후 신사참배를 강요하거나 전투용 비행기 3대를 헌납하는 등 일본 제국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6]
2. 생애
2.1. 초년기
1874년 2월 11일 충청도 청주목 남일상면 두산리(現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두산리)에서 아버지 소릉(巢陵) 정석준(鄭錫駿)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7] 그의 집안은 광주 정씨 희간공파로, 조부 정희간은 청원군 북이면 서당리에서 글방을 열고 젊은이들을 교육하던 훈장이었으며, 아버지 정석준은 당시 명망높은 문인 임헌회(任憲晦)[8]의 가르침을 받은 유학자였다. 정석준은 학문의 깊이와 남다른 효성으로 명망이 높았으나 정춘수가 11살이 되던 1885년에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그의 어린 시절은 기록이 미비해서 알기 어렵지만, 아내 임눌리는 그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본받아가며 사서오경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또한 <남감리회 30년 기념보>에 수록된 그의 파송기와 약력에 따르면, 그는 8살 때인 1882년부터 1897년까지 한문을 수학했다고 한다. 신석구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정씨는 실로 나의 잊지 못할 은인이오, 또한 동향의 세교친구(世交親舊)이다. 그의 부친은 일향(一鄕)에 유명하신 학자이시며 정씨가 십일세 시에 두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여막에서 상복을 벗지 않고 삼년상을 치렀으므로 성명이 자자했다. 나도 정씨와 동갑으로 십이세 시에 백부출계로 거상 중이었지만, 나는 한 달에 이차식(二次式) 삭망제 때 밖에 상복을 입지 아니하였다.
이렇듯 명망이 대단했던 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란 그는 부친이 사망한 뒤 인근의 문의현 동면 인차리·계산리(現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계산리)에서 살다가 작은아버지 석릉(石陵) 정석영(鄭錫永)을 따라 청주목 서강내이상면 궁현리(現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궁현리)로 이주했다. 이때 그는 훗날 자신과 같이 민족대표 33인을 구성하게 될 신석구, 신홍식과 교류를 가졌다. 한 때 과거를 꿈꿨지만 1894년 숙부의 차남인 정필수가 동학 농민 혁명에 참석했다가 청주 병영에서 효수당하는 바람에 출세에 차질이 생긴 데다 이듬해 갑오개혁이 단행되면서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과거를 통한 출세 길이 막혀버렸다. 결국 그는 1901년 28살의 나이로 조선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2.2. 기독교 입교
1901년 그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원산에서 여독을 풀기 위해 여관에서 며칠 묵게 되었는데, 여기서 장로교 신자로부터 기독교 복음을 듣고 성경을 접했다. 그의 아내 임눌리는 회고록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원산 어떤 여관에 들어 노독을 풀려고 며칠 쉬는 동안, 그 여관주인을 알게 되었는데 이 주인은 근엄한 장로교 신자로서 언행이 존경할 만했다. 정춘수는 이 여관주인으로부터 천주의 존재, 사후의 상선벌악, 강생구속 등 진귀한 이야기를 생후 처음 들었다. 밤을 새워가면서 신약성서를 통독하였고 알아듣기 어려운 문제는 주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때 오십여 세 되어보이는 노인은 이 청년을 자기 조카나 되는 듯 친절히 지도하였다.
신약성서를 재독, 삼독한 정춘수는 한학에서 "삶을 미처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 이상을 알지 못했고, 오륜삼강으로써 자기와 이해관계 있는 자에 대한 의무만 배웠을 뿐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사후 상벌과 애인여기(愛人如己)뿐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할 것을 가르침을 보고서 광명을 알아보기 시작하였고, 구국운동도 이런 종교적 토대 위에 전개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중단하고 원산 감리교회를 찾아가 미국인 목사로부터 여러 가지 교리를 연구한 다음 드디어 세례를 받고 목사의 후의로 교회 사무에 보조협력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감리교회 경영인 원산배화여학교 교원으로 있었는데 목사의 권고로 정춘수와 결혼하였다.
신약성서를 재독, 삼독한 정춘수는 한학에서 "삶을 미처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 이상을 알지 못했고, 오륜삼강으로써 자기와 이해관계 있는 자에 대한 의무만 배웠을 뿐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사후 상벌과 애인여기(愛人如己)뿐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할 것을 가르침을 보고서 광명을 알아보기 시작하였고, 구국운동도 이런 종교적 토대 위에 전개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중단하고 원산 감리교회를 찾아가 미국인 목사로부터 여러 가지 교리를 연구한 다음 드디어 세례를 받고 목사의 후의로 교회 사무에 보조협력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감리교회 경영인 원산배화여학교 교원으로 있었는데 목사의 권고로 정춘수와 결혼하였다.
