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05 20:44:57

정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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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애국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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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호 장군선 장규섭 장규현 장규황 장금송
장기덕 장기석 장기영(1890) 장기영(1903) 장낙수 장남수 장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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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립유공자 정재관 선생.jpg
출생 1880년 5월 22일
조선 황해도 황주목 청수면 원정리[1]
(現 황해북도 황주군 청수면 원정리 73)
사망 1922년 2월 27일 (향년 41세)
러시아 SFSR 프리모리예주 수청(水淸)
(現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프리모리예 지방 파르티잔스크시)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본관 봉화 정씨
해산(海山)[2]
종교 개신교 (감리회)[3]
학력 한성사범학교[A] (졸업)
서훈 대통령 표창 추서 (1963)
건국포장 추서 (1980)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990)
파일:국민회제1회이사회기념사진.jpg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1차 이사회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정재관.

1. 개요2. 생애
2.1. 미주 시절2.2. 연해주 시절2.3. 러시아 내전 시기 행적
3. 관련 기록4. 여담5. 참고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공립협회 3대 총회장, 권업회 부회장•총무, 창해소년단 참모장.

2. 생애

1880년(고종 17) 5월 22일 황해도 황주목 청원면 원정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다만 1922년 4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게재된 '정씨순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 있다.
정씨는 원래 황해도 황주군 원정리 사람으로 성품이 강직관후하고 용감인자한 이로 경성관립사범학교[5]에 재학하였다가 20년 전에 하와이에 이거하여 즉시 미국본토에 입하야 신한민보 주필로 한인지방총회장을 겸하고 있을 때에 전한국 외부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스티븐슨을 장인환이 상황에서 총살하는 그 전야에 스티븐슨이 상항 여관에서 도착하여 우선 권총의 징계를 하였다 합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정재관은 경성관립사범학교(한성사범학교)[A]에 재학했다가 1903년에 하와이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가 하와이로 이주한 까닭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2.1. 미주 시절

파일:공립협회.jpg
앞줄 왼쪽부터 송석준, 이강, 안창호.
뒷줄 왼쪽부터 임준기, 정재관.

1903년 11월 2일 하와이에 도착한 정재관은 곧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여 유학하였다고 전해진다.[7] 1905년 4월 안창호, 송석준, 이강, 임준기, 임치정, 방화중(邦化重)과 함께 공립협회(共立協會)[8]를 창립했고 1905년 11월 22일 기관지로 공립신보를 창간하여 발행인이 되어 편집 겸 발행을 담당했었다.

1907년 4월 한성에서 신민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미주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3월에 일본측이 추천한 대한제국 정부의 미국인 외교고문 스티븐스가 "일본의 한국 지배는 불가피하며 많은 한국인이 일본의 지배를 환영하고 문화도 발전하고 있다.” 등의 일본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발언이 신문에 보도되자 이내, 재미 한국인 커뮤니티에도 전해졌다. 감리교 전도사 양주삼[9]이 전해준 기사 내용은 영어가 유창했던 이학현(李鶴鉉)에 의해 곧 한국어로 번역되어 동포 사회를 격분시켰다. 이들은 한국 정부를 위해 일했다는 미국인 외교관이 대놓고 일본의 침략을 옹호했다는 사실에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다.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에서는 논의 끝에 대표단을 꾸려, 스티븐스를 직접 찾아가 망언을 취소하라고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1908년 3월 22일, 정재관, 최정익,[10] 문양목, 이학현은 스티븐스가 묵고 있던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Fairmont) 호텔[11]을 찾았다. 영어가 유창했던 이학현과 스티븐스 사이에서 대화가 오갔다. 이학현은 같은 해 1월에 있었던 13도 창의군의 의거에 대한 스티븐스의 의견을 물으며, 기사를 정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일본이 대한제국과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도록 돕겠다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왜 일본한테 화살을 돌리느냐는 주장을 고수했다. 계속 반복되는 스티븐스의 무례한 태도와 망언에 4인은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정재관이 먼저 스티븐스의 안면에 주먹을 날렸고, 주먹에 맞은 스티븐스는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며 쓰러졌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에 앉아 있던 일행 모두가 일어서 등나무 의자를 들어 스티븐스에게 휘둘렀다. 의자에 턱을 맞은 스티븐스는 이후 계속 4인의 공격을 피하다 이마가 찢어지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삐었다. 폭력사건 신고를 받은 경찰관 두 명이 사건현장에 출동하였으나, 스티븐스는 이들의 처벌을 원치 않아 호텔을 떠났다. 하지만 다음날에 더 안 좋은 일이 있었으니 스티븐스 저격사건으로 스티븐스가 처단된 뒤 정재관은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재판을 지원하는 활동을 벌이고, 재미 한인 단체의 통합에 나섰다.

