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CC0000><tablebgcolor=#FFFFFF><bgcolor=#CC0000><width=100>
||<-2>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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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CCC><colcolor=#000> 명칭 | <colcolor=#000> 한국어 | <colcolor=#000> 황푸군관학교 |
| 간체 | 黄埔军校旧址 | |
| 번체 | 黄埔軍校舊址 | |
| 영어 | Whampoa Military Academy | |
| 분류 | 혁명유지 및 혁명건축물 (革命遗址及革命建筑物) | |
| 시대 | 중화민국 | |
| 일련 번호 | 3-0021-5-021 | |
| 주소 | 광둥성 광저우시 황푸구 쥔쉐루170호 广东省广州市黄埔区军校路170号 | |
| 등재 | 1988년 | |
| 차수 | 제3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 |
|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 AAA급 | |
1. 개요
| 황포군관학교 교가. 가오슝으로 옮긴 지금도 쓰이는 중이다. 동시에 2010년부터 광저우 제6고등학교(廣州第六中學)의 교가로도 쓰인다.[1] |
이 학교는 이후 대만 군관학교로 개편되지만, 국민정부가 난징으로 옮겨간 1927년 이전까지 황푸에 있었고 우한에 분교가 있었는데, 분교 재학생들도 황포군관 출신으로 간주한다. 1930년 중앙군관학교로 이름을 개칭할 때까지 7기까지를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2] 이 학교는 황푸의 (영어식) 광동어 표기를 따서 영어권에서는 Whampoa Military Academy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장제스의 북벌의 성공에 절대적으로 공헌했으며[3], 여기에서 배출된 지휘관들은 후에 국공 양당의 핵심 지휘관이 된다. 장제스 교장 재임시절의 황포군교 출신은 국부군에서 "황포계"라고 불리며 장제스 직계로 간주되었다. 대략 국부천대 이후 1960년대까지 이들이 중화민국군(육군)의 수뇌를 이루었다.[4]
공산당의 초기 무장봉기에도 상당한 활약이 있었다. 저우언라이가 정치부 주임 재직 당시에 포섭하여 공산당에 가입시킨 황포군교 생도들이 상당수 있었다. 초창기 공산당의 무력은 이들이 다수였으나 난창 폭동-광저우 폭동-초공작전-대장정-중일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전사했다.[5] 특히 1927년의 공산당의 모험주의적인 봉기(난창, 광저우 폭동)는 황포 출신이 주력이었는데, 이때 압도적인 국민당군의 병력에 맞서다가 대부분 전사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을 때 인민해방군 고위직에서 황포출신들이 다수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5년 계급이 도입되었을 때 원수 10명중 2명, 대장 10명중 3명을 배출했다. 상장도 많이 배출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6.25 전쟁에서 맹활약했던 송시륜.
2. 역사
2.1. 국공합작으로 세운 군사학교
1921년 5월, 임시대총통에 취임한 쑨원이 북벌 전쟁에 준비하여 12월, 광시성 구이린시에 체류할 때였다. 중국공산당 제 1차 대표대회에 참가하러 중국에 온 공산국제 대표 마린(馬林, Maring)[6]이 장타이레이[7]를 통역으로 데리고 쑨원을 찾아온다.러시아 혁명으로 수립된 신생국 소련은 외교적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 중국 군벌과 협력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군벌 배후에는 일본[8]이 있고 중국인들은 소련과의 협력을 원하지 않았다. 마린은 혁명군 정부의 대표 쑨원을 찾아와 중-소 협력을 요청한다.
쑨원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 20여년 동안 10여차례의 봉기를 일으켰으나 매번 실패한다. 마린은 군대가 없이 혁명을 성공할 수 없다고 충고하며 혁명 군인을 양성하라고 제의한다. 문제는 쑨원은 자금이 없었다. 마린은 쑨원이 원하면 소련 측에서 군관학교 건립을 위한 경비를 지원할 수 있다고 전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쑨원은 삼민주의와 공산주의는 서로 맞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소련과 협력한다는 결단을 과감하게 내리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도 군인을 양성하여 군대를 보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희망을 느끼고 군사학교 설립 문제를 마린과 논의한다. 마린은 군사학교를 운영하려면 확고한 지반과 안정된 재정이 있어야 하는데, 적은 경비로 운영하려면 기존의 군벌이 운영하는 군사학교에 정치과목을 추가하여 군사정치학교로 운영하자고 제의한다.
2.2. 불편한 협력
1923년 1월 26일, 발표된 쑨원의 소비에트 러시아 대표 요페(Joffe)의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다.같은 날 쑨원은「평화통일선언」을 발표했다.
1923년 1월, 쑨원이 상하이에 체류하면서 광저우 정권 탈환을 모색하고 있을 때, 마린과 소련 전권대사 요페가 찾아왔다 이들은 쑨원에게 소련의 혁명경험, 대중동원방법, 혁명군대 건립 등 자신들이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게 된 과정을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만약 쑨원이 동의하면 소련이 군사물자와 훈련교관을 원조할 수 있으며 이들을 이용해 군사학교 설립을 제의했다.
자신의 처지가 궁지에 몰린 쑨원은 공산주의자들이 강조하는 반제국주의와 대중운동을 자신의 삼민주의 사상과 통합하는 것도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소련과 같은 군사학교를 세워 민주혁명에 대한 확고한 정신자세로 겸비한 혁명군사 지휘관을 배출한다면 제국주의와 매국 군벌을 타도할 수 있고 또 통일된 근대국가도 수립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
하지만 쑨원은 소련과의 협력은 하지만, 공산조직이나 소비에트 제도를 중국에 도입할 수 없다고 선을 긋는다. 요페는 자립하려는 모든 나라를 돕는다면서 쑨원이 중국혁명을 완수하고 군벌을 타도할 수 있도록 동정적인 지원을 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숨은 목표는 중국에 공산주의를 확산시켜 중국국민당 내에 전략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나아가 중국을 공산화한다는 것에 있다.
1923년 1월 26일, 쑨원-요페 선언이 발표된다. 소련 군사위원회 측에서 군사학교 건립을 위해 200만 루블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쑨원은 경비와 무기 외 군사훈련하고 정치적인 업무를 지도할 군사고문단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한다.
2.3. 국공합작
중국국민당은 중국공산당과 합작할 수 있도록 국민당 정부를 개조한다. 소련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중국공산당 핵심 간부가 개인자격으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변경한다.1923년 6월, 중국공산당은 광저우시에서 제 3차 전국 대표대회를 개최한다. 중국국민당이 합작한다고 하니 향후 어떻게 중국국민당과 협력할 것인지 토의하는 회의였다.
2.4. 군사학교 시찰단 파견
1923년 8월, 쑨원의 바오딩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장제스를 대표로 "쑨이셴(孫逸仙) 박사 대표단"을 구성해 소련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3개월 동안 소련의 군용 화학학교, 고급사격학교, 공군, 해군, 군사학교 등을 시찰하고 11월 중국으로 돌아왔다.장제스가 소련 공산당 중앙 서기를 만나 군사학교 설립 문제에 관해 담판하는 동안 광저우에서는 랴오중카이등 중국국민당 위원들은 국외에서 귀국하는 국민당원 청년 자제를 장차 건립한 군사학교에 입교시켜 중국국민당 군사지도자로 양성하여 공화정을 옹호하기로 협의한다.
쑨원은 이런 결정을 바탕으로 군관학교를 몇 개 더 설립하면 5~10만명 정도의 군사지도자를 배출할 것으로 보였다. 군사적 정치적 수양을 갖추고 중국국민당 지도에 복종하는 군관을 양성할 구상이었다.
2.5. 좌익으로 기운 국공합작
1924년 1월 20~30일간 광저우에서 중국국민당 제 1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된다. 쑨원은 이 회의에서 소련과 연합하고 중국공산당을 수용하며, 노동자와 농민을 지원한다는 국공합작을 선포했다. 국공합작 정책을 실행하려면 중국국민당 정부도 개조해야 하지만 자신이 주장한 삼민주의 수정이 불가피했다. 삼민주의에 대한 해석은 중국공산당 혁명 강령과 거의 일치한다. 삼민주의를 신삼민주의라고 재해석하고 국공합작을 선포하자 쑨원의 혁명은 좌익으로 급선회한다. 국공합작은 중국국민당의 정치적인 기반이 되어 중국 혁명의 길을 개척하게 된다. 하지만, 쑨원이 죽자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각각 상반된 주장을 내세워 현재까지 분열된 상황이다.2.6. 소련이 보내온 돈과 무기로
1924년 1월 25일, 소련 군사고문단 4명이 광저우에 도착했다. 이들은 군관학교 설립을 구체적으로 진행하고, 레닌과 스탈린은 군관학교 건립 경비를 오일(기름)로 보내왔다.1924년 3월 기름을 가득 실은 소련의 대형 유조선이 광저우에 도착하고 오일 판매 금액 300만 위안이 중국국민당 정부에 전달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군관학교에서 사용할 러시아 총기와 탄약, 군용 기자재도 목재선으로 가장한 대형선박으로 실어서 보내왔다.
중국국민당은 창저우도(長洲島)에 오랫동안 방치된 광둥육군소학당을 수리해서 군교학사를 마련한다. 훈련장, 사무실, 교실, 숙사, 주방, 식당, 창고 등 각 시설이 집결된 공간이었다.
| 손중산고거(孫中山故居) : 쑨원이 광저우에 머무를 때, 휴식공간 및 사무실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원래는 1877년 서양 무역선으로부터 화물 관세를 거두던 광둥세관(粤海關)의 황포분관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세관이 이전하고 잠시 쑨원의 거처가 된다. 쑨원 사후에는 손총리기념실이라는 이름으로 군관학교 교사 건물 중 하나로 사용된다. 1930년대 난징중앙육군군관학교로 이전된 후론 쇠락했다가 1984년에 문화재로 지정하고 정비해서 손총리기념실로 복원했다. |
2.7. 황포군관학교 개교
| 황포군관학교의 정문 벽면에는 "혁명이 아직 성공하지 않았으니 동지들은 계속하여 노력하라"(革命尚未成功,同志仍須努力)라는 쑨원의 명언이 쓰여있다.. |
| 황포군관학교 전경 |
| 황포군관학교시찰하는 쑨원 |
2.8. 우한분교 폐교
1926년 가을, 황포군관학교 5기생 포과, 공과 학원이 국민당의 1차 북벌 전쟁에 참전하면서 우한(武漢)으로 집단 전학을 했다. 1927년 2월 12일, 광저우 본교 전한생과 우한에서 모집한 신병 1,200여명으로 우한분교를 개교하고 그 해 3월, 황포군관학교 우한분교는 중앙군사정치학교로 개명했다. 교장은 장제스였으며 광저우 본교처럼 군사교육과 정치교육을 병행했다.북벌군이 우한을 점령한 것은 국공합작의 성과이다. 국민당 좌파 왕징웨이가 장제스를 반대하고 중국공산당에 전향했다. 중국국민당 좌파가 공산당과 협력해서 중국을 통일한다면서 중국공산당의 지위와 기세를 높여주고 우한 중국국민당을 수립했다.