이렇게 해서 원산에 눌러앉고 기독교인이 된 그는 원산 남산동 감리교회에서 영국인 선교사 로버트 A. 하디에게 세례를 받고 남(南) 감리교인이 되었다. 1906년 남감리회 전도사가 된 그는 그해 9월 개성 북부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3년 간의 활동을 마친 후, 그는 서울 도렴동 소재 종교교회로 발령이 났다. 그는 이무렵 협성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수업도 병행했고, 종로 YMCA에서 강연활동도 자주 했다. 황성신문에 따르면, 그는 종로 청년회관에서 오후 3시에 열리는 복음회 강사로 초청되어 3번 설교했고, 6월 16일엔 저녁 8시에 청년을 대상으로 연설했다고 한다.
1912년 협성신학교를 1회로 졸업한 그는 전도사로 시무했던 종교교회의 담임을 맡게 됐다. 또한 YMCA가 주축이 되어 규합한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 강연회에 참여해 격려사를 하기도 했고, 청년들의 민족정신을 일으키는 설교로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고 남감리교회 목회자로 활동하면서도 선교사들에 대한 불만을 종종 표출했다. 1917년 9월 24일 윤치호는 일기에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정춘수 목사는 선교사들의 배타적인 정책과 태도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고 있다. 그는 김필수 씨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선교사들이 배타적인 정책을 고집한다면-교회 정치와 교육 등에 대해 조선인들과 협의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교회 혁명이 일어날 겁니다." 그는 회의석상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딴전을 피우곤 했다.
그가 이같은 태도를 보인 것은, 감리회의 운영이 선교사들과 선교사 측근에서 일하는 소수 한국인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에 반감을 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선인들의 교리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노력했으며, 그들의 어려운 사정을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그의 구제를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신석구였다. 그는 신석구에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쳤고 자신의 집에서 1년 간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또한 개성 남성병원을 운영하고 있던 의료 선교사 W. T 리드에게 조선어를 가르칠 선생으로 신석구를 추천해주기도 했으며, 신석구가 협성신학교에 입학하고 신학수업을 받고 1909년 2월 개성 북부교회 전도사로 부임하게 되는 데 도움을 줬다. 신석구는 이렇듯 자신을 도와준 그를 "실로 잊지 못할 은인"이라고 칭했다. 이후 그는 함경남도 원산부 남촌동 128번지(現 강원도 원산시 신흥동)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2.3. 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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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본인이 후에 3.1 운동에 참가한 일로 심문을 받았을 때 밝한 바에 따르면, 그는 1919년 1월 <매일신보>를 통해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접했고, 그때부터 민족운동을 일으켜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그는 같은 해 2월 15일 남감리교 연회에서 전개하던 '성경학원 백주년 기념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상경했고, 이튿날 종교교회 저녁예배를 인도한 뒤 종교교회 담임목사 오화영과 만나 민족자결론에 입각한 조선의 독립을 꾀하기로 뜻을 모았다. 또한 2월 16일 북감리교회 소속인 박희도를 만나 권유를 받고, 그를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던 북감리회 운동세력과 연대하기로 했다.
그 해 2월 18일~19일 양일간, 그는 개성에서 김지환 전도사와 윤상은 전도사를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했고, 20일에 다시 경성의 영신학교 사무실에서 박희도, 신홍식, 오화영, 이승훈 등과 회합하여 기독교 연합세력을 형성, 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원산으로 돌아간 그는 곽명리, 이가순 전도사와 협의해 독립운동을 준비했고, 2월 26일 원산부에서 김성국(金成國)에게서 3월 1일에 천도교 측 대표들과 함께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또한 경성의 오화영과 편지를 통해 연락하면서 외국에도 서면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운동 진행 과정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3월 1일 당일, 사시(巳時)에 원산부를 떠나 경기도 경성부에 도착했고,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독립만세를 세 번 불렀다. 지난 2월 28일 곽명리가 서울에서 가져온 기미독립선언서에는 정춘수의 이름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올라 있었다. 그는 이걸 보고 뒤늦게 3월 1일에 상경, 오화영의 집으로 갔지만, 33인 중 오화영을 포함한 29인이 이미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오화영의 집에서 어찌해야 할 지를 고민하다가 독립선언 이후 나흘이 지난 3월 5일에 경무서에 편지를 보내 자수했다. 그러나 반응이 없자, 이틀 뒤인 3월 7일 오후 1시에 경무총감에 출두해 자수했다. 이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체포되어 구금되었고, 그는 자신이 자수한 이유는 "동지들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한 독립선언에 가담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항상 생각하기를 한일합병 이래 조선에 대한 정치와 교육 기타 일반시책에 있어 일본인과 차별을 하였으므로 그 점에 불만족하였고 또한 양 민족은 동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독립하여야 되겠다는 것을 항상 마음먹게 되었다. 그런데 본년 1월 이래 동지인 오화영과 신석구 기타 아는 사람에 대하여 이같은 원정(怨情)을 말한 결과 본년 2월 상순경 동지를 규합하여 조선독립을 할 계획을 정하였다.