2.2. 연해주 시절

1909년 4월에 미국을 순방하고 있던 이상설 일행과 함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으로 가서 신민회 블라디보스토크지회의 책임자를 맡이 이강 등과 함께 재로대한인국민회(在露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하여 각 지회를 설치하면서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동시에 블라디보스톡의 『대동공보(大東共報)』의 주필이 되어 언론운동을 전개하고, 『신한민보』의 블라디보스토크 통신원도 겸하였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이 대동공보사에서 수립될 때, 이에 참석하여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지원하였다.

1911년 12월 19일, 이상설, 최재형, 이종호, 김학만 등과 함께 교민단체로서 권업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3년, 정재관은 정동예배당에서 개최된 미 감리회 제6회 조선연회에서 일본과 한국의 선교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던 해리스의 주례로 신홍식, 변학용, 한창섭, 방족신, 이진형 등과 함께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2.3. 러시아 내전 시기 행적

정재관은 세계 대전 발발 후 러시아 당국이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억압하는 것을 보고, 러시아 당국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러시아인으로 귀화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전쟁에 자원 입대하여 러시아군에서 복무했다. 그러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했다. 이에 1918년 7월 21일, 정재관은 항일운동가 39명과 함께 니콜리스크에 모여 향후의 행보를 논의했다. 그들은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병했을 때, 우리 민족은 귀화인, 비귀화인을 막론하고 일본군의 군사행동을 방해하기로 결의했다.

정재관은 무기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르쿠츠크 독일 첩보본부와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받아내려 했다. 또한 그는 1918년 10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행된 한인신보 사장으로 선출된 뒤 가옥 건축과 활자 구입을 목적으로 러시아 돈 2만여 원을 모집하여 가옥 건축에 착수하고, 각 지방에 의원을 파송하여 3만여 원의 예산을 모집하고자 했다.

1919년 3.1 운동 직전에 만주연해주에 독립운동단체가 중심이 되어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할 때에는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김학만, 문창범, 박찬익, 박용만, 박은식, 신규식, 신채호, 유동열, 이광, 이대위,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상룡, 이승만, 이시영, 이세영, 안정근, 안창호, 조소앙, 자신을 포함한 39명의 동지들과 함께 이에 서명했다. 또한 1920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3.1 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대한국민의회, 노인동맹단 등 약 20개 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만세운동기념식이 거행되었을 때, 정재관은 여기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오늘의 독립선언기념회는 우리가 최후의 선전(宣戰)을 하는 날이다. 일반 동포들이 총과 칼을 가지고 일어나서 날마다 오늘부터 무기를 준비해서 상해임시정부의 명령을 받들어 행동하자.

1920년 3월, 정재관은 수청 지방에서 마적 토벌 활동을 벌이고 있던 김규면, 김경천 등과 합세했다. 그는 두 사람과 함께 마적 토벌을 전문으로 수행하는 무장단체를 조직하고 단체 명칭을 창해소년단[12]이라고 정했다. 그는 이 단체에서 참모장을 맡았고, 김규면은 명예단장, 김경천은 사령장을 맡았다. 정재관 등은 수청 지역을 3지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지휘관, 참모, 병사들을 배치하고 은밀히 러시아 적군과 결탁하여 일본군과 맞설 시기를 노렸다.

