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00:12:07

현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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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교의 주인 또는 경영자를 지칭하는 말[2] 1921년 김기태와 박인호 등 58명의 공동명의로 재단법인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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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4대 국무총리
현승종
玄勝鍾 | Hyun Seung-jong
파일:현승종총리.jpg
출생 1919년 1월 26일[1]
평안남도 개천군 외서면 견룡리[2]#
(現 평안남도 개천시 건지동)
사망 2020년 5월 25일 (향년 101세)
서울특별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44호
본관 연주 현씨[3]
춘재(春齋)
재임기간 제11대 성균관대학교 총장
1974년 10월 18일 ~ 1980년 3월 28일
초대 한림대학교 총장
1989년 3월 1일 ~ 1992년 10월 7일
제24대 국무총리
1992년 10월 8일 ~ 1993년 2월 24일
제13대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2005년 9월 1일 ~ 2009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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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 부모 아버지 현기명(생부)[4]·현기정(양부)
어머니 광주 이씨(생모)[5]·광주 이씨(양모)[6]
배우자 홍영표(洪榮杓)[7]
자녀 딸 현군숙(玄君淑)[8], 장남 현윤해(玄允海)
차남 현춘해(玄春海), 3남 현선해(玄宣海)
친인척 조부 현희봉(玄熙鳳)
학력 개천공립보통학교 (졸업)
평양제2중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을류 / 수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 / 학사)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1기)
고려대학교 (법학 / 명예박사)
국립정치대학 (법학 / 명예박사)
병역 공군 중령 예편
경력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학생처장
고려대학교 교양학부장
제11대 성균관대학교 총장
한림대학교 석좌교수
초대 한림대학교 총장
제24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제24대 국무총리 (노태우 정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장
학교법인 건국대학교 이사장
제13대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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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년 시절2.2. 학병 시절2.3. 월남과 미군정 근무2.4. 고려대학교 교수 시절2.5. 교육 행정가 및 관료 시절2.6. 일본군 장교 경력으로 인한 논란
2.6.1. 한홍구의 의견2.6.2. 정청래의 주장
2.7. 말년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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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법학자, 제24대 국무총리.

2. 생애

2.1. 초년 시절

1919년 평안남도 개천군 외서면 견룡리(現 개천시 건지동)에서 아버지 현기명(玄基明)과 어머니 광주 이씨 이귀태(李龜泰)의 딸 사이의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4살 때 자식없이 별세한 독립운동가 큰아버지 현기정에 양자로 입적하였다. 그의 조부 현희봉(玄熙鳳)은 이항로의 제자인 박문일,박문오 형제가 평안북도 태천군에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던 '경의재'에서 박은식, 유인석과 동문수학한 사이로, 유인석이 개천군으로 피신하였을 때 도운 바 있었다.

완고한 보수주의자로 경학을 고집했던 조부 때문에 부친대까지는 신학문을 배우지 못했지만, 부친(생부)과 숙부는 자식들에게 신식학교로 진학할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한다. 그러한 연유로 현승종은 7살이 되는 1926년 개천군청이 위치해있던 읍내의 개천공립보통학교(참조)에 취학했고,[9] 1933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합격했다.

평양고보 시절 수학에 재능을 보였던 현승종은 이공학부로 진학을 희망했고, 그를 아끼던 수학교사 메구로(目黑) 역시 "지금 시대에 조선인에게 주어지는 도지사, 판검사 자리가 몇이나 되겠느냐, 실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이공학부로 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이 법과를 고집함에 따라 현승종은 1938년 평양제이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제15회, 문과을류)에 입학했다.

독일어 등 외국어에서부터 문학/사학/철학/법학/정치학/경제학 그리고 물리/생물/화학 등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수준 높고 폭 넓은 학과 교육은 물론이고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한 스톰을 즐기며 제주도, 금강산 등 국내 각지 여행과 만주 수학여행 그리고 봉천의 만주의과대학 예과와 정기전 등을 경험한 그가 극찬한 구제고등학교 과정은 훗날 현승종이 교양교육의 전범으로 삼아 고려대학교 교양학부를 구성하는 본이 되었다.

1939년 11월 평양 서문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아내와 결혼하였다.