1927년 7월 18일, 왕징웨이도 반공 정책을 발표했다. 우한 정부는 공산당원과 좌파 인사를 체포하고 구금시켰다. 재학중이던 우한 중앙 군사정치학교는 제 5기생을 서둘러 졸업시키고 8월에 문을 닫았다. 우한 중앙군사정치학교의 교관과 학생 4000여명은 무기를 반납하고 갈 곳이 없어졌다. 우한 정부의 왕징웨이는 난징의 장제스 정부와 합류한다.
2.9. 황포군관학교의 청당(淸黨)
1927년 4월, 부교장 리지선(李濟深, 1885~1959)이 황포군관학교에 좌파를 단속한다는 「청당(淸黨)」소식을 전달했다. 광저우 「청당(淸黨)」중점 대상은 황포군관학교였다.1927년 4월 15일, 황포군관학교 해안가를 봉쇄했다. 부대마다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의 당黨, 정政 군軍 대권을 탈취해서 중국국민당을 소멸하려고 함으로 교장이 중국공산당 전원을 학교에서 정리하려고 한다."는 포고문을 내걸렸다. 교장은 학교의 모든 공산당원은 3일 내에 보고하든지 아니면 휴가 신청하고 학교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4월 17일 밤, 군인들이 소지한 무기를 몰수하고 공산당원들이 체포되었다.
4월 18일 아침, 호각소리와 함께 교본부와 학생 제 1대, 경리대가 구락부에 집합했다. 교육장에 나와서 "지금부터 국공을 분리하려고 하니 공산당원은 세 걸음 앞으로 나오고 국민당원은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으라"라고 소리 질렀다. 이렇게 불려 나온 공산당원 400여명은 체포되었다. 이들은 위주강(漁珠江)에 떠 있는 몇 척의 연결된 배에 갇혀 있다가 후먼(虎門)요새 감옥으로 보내졌다. 중산함에 구금된 공산당원 20명은 한밤중에 난스터우(南石頭) 감옥으로 보내져 쳐형된다.
「청당(淸黨)」운동은 국공 사이에 잠재되어 있던 균열을 표면화시키고 국공합장의 동상이몽을 깨뜨렸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원수로 변하고 어제의 혁명자가 오늘의 반혁명자가 되었다.
황포군관학교 제 5기 장흥 장군의 회고록을 보면 「청당(淸黨)」운동 분위기를 알 수 있다.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 동기는 내가 망명할 때 처음 세운 뜻은 혁명 투사가 되기를 맹세하였던 바, 이 투지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우선 혁명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당시 중국의 대혁명가이신 쑨원씨의 영도하에 만주족 청나라의 전제정권을 전복하고 민주공화국을 건립하였으나 국내적으로는 각 성의 군벌들이 할거해 영웅을 칭하며 중앙 정권 통일을 방해했다. 국외로는 세계 열강의 침략을 받아 국가주권을 상실케 되어 민생이 도탄에 빠져 정권이 붕괴될 위기에 부닥치게 되자 쑨원씨는 혁명재건운동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중국 남부 광둥성에서 다시 혁명 정부를 조직했다. 그런 한 편 혁명 무력을 육성하기 위하여 주장 유역인 황포 섬에 혁명군사정치학교를 세우고 장제스씨를 교장으로 임명 후 국내 청장년들을 모집하여 혁명간부교육을 실시했다. 그 결과 전국 청년들이 앞다투어 응모할 뿐만 아니라 국내의 혁명 분위기가 극도로 고조됨에 따라 전 아시아 약소민족 국가까지 파급되어 우리 한국에서도 적지 않은 청년들이 그 학교 3기부터 앞다투어 입학하므로 나 역시 이 기회를 이용하여 1926년 11월 황포군관학교 5기생 보병과에 입대하여 처음으로 군사교육을 받게 되었다.
당시 쑨원 선생께서 혁명재건운동에 치중하는 시기이므로 학교 당국의 교육 목적이 혁명간부 인재를 육성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교육방침에 있어 군사학술보다도 쑨원의 학설을 근거로 하는 정치교육에 치중하므로 훈련 배정 시간 중의 절반 이상이 정치 교육이었다. 교수진에 있어서는 군사학을 가르치는 바오딩군관학교 및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자 수십 명 외에 소련인 고문관과 국내의 저명한 공산당 지도자인 천두슈(陳獨秀), 덩옌다(鄧演達), 숑숑(熊雄) 등이 전교 학생의 훈육을 담당하였다. 전교 학생 총수 3000여 명 중에 우리나라 학생이 전 의열단장인 김원봉, 현재 북한군 총 책임자인 최용건교관 외 40여 명이 있었다. 본래 쑨원씨가 이 학교를 설립한 목적이 자기가 손수 만든 삼민주의 학설에 근거한 중국국민당 혁명군사 간부를 양성할 계획이었으나 불행히도 그가 혁명 대업에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지가 3년이 되었다. 이 때를 기회로 공산분자들이 정부산하 각계각층에 대거 침투하여 자기 당의 세력을 심는대 급급하였다. 우리 학교도 이런 환경에 처하였기 때문에 명실공히 공산당 간부 양성소로 변질되어 세상에서 '제 2의 모스크바'라는 칭호를 받았었다.
교장 장제스씨는 초지일관으로 쑨원씨의 유지를 받들어 혁명 재건의 큰 포부를 완수하려 하였으나 주위의 공산당들에게 포위를 당하여 속수무책인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 차에 공산분자들이 장교장의 반공정신이 철저함을 알고 비밀리에 숙청할 음모를 책동하다가 도리어 교장 장제스에게 알려졌다. 장제스가 선수를 쳐 교내 우익 학생과 허잉친씨가 통솔하는 제 1군 장병들을 총 동원하여 교내 공산당원들을 전부 숙청하여 버리고 순수한 삼민주의를 신봉하는 환경으로 회복하였다. 이때부터 장제스씨가 열렬히 반공투쟁을 계속하여 왔으나 현재는 도로 중국공산당에 몰리어 그 광대한 대륙을 송두리째 뺏기고, 해도 가운데 대만으로 쫒기어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세상 정세의 무궁한 변화는 참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9]
당시 쑨원 선생께서 혁명재건운동에 치중하는 시기이므로 학교 당국의 교육 목적이 혁명간부 인재를 육성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교육방침에 있어 군사학술보다도 쑨원의 학설을 근거로 하는 정치교육에 치중하므로 훈련 배정 시간 중의 절반 이상이 정치 교육이었다. 교수진에 있어서는 군사학을 가르치는 바오딩군관학교 및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자 수십 명 외에 소련인 고문관과 국내의 저명한 공산당 지도자인 천두슈(陳獨秀), 덩옌다(鄧演達), 숑숑(熊雄) 등이 전교 학생의 훈육을 담당하였다. 전교 학생 총수 3000여 명 중에 우리나라 학생이 전 의열단장인 김원봉, 현재 북한군 총 책임자인 최용건교관 외 40여 명이 있었다. 본래 쑨원씨가 이 학교를 설립한 목적이 자기가 손수 만든 삼민주의 학설에 근거한 중국국민당 혁명군사 간부를 양성할 계획이었으나 불행히도 그가 혁명 대업에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지가 3년이 되었다. 이 때를 기회로 공산분자들이 정부산하 각계각층에 대거 침투하여 자기 당의 세력을 심는대 급급하였다. 우리 학교도 이런 환경에 처하였기 때문에 명실공히 공산당 간부 양성소로 변질되어 세상에서 '제 2의 모스크바'라는 칭호를 받았었다.
교장 장제스씨는 초지일관으로 쑨원씨의 유지를 받들어 혁명 재건의 큰 포부를 완수하려 하였으나 주위의 공산당들에게 포위를 당하여 속수무책인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 차에 공산분자들이 장교장의 반공정신이 철저함을 알고 비밀리에 숙청할 음모를 책동하다가 도리어 교장 장제스에게 알려졌다. 장제스가 선수를 쳐 교내 우익 학생과 허잉친씨가 통솔하는 제 1군 장병들을 총 동원하여 교내 공산당원들을 전부 숙청하여 버리고 순수한 삼민주의를 신봉하는 환경으로 회복하였다. 이때부터 장제스씨가 열렬히 반공투쟁을 계속하여 왔으나 현재는 도로 중국공산당에 몰리어 그 광대한 대륙을 송두리째 뺏기고, 해도 가운데 대만으로 쫒기어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세상 정세의 무궁한 변화는 참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9]
소련은 이런 장제스의 「청당(淸黨)」운동에 발끈하여 황포군관학교의 교관들을 모두 철수시켰는데, 그나마 제대로 군사학을 전공했던 소련인 교관들이 모두 사라짐에 따라서 난징으로 옮겨온 군관학교의 교육의 질은 황포보다 더 떨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일본 육사에서 공부한 탕언보가 부랴부랴 일본 사관학교 커리큘럼을 참고하여 군관학교의 교육과정을 만들었다고 한다.