하지만 3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 출두한 그는, 자신이 독립선언이 아닌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려 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5월 3일, 그는 조선 독립운동을 한 전말을 밝히라는 검사의 요구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원래 한일합병에는 반대는 아니하였으나 합병 당시에 기대한 것과 같이 내선융화(內鮮融化)가 실행되지 않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던 차 본년 1월경부터 민족자결에 의해 조선도 독립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즉, 그는 한일합병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내선융화, 곧 일본과 조선이 하나 되는 것이 이뤄지지 않음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일제의 침략에 반발해서가 아니라 융화될 수 없기에 독립을 주장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또한 그는 법정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의논했을 때 자신은 독립이 아닌 자치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나는 그때 민족자치가 마땅한가 조선독립이 마땅한가고 물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독립이든지 자치든지 좋은 방법을 말하라고 하므로 나는 독립은 아직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독립을 하려면 다른데 간섭 없이 조선 사람만으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결이란 것을 이해하며 민족 자치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조선민족자치의 청원서를 제출하고 기타 조선 내의 각 사회단체 또는 각국 영사관에게도 그 일을 통지하자고 하였더니,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일본 정부나 조선 총독부에서 청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나는 그런 경우에는 언제까지든지 뜻을 이룰 때까지 몇 번이고 청원하자고 하였다.
또한 그는 독립선언서에 자신의 이름이 서명된 것 또한 본의가 아니었다고 밝혔다.
동년 2월 23일에 경성에서 오화영, 박희도에게서 서신이 왔는데 그 서신 내용에 의하면 금번 경성에서는 천도교와 합동이 되었으므로 경성과 같이 지방에서도 천도교와 합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발표의 일자는 3월 1일로 정하였으니 경성과 지방이 동일에 시행하기로 하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서신을 보고 의심이 났는데, 하나는 천도교 측과 합동한 것이고 또 하나는 일본 정부나 조선총독부에 청원하는 것을 어찌하여 절박하게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곽명리도 나와 같은 의문을 품고 일단 경성에 가서 확실히 아는 것이 좋다고 하므로 나는 원산에 있고 곽명리는 27일 상경했다가 28일 돌아왔다.
곽명리는 조선독립선언서 수백매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한 장을 받아보니 과연 조선독립선언서이고 민족대표자 33인의 성명을 열기하였는데 그 중에 나의 이름도 있으므로 나는 그에게 우리는 다수의 찬성을 얻어 다수의 명의로써 민족자치의 허가를 청원하려고 했는데 어째서 33명의 명의만으로 독립선언을 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냐고 했다. 나는 원래 민족자치와 청원에는 찬성했지만 이 독립선언서에 명의를 낼 것은 승낙한 일이 없는데 무슨 일로 이 선언서에 기재하였느냐고 하니, 곽명리는 급히 가지고 오느라고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다고 했다.
곽명리는 조선독립선언서 수백매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한 장을 받아보니 과연 조선독립선언서이고 민족대표자 33인의 성명을 열기하였는데 그 중에 나의 이름도 있으므로 나는 그에게 우리는 다수의 찬성을 얻어 다수의 명의로써 민족자치의 허가를 청원하려고 했는데 어째서 33명의 명의만으로 독립선언을 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냐고 했다. 나는 원래 민족자치와 청원에는 찬성했지만 이 독립선언서에 명의를 낼 것은 승낙한 일이 없는데 무슨 일로 이 선언서에 기재하였느냐고 하니, 곽명리는 급히 가지고 오느라고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다고 했다.
이렇듯 그는 처음 진술과 달리 자신은 독립을 꾀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자치를 주장하는 입장이었음을 밝혔다. 또한 그는 천도교와 합동하여 추진하자는 제안을 거부하는 입장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곧이어 민족 자치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문: 민족 자치란 것은 무엇인가?
답: 독립이라 하는 것은 일본과 전연 관계를 끊는다는 것이고, 민족 자치라고 하는 것은 조선이 주권을 얻어 자치하면 중요한 안건에 대해서는 일본의 지도를 받는다는 것인데 자못 한일합병 전의 통감부 시대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문: 민족 자치를 한다면 어떠한 정체(政體)를 구성하려고 생각하였는가?
답: 그것은 일본 정부에 자치를 허락한 후 공화정체나 전제정체를 할 것을 결정하면 좋다고 생각하였다.
문: 그러면 피고의 민족 자치라는 것은 독립을 하자는 것이 아닌가?
답: 나는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독립국이 되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하였다.
문: 피고는 금후에도 또 이러한 운동을 할 것인가?
답: 최초 목적을 달하지 못한 일을 스스로 깨닫기 때문에 종교 사업이나 하겠다.
답: 독립이라 하는 것은 일본과 전연 관계를 끊는다는 것이고, 민족 자치라고 하는 것은 조선이 주권을 얻어 자치하면 중요한 안건에 대해서는 일본의 지도를 받는다는 것인데 자못 한일합병 전의 통감부 시대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문: 민족 자치를 한다면 어떠한 정체(政體)를 구성하려고 생각하였는가?
답: 그것은 일본 정부에 자치를 허락한 후 공화정체나 전제정체를 할 것을 결정하면 좋다고 생각하였다.
