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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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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MG_7081.jpg
출생 1880년 5월 22일
조선 황해도 황주목 청수면 원정리[1]
(現 황해북도 황주군 청수면 원정리 73)
사망 1922년 2월 27일
소련 러시아 SFSR 연해주 수청(水淸)
(現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프리모리예 지방 파르티잔스크시)
본관 봉화 정씨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해산(海山)
종교 기독교
학력 경성관립사범학교(중퇴)
서훈 건국훈장 애국장, 건국포장 추서
파일:5854c79ca21ad4bd16ef56fc252f0eec.jpg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1차 이사회 기념사진.
앞줄 두 번째 인물이 정재관.

1. 개요2. 생애
2.1. 미주 시절2.2. 연해주 시절2.3. 러시아 내전 시기 행적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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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 생애

1880년(고종 17) 5월 22일 황해도 황주목 청원면 원정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다만 1922년 4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게재된 '정씨순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정씨는 원래 황해도 황주군 원정리 사람으로 성품이 강직관후하고 용감 인자한 이로 경성관립사범학교에 재학하였다가 20년 전 에 하와이에 이거하여 즉시 미국 본토에 입하야 신한민보 주필로 한인지방총회장을 겸하고 있을 때에 전한국 외부고문으로 있던 미 국인 스티븐슨을 장인환이 상황에서 총살하는 그 전야에 스티븐슨이 상항 여관에 있을 때 우선 권총의 징계를 하였다 합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정재관은 경성관립사범학교에 재학했다가 1903년경에 하와이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가 하와이로 이주한 까닭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그는 하와이에서 곧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한 뒤 안창호와 함께 공립협회를 창립했다.

2.1. 미주 시절

파일:IMG_7257.jpg
첫째 줄 왼쪽부터 송석준, 이강, 안창호, 임준기, 정재관

1903년경 안창호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1904년 안창호 등과 함께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했고, 1905년 11월 22일 기관지로 공립신보를 창간하여 발행인이 되어 편집 겸 발행을 담당했었다.

1907년 4월 한성에서 신민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미주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3월에 일본측이 추천한 대한제국 정부의 미국인 외교고문 스티븐스가 "일본의 한국 지배는 불가피하며 많은 한국인이 일본의 지배를 환영하고 문화도 발전하고 있다.” 등의 일본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발언이 신문에 보도되자 이내, 재미 한국인 커뮤니티에도 전해졌다. 감리교 전도사 양주삼[2]이 전해준 기사 내용은 이학현(李鶴鉉)[3]에 의해 곧 한국어로 번역되어 동포 사회를 격분시켰다. 이들은 한국 정부를 위해 일했다는 미국인 외교관이 대놓고 일본의 침략을 옹호했다는 사실에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다.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에서는 논의 끝에 대표단을 꾸려, 스티븐스를 직접 찾아가 망언을 취소하라고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1908년 3월 22일, 정재관, 최정익(崔正益), 문양목(文讓穆), 이학현은 스티븐스가 묵고 있던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Fairmont) 호텔을 찾았다.[4] 영어가 유창했던 이학현과 스티븐스 사이에서 대화가 오갔다. 이학현은 동년 1월에 있었던 13도 창의군의 의거에 대한 스티븐스의 의견을 물으며, 기사를 정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일본이 대한제국과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도록 돕겠다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왜 일본한테 화살을 돌리느냐는 주장을 고수했다. 계속 반복되는 스티븐스의 무례한 태도와 망언에 4인은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정재관이 먼저 스티븐스의 안면에 주먹을 날렸고, 주먹에 맞은 스티븐스는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며 쓰러졌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에 앉아 있던 일행 모두가 일어서 등나무 의자를 들어 스티븐스에게 휘둘렀다. 의자에 턱을 맞은 스티븐스는 이후 계속 4인의 공격을 피하다 이마가 찢어지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삐었다. 폭력사건 신고를 받은 경찰관 두 명이 사건현장에 출동하였으나, 스티븐스는 이들의 처벌을 원치 않아 호텔을 떠났다.. 하지만 다음날에 더 안 좋은 일이 있었으니 이후 정재관은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재판을 지원하는 활동을 벌이고, 재미 한인 단체의 통합에 나섰다.

1909년 2월에 신민회의 합법적 외곽 단체로서 공립협회를 확대개편해 재미주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고 총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기관지로 종래의 『공립신문』을 『신한민보(新韓民報)』로 바꾸었다.

2.2. 연해주 시절

1909년 4월에 미국을 순방하고 있던 이상설 일행과 함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으로 가서 신민회 블라디보스토크지회의 책임자를 맡이 이강 등과 함께 재로대한인국민회(在露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하여 각 지회를 설치하면서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동시에 블라디보스톡의 『대동공보(大東共報)』의 주필이 되어 언론운동을 전개하고, 『신한민보』의 블라디보스토크 통신원도 겸하였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이 대동공보사에서 수립될 때, 이에 참석하여 안중근하얼빈 의거를 지원하였다.