1941년 3월 예과를 수료하고 1943년 9월[10]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며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일찍 사망한 백부의 양자로 입적된 그는 집안 재산 정리를 하기 위해 교수들의 취업 권유도 거절하고, 고향 개천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1943년 10월부터 시작된 일제의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 모집(학도출진)으로 고향에서는 숨어서 가족 친지들에게 폐만 끼치게 되었고, "죽음의 확률이 높은 징용을 면하기 위해"[11] 최종 마감일인 11월 20일 학도 특별지원병에 지원하였다.출처

2.2. 학병 시절

1943년 12월 신체검사와 기초훈련을 거쳐 1944년 1월 20일 평양 교외의 일본군 제30사단으로 입영한 뒤 중국 장쑤성 숙현의 훈련소로 이송되어 경기관총 사수로 훈련을 받았다. 구제대학 또는 구제전문학교를 다닌 고학력자를 대상으로 시행한 간부후보시험에 선발되어 쉬저우에서 3개월여 간부후보생 집합교육을 받은 후, 중국 난징중화민국 중앙군관학교 자리에 세워진 일본 육군 예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의 데시가와라(勅使河原) 구대장 밑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은 후 예비사관학교를 마치고 일본제국 육군 견습사관으로 임관했다.

견습사관이 된 현승종은 지나파견군 제13군 山本(야마모토)독립병단(독립혼성제90여단) 原田(하라다)부대에 배치되어 와세다대학 정치학과 출신의 곤도(近藤) 중대장 예하 2소대장이 되었다.[12] 당시 중대는 2개 소대 80여 명의 병력으로 장쑤성 난퉁(南通)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8월 15일 중국 팔로군상하이 근교 난통(南通)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규모 교전(참조)을 벌였다.[13] 이후 그의 소대가 중대에서 40리 떨어진 민가암에 파견되자, 그는 수비대장 역할을 했으며,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난퉁의 중대본부로 철수한 후 대대장으로부터 일제의 패망소식을 전해듣고서야 전쟁이 끝났음을 알게 되었다.

중국 전구의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던 장제스는 8월 15일 이후에도 일본군에게 무장과 군수물자, 위수지역을 홍군에 빼앗기지 않도록 국민당군이 접수하러 갈 때까지 주둔지에서 계속 방어임무를 수행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보급이 없었기 때문에 주둔지에서 둔전을 일구면서 자급자족했다. 현승종은 대대장에게 40여 명 정도의 조선인 병사들로 별도 소대를 편성케 해달라고 건의하여 조선인 소대의 소대장을 맡아 학병 동료인 김병률과 함께 한글, 한자, 민요 등을 가르치며 자체적으로 군사 훈련까지 실시했다. 그렇게 5개월 정도가 지나고 1946년 1월 10일이 되어서야 소수의 중화민국군 병력이 와서 무장해제를 시키자, 상하이 교외의 집결지까지 이동하게 되었으며, 집결지에서 일본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일본군에서 분리되었다.

조선인들은 상하이에서 기차로 1시간 여 거리의 우승에 집결하였고, 현승종의 부대는 영안방(永安紡)이라는 방직공장 건물에서 일본군 조선인 장정들과 합류하였다. 이 때 현승종은 학병 출신 동지들과 함께 동포들을 모두 귀환시킨 후 마지막 배편으로 귀국하기로 다짐하고 보급•경리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때 조선 장정들의 처지를 동정한 일본인 대위와 함께 일본 육군 제13군 사령부를 찾아가 군수참모로부터 식량과 의약품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렇게 3개월 여를 일한 후 1946년 5월 1일 미군 LST를 타고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평안도 출신의 김병률과 함께 38도선을 넘어 5월 10일 평양의 처가에 도착해 처자와 재회하였다.

2.3. 월남과 미군정 근무

모친으로부터 집안 재산이 북조선 당국에 모두 몰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고향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처자식만을 데리고 평양을 떠나 1946년 6월 10일 월남하게 되었다. 월남 전 대학 대선배이자 훗날 북한 사법부장이 되는 최용달이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하였으나 뿌리쳤다고 한다. 고종사촌형 한재오(韓載午)[14] 역시 소련군정에서 일하고 있었음에도 월남 결심을 밝히자 만류하지 않았다.