문: 그러면 피고의 민족 자치라는 것은 독립을 하자는 것이 아닌가?
답: 나는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독립국이 되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하였다.
문: 피고는 금후에도 또 이러한 운동을 할 것인가?
답: 최초 목적을 달하지 못한 일을 스스로 깨닫기 때문에 종교 사업이나 하겠다.
한편, 1919년 3월 1일 이후 원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대해 그는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았지만, 시위의 핵심 주동자들에게 독립운동이 계획되고 있음을 알리며 이에 가담할 것을 권유해 시위가 촉발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그는 폭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 조용한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위 주동자들은 만세시위를 감행했고, 일본 제국 경찰은 이를 강경 진압했다. <대한민국 독립유공 인물 목록>에는 원산 장로교회 장로 이가순을 비롯해 이순영, 이진구, 차광은과 같은 인물들을 원산 만세시위 주도자로 기록했는데, 이들의 활동상을 기록한 글은 하나같이 정춘수가 중요하게 거명된다.
이상의 기록을 토대로 보면, 그는 3월 1일부터 진행된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할 뜻이 없었다. 물론 독립선언계획의 모의 과정에 참여한 그가 민족 자주와 독립에 대한 바람이 처음부터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동료들을 설득해 운동에 가담하게 하고 어떻게 진행할 지를 자발적으로 논의했다. 그러나 2월 21일 밤 영신학교 교무실에서 논의할 때 결의되지 않았던 일이 급물살을 타자, 그는 매우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기독교, 천도교, 불교의 연합이 이뤄지는 걸 결코 원하지 않았고, 강대한 일제를 상대로 독립을 선언하는 것 또한 무모하다고 여겨 자치를 청원하는 데서 그치기를 원했다. 게다가 민족대표라는 이름으로 선언서 서명자의 한 사람이 된 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평화스러운 방법으로 일제에 청원하는 온건한 길을 선호했다. 그는 조선인을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 일제에 불만을 품었지만, 조선의 정치와 백성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치를 하되 일제의 감독을 인정하는 '통감부' 시대로 돌아갈 것을 원했다.
1919년 8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경성지방법원에서 본 건을 담당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내려졌고,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이른 바 내란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을 본 건의 관할 재판소로 지정했다.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소요 혐의에 대해 본 건에 대한 공소를 수리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내려졌고, 이에 공소하여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위와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징역 1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36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1년 5월 5일에 만기 출옥했다.
2.4. 애매한 행보
그는 출옥 후 자신이 목회하던 원산으로 돌아왔고, 1921년 7월 6일 저녁 8시 원산중리 예배당에서 제1회 복음강연을 개최했다. 그는 이날 강연에서 모인 사람들에게 "무한한 감흥"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설교와 강연에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개성에서 6백여명의 소년들이 운집한 소년회 선전강연에서 <소년의 금일>을 연설해 큰 감동을 줬고, 1925년 9월에는 중앙기독청년회에서도 강연했다. 1925년 10월 5일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그의 근황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언변 좋으신 정춘수 선생은 지금 개성 북예배당 목사로 계시며 겸하여 고려여자관을 주관하고 계시답니다.
이렇듯 그는 '언변 좋은 목사'로 통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1922년 9월 개성 북부교회 파송을 시작으로 목회 활동을 재개했다. 1926년 춘천지방 장로사를 거쳐 남·북 감리교가 합동했던 1930년에는 철원지방 장로사로 활동했다. 평양 신양리교회(1931), 서울 동대문교회(1932), 서울 수표교교회(1934) 담임 등을 비롯해 1935년에는 중부연회 부흥 사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1930년 말에는 총리원의 목사 측 이사로 선임되기도 했다. 이렇듯 그는 왕성하게 활동하며 윤치호, 양주삼에 이어 남감리교회의 대표인으로 성장했다.
