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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훈(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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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훈.jpg
출생 1890년 2월 27일[1]
충청도 홍주목 상전면 산소리
(현 충청남도 청양군 남양면 흥산리 궁구골 424번지)[2]
사망 1950년 9월 10일[3] (향년 60세)
충청남도 논산시
본관 청주 한씨[4]
본명 한우석(韓禹錫)
이명 한만우(韓萬宇), 한동열(韓東烈)
조주사(曺主事), 조선달(曺先達)
성초(聖初), 훈(焄)
송촌(松村)
가족 배우자 유응두
장손자 한상회[5]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87호
상훈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광복단2.3. 광복단 결사대2.4. 광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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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의병장.

2. 생애

2.1. 초년기

1890년 2월 27일 충청도 홍주목 상전면 산소리(현 충청남도 청양군 남양면 흥산리 궁구골 424번지)에서 아버지 한성교(韓省敎, 1854 ~ ?.12.29.)[6]와 어머니 창녕 성씨 성자문(? ~ 1892.8.10.)[7] 사이에서 2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향은 정산군 적면 낙지리[8]이다.[9] 이후 아버지가 일찍 사망해 작은아버지 한호교(韓互敎, 1858.11.16. ~ 1892.6.28.)에게 입양되었다. 그는 을사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 넘어간 것에 반발하여 봉기한 홍주 의병에 외삼촌이 참가했다가 전사한 것을 계기로 십대의 나이에 친형인 한태석과 함께 홍주 의병에 가담했다.

한훈은 홍주의병장 이용규(李容珪) 휘하에 소속되어 부여군, 노성군, 연산군, 정산군, 공주군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런 와중에 부여군에서 유응두를 부인으로 삼았다. 그러나 홍주의병이 끝내 일본군에게 진압되자, 그는 연산군 식한면 내기동[10]에 은거하면서[11]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나철, 오기호 등이 결성한 '오적 암살단'에 가담하려 했다. 그러나 나철 등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직산군수가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자 처단한 뒤 만주로 망명했다.

2.2. 광복단

만주로 망명한 한훈은 그곳에서 채기중과 만나 의기투합했고, 1913년에 풍기에서 그와 함께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해 민족투쟁에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을 끌어모았다. 광복단은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일본인 광산과 부호들을 습격해 돈을 끌어모으려 했다. 한훈은 이에 필요한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직접 권총을 구입한 뒤 조선으로 잠입했다. 이후 그는 전라도로 내려가 홍주의병장 출신 곽한일, 김재순 등을 포섭하고, 그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침략의 원흉을 처단하기로 약속하고 군자금 수합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곧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자, 그는 다시 만주로 망명했다. 훗날 1945년 해방을 맞이했을 때, 그는 <대한광복단>을 기고해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단기 246년(서기 1913년) 만주 길림에서 권총 2정을 반입하여 풍기의 채기중과 유장렬, 김상옥 등과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하고, 무기구입차 광복단 대표로 만주 훈춘으로 가 한창섭에게 권총 3정을 청해서 얻고, 귀국하여 곽한일·김재순 등과 밀의, 고종황제의 밀권(密權)으로 도일하여 조선침략의 원흉을 제거코자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재차 봉천으로 망명하였다.
1915년 7월, 대구지역의 조선국권회복단과 풍기의 광복단이 연합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했다. 한훈은 이 단체에 가담하여 전라도에서 활동하면서 군자금 모금 및 일제에 영합한 부역배를 처단했다. 1916년, 그는 보성의 양재성(梁在誠)과 별교의 서도현(徐道賢)을 처단했으며, 서도현의 당질인 서인선을 납치하여 75일 동안 감금해 1만원의 자금을 몸값으로 지불받았으며, 전북 순창의 오성 헌병분대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광복회가 일제에게 발각되어 단원들이 대거 체포되어 처형되면서 대한광복단 조직이 거의 파괴되자, 그는 가까스로 빠져나와 만주로 도주했다.
이상은 한훈 본인이 8.15 광복 후 언론에 밝힌 독립 활동 이력서에 기재된 내용이다. 하지만 1920년 9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개제된 일제 경찰 수사보고에 따르면, 한훈은 배일, 독립사상을 품은 채 블라디보스토크, 만주, 관동주 등지를 방황했고, 우연히 모 사업에 착수해 1만여 원의 이익을 얻고는 조선에 돌아와 전남 용담군에서 도술을 배우다 대둔산에 들어가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어가며 4년 동안 도를 닦았다고 한다. 한훈이 광복단에서 활약했다는 것과 상반되는 내용인데,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2.3. 광복단 결사대

