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13:00

장세용(독립운동가)

성명 장세용(張世湧)
이명 장상정(張相徵), 장원제(張元濟)
생몰 1902년 4월 17일 ~ 1936년
출생지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읍남리
사망지 신의주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세용은 1902년 4월 17일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읍남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2년 10월 환인현에서 통의부(統義府)에 가입하여 의용군 제4중대 제1소대장에 임명되어 중대장 홍기주(洪基柱) 및 김국보(金國輔)·신홍영(申洪永) 등과 함께 무력항쟁을 전개했다. 1926년 4월에는 유하현 삼원보에서 동명학교(東明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에 주력했다. 이후 국민부(國民府)에 가입하여 1930년 8월에는 혁명군 제5대장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29년 3월에는 남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통일 흡수된 국민부를 지원하기 위해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이 조직되자, 그는 여기에 관여하여 23명의 중앙위원 중 1인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단행하면서 일본군의 압박이 심해지자, 조선혁명군은 이에 맞서 한, 중 연합군을 조직했다. 그러나 1931년 12월 신빈에서 긴급 중대회의를 하던 위원장 현익철이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조선혁명당의 중앙부서가 개편되었고, 그는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총사령관 김관웅(金寬雄)을 보필했다. 또한 1931년 4월에는 상무집행위원에 보선되는 동시에 노동부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8월에는 조직부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31년 12월 19일 신빈현 하북의 교민 가옥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있던 중 일경 대부대의 습격을 받고 그를 비롯한 조선혁명당의 중요간부 대다수가 체포되었다. 그는 1932년 11월 21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경에 신의주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세용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