이후 마적 토벌에 성공한 창해청년단은 군정과 민정을 단행했다. 김경천은 수청 일대를 중심으로 군정을 맡아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인 뿐만 아니라 중국인, 러시아인도 통제했다. 그들이 관할 구역을 벗어나 타 지역으로 이동하려 할 때는 반드시 자신이 발급한 증명서를 소지해야 했다. 한편 정재관은 동포들의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민정을 도맡았다. 그는 매년 매호 마다 10원씩 걷어들여 군자금으로 활용했고, 러시아식 교육을 전폐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했고, 둔전병제도도 실시했다.

1921년 7월, 이만에서는 한인무장유격부대들의 지휘관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참가한 정재관은 김경천, 채영 등과 함께 대한의용군사회를 조직하기로 했다. 1921년 8월, 그는 한창걸 등과 함께 한인혁명군을 조직하였고, 치타 공산당과 상호협약을 체결했다. 한인혁명군은 적군이 일본군과 교전할 때 기꺼이 도와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내전과 싸울 때도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적군 역시 한인혁명군이 조선 국경을 넘어 공격할 때 도와주기로 하고 총기, 탄약, 군자금의 소요액 역시 보조하기로 했다.

또한 정재관은 소자하 지방에서 여러 동지들과 협의해 한인총회를 조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거주민의 생활 안정과 식산을 도모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군사와 교육을 후원하게 했으며, 전 지방을 12개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각 구에 지방회를 설립하고, 각 구에 소학교를 한 개씩 설치하여 만 8세 이상의 남녀는 반드시 학교에 다니게 했다. 일제는 이러한 정재관의 활동에 강한 경계심을 품었다. 1921년 일제 정보기록인 『불령단관계잡건 제시베리아부 1921년 12월 10일 주요 불령선인에 대한 조서보고의 건』에는 정재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한인신보사 사장 역임, 배일의 거두임

그러나 이렇듯 왕성하게 활동하던 정재관은 돌연 병에 걸려 1922년 2월 27일 이국땅인 러시아 수청(水淸)에서 운명했다. 정재관은 병으로 죽어가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을 화장하여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13]