서울로 온 현승종은 친척집에 얹혀살면서 종씨인 현상윤 보성전문학교 교장에게 부탁해 미군정청 인사행정처장으로 있던 정일형 박사를 소개받았다. 정일형 박사는 그를 물가행정처 행정과장 자리에 앉여줬는데, 한 달 남짓 근무하고 현승종은 행정차장과 충돌하여 사직하고 말았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그는 대학에서 일자리를 구해보려고 하였다. 사실 그가 학병에서 막 귀환한 5월 초순만 해도, 모교 경성제대에서 일본인 교수들이 물러난 자리를 그 교수들 밑에서 조수로 있던 선배들이 물려받아 연구실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현승종에게도 조수 자리를 권했었다. 그런데 그가 구직에 나선 여름에는 이미 대학 후배인 김증한이 그 조수 자리에 앉아있는 상태였고, 1946년 9월부터 신제대학으로 개편이 예정되어있던 여러 구제전문학교의 교원 자리 역시 대학 선후배들과 일본 등 해외 각지에서 귀국한 구제대학 출신들이 차지한 뒤였다. 현승종은 고향에 다녀오는 동안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

2.4. 고려대학교 교수 시절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이끌어온 경성제대 대선배 현민 유진오에게 부탁하여, 고려대학교가 출범한 1946년 9월 1일부로 고려대학교 정법대학 전임강사로 발령받았다. 이로써 현승종은 1946년 9월부터 1974년까지 고려대학교 법학과에서 29년간 교수를 역임하게 된다.

법학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로마법개론' '로마법원론' '법사상사' '서양법제사' '민법' '비교법입문' '로마법' '게르만법' 등의 책을 저술하였으며, 법사상사, 법사학, 비교법 및 민법분야에서 연구업적을 남겼다. 특히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지로 대륙법 계통의 법 체계를 갖고 있으면서 미합중국의 state로 영미법 방식의 법 적용을 하는 뉴올리언즈의 비교법 명문 툴레인 대학교 법학부에서 1956년부터 1년간 교환교수로 연수하면서 비교법 연구의 기초를 닦았다.

교수로 재임하며 민법을 가르치던 시절, 명강의로 이름 높았을 뿐 아니라 휴강이나 지각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교육자 직분에 성실하였다. 천성이 검소하여 교수 신분에도 불구하고 양복이 아닌 교복 차림으로 출퇴근하였다. 실력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하였으며, 자애롭고 온화한 자세로 제자들을 대하여 학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학문적 측면으로 볼 때, 서울법대 교수 김증한, 곽윤직 등과의 연구실적 경쟁은 일방적으로 밀렸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김증한과 곽윤직이 워낙 뛰어난 학자였던 탓도 있지만, 현승종 교수가 고대 내에서 주요 보직을 맡다보니 연구에 전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15] 물론 당대 민법학자들 가운데서 김증한과 곽윤직을 제외한다면, 현승종 만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16]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가족들을 데리고 미처 피난가지 못해서 9.28 수복때까지 3개월 이상을 숨어살았으며, 1.4 후퇴 때는 대구로 내려가 고려대학교 임시사무소에 합류했다. 그런데 이 때는 평양고보-경성제대 법학과 선배인 양정수가 공군 인사국장 겸 법무감으로 있었고 류홍렬, 유민상, 김경수, 서임수 등 대학 후배들이 공군에 다수 입대해 있었다. 현승종 역시 1951년 7월 5일 진해시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해 5주 훈련을 받고 대위로 임관, 공군본부 인사국 상전과장으로 보임되었다. 이 때도 고려대학교가 대구의 임시교사에서 개강하자 양창수 인사국장을 조른 끝에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의 특별허가를 받아 출강하였다. 1953년 환도 후 서울로 올라온 고려대를 쫓아 국방부 제3국(공군국) 인사행정과장으로 부임하였으며, 1955년 국방부 총무국 섭외과장을 거쳐 미국 국무부 초청 연수에 선발됨에 따라 공군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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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에는 고려대학교 학생처장이 되었다. 마침 그 직후 4.19 혁명이 일어나자 데모행렬의 선두에서 제자들의 신변안전에 정성을 다했다.[17]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고대생들의 데모가 연일 이어졌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수많은 고대생들을 구속, 강제징집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현승종은 스크럼 짠 제자들 앞에 나아가 그냥 드러누워버렸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정 나가고 싶으면,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외쳐서 학생들의 대량구속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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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을 설득하는 현승종 학생처장