2.10. 중국공산당의 반격
1927년 12월, 탄압을 받던 중국공산당이 코민테른의 지휘하에 광저우 국민당 정권 전복을 시도했다. 광저우를 지키는 국민당 주력군이 광시(廣西)계열 군벌과 전쟁하러 나가 광저의에 군사력이 미약한 틈이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노동자, 학생, 군인 등 6000여명을 동원해서 폭동을 일으켰다. 「광저우 코뮌」이라고 한다.「광저우 코뮌」기간, 황포군관학교 학생군과 교도단이 주력군이었으며 「적위대(赤衛隊)」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중국국민당 병력들은 3일만에 반격해서 폭동을 진압했다. 광저우 경비사령부는 공산당원처럼 보이는 사람은 현장에서 총살한다. 서양 양복을 입은 민간인이라도 공산당원으로 보이면 모두 처형했는데 약 5000여명이 죽었다.
| 중국국민당청당(中國國民黨清黨) 공산당원 처형 장면 |
2.11. 광저우 황포군관학교 본교 폐교
장제스는 광저우 황포군관학교를 폐교하고 국민정부가 소재하는 난징에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설립한다. 학교 이전을 예정하고 황포군관학교 제 6기부터 입교생을 1총대와 2총대로 분류해서 모집했다. 6기 1총대와 76시 1총대는 난징의 중앙육군군관학교로 전학하고 6기 2총대와 7기 2총대는 광저우에 남아 6기와 7기생은 광저우와 난징에서 각각 졸업했다.「광저우 코뮌」사건 이후, 황포군관학교는 일시 교무행정이 중단되었다. 1929년 9월, 7기생 2총대가 졸업하고 광저우의 중앙군사정치학교는 입학을 중지하고 1930년 10월에 교무를 마무리 한다.
1928년 5월부터 부교장 리지선(李濟深)아 교명을 국민혁명군관학교로 개명하고 학생을 모집해 황포군관학교를 대체해서 운영했다. 국민혁명군관학교와 난징육군군관학교는 한동안 병존한다.
2.12. 난징중앙육군군관학교
난징에 세워진 중앙육군군관학교는 각지 분교생을 모집하여 황포군관학교 제 6기를 계승한다. 1927년 5월 광저우시, 우한시, 창사시의 황포군관학교 분교생, 학병단 학병 푸젠 육군간부학교 보병, 포병, 공병, 교통, 치중대 등 3,534명이 난징중앙육군군관학교 제 6기에 편입했다.1928년부터 교사, 숙사, 도서관을 증축하여 건물 70여 동, 1000여칸의 교실로 확장한다. 1937년 본격적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10여 년간 6기부터 13기를 운영하여 수 만명의 초급, 중급 간부를 배출하고 한국광복군에서는 제 8기 아나키스트 나월환을 시작으로 10기 이후부터 김구계 청년들이 입교하게 된다.
낙양분교에서 약 7 개월 정도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알고 있다. 그 다음 여름 관장님 포함해서 17명이 본교로 가시기 전에 7개월 동안 낙양에서 훈련을 받았을 때 생각나는 것은?
우리를 교육시키고 오광선 그양반이 만주에서 독립군을 하고, 지청천 장군 부하로 일하고, 조경한 그 양반은 맡은 것이 별로 없죠. 한원 이란 분은 그러다가 중간에 17 명이 선발 되어서 난징으로 전학을 했지요. 처음에 가니깐 강의에 적응을 못했지요. 한인반 중국의 초급 장교를 훈련시키는 것이 우리나라 장교들 훈련을 같았습니다. 동기생들의 명부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졸업을 못했지요. 양은상은 수류탄 투척 중에 사고나서 죽었습니다. 군관학교는 3년 훈련기간 중에서 1년 동안 꼭 사병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2년 학생 노릇하는데, 우리는 1년 지나고 학생 때 들어 갔습니다.
16명이 다같이 가셨는데 다 같은 방에서 교육을 받으셨습니까?
다 다른방에 들어 갔죠. 중국 사람들과 똑같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내가 흑룡강성에 해륜 사람이거든…. 우리가 시험을 쳐서 들어갈때 그 때에 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난 다음에 만주 출신이 많았습니다. 4분의 1정도 그 중에서 예를 들어서 만주 흑룡강성에 저놈은 우리 거기놈이 아닌데 속이고 들어 왔구나 하는 것은 알지요. 만약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외국사람이 와서 중국 사람이라고 하면 손가락질 하고 빈정댈텐데 그렇게 할것인데… 중국 국민의 국민성은 잘되있다. 우리나라 사람 같으면 찝쩍거리고 장난도 하고, 놀리고 그렇게 했을텐데… 어쨌든 공부를 좀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전술 문제에 대해서, 전술 시간에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전술 반에서는 내가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 한시간 강의를 하고 시험을 치는데, 시험을 치고 가지고 가서 내주지는 않습니다. 다음 전술 시간에 와서 100점 한 사람 누구 누구 10 여 명 나오지요. 전술 시험에는 매번 100점을 맞았습니다. 군관학교 시절 100미터 선수, 철봉, 사격, 우리 중대에 사격 선수로 나가고 어디하고 대항한다 하면 꼭 나갔습니다. 공격부대가 있는데 이금란이란 애가 있습니다. 아주 탄탄하고 중기관총 하나 그통하나 들고 탁 접어서 높은데 산꼭데기에 올라가서 탁놓고 갖다 놓고… 뒤에서 기어 올라오고 거기서 공부하는데 남 한테 지진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러가지 훈련을 평소에 잘받으셨기 때문에 비행기장 전투나 수비 전투에서도 많은 전사가생기는데도 이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고 그래야지요. 내가 맞고 먼저 적을 쓰러 뜨려야 하기 때문에 네가 안죽으면 내가 죽는다. 사격도 잘하고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서 척척 총알을 잘 피하고…. 육군 군관학교 시절 받으신 훈련이 독립군으로써 광복군 운동 할때나 해방 후 군인의 길을 걷는데 기초가 되신것 같습니다. 군관학교 시절 교육은 짜임새가 있었습니까?
아주 짜임새가 있었습니다. 아주 억압을 하고 예들 들어서 내무반에 나무상자라고 양철로 짠 것이 있는데 그것도 착착 규모 있게 해서… 토요일 오후에 내무 검사를 합니다. 한마디 나무랄데도 없는데 구대장이 와서 뒤집어 놓는거지요. 이게 뭐냐고 하고 막 때리고 그래도 다 받아들여야지 인상이 조금 이라도 달라지면… 그렇게 되기 쉽거든. 잘못한게 하나도 없는데 난 한번도 맞아 본적도 없지만 옆 남들 맞는 것을 보면 저놈들 너무하지 않냐 그래도 이게 의미가 있구나. 상관의 명령, 규정 절대 복종이야 그 복종심을 기르기 위해서 억압을 하는 거야 평소에 그렇게 길러야 총알이 비오듯 하는데도 뛰어 나가야 되는 거야 그런 훈련이 있기에…. 이런 훈련을 받아야 나중에 사병들 복종심을 길르는 훈련이 되겠구나 하는 거죠.
규칙적인 일과 생활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기상 나팔소리에 일어나고 침상 밑에 세수대야가 있고 양치질도 하고 그것을 다 들고 변소를 간다. 대변이 마렵던지 안마렵던지…. 그냥 습관이 되니까 볼일은 본다. 다른때는 볼일 볼 시간도없다. 침상 밑에다 놓고 선 그런 훈련을 했기 때문에 어려움도 별로 없고, 전장에 나가서도 하는거지…
중국인들 같은 동료들 훈련생들 친구 있지 않습니까? 광복군 활동할 때 교류가 있었던 동기들 얘기를 해주시겠습니까?
이준식 장군이 국내 전진 장군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미국 비행기를 타고 7~8명을 데리고 왔다 갔다 했지요. 못내리게 해서 다시 돌아오고… 74고지에 방문을 했더니 마침 거기에 동기생들이 있어서 내가 지금 군대를 하나 맡았는데 당장 군량미가 부족한데 일본놈들 군대가 먹든 양식 남은 것이 있으면 달라고 했더니 주었습니다. 트럭에 싣고서 막 갖다 주었지요. 군관학교 동기생의 혜택을 많이 받았습니다. 와가지고 또 못하는 거 있으면 도와 준다. 독립이 되면 돌아가면 다 돌아가면 군대라고 한자리 하겠지 그러면 교류를 한다고 말이에요… 너희 나라 독립이 되면 괜찮아 질것이 아니냐 그러면 갈게라는 것이었죠.
그때 군관학교에서 나중에 한국광복군으로 오신 분들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조선의용대로 가신 분들은 있지 않습니까?
우리 졸업생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조선의용대 중에 생각나는 사람은 광주서 올라온 사람들이 갔는데…. 우리 같은 졸업생(10기)은 이의흥(李義興)이라고 그 사람은 만미터 선수입니다. 조선 사람이죠. 조선의용대는 지금 김승곤 광복회 회장 하던 사람 뤄양에 같이 다녔고 난징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거거서는 같이 다녔지요. 광복군이 된 분들은 김효철이라고 하나 있습니다. 난징에 같이와서 공부 했는데 아직도 생존해 있습니다. [10]
우리를 교육시키고 오광선 그양반이 만주에서 독립군을 하고, 지청천 장군 부하로 일하고, 조경한 그 양반은 맡은 것이 별로 없죠. 한원 이란 분은 그러다가 중간에 17 명이 선발 되어서 난징으로 전학을 했지요. 처음에 가니깐 강의에 적응을 못했지요. 한인반 중국의 초급 장교를 훈련시키는 것이 우리나라 장교들 훈련을 같았습니다. 동기생들의 명부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졸업을 못했지요. 양은상은 수류탄 투척 중에 사고나서 죽었습니다. 군관학교는 3년 훈련기간 중에서 1년 동안 꼭 사병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2년 학생 노릇하는데, 우리는 1년 지나고 학생 때 들어 갔습니다.
16명이 다같이 가셨는데 다 같은 방에서 교육을 받으셨습니까?
다 다른방에 들어 갔죠. 중국 사람들과 똑같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내가 흑룡강성에 해륜 사람이거든…. 우리가 시험을 쳐서 들어갈때 그 때에 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난 다음에 만주 출신이 많았습니다. 4분의 1정도 그 중에서 예를 들어서 만주 흑룡강성에 저놈은 우리 거기놈이 아닌데 속이고 들어 왔구나 하는 것은 알지요. 만약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외국사람이 와서 중국 사람이라고 하면 손가락질 하고 빈정댈텐데 그렇게 할것인데… 중국 국민의 국민성은 잘되있다. 우리나라 사람 같으면 찝쩍거리고 장난도 하고, 놀리고 그렇게 했을텐데… 어쨌든 공부를 좀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전술 문제에 대해서, 전술 시간에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전술 반에서는 내가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 한시간 강의를 하고 시험을 치는데, 시험을 치고 가지고 가서 내주지는 않습니다. 다음 전술 시간에 와서 100점 한 사람 누구 누구 10 여 명 나오지요. 전술 시험에는 매번 100점을 맞았습니다. 군관학교 시절 100미터 선수, 철봉, 사격, 우리 중대에 사격 선수로 나가고 어디하고 대항한다 하면 꼭 나갔습니다. 공격부대가 있는데 이금란이란 애가 있습니다. 아주 탄탄하고 중기관총 하나 그통하나 들고 탁 접어서 높은데 산꼭데기에 올라가서 탁놓고 갖다 놓고… 뒤에서 기어 올라오고 거기서 공부하는데 남 한테 지진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러가지 훈련을 평소에 잘받으셨기 때문에 비행기장 전투나 수비 전투에서도 많은 전사가생기는데도 이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고 그래야지요. 내가 맞고 먼저 적을 쓰러 뜨려야 하기 때문에 네가 안죽으면 내가 죽는다. 사격도 잘하고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서 척척 총알을 잘 피하고…. 육군 군관학교 시절 받으신 훈련이 독립군으로써 광복군 운동 할때나 해방 후 군인의 길을 걷는데 기초가 되신것 같습니다. 군관학교 시절 교육은 짜임새가 있었습니까?