3. 관련 기록

위임장

위는 아령 원동각처에 주지한 우리 동포를 규합하여 단체를 고결하며
본회의 종지를 창명하여 목적을 관철케 함이 현시의 급무인바
본 회원 이당은 덕망이 귀중하고 경륜이 탁월하여 나라를 근심하고 동포를 사랑하는 열심과 성덕이 가히 우리 회의 표준을 지을지라.
그럼으로 원동방면의 일체 회무를 진권행사케 하기 위하여 본회의 대표원을 추정하노니 왕재 욱재하여 중망을 극부할지어다.
융희 3년 5월 1일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최정익
국민회 하와이지방 총회장 정원명
『신한민보』 1909년 6월 2일자 국민회보
鄭載寬 38세, 현주소:노령 소성(현재 빠르티잔스크) 원적: 京城
혹은 鄭在寬이라고 하며, 러시아귀화인
이갑파의 영수, 일찍이 하얼빈에 있을 때 공립회라는 배일단체를 설립, 블라디보스톡 대동공보 객원, 블라디보스톡 성명회문서 제술원, 권업회 교육부장, 同 의사부 부의장, 동 부회장, 동 총무였고, 고안중근유족구조를 위해 설립된 공동회의 사무를 맡았을 때 會金 3,4천원을 사사로이 소비한 후 대한인정교보 기자로 있은 후 자바이칼주에 가서 항상 이갑, 안창호 등과 함께 "사회파"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한국 독립쟁취를 위한 활동을 전개함. 1914년 11월 그의 반대파에 의해 일본 첩자로 고발당해 <블라고베센스크> 에 있을 때에 러시아 경찰에 끌려갔으나, 2주후에 석방됨. 같은 해 12월 치따에서 격렬한 발언을 하고 한인들을 선동하고 국권회복의 기초를 마련한다는 미명하에 기부금을 강제로 모으고, 치안방해의 혐의 등으로 고발되어 이강 등과 함께 러시아 헌병에 체포되었으나, 1915년 1월 22일 석방됨.
『재불령단관계잡건 배일선인명부 제1호, 1915년, 「정재관」』
다른 편으로 소작인 고려농촌들에는 마적(홍후적)들을 파견하여 농민촌락들을 략탈, 파멸케 하였다. 1920년 하반기부터 1921년 상반기까지는 연해주에서 고려인빨지산부대는 일본군의 침입과 마적부대의 활동을 방지하는 전투에서 번번히 승리하였다. 촌락을 불지르고 략탈하던 코산파마적 7백여명은 수청지방 우지미, 허포수동, 석탄광에서 창해소년단부대의 토벌에 소탕되었다. 허포수동 농촌에 출병하였던 일본군대는 마적부대가 패주하는 바름에 다른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창해소년단부대 사령장은 김경천, 참모장은 정재관, 명예단장은 김규면이었다.
김규면, 『김규면비망록』 266쪽.
황해도 재령출생이다. 일즉이 북미주 산푸란쓰크 류학하였다. 조선망국정부 고문관 미국인 수지분이 옥란정거장에서 전명운이와 육박전하는 순간에 장인환총살한 사건에 직접 선도자로 미주에서 망명하여 원동연해주에 와서 동시의 권업회사업과 해조신문사업에 한형권, 리종호, 신채호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의병대장 김두성의 부하 안중근중장이 하얼빈정거장에서 이등박문총살한 사건에 직접 참모자이고 그 후는 "신민단"조직 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신민단" 유격대장 강우규경성 남대문정거장에서 재등총독을 포격한 사건에 직접 조직자이다. 강우규 기태 대원들은 석왕사에서 맡은 책임들을 준비케 하고 원산에 최자남이와 경흥에 김병하는 운반 련락원으로 조직하였다. 그 다음부터는 "한인사회당"군사부위원으로 수청일대의 빨치산 고려민 부대, 조직, 지도, 사업에 마지막까지 분투하다가 풍한서습에 병으로 죽으면서 신체를 화장하여 달라고 유언하였다. 그래 빨지산 일동은 정재관동무를 통나무가리 불속에 장례하였다. 별호는 해산(海山) 그리고 그곳을 정재관골이라고 기념하였다. 그의 자식들은 그의 형이 와서 다리고 재령고향으로 나갔다.
김규면, 『김규면비망록』

4. 여담

  •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5. 참고

  • 박환, 『鄭在寬 : 미주의 공립협회 총회장에서 러시아의 혁명가로』


[1] 평양이라는 설도 있지만 정재관 의사의 출생지가 황주목 청수면 원정리 출신이라는 것은 1922년 4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확인되는 바이고, 2003년 8월 23일 정재관 의사의 둘째 며느리인 김복희 여사와의 면담에서 확인된 것이므로 아닐 확률이 높다.[2]독립신문』 1923년 5월 2일자.[3] 1913년 감리회 제6회 조선연회에서 안수받았다.[A] 1895년 5월 1일 만들어진 교사 양성 기관으로 1906년까지 총 7회에 거쳐 195명의 졸업자를 배출했다. 1906년 이후 한국통감부에 의해 관립한성사범학교로 개편된 후 유지되다가, 1911년 10월 「조선 교육령」에 따라 폐지되었다.[5] 1895년 세워진 한성사범학교를 이르는 말인 것 같다.[A] [7] 하와이 세관의 기록에 정재관은 당시 24살이며, 결혼을 했고, 한국에서의 마지막 거주지는 황주, 타고온 배는 Korea호, 도착 일자는 1903년 11월 2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8] 공립협회는 당시 미국 본토에서 존립하던 한인단체들인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공제회(共濟會), 동맹신흥회(同盟新興會) 중에서 미주 한인 사회를 선도한 단체였다. 1907년에 이르러서는 지방회 7곳을 둔 북미 최대의 한인자치단체로 발전했다.[9] 훗날 친일파로 전향했으며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10] 후일 대한인국민회 초대 총회장을 역임한다.[11] 이 호텔은 2025년 현재까지 그대로 영업하고 있다.[12] 일명 창해소년단[13] 김규면, 『김규면비망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