만주로 망명한 그는 한동안 숨어 지내다가 3.1 운동을 계기로 다시 국내로 잠입했다. 그는 대한광복회를 재건할 방안을 모색하다가 과거에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했던 우재룡, 권영만 등과 접촉한 뒤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기로 하고 광복단 대표로서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난 그는 서울을 중심으로 광복단 결사대를 조직하려는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임시정부로부터 지원 약속을 받고 귀국한 그는 광복단 결사대를 조직했다.
광복단 결사대는 모병과 암살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상하이와 만주에 요원을 보내 군사훈련을 받게 하고, 그 중에서 암살단원을 선발하여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 그리고 부역배와 조선인 형사를 처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한훈은 남만주 안동으로 가서 임시정부 파견 요원들로부터 다량의 무기와 탄약을 건네받고 압록강을 건너 국내에 반입시켰다.
그 후 한훈은 전라도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했다. 한편 서울에서 김상옥을 중심으로 암살단이 조직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한훈은 대전에서 김상옥과 회합을 갖고 두 단체가 연합하여 행동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암살단이 무기와 탄약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자신이 반입해놓은 무기와 탄약을 기꺼이 공유해줬다. 이 일로 한훈과 김상옥은 친밀한 관계가 되었고, 김상옥은 한훈의 딸인 한정수와 결혼했다.
광복단결사대와 암살단은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내한했을 때 그들을 환영하러 나오는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및 정무 총감 등을 처단하기로 했다. 그들은 미국의원단이 남대문역에 도착했을 때 암살단취지서 및 통고문·경고문을 환영군중들에게 살포하고 자동차를 이용한 사격전을 계획했다. 이에 자동차에 폭탄을 싣고 가서 총독 이하 일본 관리들을 처단하는 한편, 총격전이 벌어지는 동안 관공서와 일본 경찰서 등을 폭파하는 세부계획을 수립했다. 한편 그는 조선인 형사들을 대상으로 한 경고문을 작성했다.
군등(君等)은 조선의 혈통을 받고 배달민족이란 긍지 아래 살아 왔거늘 어찌하여 부모의 육신을 깎고 형제의 피를 빠는가! 하늘이 뜻이 있다면 어찌 천벌이 없을 것이며 신(神)이 뜻이 있다면 어찌 재앙이 없을 소냐! 아 금수(禽獸)만도 못한 어리석은 무리여 그러고도 오히려 생명을 보존코자 하니 개탄치 않을 수 없다. 한번 기회가 오면 누가 너희들의 일편고기를 회치고 싶지 않을 자 있으며, 한 줌의 소금을 가지고 기다리지 않는 자 있으랴! 그 후에 남을 너희들의 자손은 또한 어이 하려나?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보내려는가 또 어느 지옥의 한 모퉁이에 방황케 하려는가?

오늘날 저 철창에서 신음하는 형제자매들은 모두 누구 때문인가? 그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義士)들이거늘 군들은 이 의혼(義魂)을 죽이는 마귀에 그치려는가? 더 말하지 않겠노라. 부모를 모시고 처자를 거느린 자로서 너희들이 차마 할 수 있는 행동인가 깊이 생각하여 보라. 그러고도 오히려 너희들이 하는 일이 옳다고 하면 옳다고 믿는 대로 행하여 보라.
그러나 미국 의원단이 도착하기 하루 전 일제 경찰의 예비검속이 이뤄지면서 김상옥의 집이 먼저 수색을 당했다. 김상옥은 일본 경찰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 탈출했지만 한훈은 체포되었다. 이어 광복단 결사대원과 암살단원들이 모두 체포되면서 거사 계획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후 한훈은 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대한광복회 요원으로 서도현 등을 처단한 것이 추가로 확인되면서 5년 형이 추가되었다. 그는 옥고를 치르는 와중에도 투지를 꺾지 않다가 1929년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출옥한 그는 가족의 보살핌으로 건강을 회복한 뒤 충남 강경에서 신문사 지국장으로 일하면서 그해 11월부터 다시 군자금 모금에 나섰다. 그러나 또 경찰에게 발각되었고 1930년 10년 형을 선고받고 1939년에야 출옥했다. 부인 유응두 역시 일제 경찰의 고문을 받아야 했고, 하도 뺨을 얻어맞아서 귀가 멀어버렸다고 한다.
1939년에 출소한 한훈은 충남 계룡산 남측 자락에 위치한 신도안에 집을 짓고 그곳에 은거했다. 그는 학병 거부자와 탈출병들을 숨겨주며 독립운동을 재개할 방안을 모색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2.4. 광복 이후

한훈은 광복 후 상경하여 우재룡 등과 함께 광복단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재건 광복단 단장으로 취임한 그는 임시정부의 이념에 따라 자주적 독립국가의 수립을 추진하면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모든 단체가 통합될 것을 주장했다. 재건 광복단은 <광복단재흥의 동기>에서 그들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조국의 주권을 광복하자.
2. 건전한 자주독립국가의 완성 및 발전을 도모하자.
3. 세계안전과 평화를 도모하자.
광복단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광복 정신의 철저화 운동, 국민조직의 단결화 운동, 농촌사업의 건전화 운동, 경제생활을 자력화 운동, 민족문화의 창조화 운동, 세계 인류의 평화화 운동 등을 실천 강령으로 채택했다. 또한 광복단은 광복의숙(光復義塾) 설립, 실험농장(實驗農場) 설치, 동서문화연구회 조직 등을 계획하면서 민족교육과 산업의 부흥을 이룩하고자 했으며, 내외사정조사회(內外事情調査會)를 조직하여 민족문화를 창조적으로 계발, 계승하려고 했다. 그러나 재건 광복단은 1946년 3월에 예산 부족 등의 사유로 해소되어 더이상 활동하지 못했다.
1950년 6.25 전쟁 후, 한훈은 논산에서 북한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논산에 억류되었다가 그해 9월 10일 북한군이 논산을 떠나면서 우익 인사들을 대거 처형할 때 함께 피살되었다. 그의 유해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한훈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69년 10월 20일 배우자 유응두와 함께 위패가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봉안되었다.


[1] 청주한씨제7교대동족보 26권 1989쪽에는 3월 27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3] 청주한씨제7교대동족보 26권 1989쪽에는 8월 15일에 사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4] 공안공파(恭安公派) 30세 석(錫) 항렬.[5] #[6] 자는 여진(汝鎭).[7] 성신호(成薪鎬)의 딸이다.[8]청양군 장평면 낙지리[9] #[10]계룡시 신도안면 정장리 183번지[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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