아주 짜임새가 있었습니다. 아주 억압을 하고 예들 들어서 내무반에 나무상자라고 양철로 짠 것이 있는데 그것도 착착 규모 있게 해서… 토요일 오후에 내무 검사를 합니다. 한마디 나무랄데도 없는데 구대장이 와서 뒤집어 놓는거지요. 이게 뭐냐고 하고 막 때리고 그래도 다 받아들여야지 인상이 조금 이라도 달라지면… 그렇게 되기 쉽거든. 잘못한게 하나도 없는데 난 한번도 맞아 본적도 없지만 옆 남들 맞는 것을 보면 저놈들 너무하지 않냐 그래도 이게 의미가 있구나. 상관의 명령, 규정 절대 복종이야 그 복종심을 기르기 위해서 억압을 하는 거야 평소에 그렇게 길러야 총알이 비오듯 하는데도 뛰어 나가야 되는 거야 그런 훈련이 있기에…. 이런 훈련을 받아야 나중에 사병들 복종심을 길르는 훈련이 되겠구나 하는 거죠.
규칙적인 일과 생활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기상 나팔소리에 일어나고 침상 밑에 세수대야가 있고 양치질도 하고 그것을 다 들고 변소를 간다. 대변이 마렵던지 안마렵던지…. 그냥 습관이 되니까 볼일은 본다. 다른때는 볼일 볼 시간도없다. 침상 밑에다 놓고 선 그런 훈련을 했기 때문에 어려움도 별로 없고, 전장에 나가서도 하는거지…
중국인들 같은 동료들 훈련생들 친구 있지 않습니까? 광복군 활동할 때 교류가 있었던 동기들 얘기를 해주시겠습니까?
이준식 장군이 국내 전진 장군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미국 비행기를 타고 7~8명을 데리고 왔다 갔다 했지요. 못내리게 해서 다시 돌아오고… 74고지에 방문을 했더니 마침 거기에 동기생들이 있어서 내가 지금 군대를 하나 맡았는데 당장 군량미가 부족한데 일본놈들 군대가 먹든 양식 남은 것이 있으면 달라고 했더니 주었습니다. 트럭에 싣고서 막 갖다 주었지요. 군관학교 동기생의 혜택을 많이 받았습니다. 와가지고 또 못하는 거 있으면 도와 준다. 독립이 되면 돌아가면 다 돌아가면 군대라고 한자리 하겠지 그러면 교류를 한다고 말이에요… 너희 나라 독립이 되면 괜찮아 질것이 아니냐 그러면 갈게라는 것이었죠.
그때 군관학교에서 나중에 한국광복군으로 오신 분들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조선의용대로 가신 분들은 있지 않습니까?
우리 졸업생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조선의용대 중에 생각나는 사람은 광주서 올라온 사람들이 갔는데…. 우리 같은 졸업생(10기)은 이의흥(李義興)이라고 그 사람은 만미터 선수입니다. 조선 사람이죠. 조선의용대는 지금 김승곤 광복회 회장 하던 사람 뤄양에 같이 다녔고 난징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거거서는 같이 다녔지요. 광복군이 된 분들은 김효철이라고 하나 있습니다. 난징에 같이와서 공부 했는데 아직도 생존해 있습니다. [10]
2.13. 청두본교 시기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항일전쟁이 시작된다.1937년 8월 중하순경에 난징분교 11기생이 졸업하고 즉시 부대에 배속되어 전장터로 나갔다. 일부 학생은 뤄양중앙육군군관학교로 가고[11] 나머지 재학중이 학병들은 주장(九江), 우한을 경유해 1939년 초, 원래 있던 청두분교에서 합류했다.
1949년 말, 14~23기까지 13년간 최대수 학생을 배출했다. 이 시기를 청두본교시기라고 한다. 필요에 따라 청두본교는 3년 학제를 2년으로 개편한다. 항일전쟁 8년간 속성이지만, 규범적으로 약 4000명의 군사간부를 배출한다.
일본이 패망 후, 약 4년간 중국은 제 2차 국공내전을 치룬다. 청두군관학교는 육군군관학교로 개명하고 일반적인 초급간부를 양성했다. 1949년 12월, 중국공산당이 청두시를 점령하여 육군군관학교는 대륙에서 역사를 마치고 대만으로 이동한다.
3. 교육과정
교육과정은 군사교육학과, 정치사상 교육. 그리고 자율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교육으로 나뉘어진다.3.1. 군사교육학과
교육내용은 정치 군관으로서 식견을 갖추는 이론교육과 실제 군사훈련이다.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군사지식 뿐만 아니라 뚜렷한 목표가 있는 혁명정신이었다. 쑨원의 삼민주의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동일한 위치를 차지했다. 제 1기 정규교육 기간은 원래 3년을 계획했으나 교도단을 훈련시킬 간부가 시급해서 6개월로 단축했다. 전쟁이 나면 학생들이 동원되어 각 기수마다 교육기간이 다 다르다. 오전에는 이론 수업을 했다. 교수부 교관이 학과를 가르쳤다.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정리한 내용을 연구해서 강의하고, 학생들은 필기하면서 학습하고 암기했다. 오후에는 주로 배운 내용대로 야외훈련을 받았다.| 황포군관학교의 교실 |
기본군사지식
* 보병조전
* 사격교범
* 야외근무령
* 보병조전
* 사격교범
* 야외근무령
4대 과목
* 전술
* 병기
* 교통
* 축성
* 전술
* 병기
* 교통
* 축성
기타 : 전술학, 병기학, 교통학, 지형학, 군제학, 축성학, 군대내무규칙, 육군예절, 군대용어, 전술작업, 실지측도 등 술과, 군사훈련과 실전훈련, 제식교련, 실탄사격, 마술(馬術), 검술, 총검술, 행군, 숙영, 전투연락, 반(班), 배(排), 연(連), 영(營)을 조직해서 전투에 임하는 법을 익혔다.
- 보과 : 기본군사지식
- 포과 : 기본 군사지식, 야전포병조전, 야전포병사격교범, 진중 근무, 기마술, 산포, 야포 등
- 공과 : 기본 군사지식, 공병조전, 지형학, 사격교범, 가교교범, 통신교범, 폭파교범, 수로도로교범 등
- 군수물자과 : 군수물자조전, 철도선박자동차운송학, 측도학, 사격교법, 마학마술교범, 응용전술수영법, 운송탄약, 차량검사, 기계 조작
- 헌병과 : 육군현행처벌령, 육군경찰학, 국제대요, 정찰학, 포승실습 등
3.2. 정치 사상 교육
황포군관학교 설립 목표는 정치적 식견으로 무장한 군사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이다. 이런 군사지도자를 배출하려면 정치이론교육을 병행해야 했다. 1~5기생은 정치훈련반 훈련 개요, 삼민주의, 제국주의 해부, 사회발전사, 중국 민족혁명 문제, 제국주의 침략사, 중국 근대 민족 혁명사, 각 국 정당 사략, 국민당사 등 과목을 배웠고, 후에 중앙 군사 정치교육 대강, 사회학개론, 소련 연구,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등 26개 과목이 추가로 개설되었다. 내용은 대부분 기본적인 혁명 이론과 혁명에 대한 지식이다.- 기초 지식 교육 : 중국 사회의 발전 역사를 통해 중국 근대 이후의 사회, 정치, 경제 형세 변화에 대하여 거시적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이를 기초로 당대 사회 정치 국면과 혁명 형세에 대한 미시적 인식을 제고 하고자 했다. 이런 교육을 통해 학생들은 혁명에 대한 내적 동기를 부여하고 혁명 전투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 가치관 교육 : 삼민주의 교육은 청나라 봉건 통치에 반대하는 정확한 민족의식을 심었다. 불평등 과목에서는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 현실을 배우고 민족감정을 유발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 과목은 10월 러시아 혁명의 성공 정신을 가르쳤다. 농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과목은 혁명운동에 동참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 규율 교육 : 일상생활과 학습생활 기율(학습 태도, 교사 존중, 용모청결 암호소통 등)을 엄격하게 지키게 했다. 학교 설립 목표는 주의건군(主義建軍), 건립당군(建立黨軍)이다. 즉, 혁명정신으로 무장한 군을 만들고 당의 지시를 따르는 당군을 육성한다는 뜻이다.
3.3. 자율적인 사관정치 교육
서로 다른 당파의 사상과 이론을 포용하도록 국공 양측의 유명인사를 초청해서 정치강연회를 개최했다. 자유롭게 의견을 발표하는 토론회, 연극단과 선전대, 각종 간행물을 출판해서 전국각지로 발송하기도 했다.- 문답식 교육 : 정치교육은 질의-응답-정리하는 3단계 절차로 진행된다. 수업 후에 조별 토론회를 하며 배운 내용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발언함으로서 자발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 강연회 개최 : 정치 강연자는 학교의 주요 대표들과 정치 교육 관계자, 혁명가, 사회저명인사들이다. 삼민주의 재해석 시간을 이용해 마르크스-레닌주의 원리를 강의하고, 「광둥 농민의 왕」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공산당원 펑파이(彭湃)가 농민운동 전개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 질의와 응답 우편함 제도 : 정치사상과 관련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글로 써서 우편함에 넣는다. 매주 월요일마다 담당 교관이 질문을 정리해서 수업시간이나 토론회 시간에 상세하게 답변을 했다. 이런 학습방법은 교사와 학생 사이에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훗날 『정치 문답집』으로 출판되었다.