그렇게 5년 7개월 동안 학생처장직을 수행한 뒤, 1965년 국내 최초로 고려대학교에 교양학부를 설치하고 교양학부장과 도서관장 등의 보직을 맡았다. 차기 총장으로 임명될 것이 당연시되었으나,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답게 직언으로 재단 이사회와 사이가 틀어진 때문이라는 세간의 추측을 남긴 채출처 고대를 떠나 성균관대학교 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5. 교육 행정가 및 관료 시절

1974년 55세의 나이로 고려대학교를 떠나 성균관대학교에 총장으로 부임하였다.[18] 그 후로 1980년까지 6년 동안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성대 총장으로 있으면서 구조조정 등 온갖 악역을 도맡았는데, 그런 궂은 일을 예상보다 더 깔끔하게 마무리하였다.

61세의 나이로 성균관대학교를 떠난 뒤 1984년에는 한림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19] 한림대 학장을 거쳐, 1989년부터 1992년까지 한림대학교 초대 총장을 맡았다. 성균관대학교와 한림대학교에서 총장으로 일할 동안 학사행정 실무담당자에게 전결권을 부여하는 등 자율과 책임의 원칙을 실현하였다.

1991년에는 한림대학교 총장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장을 겸직했다. 교총 회장으로 일하면서 김영삼김대중으로부터 우수교원확보법, 학교안전관리공제회법, 교육시설투자촉진법 제정 지원 약속을 이끌어냈고, 결국 그러한 특별법들을 통과시켰다. 그 외에 교총-교육부 정기교섭 협의도 성사시켰으며, 교원처우개선과 수당지급체계 개선 등 현재 교원정책의 근간이 되는 사항들을 대부분 확립하였다.

1992년 10월에는 임기 만료를 앞둔 노태우 정부로부터 '대선 기간 동안의 공정한 국정 운영을 위한 중립 내각' 구상에 따른 국무총리직을 제의받았다. 당시 한준수 전 연기군수의 관권선거 폭로 양심선언으로 인해 여론이 부정적인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자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이었으며 현승종의 고대법대 교수 시절 제자였던 김중권이 노태우에게 현승종을 중립 내각 총리로 강력 추천하였다. 처음에는 총리직 제안을 극구 사양하였지만, 결국 승낙하였다.

그 후 국무총리직에 취임하여 (취임 당시 인터뷰 링크) 제14대 대선 기간을 포함한 약 5개월 동안의 노태우 정부 잔여 임기를 통틀어 국무총리직을 역임하였다. 총리직에 취임한 후, 짧은 기간이지만 전임총리 시절부터 혼란하던 정국을 가라앉히고 안정되게 만들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는 퇴임을 불과 수개월 앞둔 상태였고, 현직 대통령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여당에서 '탈당'을 선언하여 충격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그는 노태우 정부의 잔여 임기동안 실질적인 내각 수반의 역할을 수행했다.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음란물 지정 및 탄압 사건'이 터졌을 때에는, 당시 원로교수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던 마광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여 결국 마광수가 체포, 구속되게끔 만들었다.

어쨌든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비교적 무사히 치렀으나, 선거 직전에 터진 초원복집 사건으로 큰 오점을 남겼다. 사실 14대 대선도 관권개입, 금품살포, 흑색선전, 마타도어, 여론조작이 난무했던, 지저분한 선거이긴 했다. 그나마 13대 대선에 비해선 약간 나아졌다 정도.[20]

1993년 2월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 후 1993년 건국대학교에서 대규모 부정입시 사건이 일어나 현직 이사장이 파임되었을 때, 74세의 나이로 건국대학교에 관선이사로 파견되었다. 결국 건국대학교 이사장직을 맡아, 1999년 7월까지 6년 동안 이사장직을 수행하였다.[21]

2.6. 일본군 장교 경력으로 인한 논란

1999년 2월 28일 연합뉴스와 가진 회견에서 지난 80년 간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일본군 장교 경력에 대해 고백하였다. 그동안 이런 사실을 숨긴 이유로 "비록 자발적이지는 않았지만 일제 군복을 입고 참전했던 사실을 차마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그러한 고백을 한 후 약 두세 달 동안 건국대 교수협의회, 직원노조, 총학생회 등 학내·외 단체들로 구성된 비상대책위로부터 이사장 직위 사퇴 압력을 받았다. 결국 1999년 4월 20일 사의를 표명하였다.