한 편 그는 1926년 신간회에 간사로 참가했으며, 미국에 있던 동지회의 국내지부 성격을 띈 흥업구락부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렇듯 그는 민족주의자로서 명맥을 유지했고 대중에게도 민족대표로서 선망받았지만, 실제로는 목회 활동에 전념할 뿐 민족 운동가로서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않았다. 그는 '종교사업이나 하겠다'던 자신의 법정 증언을 충실히 지켜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친일로 돌아섰다고 보기도 어려웠고, 그와 함께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이름을 올린 최린과 박희도가 자치론을 전개할 때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친일 행적을 보이기 시작한 계기는 흥업구락부 사건이었다. 1938년 5월 19일, 서울 YMCA의 구자옥과 홍병선을 비롯한 흥업구락부 관련자들이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었다. 흥업구락부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단체인 동지회의 국내지부로 인식되었지만, 실제로는 별다른 독립운동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제가 흥업구락부 인사들을 대거 체포한 것은 민족운동 계열의 인사들을 집단 전향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이후 흥업구락부 연루자들은 1938년 9월 3일 전향성명서를 쓰고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조선총독부 체제의 질서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전향성명서에는 정춘수의 이름도 있었다. 그는 이때부터 애매한 행보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친일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2.5. 친일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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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고란 '나의 전시생활'에 기고한 한시 - 녹기 1941년 11월호 | |
1939년 9월 28일 감리교회 감독으로 당선되었다. 그가 당선된 데에는 복잡한 정치관계가 얽혀 있었다. 남북 감리교 통합이 이뤄진 1930년 이전부터 감리교 내엔 서북 일대(평안도와 함경도)와 기호(경기도, 황해도 남부와 충청남도 북부 지역)의 갈등이 있었고, 1933년 9월 적극신앙단이 출현하면서 본격적인 분파 갈등이 시작되었다. 적극신앙단은 평안도 장로교의 근본주의 신학, 친선교사 성향과 조선 기독교회 주도에 불만을 품고 사회복음주의와 조선 기독교 수립을 제창했다. 이에 평안도 장로교는 이들을 배격했고, YMCA와 감리교 내에서도 적극신앙단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때 그는 적극신앙단 임원이었지만 별다른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갈등은 윤치호와 양주삼이 적극신앙단의 지도자인 신흥우에게 적극신앙단 해체를 명령하면서 해소된 듯 했다. 그러나 신흥우는 그의 측근 인사들과 더불어 일제의 신임을 얻고 감리교단과 YMCA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1939년 9월 28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신흥우는 재기의 기회를 얻었다. 그 날 후보 중에는 1934년 평양 남산현 교회를 이끌었던 서북계의 핵심 인물 이윤영과 신흥우계 인물이었던 김영섭이 유력했다. 이윤영은 김영섭이 당선되면 신흥우 일파의 교권 장악을 염려해 적극신앙단에 가입한 적이 있지만 별다른 활동을 한 적이 없던 그에게 표를 몰아주기 위해 후보 사퇴를 선언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감리교회 감독이 될 수 있었다.
그는 감독의 지위에 오른 뒤 감리교가 일제에 적극 순응하도록 이끌었다. 사실 그가 당선되기 이전부터 조선감리교회의 친일성향은 기정사실화된 것이었다. 조선감리교 총리원은 1938년 7월 양주삼 총리사를 위시하여 중일전쟁 1주년을 기념하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결성식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감리회가 노골적으로 친일 행각을 수행하게 했다. 그의 첫 행보는 1939년 10월 19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메소지스도교회 총회 참석이었다. 이는 조선 감리교와 일본 감리교 합동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1940년 1월호 <조선감리회보>는 지면의 3분의 1을 할애하여 '일본 황실의 번영과 국가의 융창을 봉축'했다. 또한 '감독의 신년 편지'에서는 '조선감리교회가 창립된 지 십주년이며, 금년은 황국기원 2천 6백년 맞게 된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면서 "감리교회 기본 재산 20~30만원을 적립하도록 노력을 다하자"면서, 이를 하늘나라 건설로 비화시켰다. 또한 그는 1940년 2월에 2대 기념행사를 강조했다. 하나는 2월 11일 황기 2600년 기원절 행사에 국민의 성의를 보이자는 것이며, 또 하나는 조선감리회 창립 10주년을 맞이하여 총리원기본금을 완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1940년 3월 '감독의 편지'에서도 일제에 충성할 것을 요구했다.
이 월호 일면에 특서하였거니와 앞으로도 삼월호에 기재하겠사오니 그 삼대 조건을 특별히 주의를 하셔서 영적사업으로 신신자배가 전도운동과 물적 사업으로 총리원 기금 완성 운동을 교인 정신 총동원적으로 일체 협력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거두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시고, 국민적으로도 황기 이천 육백년을 기념하면서 성심보국하시기를 바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1940년 4월 호에서 4월 29일 천장절을 기리기 위해 28일 주일은 '애국전도 보국주일'로 정하여 내지(일본), 조선, 만주에 있는 조선감리교회의 아침 예배에서 천장절을 봉축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이 날의 헌금 역시 총리원 전도국으로 보낼 것을 요청했다. 또한 7월 호에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지 3주년임을 환기시키며, "7월 7일 지나사변 기념행사에 당국의 지시가 있는 대로 일체 봉행할 것"을 다짐했다. 또한 그는 "주님의 명령"과 "사도들의 교훈"을 받들어 종교보국의 실적을 거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편 그는 조선총독부가 창씨개명을 할 것을 요구하자 이를 받아들여 자신의 이름을 '카타니 슌주(禾谷春洙)'로 개명했다.