- 담화 : 교관은 학생 개인의 상황을 이해하고 사상을 확인하기 위해 시간이 나면 불러 면담했다. 학생과 교관사이에 친밀감이 형성되고 학생이 교관을 존중하는 분위기도 조성되었다.
- 이론과 실천 결합 : 각 지역에서 일어나는 농민운동, 학생운동, 노동운동 등 각종 시위나 혁명에 참여하는 동기부여했다.
- 기타 : 신문 『군인일보(軍人日報)』, 잡지『화화(火花)』, 포스터 문집 등을 제작하고 연극<황화강>, <자유를 달라>, <아편전쟁>등 가무로 대중들을 교화하고 클럽 및 동호회를 조직해서 혁명을 홍보했다.
4. 생도
전국의 국민당 당원들은 18세에서 25세 사이의 중학교 내지 고급소학교 졸업생을 후보로 추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펼쳤고 그렇게 선발된 지원자들은 나라에 봉사하고자 하는 이유를 쓴 글을 제출해야 했으며 최소 3년간 복무해야 한다는 조건에 응해야 했다. 총 645명의 1기 생도가 모집되었고 1926년에는 생도의 수가 3천 명에 달했다. 하지만 황푸군관학교의 정치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황푸군관학교는 무산계급의 훈련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도의 75%가 지주와 중농, 관료 집안의 자제였다.1기 입학생은 500명이었으나 중간에 편입등이 많아서 최종적으로는 645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기는 6개월 과정으로 전원 보병과였으나 이후에는 포병과 기병, 공병 등의 여러 병종이 추가되었다. 2기부터는 교육기간이 1년으로 늘어났고, 3기부터는 13개월 등으로 점점 늘어나서 최종적으로 황포에서의 마지막인 7기(1929년 1월~ 1930년 9월)가 되면 20개월의 교육기간이 되었다. 졸업생수는 1기부터 7기까지 각각 645, 499, 1233, 2654, 2418, 3970, 1518명이다.(우한 분교 포함)
4.1. 조선인 교관
| 이름 | 출신 | 약력 | 최후 |
| 김훈 | 평양 | 신흥무관학교,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관, 교성대 대장, 윈난강무당 제 16기, 황푸군관 제 3~5기 기술주임 교관, 예팅독립단 3연대장, 중국공산당만주성위원회 군사위원/서기, 홍색간부단 참모장 | 옌시산 군대와 교전하는 후 전투장 수습하던 중 전사 |
| 이용 | 함경남도 북청 | 이준 열사의 장남, 러시아 한인사회당 군사부 교관, 대한국민의회 군사부 총사령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동로군 사령관, 러시아 이만 고려의용군 결성, 황푸군관학교 군사고문 | 1946년 6월 8일, 이승만 남한 단독정부 설립 반대성명 발표하고 1948년 남북연석회의 자진 월북함. |
| 양달부 | 연해주 | 모스크바 홍군대학 포병 전공, 황푸군관학교 군사고문단, 황푸 4기 포병교관, 상터우 동로군 총사령부 포병고문, 동강공산당학교 설립 | 국민혁명군에서 추방됨. |
| 강섭무 | 황푸군관 창립시 소련의 정치고문 미하일 보로딘, 군사고문 가룬과 광저우에 와서 소련 고문 통역 겸 포병훈련교관. | ||
| 김병현 | 모스크바 홍군군관학교 졸업 후, 소련군사고문들과 황푸군관학교 도착, 광저우 폭동 실패, 하이루펑 공산당 학교 교관. | ||
| 김준섭 | 함경북도 명천군 | 모스크바군관학교 기관총과, 국민혁명군 제 6군 55단 기관총연대 교관, 광둥혁명군 복무, 북벌전쟁 포병 선봉대 | 러화(樂化)역 전투에서 전사 |
| 손두환 | 황해도 은율군 | 일본 메이지대학,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밀항,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 임시정부 군법국장, 박은식 내각 경무국장, 황푸군관학교 장제스의 부관, 소련 유학, 한인애국단 활동, 중앙육군군관학교 일본어 교관, 한국독립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위원회, 근로인민당 중앙감찰위원장, 남북연석회의 참석, 북한최고인민회의 제 1기 대의원 선임 | 8월 종파사건으로 연루되어 숙청 |
| 오성륜 | 함경북도 온성 | 봉오동 대한도독부, 다나카 기이치 암살미수, 모스크바 공산주의 노동대학 수학, 황푸군관 러시아어 교수, 노농혁명군 제 4단 참모, 중국공산당만주성위원회 소수민족위원회 실무위원, 홍군유격대 조직, 조국광복회 발족, 동북항일연군 제 1군 2사단 정치부 주임, 만주국 치안부 고문 | 내몽골 자치구에서 지병으로 병사 |
| 강파 | 평안북도 정주 | 상하이 남화학원 수학, 황푸군관학교 교관 | 북벌전쟁 난창 딩자교에서 전사 |
| 이검운[12] | 함경남도 함흥 | 의열단 윈난강무당 수학, 허난 펑위샹 국민군 제 2군 교도단 교관, 제2차 직봉전쟁 참전, 황푸군관학교 포병과 교수, 주장(九江)에서 장제스 구출, 공산주의자 혐의로 체포됨,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 교관, 하얼빈에서 재중한인청년동맹 조직 | |
| 오명 | 미상 | 황푸군관학교 제 5기 훈련부 조교, 한인청년동맹회 감찰위원, 제 19로군 상하이 전투 참전 | |
| 최용건 | 평안북도 용천군 | 푸젠성 국적 취득, 윈난강무당 17기 보병과 입학, 황푸군관학교 제 5기 구대장 교관으로 취직, 황푸군관학교 특무영 제 2영 영장, 흑룡강 동북구 라오허현 한인소학교 설립, 라오허민중반일유격대 대장,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4연대 참모장, 동북항일연군 제 7군 당서기 겸 군대장, 소련극동방면군 제 88독립보병단 입단, 북한 보안국장, 보위상, 북한 부주석 | 평양에서 병사 |
| 안응근 | 평안남도 신천 | 안중근의 사촌동생, 임시정부 외교위원, 윈난강무당 17기, 만주 정의부 군사위원, 황푸군관 5기 교관, 한인애국단 조사위원, 김구 경호원, 텐진 영국조계지에서 일본군 군사활동 정보수집,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1948년 남북연석회의 전에 김구를 대신하여 파견 | 북한에서 숙환 |
| 공주선 | 미상 | 한국노병회 제 4회 결정으로 북경학병단에서 유학, 윈난강무학당 포병과 졸업, 황푸군관학교 제 6기 교관, 상하이 전투 참전 | 1933년 옥관빈 피살사건 혐의자로 평북경찰서로 강제압송 |
| 채원개 | 평안남도 영원군 | 대한통의부 독립군 대장, 허난성 뤄양강무학교, 직봉전쟁, 만주참의부 군사부부장, 황푸군관학교 독립학생대 대장, 유월한국혁명청년회 집행위원, 한국독립당, 한국광복군 참모, 통위부 근무 | 노환으로 사망 |
| 운암 김성숙 | 평안북도 철산군 | 불교유신회 활동, 중국 민국대학교 경제과 입학, 광둥 중산대학 법학과 정치학과 입학, 국민혁명군 제2연대 5연대장, 중국공산당 탈당, 조선공산주의자동맹 조직, 조선의용대지도위원 및 정치조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차장 선임, 임시정부 국무위원 | 미군정비판 설화사건으로 체포 구금, 근로인민당 조직, 박정호 간첩사건 누명으로 구금, 5.16 군사정변으로 10개월 구금 집행유예로 석방, 숙환으로 사망. |
| 김산 | 평안북도 용천 | 평양숭실중학 자퇴, 베이징 협화의과대학 수학, 중국공산청년동맹 가입, 중산대학 경제학과, 하이루펑 소비에트인민위원회 심판위원, 베이싱피위원회 중국공산당 조직부장, 조선민족해방동맹 결성, 옌안항일군정대학 교수 | 일본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처형[13] |
| 박영 | 함경북도 경흥군 | 대한군무도독부 참모장, 대한북로독군부 군무부장,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참전, 흑룡강주 고려의용군 군사위원, 중국으로 망명 | 국민당 리푸린(李福林) 전지에서 학살당함. |
| 방우용 | 경상남도 언양 | 경성의학전문학교 1기 졸업, 의민단[14] 조직, 동도독군부 창설,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참전[15], 난징 황푸군관학교 7기 교본부 군의교관, 조선의용대 제 3지대, 백구은 국제평화병원 내과과장, 화북조선독립동맹 연안지부 집행위원, 북한 임시중앙위원, 조선신민당 중앙위원, 조선노동당 검열위원 | 8월 종파사건에 연루되어 숙청 |
| 김규흥 | 충청북도 옥천 | 대한자강회, 고종의 임명으로 중국망명, 중국동맹회, 광동군 정부 도독 군사고문, 황푸군관학교 군부대 심장(審長) 한국독립당 광둥지부 | 밀정 가능성 있음. 톈진시에서 병사 |
4.2. 조선인 생도
| 독립운동가들이 수학한 군사학교 목록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D4D4D, #696969 20%, #696969 80%, #4D4D4D)" {{{#!wiki style="margin: 0 -10px -5px;min-height:calc(1.5em + 5px); color:#fede58"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운영주체 또는 설립자 | 학교명 | ||
| 민족자본 군사학교 | ||||
| 대한제국 | 육군무관학교 | |||
| 신민회 | 신흥무관학교 | |||
| 이동휘 | 동림무관학교 | |||
| 북로군정서 | 대한군정서 사관연성소 | |||
| 대한의용군 | 대한의용군 사관학교 | |||
| 의열단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임시정부 육군무관학교 윌로우스 비행학교 뤄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 |||
| 국외 군사학교 | ||||
| 중화민국 국민정부 | 황포군관학교 육군대학 | |||
| 전계군벌 | 윈난육군강무학교 윈난항공학교 | |||
| 북양군벌 | 바오딩육군군관학교 뤄양군관학교 | |||
| 검계군벌 | 구이저우육군강무학교 | |||
| 일본 제국 | 일본 육군사관학교 | |||
| 프랑스 | 생시르 사관학교 | |||
| 미국 | 버지니아 군사대학 | |||
|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와 뤄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은 엄밀히 말해 중국 국민혁명군 군사학교들의 부속기관이었으나, 교관진 등 운영위원들과 교과과정은 한국인들의 손으로 운영됨. ※ 일본육사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주로 국치 이전 대한제국군의 장교로서 유학하여 일본육사에서 수학한 이들임. ※ 생시르, 구이저우, 버지니아 군사대학의 입교자는 각각 1명씩, 즉 이위종, 김홍일, 이복원임. | ||||
황포군관학교가 설립되기 전, 한국인들은 주로 신규식(1879~1922)이 소개하는 윈난육군강무학교에서 군사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황포군관학교가 설립되자 한국인 청년들은 윈난에 비해 교통도 편리하고 교통비도 저렴한 광저우로 왔다.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홍콩까지 와서 다시 주광선(九廣線, 주롱~광저우) 기차를 갈아타면 곧바로 광저우에 도착한다.