2.6.1. 한홍구의 의견

이러한 친일 논란에 관해서는 역사학자 한홍구한겨레21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관련 기사 링크
학생들은 형식상 지원제인 학병에 나간 것을 친일 행위로 본 것인데, 이는 해방 당시의 정서와는 큰 거리가 있다. 물론 학병에 지원한 사람들 중에 황국신민 의식이 골수에 박혀 스스로 자원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학병을 대부분 끌려간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학병 출신들은 일제 통치의 희생자로 간주되었고, 해방 정국 초기에 학병동맹을 결성하여 미군정의 탄압으로 해산될 때까지 진보진영 내에서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당시에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 신분에다 일제 강제동원의 피해자였다는 위치를 겸하여 일제 잔재 청산에 목소리를 높였다.
2005년 8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현승종은 포함되지 않았다. 건국대 졸업생들이 이에 항의하였으나, 민족문제연구소측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현승종 이사장은 일제강점기인 1944년 1월 학병으로 끌려가 해방될 때 소위로 제대했지만 자발적으로 입대한 것이 아니어서 친일파로 보는 건 무리가 있다."[22]

2.6.2. 정청래의 주장

한홍구의 글에 대해서는 정청래[23]오마이뉴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관련 기사 링크
결론부터 말하겠다. 현승종 씨 문제에 대한 한 교수의 주장은 틀렸다. [...] 위에서 한 교수는 학병에 나간 것을 학생들이 친일행위로 본 것이라 단정했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 같은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른 글도 아니고 역사의 문제를 다루는 학자가 어떻게 기초자료도 조사하지 않고 함부로 글을 쓰는지 놀랍다. [...] 비대위는 현씨가 학병을 나간 것을 친일로 몰아붙이지 않았다. 1945년 1월 20일 현승종씨가 학병을 나간 것은 사실이다. [...] 비대위가 문제를 삼은 핵심사항은 현씨가 학병으로 나간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가 학병으로 나간 이후 자발적 의사(대단히 중요한 팩트다)에 의해 일본군 장교에 자원했고[24] 일본 황국의 장교로서 황국신민의 첨병이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현씨는 일본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팔로군과 교전까지 치른 일본군 전투장교였다.[25] 사실이 이러함에도 비대위는 현씨 개인의 과거에 대해 같이 아파했고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런 전력은 적어도 후학을 양성하는 기관의 대표로는 부적격이고 더군다나 설립자가 독립운동가인 민족사학에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음으로 이사장직을 수행할 권위를 상실했다고 판단해 사퇴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2.7. 말년

건국대학교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후 2001년에는 인촌기념회 이사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2005년 9월에는 86세의 나이로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직에 취임하여 2009년 7월까지 이사장직을 수행하였다. 남들은 한번도 하기 힘든 것이 재단이사장직과 총장직인데, 고려대와 건국대에서는 재단이사장을, 성균관대와 한림대에서는 총장을 각각 역임하였다.

그 밖에 1994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가 출범하였을 때 한국 유니세프 회장이 되었다. 그렇게 취임한 한국 유니세프 회장직을 1994년부터 2010년까지 무려 16년 동안이나 수행하였다.

2017년 2월 2일, 정치인 한광석이 98세의 나이로[26] 사망한 이후 살아있는 전직 정치인들 중에서는 최고령자로 밝혀졌다. 1992년 최고령 국무총리 타이틀에 이어 2018년 기준 역대 국무총리들 중에서 가장 최고령인 인물이었다. 여담으로 역대 정치인들 중에서 제일 오래 산 인물은 2007년 향년 110세까지 장수한 이을식이다. 2009년 향년 100세의 나이로 사망한 김판술에 이어[27] 현승종이 100세를 넘긴 정치인이 되었고, 한 달 뒤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8]

2018년 3월 3일에 촬영된 사진#

3. 평가

학자로서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기보다는 교육행정가로서의 행적이 더 돋보이는 사람이다. 보수주의적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정치색을 그리 강하게 드러내지 않아, 보수-진보 양쪽에서 무난하게 수용되었다.

