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0:15:34

서병철

1. 서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서병철2. 대구시 출신 독립운동가, 서병철

1. 서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서병철

성명 서병철(徐丙轍)
이명 서병철(徐丙喆, 徐炳徹)
생몰 1893년 7월 6일 ~ 1977년 2월 26일
출생지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읍 억대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서병철은 1893년 7월 6일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읍 억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8년 4월경 대한독립단으로서 군자금을 모금해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송금하던 이종성(李鍾聲)의 소개로 대한독립단에 가담했다. 이후 서산군 일대의 유지들에게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파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했다. 그해 8월 서산군과 안면도를 근거지로 삼고 안면면, 태안면, 부석면, 남면 등 4개면의 유지 4명을 포섭해 대한독립단 서산지단, 일명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했으며, 단장엔 안면도 승언리에 거주하는 사립 광영학교장 이종헌(李鍾憲)을 추대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서산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으며, 그해 4월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단원 권인채(權忍采)와 서울에서 만나 활동 계획을 협의한 뒤, 8월 1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원으로 가입했다. 이후 그해 9월에 서산지단원 임정호(林楨鎬)를 권인채에 소개해 임시정부에 가도록 주선했으며, 사비 120원을 여비로 지급했다. 1920년 초에는 서산군 인지면 아당리의 부호 박준용(朴準用)의 집에 들러 독립운동자금 1,000원을 요구, 현금 200원을 수령하여 영수증을 교부하고 나머지는 후일 송금할 것을 약속받았다.

1920년 5월, 서병철은 서울 인의동에 있는 전기봉(全基奉)의 자택에서 김상옥, 김동부(金東浮) 등과 함께 암살단을 조직해 친일 부역배들을 처단하고 군자금을 수합해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를 지원할 것을 계획했다. 그해 8월 미국 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국내에 잠입한 한훈 등과 함께 미 의원단이 한국에 방문한 때에 맞춰 총독 등 일제 고관을 처단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알리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탄로나고 말았고, 결국 그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921년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엔 서울에서 조용히 지냈으며, 1977년 2월 2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서병철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또한 그의 유해는 2014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2. 대구시 출신 독립운동가, 서병철

성명 서병철(徐丙哲)
생몰 1892년 8월 4일 ~ 1970년 2월 5일
출생지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 남산동
사망지 대구광역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서병철은 1892년 8월 4일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경 북만주로 망명했다가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위해 귀국한 손병선을 대구에서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파원 허영원(許永元)과 함께 경상북도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했다. 이들은 영남지방의 부호인 박소용(朴韶鏞)에게 군자금 6천원의 헌납을 요구하는 등 4차례에 걸쳐 부호들에게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고, 이후에 상하이로 탈출을 꾀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1921년 5월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및 공갈죄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엔 대구에서 조용히 살았으며, 1970년 2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서병철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또한 그의 유해는 1991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