쑨원이 세상을 떠나고 1926년, 제 2차 중국국민당 전국대표대회에 초청받은 여운형이 쑨원의 정권을 이어받은 장제스를 면담하고 한국 학생이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
① 혁명동지로 인정할 때는 어떤 경우든지 막론하고 입학을 허가할 것.
② 재학 중 학비와 식비를 면제하고 서적을 급여하며 비복과 용돈도 지급할 것.
③ 본교 졸업 후 이어서 2년 간 반드시 중국국민당 정부에 의무적으로 복무할 것.
④ 조선 독립에 대하여 기회가 있으면 이를 원조할 것
⑤ 일국의 국가주의적 입장이 아닌 혁명정신을 보급하는 취지에서 양성할 것
이상 각 사항은 조선인, 대만인, 베트남인에 국한한다.
② 재학 중 학비와 식비를 면제하고 서적을 급여하며 비복과 용돈도 지급할 것.
③ 본교 졸업 후 이어서 2년 간 반드시 중국국민당 정부에 의무적으로 복무할 것.
④ 조선 독립에 대하여 기회가 있으면 이를 원조할 것
⑤ 일국의 국가주의적 입장이 아닌 혁명정신을 보급하는 취지에서 양성할 것
이상 각 사항은 조선인, 대만인, 베트남인에 국한한다.
한국인 졸업생들은 졸업 후 2년 간 국민혁명군에 복무하고 그 후의 행로는 본인이 결정했다. 일부 한인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황포군관학교와 광둥항공학교에서 훈련받은 한국인 청년만으로 1000명 규모의 조선혁명병단을 조직해서 국내로 침공해 직접 일제와 독립전쟁을 일으킬 계획도 세웠다.
『황포군교동학록(黃埔軍校同學錄)』에서 확인되는 한인 입교생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기수 | 년도 | 명단 |
| 1기 | 1924 | 김철남[16] |
| 3기 | 1925. 7∼1926. 1 | 이빈(李彬)[17] · 이일태(李逸泰)[18] · 차정신(車廷信)[19] · 장성철(張聖哲) [20] · 유철선(劉鐵仙)[21] 이상 5명 |
| 4기 | 1926. 3∼1926. 10 | 강평국(姜平國)[22] · 유원욱(柳元郁)[23] · 박효삼(朴孝三)[24] · 박건웅(朴建雄)[25] · 최림(崔林, 김원봉金元鳳) [26] · 강인수(楊儉, 姜人壽) [27] · 전의창(田義昌)[28]· 이우각(李愚慤)[29] · 권준(權晙)[30] · 이집중(李集中) [31] · 왕자량(王子良)[32] · 윤의진(尹義進)[33] · 최영택(崔泳澤)[34] · 김종(金鐘) [35] · 이종원(李鍾元)[36] · 노일룡(盧一龍)[37] · 이기환(李箕煥)[38] · 오세진(吳世振) [39] · 김홍묵(金洪黙)[40] · 백홍(白紅)[41] · 노세방(勞世芳)[42] · 박익제(朴益濟)[43] · 문선재(文善在)[44] · 노건(盧建)[45] · 이동화(李東華)[46] · 강연권(姜淵權)[47]· 최혁우(崔赫宇)[48]· 이문필(李文筆)[49] |
| 5기[50] | 1926. 11∼1927. 8 | 신악(申岳)[51] · 안유재(安維才)[52] · 장익(張翼)[53] · 김호원(金浩元)[54] · 장흥(張興)[55] 이상 5명 |
| 6기[56] | 1928. 4∼1929. 5 | 김정문(金貞文)[57] · 김명산(金明山)[58] · 김은제(金恩濟)[59] · 이춘암(李春岩)[60] · 최문용(崔文鏞) [61] · 오상선(吳尙善)[62] · 노식(魯植)[63] · 신석우(申碩雨)[64] · 최정무(崔鼎武)[65]· 김근제(金槿濟)[66] · 안태(安台)[67] 이상 11명(생존 9명) |
| 7기 | 이석(李石) | |
| 8기 | 이근호(李根浩) · 나월환(羅月煥)[68] | |
| 10기[69] | 왕중량 나태섭(王仲良, 羅泰燮)[70] · 고일명(高一鳴, 高時福)[71] · 왕형(王衡, 安椿生)[72] · 왕신호(王信虎) · 조동윤(趙東潤)[73] · 노태준(盧泰俊, 李無雄)[74] · 김동수(金東洙)[75] · 한대원(韓大源) · 김고두(金高斗) · 왕자인(王子仁)[76] · 이의흥(李義興)[77] · 김동일(金東一) · 진동명(陳東明)[78] · 신계서(申繼瑞)[79] · 진국동[80](陳國東, 金裕哲)[81] | |
| 11기[82] | 장병훈(張炳勳) · 조열광(趙烈光) [83] · 이지강(李志剛, 李相勳) [84] · 진낙삼(陳樂三) · 조황(曹晃, 千暻伊) · 최영빈(崔英賓) · 유장환(劉章煥) · 왕수의(王守義) · 유민(劉敏) · 최양성(崔陽成) · 김병화(金炳華)[85] · 이철중(李鐵重) · 이운산(李雲山, 張致文 · 李雲煥)[86] · 관건 김병일(關鍵, 黃載衍)[87] · 엽홍덕(葉鴻德) · 강지산(康志山, 蔣載福) · 이청산(李靑山, 金貞彩) · 오주국(吳柱國, 白贊基) · 이국화(李國華, 韓道源)[88] · 이철부(李鐵夫, 金世雄) · 김해석(金海石, 朴珍守 · 朴景一) · 서홍(徐洪) · 구양군 박기성(歐陽軍, 朴基成)[89] · 이현근(李炫瑾) [90] | |
| 12기[91] | 노복선(盧福善) [92] · 김용무(金用楙) [93] · 진경성 신송식 (陳敬誠, 申松植) [94] · 김태삼(金泰三) · 김철(金鐵) | |
| 15기[95] | 유해준(兪海濬) [96] | |
| 16기[97] | 이규학(李奎鶴) [98] · 김응삼 한도명(金應三, 韓道明)[99] | |
| 18기[100] | 1940~1943.1 | 송면수(宋冕秀) [101] · 왕영수, 민영수(王永秀, 閔泳秀) |
| 19기[102] | 이윤장(李允章)[103] | |
| 20기[104] | 김중진(金重鎭) · 강홍모(姜弘模) [105] · 이건국(李建國) [106] · 장철부(張哲夫)[107] | |
| 21기 | 조동린(趙東麟) [108] | |
| 22기 | 김영훈(金英勳) · 박위택(朴胃澤) · 김현규(金現奎) · 박천마(朴天馬) · 이시엽(李時燁) · 김중달(金重達) · 김명규(金明奎) · 안창도(安昌道) · 오용필(吳用弼) · 정기엽(鄭基燁) · 장해덕(張海德) · 박윤호(朴允鎬) · 권필현(權必鉉) · 장정근(張定根) · 김정인(金正仁) · 안수성(安秀成) · 김시구(金是九) · 김치삼(金致三) · 이성만(李成滿) · 박성남(朴成男) · 허지수(許志秀) · 서삼철(徐三哲) · 이학서(李鶴瑞) · 김병철(金炳喆) · 김광진(金光進) · 문시욱(文時旭) · 이원곤(李元坤) · 김로(金露) · 김은석(金銀錫) · 강일영(康一永) · 이학률(李學律) · 조동희(趙東熙) · 백현일(白賢一) · 이시봉(李時奉) · 김대위(金大衛) · 김병선(金柄善) · 문창덕(文昌德) · 박재준(朴在俊) · 나태규(羅泰奎) · 한창섭(韓昌燮) · 최용산(崔龍山) · 김용호(金龍浩) · 문창흥(文昌興) · 김은령(金恩嶺) · 김백운(金白雲) · 김일건(金一鍵) · 배호원(裵豪元) · 오귀성(吳貴星) · 문인준(文仁俊) · 이원경(李元敬) · 양치호(楊致昊) |
1945년 일본이 투항 후, 1949년까지 4년간 국공내전을 치루면서 청두군관학교는 육군군관학교로 개명하고 1949년 12월, 중국공산당이 청두를 점령하여 육군군관학교는 대륙에서 역사를 마치고 대만으로 이동한다.
- 우한분교
| 기수 | 년도 | 명단 |
| 5기 | 1927년 | 박시창(朴始昌)[109] · 진공목(陳公木) · 진갑수(陳甲秀) · 안동민(安東民) · 안자산(安自山) · 사검인(史劍仁) · 왕구(汪炬) · 관추(關秋) · 조국동(趙國棟) · 안동만(安東晩) · 송욱동(宋旭東)[110] · 김준(金俊) · 유광세(劉光世) · 김치정(金致廷)[111] · 이종(李鍾) 이상 정치과 유원도(柳源道) · 박태섭(朴泰燮) · 진용학(陳龍鶴) · 백규(白珪) · 이건(李建) · 최승연(崔承淵)[112] · 김희철(金熙喆) · 박우균(朴禹均)[113] · 이춘식(李春植) · 이벽파(李碧波, 이상 포병과) |
조선인의 황포군관학교 출신들 일부분은 다시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으로 활동하거나 중국국민당 계열의 국민혁명군 또는 중국공산당 계열의 팔로군, 신사군 관련해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 이후에도 계속 되었으며 일부는 남조선 경비사관학교를 통해 국군으로 또 다른 북한군에 기여했다. 물론 조선의용대 출신이라고 해서 반드시 북한군으로 갔던 것은 아니고,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된 인원들은 대한민국 군인으로 복무하였다.
