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8 22:33:22

이종호(독립운동가)

파일:이종호 선생.jpg
이종호
李鍾浩

1. 개요2. 생애3. 사후4. 참고 문헌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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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생몰년도 1885년~1932년. 교육자, 사업가, 독립운동가. 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학교의 2대 교주(校主)를 맡았었다. 고려대학교의 설립자인 충숙공 이용익[1] 선생의 손자이다.

2. 생애

이종호는 1885년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고려대학교 설립자인 이용익(李容翊)의 손자이자 이현재(李賢在)[2]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7년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인 할아버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보성전문학교의 제2대 교주(校主)가 되었다.

당시 일제한국통감부[3]학부를 통하여 보성전문학교를 일제 산하로 관립화 또는 예속화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통감부는 학교 경비의 부족액을 기부하겠다는 회유책을 폈었다. 이종호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 뒤로도 통감부의 지속적인 권유와 위협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종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통감부는 안중근사건연루혐의라는 죄목으로 이종호를 안창호, 이갑 등과 함께 붙잡기도 하였다.

1907년 1월에는 이준(열사), 이동휘함경도의 유지들과 함께 한북흥학회를 조직하였으며, 이어 이 학회에 속성사범과를 설치하여 소학교 교원을 양성하였다.

1908년에 한북흥학회가 서우학회와 합동하여 서북학회로 개칭하면서 두 학회가 경영하던 학교도 통합되어 서북협성학교로 새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이종호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밖에도 강화 보창학교와 청주 보성학교 등을 사재로 경영하고, 안창호를 도와서 평양 대성학교의 설립에도 기여하였다. 또한, 인쇄소 보성사[4]를 통하여 많은 서적과 교과서를 간행, 전국의 각 학교에 무료로 배부함으로써 근대교육의 보급에 이바지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보성전문을 비롯한 보성학교의 경영을 인수자인 천도교손병희에게 인계하였다.

1910년 12월 일제가 소위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려 하자, 이종호는 1911년 이른 봄 이갑과 함께 중국 청도(靑島)로 망명하여 안창호·유동열 등과 독립운동 방책을 논의하였다. 한동안 중국에 머물다가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고, 이상설·김립·김도여 등과 함께 권업회를 조직하고,『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교육을 위하여 4개처에 한민학교(韓民學校) 등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뒤 상하이로 갔다가 1917년 일본 경찰에 붙잡혀 귀국, 고향인 명천에서 1년간 거주제한을 받았다. 1918년에 상경하여 천도교에 이관된 보성학교 재단을 인수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3. 사후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고, 군사정권기의 혼란으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다가 2004년 11월 추서 42년만에 후손들에게 전해졌다.#

4. 참고 문헌

5. 관련 문서

파일:투명 1x10.png파일:고려대학교 심볼.svg파일:투명 1x10.png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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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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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전문학교 교주(校主)[1]
초대

이용익
2대

이종호
3대

손병희
<nopad>
1921년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2]
<nopad>
1932년

재단법인 중앙학원에 인수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초대

김성수
1-4대

이활
5-8대

김상만
9대

김용식
10대

채문식
11·12대

김병관
13대

현승종
14·15대

김정배
16-19대

김재호

[1] 학교의 주인 또는 경영자를 지칭하는 말[2] 1921년 김기태와 박인호 등 58명의 공동명의로 재단법인 설립.
}}}}}}}}} ||


[1] 대한제국 시대의 관료, 애국지사, 독립운동가. 오늘날의 기획재정부 장관인 탁지부 대신과 황실의 재정을 총괄하던 내장원경을 맡았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2] 이현재는 이용익의 형인 이연익(李然益)의 둘째 아들로 이용익의 양자였다.[3]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에 따라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으면서 한성부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를 계기로 한국의 정사(政事) 및 행정 등을 장악하며 직접 통치하도록 일제에 의해 설치된 기관이다.[4] 충숙공 이용익이 보성전문학교 근처에 세운 인쇄사로,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