고위직을 계속 연임하였지만 평범한 서민 동네인 도봉구 쌍문동에서 말년까지 계속 살았을 정도였다. 성균관대학교, 한림대학교, 건국대학교, 고려대학교에서 총장과 이사장직을 역임할 동안 대부분의 판공비를 그대로 반납하였다.

3남 1녀를 두었다. 셋째 아들 현선해(玄宣海)는 현재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이다.[29]


[1] 음력 1918년 12월 25일[2] 연주 현씨 집성촌이다.[3] 첨정공파(僉正公派) 24세손 ○종(○鍾) 항렬.(족보)[4] 玄基明.[5] 이귀태(李龜泰)의 딸이다.[6] 이봉수(李鳳洙)의 딸이다.[7] 남양 홍씨 홍순협(洪淳協)의 딸이다.[8] 김해 김씨 김동근(金東槿)과 혼인하였다.[9] 다편도 3.5km의 통학길을 매일 걸어다녔다고 한다. 5살 때부터 7살 때까지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10] 본래대로면 1944년 3월 졸업해야 했으나, 1941년 태평양전쟁 개전에 즈음하여 일제는 전시 수학기간에 관한 조치를 단행하여, 방학을 없애고 학기 중 수업 시수를 늘려 수학연한을 단축하였다. 이에 학부가 3년에서 2년 6개월로 단축됨에 따라 현승종은 1942년 3월이 아닌 1943년 9월 학부를 졸업하였다.[11] 당시 일제는 학병에 지원하지 않는 자는 한 번 끌려가면 살아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던 남방전선(남양군도)으로 징용할 것이라 협박하며 자원을 강권했다.[12] 당시 1소대장은 데시가와라 구대장 밑에서 함께 교육받았던 와세다대학 철학과 출신 김병률이었다고 한다. 김병률 장군은 광복 후 육군사관학교 특7기로 입교해 국방부 정훈국장을 지내고 1969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13] 학병 모병과정 등에 대해서는 참조.[14] 성천군 갑부집 아들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해 법문학부 법학과(경제학전공)를 1941년 3월 졸업한 인물.[15] 유진오(제1회), 신기석(제5회) 등(1946.9~1954.3)에 이어 이항녕(제11회), 박재섭(제12회), 차락훈(제11회), 남흥우(제9회) 등 경성제대 법학과 선배들이 줄줄이 고려대학교 정법대학장/법과대학장(1959.10~1978.8)을 역임하는 동안 제일 후배인 현승종(제15회)은 학생처장(1960.2~1965.9), 교양부장(1965.10~1969), 중앙도서관장(1971~1974) 등 부담이 심한 보직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회고록에 따르면 1960년 2월 학생처장에 보임된 것은 "유진오 총장께서 제의하는 것을 마다할 처지가 아니라서 맡게 되었"던 것이라고 한다.[16] 현승종 교수는 곽윤직 교수의 물권법 교과서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서평을 남긴 적이 있다.[17] 물론 데모를 마치고 해산하는 과정에서 깡패들에 의해 제자들이 구타 당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으나, 이때 고대생들의 희생으로 4.19 혁명의 불꽃이 더 크게 타올랐고, 이승만 정권이 결국 무너졌다.[18] 전임자인 황산덕 총장이 평양고보-경성제대 법학부 선배라서 현승종을 성균관대 총장에 추천했다고 한다. 당시 고려대학교는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극심한 재정난에 직면하여 언제 망할지 모를 정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승종처럼 호봉 높고 나이 많은 교수들은 눈치껏 다른 학교로 떠나주는 것이 예의였을 것이다.[19] 한림대 설립자인 고 윤덕선 박사와 평양고보 동기로서 동문 수학한 사이였다. 대학 설립의 기획단계부터 관여해 한림대를 짧은 시간 안에 급성장시켰다.[20] 물론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만 해도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부정선거에 맞서서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던 김대중이 제14대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해서는 즉각 승복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할 정도로, 14대 대선은 13대 대선에 비해 부정적인 측면이 어느 정도 줄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 1991년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 1992년 한준수 전 연기군수의 관권선거 폭로 등으로 당시 노태우 정권이 심각한 레임덕 상황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21] 1993년 당시 건국대학교는 평판도 나빠져 있었지만,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건국우유의 경영을 정상화하는 등 건국대학교의 재정을 충실히 하는 데 힘썼다.