4.3. 출신들의 활약
1924년 광저우 상단 사건으로 첫 실전 데뷔를 했으며 1925년 국민당의 1차 동정, 국민당의 2차 동정으로 군벌 천중밍을 격퇴했고 1926년 중산함 사건 이후 친공세력이 대거 숙청되면서 확고한 장제스의 직계 세력이 되었다. 이후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에서 주력인 1군을 형성하여 나섰다.제1차 국공합작을 계기로 세워진 학교였다 보니, 이후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에서 싸운 중국국민당, 중국공산당 양쪽의 주요 군사 지휘관들은 이곳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국공양당에 퍼쳤던 이곳 출신 지휘관들은 황포출신이라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 특히 국민당은 총수인 장제스가 교장인지라 황포 출신들은 장제스를 교장이라고 부르면서 친분을 과시하였다. 국공내전을 다룬 중국의 선전영화들을 보면, 양군 지휘관들이 서로 안면이 있어서 적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당부할 때, "황포에서도 그놈은 참 특출했다"고 운운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5. 동문
5.1. 중화민국 국군(국민혁명군)
국공내전 이후 포로가 되거나 투항하여 대륙에 남은 자는 ★- 계영청 (일급상장, 1기)[114] 제3대 참모총장,
- 팽맹즙 (일급상장, 5기) 제4대 참모총장
- 왕숙명 (일급상장, 1기)
- 두위밍 (중장, 1기) ★
- 황걸 (일급상장, 1기)
- 다이리 (중장, 6기 중퇴)
- 마오런펑 (상장, 4기)
- 정동국 (중장, 1기) ★
- 송희렴 (중장, 1기) ★
- 장영보 (중장, 4기) 1947년 국공내전 당시 전사
- 후쭝난 (일급상장, 1기)
5.2. 중화인민공화국 당군(중국인민해방군)
초기 홍군 지휘관중 상당수가 황포군교 출신인데다가 제2차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소속 황포 동문들중 다수가 포로/투항했기 때문에 아예 동문회가 대륙에 생길 정도였다.- 쉬샹첸 (원수, 1기)
- 린뱌오 (원수, 4기)
- 쑹스룬 (상장, 5기)
- 천겅 (대장, 1기)
- 쉬광다 (대장, 5기)
- 뤄루이징 (대장, 우한분교)
- 쭤취안 (1기) 중일전쟁중 팔로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
- 류즈단 (4기) 공산당 지도부가 장정후 피신해 온 옌안해방구의 건설자. 옌시산군과 싸우다가 전사.
5.3. 조선인 인물
- 황포군관학교 교관 출신
- 김원영 - 국민혁명군 공군 준위
- 김은제 - 국민혁명군 공군 장교
- 권준 - 의열단, 조선의용대 비서장, 한국광복군 제 1지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차장
- 이집중 - 의열단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총무조장
- 김종 - 조선의용대 편입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1구대장, 김승곤의 숙부
- 이소민 - 조선의용대 편입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장[115]
- 신악 - 조선의용대에서 편입된 한국광복군 제 1지대 부지대장
- 장흥 - 의열단, 김구계, 대한민국 육군 초대 헌병사령관
- 나월환 - 한국광복군 제 5지대장
- 나태섭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군사학 편찬위원회
- 안춘생 -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제 1구대장
- 노태준 -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제 2구대장
- 노복선 -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제 3구대장
- 김동수 - 한국광복군 제 5지대 부지대장겸 제 1구대장
- 박기성 - 한국광복군 제 5지대 제 2구대장
- 이운한 - 남목청 사건에서 백범 김구 피격범, 탈옥 후 행방불명, [116]
- 신송식 -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 제 6징모분처(=제 3지대)에서 복무
- 유해준 - 한국광복군 제 2징모분처
- 이지일 -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117]
- 한도명 -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진화에서 전사
- 최문용 - 한국광복군 제 9전구 공작대
- 송면수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 통운과장
- 민영수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제 2지대
- 강홍모
- 이건국
- 박시창 - 한국광복군 제1지대, 총사령부 고급참모에 선임되었다. 민족혁명당
- 송욱동 - 본명은 송식(宋植)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령,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전라도 의원, 광복 후 중국국민당군 소장, 1946년 국공내전 중 전사
- 장철부 - 기병대장
- 박효삼
- 김원봉
- 강인수
- 차일혁
5.4. 베트남 인물
본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베트민과 베트남 민주 공화국 인사들 중에도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이 다수 있다.- 팜반동 -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의 수상이었던 인물이다.
- 브엉 투아 부 -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투입된 308여단 단장이다.
- 풍 찌 끼엔 1941년 호치민, 보응우옌잡, 팜반동과 더불어 베트민을 창설한 인사다. 1926년에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으며, 1927년 광저우 봉기에 참가했다.
- 응우옌 썬 베트민 출신이면서, 중국인민해방군 출신 군인으로 베트민에서 소장 계급까지 오른 인물이다. 1920년대 황포군관학교 시절 사용하던 이름은 이영사고, 이후 중국에서 쓰던 이름은 홍수.
- 레 홍 퐁 베트남 공산당 초대 총비서다. 1938년 프랑스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1942년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베트남 공산당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기에, 1950년 베트민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총 반격을 했을 때, 작전 이름을 레 홍 퐁 작전이라 했었다.
6. 매체에서
-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대전략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선 중국의 장군 지휘력을 향상시키는 중점으로 등장한다.
- 황포군혼
[1] 이 학교의 전신인 황푸중정학교(黃埔中正學校)가 황푸군관학교가 옮겨간 후 이곳에서 개교하였기에(현재 제6고등학교의 위치는 다른 곳이다.) 훗날 이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교가를 이 노래로 바꾼 것.[2] 일부 대만자료를 보면 난징에 옮겨온 6기나 7기 이후에도 황포X기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황포가 미 육사의 또다른 명칭인 웨스트포인트처럼 중화민국 육군군관학교의 별칭이 된 것.[3] 중국의 다른 군벌들은 정규군이라고는 하지만 체계적으로 군사학 등을 교육한 장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일본 육사 등에 유학해서 신식 교육을 받은 극소수 장교들은 소수의 정예부대에만 배치되었다. 군벌 지휘관들 상당수는 최대 군벌 세력이던 장쭤린이 마적 두목 출신이었듯 질 높은 인재는 아니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일본 육사, 일본해군병학교(사관학교에 해당)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유일한 체계적인 장교 양성기관이었다. 중국 이외에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한국, 북한의 초창기 인재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4] 중화민국군(대만군) 국방참모총장은 육해공 돌아가면서 하는데 고괴원(1967-1970) 참모총장(4기, 일급상장)을 마지막으로 황포계는 역사에서 퇴장했다. 이후 참모총장들은 모두 난징이나 대만 시절 재학생들.[5] 다만 2차 국공내전(1946-49) 시절에는 공산당측 황포군교 출신들은 대부분 여단장급 이상으로 승진해 있었기 때문에 유력 인사들 중에 전사자는 거의 없다.[6] 본명 : 헨드리쿠스 요세푸스 프란시스쿠스 마리 스니블리에트(Hendricus Josephus Franciscus Marie Sneevliet) 1883년5월14일~1942년 4월13일네덜란드 공산주의자이자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창립자.[7] 중국공산당 의 초기 지도자 중 한 명 이자 보로딘의 번역가, 코민테른 대표, 광저우 봉기의 주요 기획자이자 지도자였다 광저우 봉기에서 전사하였다.[8] 장제스와 같이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중국인[9] 장흥 저자 · 한홍구 해제, 전격 교체된 대한민국 초대 헌병사령관 장흥 자서전, 한울, 2025, 42~45쪽[10] 독립유공자 증언자료집 1, 국가보훈부, 2002, 29~31쪽[11] 김승곤, 안춘생[12] 본명 이철호[13] 1983년 1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에서 김산이 일본의 간첩과 사상 변절자라는 근거가 없고, 올곧은 인물이었음을 인정받아 사후 45년 만에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14] 천주교인 무장단체[15] 의민단 소속으로 전투함[16] 본명 김병두, 황해도 신천 출신, 푸젠성 푸저우로 망명, 1기 졸업생 교도단 교관, 북벌전쟁 참전, 중앙항공위원회 방공감독부 직원/과장, 중앙육군군관학교 8기 일본어 교관, 임시정부 황해도 대표의원, 교통부 차장, 한국공군설계위원, 베이징인민예술극원 입사, 1952년 베이징에서 폐암으로 사망[17]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제 의주 소년선전원, 졸업 후 황푸군관 4기 정치과 대대 구대장 복무, 1927년 광저우 코뮌 기간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18] 3.1운동 후 중국망명, 금문상사 점원, 병인의용대 활동지원, 광둥항공학교 2기 입교, 소련유학, 상하이 영국조계지에서 공산주의 선전하다가 체포 압송, 한독당 난징지부, 중국군 3천명 임솔하는 참장으로 승진[19] 임시정부 광둥비행학교 파견교육, 광동대사두비행학교 황포중앙군사정치학교(黃埔中央軍事政治學校)의 조선인 입학생 모집에 조력, 소련유학 후 차정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음.