1940년 <조선감리회보> 8, 9월호에서 같은 해 6월 23일 경성을 출발해 만주의 교역자 부흥수양회에 참여하고 만주 일대 감리교회를 순행하며 설교한 소감을 밝혔다. 그는 만주 교회와 교역자들의 어려움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선교에 대한 교회의 사명을 절실하게 느끼고 돌아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국가의 팔굉일우의 정신으로 대동아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나라의 충성을 다함이라는, 이른바 '전도보국'을 주창했다. 이후 1940년 10월호에서 그는 황기 2600년을 기념하여 10월 17일에 일본 현지에서 열리는 기독교신도대회를 위해 '성심봉축'할 것을 당부했고, 11월호에는 10월 8일부터 23일까지 일본에 다녀온 소감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특별히 동경 체재 중 14,15,16 삼일간은 일본메소지스도교회 임시총회에 회원의 책임으로 참석하야 회무진행에 많은 참고가 있었으며 17일은 특별히 전국적을오 모이는 기독교 신도대회로 청산학원 후정에서 3만여 명이 집합하여 오전에는 계속하여 기독교 47여 파가 합동키로 결의된 선언이 있은 후 총리대신, 문부대신, 이외 각 관, 군, 공 측의 축사와 각 방면의 다수의 축전과 축문이 있었고, 3만여 명 교인이 만장일치로 화기융융하야 그리스도의 정신을 발휘하는 새 세상이 온 것 같은 평화의 기분으로 남은 순서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신체제에 대한 국민의 책임과 평화 합동에 대한 교인의 의무를 일층 더 심각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우리 기독교인으로는 국민의 총력연맹적 정신으로 매진하고 교인의 합동 일치적 성심으로 봉사하여 내선일체와 신동아건설의 목표를 정하고 굳은 신앙으로 시국을 극복하며 신체제에 순응하여 멸사봉공하는 것이 참 신앙 보국이요, 전도보국의 사실인줄 압니다.
신체제에 대한 국민의 책임과 평화 합동에 대한 교인의 의무를 일층 더 심각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우리 기독교인으로는 국민의 총력연맹적 정신으로 매진하고 교인의 합동 일치적 성심으로 봉사하여 내선일체와 신동아건설의 목표를 정하고 굳은 신앙으로 시국을 극복하며 신체제에 순응하여 멸사봉공하는 것이 참 신앙 보국이요, 전도보국의 사실인줄 압니다.
이러한 그의 명백한 친일 행보에 대한 질타 여론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그는 조선감리회보 1940년 11월호에서 이러한 질타를 '오해와 악평'으로 일축하고 '굳은 믿음으로 현혹되지 않을 것'을 성도들에게 당부했다.
'근일 우리 교회에 대한 오해와 악평이 많은 비상한 시험을 신앙으로 잘 이기고 물심 양방의 자립적주의로 그리스도의 정신만 가지고 전진 향상하면서 신체제에 순응하여 선공후사의 생활로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라오며 10월 2일 총리원 이사회에서 선언, 통과된 교회혁신조항에 대하여 합심 실행하시기를 거듭 부탁합니다.
1940년 12월 그는 "구주 성탄을 축하하는 동시에 황군을 동정하는 위문대금 2원 이상을 성심껏 준비해서 12월 20일까지 총리원으로 보내라"고 '부탁'했다. 이후 1941년 1월, 그는 '감독의 편지'에서 "국가에 대하여 충량한 국민이 되고 교회에 대하여 진실한 교인이 되고 가정에 대하여 평화한 가족이 되라"고 독려하면서 "우리 교회가 실행하여 나아가는 일에 대하여 조금도 이의와 의문이 없이 총력일체, 협동진행하기를 부탁한다"고 밝혔다.
그는 1941년에 감리교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감독의 명칭은 '통리자'가 되었고, 지방은 '교구', 감리사는 교구장으로, 목사는 '교사'로 바뀌었다. 또한 지금까지 조선감리회보에 '감독의 편지'로 올려졌던 글은 1941년 4월호부터 '공시'로 올려졌고, 어투도 공손한 '~합쇼체' 또는 '~해요체'에서 딱딱한 명령투로 바뀌었다. 이러한 공시의 첫번째 발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거 삼월 심일 경성정동예배당에서 임시특별총회를 개하고 우리 교회의 신교단 규칙을 결정하야 획기적 혁신을 단행하야 교계신체제의 제1보를 용감하게 답출하였고 시국에 대응하는 결의를 행하여 일의일심으로 신동아건설에 매진하여 종교보국의 실을 거하려는 결의를 굳게 하였다. 이 총회 기록을 본보에 게재하겠으므로 상술치 아니하고 신규칙 기구 운행상 중요한 교점을 공시하여 여러분의 주의를 청한다.
공시를 통해 밝힌 내용은 각 교구 연회의 일시를 '5, 6월 사이'로 제한하고 중앙에서 삼부연회를 개최해 지방에서 감당할 일을 이미 했기 때문에 교구연회를 생략할 것을 권고하는 것이었다. 이는 지방조직의 의결권을 대폭 축소함을 의미한다. 또 '교회역원'의 인사를 4월 중에 신규칙에 의해 개선하라고 지시했으며, 역원의 수를 감소시켜 교회 행정을 '단결민활'함을 꾀하며, 주관자의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또한 본처 전도사와 권사를 '권도사'로 통칭하도록 했고 교구 내에서 활동 중인 전도부인들에 대해서도 통리자에게 보고하여 임명을 다시 받도록 명시했다. 그밖에 교사(목사)의 은급과 임면권에 대해서도 통리사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통리자는 지금이 초비상시국임을 환기시키며, 모금을 위해 분발할 것과 이를 위해 신도단 결성이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했다.