1911년 12월 19일 이상설, 최재형, 이종호, 김학만 등과 함께 교민단체로서 권업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2.3. 러시아 내전 시기 행적

정재관은 세계대전 발발 후 러시아 당국이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억압하는 것을 보고, 러시아 당국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러시아인으로 귀화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전쟁에 자원 입대하여 러시아군에서 복무했다. 그러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했다. 이에 1918년 7월 21일, 정재관은 항일운동가 39명과 함께 니콜리스크에 모여 향후의 행보를 논의했다. 그들은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병했을 때, 우리 민족은 귀화인, 비귀화인을 막론하고 일본군의 군사행동을 방해하기로 결의했다.

정재관은 무기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르쿠츠크 독일 첩보본부와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받아내려 했다. 또한 그는 1918년 10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행된 한인신보 사장으로 선출된 뒤 가옥 건축과 활자 구입을 목적으로 러시아 돈 2만여 원을 모집하여 가옥 건축에 착수하고, 각 지방에 의원을 파송하여 3만여 원의 예산을 모집하고자 했다.

1919년 3.1운동 직전에 만주와 연해주에 독립운동단체가 중심이 되어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할 때에는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김학만, 문창범, 박찬익, 박용만, 박은식, 신규식, 신채호, 유동열, 이광, 이대위,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상룡, 이승만, 이시영, 이세영, 조소앙을 포함한 39명의 동지들과 함께 이에 서명했다. 또한 1920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3.1 운동 1주년을 마징하여 대한국민의회, 노인동맹단 등 약 20개 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만세운동기념식이 거행되었을 때, 정재관은 여기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오늘의 독립선언기념회는 우리가 최후의 선전(宣戰)을 하는 날이다. 일반 동포들의 총과 칼을 가지고 일어나서 날마다 오늘부터 무기를 준비해서 상해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들어 행동하자.
1920년 3월, 정재관은 수청 지방에서 마적 토벌 활동을 벌이고 있던 김규면, 김경천 등과 합세했다. 그는 두 사람과 함께 마적 토벌을 전문으로 수행하는 무장단체를 조직하고 단체 명칭을 창해청년단이라고 정했다. 그는 이 단체에서 참모장을 맡았고, 김규면은 단장, 김경천은 총지휘관을 맡았다. 정재관 등은 수청 지역을 3지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지휘관, 참모, 병사들을 배치하고 은밀히 러시아 적군과 결탁하여 일본군과 맞설 시기를 노렸다.

이후 마적 토벌에 성공한 창해청년단은 군정과 민정을 단행했다. 김경천은 수청 일대를 중심으로 군정을 맡아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인 뿐만 아니라 중국인, 러시아인도 통제했다. 그들이 관할 구역을 벗어나 타 지역으로 이동하려 할 때는 반드시 자신이 발급한 증명서를 소지해야 했다. 한편 정재관은 동포들의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민정을 도맡았다. 그는 매년 매호 마다 10원씩 걷어들여 군자금으로 활용했고, 러시아식 교육을 전폐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했고, 둔전병제도도 실시했다.

1921년 7월, 이만에서는 한인무장유격부대들의 지휘관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참가한 정재관은 김경천, 채영 등과 함께 대한의용군사회를 조직하기로 했다. 1921년 8월, 그는 한창걸 등과 함께 한인혁명군을 조직하였고, 치타 공산당과 상호협약을 체결했다. 한인혁명군은 적군이 일본군과 교전할 때 기꺼이 도와줄 뿐만 아니라 백군과 싸울 때도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적군 역시 한인혁명군이 조선 국경을 넘어 공격할 때 도와주기로 하고 총기, 탄약, 군자금의 소요액 역시 보조하기로 했다.

또한 정재관은 소자하 지방에서 여러 동지들과 협의해 한인총회를 조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거주민의 생활 안정과 식산을 도모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군사와 교육을 후원하게 했으며, 전 지방을 12개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각 구에 지방회를 설립하고, 각 구에 소학교를 한 개씩 설치하여 만 8세 이상의 남녀는 반드시 학교에 다니게 했다. 일제는 이러한 정재관의 활동에 강한 경계심을 품었다. 1921년 일제 정보기록인 <불령단관계잡건 제시베리아부 1921년 12월 10일 주요 불령선인에 대한 조서보고의 건>에는 정재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한인신보사 사장 역임, 배일의 거두임
그러나 이렇듯 왕성하게 활동하던 정재관은 1922년 2월 27일 돌연 병에 걸려 러시아에서 운명했다.

3. 여담

서울대 이태진 교수가 고종의 비밀정보기관인 제국익문사의 해외통신원으로 추정하기도 했다.경향신문

2015년 그의 공적을 기려 국립서울현충원에 위패가 세워졌다.
[1] 평양이라는 설도 있다.[2] 이 사람은 훗날 친일파로 전향한다. 한국전쟁 이후로 행적이 묘연한데 아마 납북된 것으로 보인다.[3] 영어가 유창했다고 한다.[4] 이 호텔은 2024년 현재까지 그대로 영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