[20] 레닌그라드 항공학교 훈련, 항주항공학교 교관, 한국혁명당,1943년에는 광복군 총사령부와 협조하여 항공기로 전단을 살포하여 대일선전활동, 한중문화협회 쿤밍분회 설립, 1963년 중국에서 사망[21]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 북만주 통신연락원, 윈난강무학당 입교 후 퇴학, 광둥항공학교 2기 입교, 소련 유학 후 미귀환[22] 의열단 가입, 졸업 후 1928년 베이징에서 의열활동[23] 의열단 추정, 황푸군관 보병과 1사단 2중대[24] 의열단, 조선의용대 제1지대장, 창사 제 2차 전투 참가 후좌장, 반소탕전, 조선의용군[25] 민혁당 창당,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선전부 부주임, 대한통의부 파견 독립군, 1946년 3월 남한으로 귀국하여 좌우합작운동, 48년 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 신분으로 남북연석회의 참석, 6.25 전쟁 중 납북[26] 의열단장, 조선의용대장, 광복군 1지대장[27] 1940년 7월부터는 조선의용군, 조선민족혁명당 특파원, 광둥 광복군 잠편지대, 1946년 중국 국공내전 참전, 1951년 장제스와 대만으로 이동함. 대만군 육군소장 1992년 대만에서 사망[28] 평안북도 선천 천도교 종리원에 봉사하면서 만주 고려공산당과 협력[29] 허난성 중앙군관정치학교 파견유학, 황푸군관학교 전학, 우한 국민혁명군 복무[30] 의열단, 민혁당, 임시정부 내무부차장[31] 의열단, 이기환과 함께 일제 밀정 김달하 처단, 조선의용대, 광복군 1지대 총무조장, 2대 제 1지대장,임시의정원 의원, 1946년 부산 선상에서 병사.[32] 경남 산청, 황푸군관 보병과 1사단 보병 9중대, 의열단 난창지부 활동[33] 서울 적선동 출생, 백호청년회 위원[34] 독립군 참의부, 펑위샹 군대 장교로 편입, 참의부 복귀, 제 2중대장 대리대장 취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판결받음.[35] 김승곤 숙부, 본명은 김용재, 김준, 의열단, 조선의용대, 광복군 1지대 1구대장[36]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가입, 1928년 신채호와 국제수표가담혐의로 체포됨[37] 충남 홍성, 의열단, 중국 국민혁명군 복무, 우창 의열단 활동, 조선혁명군사학교 교관, 밀정 처단, 정저우에서 피살됨.[38] 황해도 개성, 인삼상인, 일제 밀정 김달하 처단, 황푸군관 관리부 직원, 무정부주의자 전향, 샤먼 선전원 양성소 교관, 천영이속민단편련처 교관, 샤먼 태백삼상점에서 체포됨, 한국으로 압송[39] 1928년 만주무장단체 국민부[40] 서울 출생, 황푸군관 4기 공병과 입교, 상하이 농민 폭동 지원, 홍군 14군 1사단 유격활동 지휘, 루이진 중화소비에트 홍군학교 교사, 장시 독립4사단장, 1933년 장쑤에서 전사[41] 한성 출생 황푸군관학교 정치과 대대 입교, 대한민국 임시정부 차리석과 관련있음.[42] 황푸군교 정치과 입교, 우한 국민혁명군 복무, 우한한인혁명청년회 조직[43] 정치과 입교[44] 평남 평원, 정치과, 상하이 병인의용대, 국민혁명군 광저의 제 3경비단 배속, 난징 국민당, 총사령부 헌병대 정치부 근무, 중국공산당 입당, 중화소비에트 조선대표[45] 평북 정주 출생, 난징 동명학원, 졸업후 국민혁명군 장교[46] 의열단, 폭탄제조법 습득, 국민혁명군 제 2군 기관총 훈련 교관, 러시아 군사고문 통역, 북벌군 우창 선봉대, 북벌군 난징 선봉대, 조선혁명군사간부학교 군사조 교관, 중국군사위원회 특수경찰학교에서 폭탄사용법 가르치다가 사망[47] 국민혁명군 장교, 병인의용대, 신의주지방법원에서 4년 판결, 애국동지회, 남북협상 입국거부 당함.[48] 양세봉 조선혁명군 출신, 중국군대에 복무[49] 졸업 후, 소련 이만의 한인학교 교원[50] 중국 정국이 국공분열되던 시기이다. 3300명 입교생 중 졸업자가 2418명으로 감소했는데 공산주의로 의심받는 생도들이 스스로 퇴교했기 때문이다. 한인 입교생은 200여명이었으나 6명이 졸업했다. 우한분교 박시창과 오봉환이 졸업한다.[51] 의열단, 한국혁명군 간부양성훈련반 교육주임, 광복군 1부지대장[52] 평양, 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의열단 기관지 '우리 길' 발행, 조선박람회 사건 가담.[53] 보병과 2학생대[54] 강계군 조선일보지국 기자[55] 중국군 헌병사령부, 헌병 제8단 소교단(少校團), 동제2영 소교영장(少校營長) 대일전선통일동맹 후원, 민혁당 감찰위원[56] 1927년 5월,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으로 이전하여 광저우, 우한, 창사 각지 분교생을 모집하여 황푸군관학교 6기로 계승했다. 육군중앙군관학교로 개칭됨. 난징본교. 1928년부터 교사, 숙사, 도서관을 증축하여 건물 70여동 1000여칸의 교실로 확장한다. 중일전쟁발발전까지 6~13기 운영한다.[57] 평양출신[58] 공산당 전향, 상하이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조선은행 평양지점 갈취사건으로 체포[59] 난징 중앙항공학교 1기 입교, 한국혁명당, 의열단 가담, 항공기 추락사고로 사망.[60] 조선공산당재건동맹 만주지부, 레닌정치학교 교관, 난징헌병사령부 우편검열소 주임,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 급진대 정무과 비서부 부주임, 민혁당 특무부 부장, 조선의용대 지도위원[61] 노병회 가입, 중국군 복무, 한국광복군 제 9전구 공작대장 창사전투(3차~4차)[62] 조선공산당 재건동맹 경성지부[63] 김창만, 국제재난구제회 요원, 조선공산당 재건, 강릉적색농민조합결성준비위원회 위원[64] 충남 보은군 입교 당시 26세, 2총대 보병과 3중대[65] 상하이 자동차공장 수리공, 국민당 포위토벌작전 참전, 국민당 군대에 위장 입대, 조선의용대 가입, 항미원조 한국전쟁 참전, 랴오닝성 명예군인 휴양원 부원장[66] 재학중 사망[67] 재학중 사망[68] 광복군 제 5지대장 1942년 3월 1일, 박동운에 의하여 암살됨[69] 뤄양분교로 이전[70] 한인애국단, 한독당, 제 2징모분처 간부, 임시정부 군무부 간부[71] 광복군 제 2징모분처, 군무부원, 임시정부 내무부 총무과장, 민정과장, 심리작전연구실[72] 광복군 제 1징모분처, 광복군 제 2지대 1구대장[73] 황해도 출생. 안공근과 친척 관계임. 안춘생 따라옴.[74] 광복군 제 2지대 제 2구대장[75]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부대장, 광복군 제 5지대 1구대[76] 만주 출생. 조선의용군[77] 안춘생 증언엔 만미터 선수로 달리기를 아주 잘 했으며 조선의용대로 갔다고 전해진다[78] 본명은 백종칠(白宗七) 엄창복과 같은 날 뤄양(洛陽)분교에 입교한 자. 최창환과 친교 있음. 안공근의 부름에 응해 도녕(渡寧)하였음.[79] 만주 출생[80] 본명 김유철[81]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총사령부 참모, 미 5공군 특파원 선전공작[82] 뤄양분교[83] 조선의용군[84] 조선의용군[85] 1936년 8월 14일, 군관학교 동기생 김순곤(金順坤)·김학무(金學武)·김파(金波) 등과 함께 중국 상해의 일본총영사관을 폭파하기로 계획하고 불란서조계 환룡로(環龍路) 태흥방(泰興坊)에서 폭탄 2개를 완성하고 3개째를 제조하다가 갑작스런 폭발로 순국하였다.[86] 남목청 김구 피격범[87] 조선혁명군, 조선의열단, 민혁당 통신 특파원[88] 이봉창에게 군자금과 권총 전달, 맹혈단(盟血團) 옥관빈 사살, 상하이 일본 영사관 투탄, 일본 아리요시(有吉明)공사 암살 계획 중 체포, 1937년 6월 5일순국[89]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광복군 제 5지대 2구대장[90] 의열단, 중국군 제 6사 제 17여 제 31단 제 2영 제 6연장, 한커우 전선에서 체포 순국[91] 이 기수까지 뤄양분교로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수효원으로 충족된다.[92] 제 1징모분처, 제 2지대 3구대장, 총무조장[93] 귀주(貴州)포병학교 교관, 1942년에는 연합군 사령부 제16연대 소교[94] 민혁당, 조선의용대 제 1지대, 광복군 제 3지대, 한광반 교관, 참모처 제 1과[95] 15기부터 쓰촨성 청두분교.[96] 총사령부 참모, 제 2징모분처[97] 이지일, 한도명 졸업 후 김문호, 신정숙과 함께 1941년 3월 1일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 거행된 광복군 징모(徵募) 제 3분처 성립식 참여하고 중국 저장성으로 가게된다.[98] 제 3징모분처 정보조장, 군무부원, 군무부 군사과장, 내무부 경무과장, 경위과장[99] 한인애국단, 제 3징모분처 훈련조장, 절동전투 란씨역에서 부상 후유증으로 1942년 란씨역 전투에서 전사[100] 청두분교, 교육 중에 1941년 12월 미국 진주만 폭격 소식을 듣기 된다.[101]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겸 선전부주임 대한민국임시정부 문화부 및 선전부위원 1944. 8. 21 광복군 O.S.S. 정보파괴반[102] 청두분교[103]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제 2지대 산시, 허난지구[104] 청두분교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 이후의 기수이다.[105] 광복군 제1지대 1구대 초모공작대원[106] 광복군 제 3지대 화중지구[107] 광복군 제1지대 제1구대에 입대, 한미전차훈련반 대기 중 광복을 맞이함[108] 광복군 제 3지대, 지하공작원[109] 1932년 상해사변 참전 1943년 8월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로 활약, 민족혁명당 후보위원, 1944년 10월 임시정부 참모부의 참모, 1945년 8월 한국광복군 상해지대장[110] 광복군 총사령부 근무[111] 1930년 도쿄서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朝鮮共産黨再建鬪爭協議會를 결성, 1932년 5월 조선공산당재건투쟁위원회 일본출판부를 결성,1932년에 피체 순국[112] 한국혁명청년당(韓國革命靑年黨)에 가입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지회를 설립하는데 주력하였다. 1928년 10월 26일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붙잡혔다.[113] 북벌에 참전 후 소위로 임관, 중국 반란군 토벌 등에 참전[114] 대륙의 대장에 해당.[115] 김용 회고록, 정화암 회고록, 유기석 회고록에 언급이되고 독립운동 문서에는 나오나 황푸군관 몇기인지는 불분명하다. 확실치는 않으나 7기 이석(李石) 8기 이근호(李根浩) 추정된다. 광복 후 행적묘연[116] 박기성의 동기이다. 그의 회고록 '나와 조국'에서는 담배를 피려다 우연히 만난 것처럼 언급이 되어있으나 동기임을 알아보고 일부로 놓아준 것으로 추정된다.[117] 일명 '제 3전구공작대', '한교전지공작대'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