이리하여 통리자는 교역자의 인사권을 모두 자신의 권한에 속한 것으로 만들었고, 각 교구마다 신도단을 조직해 중앙의 통제에 적극 협력할 수 있는 하부구조를 형성했다. 그리고 통리자 정춘수, 곧 '카타니 슌주(禾谷春洙)'는 이렇게 강화된 권한을 십분 활용해 일제에 자신의 충성심을 입증하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성도들에게 "지원병 입소에 다른 사람보다 앞서 지원하라"고 부추겼고, 국어(일본어) 강습소 개설을 통해 "내선일체의 원동력이 되는 국어보급 운동에 전교회가 협력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조선감리회보> 1941년 5월호에서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통보했다.
우리 교단이 혁신된 지 아직 일천하나 교사와 신도 제씨가 배전의 노력을 한 결과 많이 진보 정비된 줄 믿고 감사한다. 그러나 비상시국은 더욱 긴장의 도를 가하여 일소(日蘇) 중립조약에 성공한 아국(我國)의 외교는 남진정책이 적극화하여 동아공영권(東亞共榮圈)의 확립이 불원한 한편, 태평양의 파도는 불가측(不可測)의 정세이다. 이때에 우리는 가일층 우리의 복음전도전선의 민심을 확충하여 총후(銃後·후방지역/필자)의 민심을 통일하고 필승의 신념을 굳게 하여서 신앙보국에 진충(盡忠)하여야 한다. 교역자 신도를 물론하고 합심일체 되어 기독의 희생적 성애(聖愛)를 사회에 실현하여 교세의 진전(振展)을 도(圖)함이 급무이다.
1941년 10월 그는 최린을 단장으로 한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 결성에 가담했다. 이때 그는 오긍선, 양주삼, 정인과, 박인덕, 황신덕, 채필근, 박희도 등과 함께 평의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42년 2월에는 각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황군 위문 및 철물 헌납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교회의 철물, 철책은 물론 교회 종도 헌납하여 거룩한 전쟁 완수에 협력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변홍규를 앞세운 반(反) 정춘수 세력이 1942년 2차 총회에서 정춘수를 종교국장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1943년 10월에 열린 총회에서 그는 일제의 비호 아래 다시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으며, 곧 이은 조직 개편으로 감리교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되었다.
1944년 3월, 그는 일제의 군용 비행기, 이른바 애국기(愛國機) 헌납을 위해 전국 39개 예배당을 폐쇄 매각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직접 평안남도 진남포에 와서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신흥리교회와 대두리교회 예배당 폐쇄조치를 내렸다. 이에 젊은 목회자들이 거칠게 항의하다가 일본 경찰에 연행되었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폐쇄 조치를 끝내 감행했고 친일 정책에 협조하지 않는 목회자들을 제명시키거나 출교 혹은 휴·퇴직 처분을 통해 교회에서 강제로 쫓아냈다. 신석구는 훗날 자서전에서 그곳에서 그 모든 과정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밝혔다.
그 해 여름, 신석구는 경성부로 올라왔다. 당시 춘천중학교를 다니고 있던 그의 손자 신성균의 증언에 따르면, 신석구는 소고기 2근을 사들고 정릉에 있는 그의 집에 방문해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감독직만 수행하지, 일본에 협력하지는 말라."
그러나 그는 끝내 뿌리쳤다.
2.6. 해방 이후
8.15 해방 이후, 경기도 포천군(現 포천시)으로 이주했으며, 1949년 1월 16일 포천군 농업협동조합이 창설되자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감리교 내에서는 정춘수 일파에 반대하던 세력이 교회의 회복과 재건을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정춘수 등은 "일제의 압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친일 청산을 묵살하고 1946년 복흥파(復興派)를 조직해 친일청산을 부르짖는 이들을 침묵시키려 했다. 이에 1947년 2월 3일, 반대세력은 "감리교회 배신, 배족 교역자 행장기"를 발표해 정춘수, 갈홍기를 포함한 19명을 숙청 대상자로 지목했다. 그러나 다수 교권주의자들은 "회개하기만 하면 된다"며 이를 막았다.1948년 8월 16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상정되었고 9월 1일 통과되었다. 이후 1948년 1월 8일에 출범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거물급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는데 그 역시 반민특위의 수배를 받았다. 그는 3월 11일 오후 2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중앙사무국 제3조사부에 자수한 뒤 반민법 4조 11항에 의거, 종교문화단체에서 반민 피의자 42명 중 한 사람으로 체포되었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60일 간 수사를 받았으나, 같은 해 4월 28일에 검찰부회의의 결의에 따라 특별한 혐의 없이 불구속 기소로 풀려났다.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일제강점기에 관리로 일한 전력 때문에 같은 방에 수감되었던 조원환을 만났다. 정춘수는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출옥 이후 그로부터 건네받은 교부들의 신앙을 정독했다.