[22] 비슷한 사례로 김수환 추기경이 있다. 실제 학도지원병이 말만 지원이지 실상은 강제징집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친일파로 모는 것은 부적절하다.[23] 아직 국회의원이 되기 전 기고한 글이다.[24] 참고로 1943년 2월 과달카날 전투와 1943년 11월 창더 전투 이후 일본의 패망이 100% 확실해진 당시 학병으로 끌려간 조선인이 사병이 아니라 장교를 자원했다는 것은 공명심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조선인 학병 동료들을 위한 희생정신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당시 학병으로 끌려간 조선인 가운데 일정 수는 장교를 자원해야 했고, 자원하는 자가 없으면 제비뽑기라도 해야만 했기 때문. 사병은 참호 안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있어도 되었지만, 소대장은 언제나 선두에서 "소대원 돌격 앞으로!"를 외쳐야 했다. 상부에서 집단옥쇄 명령을 내릴 경우에도 장교는 사병보다 먼저 할복을 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 상황에서 장교를 자원한 자는, 조선인 학병들 가운데서도 양보심이 있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5] 참고로 중일전쟁 말기 중국 팔로군의 사기는 날로 치솟고 있었던 반면에 이에 맞선 일본 관동군은 거듭된 패전으로 거의 껍데기만 남은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 상태였다. 주력부대는 본토방위를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고, 기존부대 나머지는 소련군을 막기 위하여 동부전선으로 배치되었다. 중일전선 최전방에는 급조한 신설부대만 총알받이 용도로 보냈으며, 1942년 이후 관동군에 대한 본토의 군수물 및 식량지원은 대부분 끊겨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 학병 출신 장교가 당시 중일전선 최전방에 전투부대 소대장으로 간다는 것은 막말로는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일본군 가운데 소총을 가진 병사가 40%, 총검을 가진 병사가 30%일 정도로 전투장비가 부족하여 죽창이나 맨몸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고, 군화도 없어서 추운 겨울에 짚신으로 걸어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최전방 전투부대로 갔다고 해서 후방의 비전투부대보다 더 폼이 났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중일전선에서 일본 관동군 신설부대원은 팔로군과 전투를 치르는 족족 걍 사망크리였고, 장준하김준엽처럼 탈영을 한다 하더라도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없었으며, 오히려 탈영했다가 조선인 동료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당시 전투장교, 특히 최전방 전투부대 소대장(소위) 자리는 어찌보면 "우리 조선인 학병 중에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죽겠다"는 마음으로 가는 자리라 할 수 있었다.[26] 다른 98세까지 산 정치인으로는 정광호, 고형곤, 안춘생, 김종환이 있으며 윤치영은 98세 생일을 하루 앞두고 사망했다.[27] 송인상은 101세, 이강훈, 김허남, 김창규, 장경순도 100세까지 살았다. 99세까지 산 정치인으로는 박철수, 김영도, 김봉환, 조광희, 백선엽, 박경원이 있다.[28] 현재 대한민국에서 사망한 국무총리들 중 최고령 사망자이다. 현재 생존중인 최고령 전직 국무총리는 이현재로 [age(1929-12-20)]세이다. 참고로 현재 생존중인 최고령인 전직 정치인은 [age(1926-03-09)]세의 박찬긍이며 최고령 전직 국회의원은 [age(1926-09-25)]세의 김두현이다. 외국으로 귀화한 인물까지 포함한다면 [age(1919-03-11)]세박갑동도 있다. 또한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사망한 이후 영어 위키백과에서 정리한 생존한 전직 국가 수반들 중 최고령이었다.[29] 송중기의 스승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