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32:43

노공일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노승용(盧昇容)
자 / 호 공일(公一) / 담연(淡淵)
본관 광주 노씨[1]
출생 1882년 2월 17일
경상도 창녕현 이방면 석동
(현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석리)[2]
사망 1950년 5월 9일
미상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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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노공일은 1882년 2월 17일 경상도 창녕현 이방면 석동(현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석리)에서 아버지 노수기(盧秀祺)와 어머니 진주 하씨 하석대(河錫大)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노응규의 족손(族孫)[3]이자 문인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노응규와 함께 최익현의 막사에서 의병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최익현이 순창에서 관군에게 투항하자, 의병대는 해산되었다. 이에 노공일은 노응규를 고향으로 모시고 잠시 피신했다가 다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1906년 가을 충청, 경상. 전라 3도의 분기점이자 산중 요지인 황간군 상폰면 직평으로 들어가 동지를 규합했다. 그는 노응규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선봉장에 엄해윤, 중군장에 서은구(徐殷九)를 추대했고, 자신은 종사관을 맡았다.

이후 무기를 제조하고 군사들을 모집해 훈련시킨 그는 일부 병력을 파견해 경부 철도 등 군용시설을 파괴하고 일본군의 척후병을 처단했으며, 각 의병대와도 연락하며 서울로의 진공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얼마 후 충청북도 경무서 황간군 분파소 순검들의 유인책에 걸리면서 노응규 이하 서은구, 엄해윤, 노공일 등 주요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의병대는 부득이 해산되었다. 이후 한성 경무서에 투옥되어 옥중 투쟁하던 중 1907년 1월 4일에 노응규가 옥사한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이후 그는 서은구, 엄해윤과 함께 5월 18일 평리원에서 내란음모 혐의로 각기 유배형 7년형을 선고받았다.# 노공일은 7월에 백령도로 유배되었다가 1910년 한일병합 소식을 듣고 백령도를 탈출한 뒤 승복을 입고 전국을 유람하면서 망국의 한을 달랬다.

이후 1950년 5월 9일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노공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사매당공파 29세 용(容) 희(喜) 렬(烈) 항렬.[2] 인근의 동산리·현창리와 함께 광주 노씨 집성촌이다.[3] 족보상 28촌 지간으로, 노응규는 묵재공파 27세 응(應) 항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