1950년 4월 감리교 중부연회는 그를 교회법에 따라 면직 처분했고, 끝내 감리교단으로부터 목사직을 파면당해 출교되었다. 이후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로 결심했다. 같은 해 11월 21일 오후 3시 명동성당에서 그는 아내 임눌리(林訥利)와 함께 각각 바오로와 데레사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렇게 가톨릭 신자가 된 이후, 그는 가톨릭계 학교, 병원, 수도원에 강연을 다니면서 가톨릭에 귀정케하여 주신 천주의 대은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한국감리교회는 그의 개종 소식에 충격에 휩싸였다. 많은 이들이 그를 '변절', '배은망덕'이라고 맹비난했고, 그를 찾아가 회유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한 사람이 "45년을 몸담아온 교회를 하루아침에 떠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물론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로 말하려면 자연 과거지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1 운동 때 33인의 하나로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나의 정신은 오늘까지 변치 않았다. 그러나 세태의 변함을 따라 전쟁이 점점 심해짐으로 일본 정부와 협력하는 척했고, 아홉 교회를 살리기 위해 한 교회를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세인들이 나를 친일파라 부르는 까닭이다. 나의 밑에서 나의 지도를 받고 지내던 사람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갖은 방법과 수단을 다해서 나를 중상하며 전부터 말해오던 숙청을 하려 하니 나는 숙청을 당하기 전에 먼저 내가 스스로 숙청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개신교를 깎아내리는 발언도 했다.
'하여튼 내가 50년이나 인도한 교회가 나에게 불만이다. 가령 예배 보는 것도 엄숙을 많이 주장하였으나 그대로 되지 않고 개신교를 무시한 구교인들이 열교라고 하는데 참말 교파의 갈래가 너무 많아 열교이다. 그러니 감리교회에서 떠난다고 장로교회나 성결교회로 갈 수 없고, 결국 천주교회에 들어가서 평신도의 자격으로 남은 여생을 조용히 지내려 한다. 이 사실을 국내 뿐 아니라 국외에도 알리어 정춘수는 감리교회와 아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리려 한다. 과거도 그랬거니와 이번 일도 내가 기도하는 중에 작정한 것이다.
그로부터 2달 뒤 6.25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서울특별시에서 은거하다가, 1951년 1.4 후퇴 때 아내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고, 현재 행정구역 기준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現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궁평리에 있던 족손(族孫) 정인환(鄭仁煥)의 집으로 피신했다. 거기서 더 남하하려고 했지만 정인환이 간곡히 말려 일단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던 1951년 가을 그는 중병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되었고, 그 해 10월 27일 정인환의 집에서 지병으로 인해 향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에 매장되었다.
3. 사후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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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거되는 정춘수의 동상. | |
1978년 3월 7일, 감리교신학대학교는 동문들의 성금으로 신학대를 졸업한 민족대표 7인(정춘수, 신석구, 신홍식, 최성모, 이필주, 오화영, 김창준) 중 월북한 김창준을 제외한 6인의 흉상을 건립했다. 그러나 1995년 감신대 학생들은 정춘수의 흉상을 훼손했고, 2007년 10월 감신대는 개교 12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7인의 부조물을 새로 건립하면서도 김창준과 정춘수에 대해서는 내용을 상세히 소개했다.
1996년 2월 8일, 충북 지역 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는 청주시 삼일공원에 서 있던 정춘수의 동상을 끌어내렸다. 그 후 한동안 좌대만 뎅그러니 서 있더니 얼마 뒤 좌대마저 철거되었다. 현재 그 자리에는 횃불 조형물이 새로 설치되었다. 또한 일제 말기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독립유공자 포상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2002년 발표 대한민국 국회가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같은 해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모두 수록되었다. 또한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005년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펴낸 자료집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에서 선정한 감리교 내 친일 부역자 명단 12명 중에도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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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9년 8월 26일 고등법원 예심계 판사 신문조서[2] 정춘수의 제적등본에는 1953년 1월 10일 사망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3] #. 동백공종(東伯公宗)-성재공파(醒齋公派) 18세 수(洙) 항렬.[4] 1829. 1. 3. ~ 1885. 6. 13.[5] 1840. 6. 29. ~ 1911. 11. 5.[6] 그나마 같은 민족대표 33인 출신의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최린은 해방 이후 자신의 행적에 대해 반성하는 태도라도 보였으나 정춘수는 끝까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변명도 모자라 신성모독까지 하는 행태를 보여주었기에 더 많은 비판을 받는다.[7] 아버지 정석준은 첫 부인 평해 황씨(平海 黃氏)와 두 번째 부인 고성 이씨 이태(李泰)의 딸 등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정춘수는 누구의 소생인지 알 수 없다.[8] 신채호의 조부인 신성우의 스승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