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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기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채기중
蔡基中[1]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
파일:채기중.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극오(極五)
소몽(素夢, 小夢)
본관 인천 채씨[2]
출생 1873년 7월 7일[3]
경상도 함창현 수하면 소암리
(現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4] 290-1번지[5])
사망 1921년 8월 12일[6] (향년 48세)
서대문형무소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37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3.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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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이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비밀결사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채기중은 1873년 7월 7일 경상도 함창현 수하면 소암리(현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 290-1번지)에서 아버지 채헌락(蔡獻洛, 1832 ~ 1873)과 어머니 곡부 공씨[7] 사이의 5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함창현에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어 여러가지 곤욕을 겪어 1906년 인근의 풍기군 동부면 동문동(現 영주시 풍기읍 동부리)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이후 한학을 배워 76편의 한시를 짓는 등 문학적 소양이 있었고 억울한 일을 그냥 바라보지 못하는 의협심을 갖고 있었다.

이후 그는 풍기군이 이주민들이 많이 살아 비밀결사를 통한 독립운동을 하기 좋은 지역인 것으로 판단하고, 1913년 강순필(姜順必)·유창순(庾昌淳)·유장렬(柳漳烈)·한훈(韓焄)·장두환(張斗煥)·김병렬(金炳烈)·정만교(鄭萬敎)·김상오(金相五)·정운홍(鄭雲洪)·정진화(鄭鎭華)·황상규(黃相圭)·이수택 등과 함께 비밀결사 풍기광복단을 조직했다. 이때 의열단의 전설 김상옥을 만나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풍기광복단의 첫 번째 목표는 군자금 확보였다.

채기중은 우선적으로 몇몇 일본인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을 확보하기로 목표를 정해 한동안 군자금 확보에 진력했다. 그리고 1915년 대구부 달성정(現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달성공원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의 박상진 단장과 만나 박상진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과 자신이 조직한 풍기광복단을 통합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하는 데에 일조했고, 이때 채기중은 경상북도 지부장에 취임하고 군자금 조달을 담당했다. 대한광복회는 앞선 조직과 마찬가지로 군자금을 모아 만주의 독립군들에게 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여러 회원들 중에서도 특히 과거 의병활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주도하에 친일 부호를 처단해 군자금을 확보하거나 별도로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에 힘썼다.

한편, 대한광복회에서 군자금 조달을 담당하던 그는 처음에는 직접적으로 지방 부호들을 찾아가 군자금을 확보하려 했는데, 이 때문에 덜미가 잡혀 체포되었다가 1916년 7월 20일 소위 보안법 위반·살인·공갈·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무죄선고받고 석방되기도 했다. 이후에는 주로 대부호들에게 의연금을 납부하라는 문서를 발송해 기부금을 모으는 형식으로 군자금을 확보하려 했다. 이때 일부 부호들이 문서를 받고도 자금 지원을 거절하자, 채기중은 이들을 친일파로 규정하고 처단키로 결정했다. 이에 회원들을 파견해 1917년 11월 12일 광복회원 유창순·임봉주(林鳳柱)·강순필 등이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과거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낸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 1852 ~ 1917. 11. 12)[8]을 처단하고, 이어 1918년 1월 24일 충청남도 아산군에서는 임봉주와 김경태(金敬泰)가 김한종·장두환의 지시로 도고면장을 지낸 박용하(朴容夏)에게 「사형선고문」을 읽게 한 뒤 총살했다.

그러나 친일 부호를 처단하는 과정에서 조직의 실체가 탄로났고, 곧 채기중도 전라남도 목포부에서 체포되어 경상북도 제3부에 이송되었다. 채기중은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해 광복회원 김한종·김경태·임봉주·강순필과 함께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의 공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공갈·방화·살인·강도·강도살인미수·주거침입·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횡령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여 9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 중 채기중 본인에 관한 부분이 취소되었으나 사형 판결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에 상고했으나 1920년 3월 1일 고등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판결이 확정되고 말았다.

결국 1921년 8월 1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임봉주·김경태와 함께 사형이 집행되어 현장에서 순국했다. 이 당시 대한광복회의 임원들이 많이 체포되어 조직이 흔들렸지만, 다행히 다른 조직으로 활동을 이어나가는 데에는 성공했다.

사후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73년 10월 31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1976년 9월에는 인천 채씨 종중에서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 1317번지 검단동 토성 내에 '의사 소몽 채기중 순국기념비(義士素夢蔡其中殉國記念碑)'를 건립했다. 2005년 7월 7일에는 상주시에서 고향인 이안면 소암리 550-3번지에 만세동산을 조성하고 채기중 열사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03~204p

[1][2] 소감공파(少監公派)-인천군 종파(仁川君宗派) 28세 기(基) 항렬.[3] 1919년 9월 22일 판결문에는 10월 7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4] 인천 채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채세현도 이 마을 출신이다.[5] 이 지번의 필지에 순국항일의사소몽채기중선생생가가 남아 있다. 1913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290번지의 필지는 1913년 당시 채기중의 16촌 족형(族兄) 채기두(蔡基斗, 1866 ~ 1919. 11. 29)의 소유였다. 이후 1979년 5월 7일 290-1번지로 분할되었고, 1980년 5월 9일 채기두의 7촌 재종증손(再從曾孫) 채갑식(蔡甲植, 1959. 10. 18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2005년 8월 22일 '순국선열소몽채기중의사숭모회'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6] 음력 7월 9일.[7] 공흥민(孔興珉)의 딸이다.[8] 장택상대한민국 국무총리의 아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