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7-24 20:47:02

천영이속민단편련처


1. 개요

혁명근거지건설론 : 한국인 아나키스트 운동의 3대 방법론 중 하나이다. 어느 한 지역에 아나키스트 사회를 건설하고 그 기반으로 아나키스트 사회의 영역을 점차 넓혀나가야 한다는 이론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이 미치는 조건에서는 혁명근거지 건설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상촌 건설사업은 상호부조[1]의 자위자치적 농촌공동체인 자주적 코뮌 건설을 목표로 전개된 아나키스트 운동으로서[2] 한 지역에 아나키스트 사회를 건설하고 그 자유공동체를 근거지로 하여 아나키스트 혁명을 전 중국에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상촌 건설을 민족해방운동으로 규정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기는 하지만, 아나키스트 사회 건설이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띈다.

2. 배경


1927~1928년 이정규[3], 이을규, 유기석, 이기환, 유지청 등을 비롯한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중국 아나키스트 량룽광(梁龍光), 친왕샨(秦望山) 등과 함께 취안저우 지역을 무대로 천영이속민단편련처를 조직하여 농민자위운동을 전개하면서, 농촌을 중심으로 한 아나키스트 사회 건설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1927년 당시 이을규, 이정규 등은 상하이에서 노동대학 설립 준비작업에 참가하고 있었다. 노동대학 설립계획은 1927년 4월 12일, 장제스의 난징 정부가 상하이에서 반공쿠데타를 일으켜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한 이후 수립되었다. 당시 국민당 정부에 참여하고 있던 원로 중국인 아나키스트는 우쭈이휘(吳稚暉), 리시층(李石曾) 장징장(張靜江)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우크겅(吳克剛) 센쫑지우(沈仲九) 등이 상하이 노동대학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4]

상하이 노동대학은 난징정부가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상하이총공회 산하의 각급 노동조직 및 친공산주의계의 각 기관을 봉쇄하여 총검거를 단행한 뒤, 노동조직을 이끌어나갈 노동단체의 간부를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하고자 했던 기관이었다.[5] 중국 아나키스트 내부에서 조차 상하이 노동대학 설립참가에 반대하는 의견이 제기되었지만, 이정규 등은 노동대학 설립 참가에 반대하던 일본인 아나키스트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 을 설득하여 함께 설립준비에 객원으로 참가하였다. 이정규가 상하이 노동대학 설립에 참가하였던 이유는 중국 형편상 국민당정부와의 합작을 인정할 수 있으면 노동대학을 설립하는 것은 다수 동지를 집결하여 조직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3. 변천


1927년 6월 하순, 상하이 노동대학 설립 준비를 끝나고 개교를 앞두고 있던 시점에 중국 아나키스트 친왕샨(秦望山)이 량룽광(梁龍光)을 앞세우고 이정규 등을 방문하였다. 량룽광(梁龍光), 친왕샨(秦望山)등은 이정규 등에게 학생들에 대한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농촌운동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상의하면서 취안저우(泉州)를 중심으로 한 농민자위조직 건설에 동참할 것을 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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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왕샨(秦望山)의 제의에 대해 이정규, 이을규, 우크겅(吳克剛),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 등 상하이 노동대학 관계자들이 모여 토의한 결과, 상하이 노동대학은 노동운동의 이론과 훈련을 맡아서 도시노동자 조직화의 책임을 맡고 푸젠성에서 네스토르 마흐노[6] 식 무장자위조직으로 농민들의 조직화하는 책임을 맡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정규와 량룽광(梁龍光)이 농민자위조직의 총책임을 맡고 천춘페이(陳春培)(이기환으로 교체)가 훈련을, 그리고 마오이보(毛一波)(유기석으로 교체)가 학과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이정규, 량룽광(梁龍光), 친왕샨(秦望山) 등이 6월 말 학생들이 모여있던 샤먼으로 먼저 출발하였으며, 한국인 유기석, 이기환, 이을규, 유지청, 일본인 아카가와(秦希同, 赤川啓來)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 , 중국인 판치엔쥔(范天均) 리량롱(李良榮) 첸쥔링(陳君泠) 등이 차례로 합류하였다. 농민자위운동이 취안저우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장제스의 반공쿠데타 이후취안저우 지역이 국민당 좌익 쉬주오란(許卓然), 친왕샨(秦望山)의 수중에 장악되어 쓰촨성, 후난성, 광둥성, 상하이 등지의 아나키스트 및 한국, 일본의 혁명가들이 취안저우로 피난하여 비호를 받는 등, 상당히 오랫동안 아나키스트들의 무릉도원으로 불려질 정도로[7] 취안저우 지역이 아나키스트 운동에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정규는 1927년 7월 1일부터 강의를 시작하였다. 9월 말까지 학과를 마치고 10월에는 농촌에서 실지활동을 하기로 하고 교과목을 변경하였는데, 이정규가 서양사회운동사, 공산주의 비판, 신정치론, 농촌사회조직론을, 유기석은 신경제학, 사회학, 봉건사회 및 자본주의 사회 해부 등을 맡았다. 수료가 끝나가면서 취안저우로 돌아가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장제스의 반공쿠데타가 일어난 이후라 중국의 정황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친왕샨(秦望山)이 9월 하순 푸저우난징의 정국을 시찰하러 쉬주오란(許卓然), 따이진화(戴金華) 등과 함께 떠났는데, 난징에서 친왕샨(秦望山)이 국민당 중앙당부로부터 푸젠성 당화교육훈련소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이에 대하여 토의한 결과 국민당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훈련소를 맡기로 결정했다. 이어 소장에 친왕샨(秦望山), 정치주임에 이정규, 훈련주임에 리량롱(李良榮), 교수부주임에 유기석, 학생대장에 이기환을 배치하였다.
선전양성소를 설립한 사람은 친왕산(秦望山)이었다. 그러나 왕산은 사회활동으로 바빠서 많이 관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교무행정은 교무주임인 이우관李又觀(본명 이정규李丁奎)이 주관하였다. 그는 일본 게이오 대학(慶應)출신으로 일찍이 조선에서 유명한 아나키스트였다. 그의 형 이회관李晦觀(본명 이을규李乙奎)도 아나키즘 이론가 중 하나였다. 또 군사 교관 이기환李箕煥은 황포군관학교 제 4기 졸업생으로 이미 의열단(朝鮮義烈團)의 테러활동[8]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친왕산은 푸젠성(福建) 취안저우(泉州)사람이다. 당시 40세가 좀 넘었고 국민당 당원이었으며 쉬줘란(許卓然)과 함께 민남(閩南)의 ‘인사’ 중 하나로 불렸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일찍이 상하이에서 이정규 등을 알게 되었고 후에 사상에 있어서도 아나키즘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사회관계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화교자본가의 대변인이 되었다. 친왕산의 수하에는 또 량룽꽝(梁龍光)이 있는데, 그는 용춘(永春) 사람으로 일찍이 상하이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군사교관 이양영(李良榮)은 황포군관학교 2기 출신이었다. 이상의 몇 사람이 모두 선전양성소의 중심인물이었다.

선전양성소는 1기만을 운영하였다. 한 달 기한으로 훈련을 하고 바로 종결을 고했다. 친왕산은 국민당 푸젠성 당黨 조직부장으로 전근되었으므로, 푸저우(福州) 쪽은 우리 몇몇 사람들이 성으로 가서 당의 사무 훈련반을 인수하여 처리해야 하였다. 그러므로 원래의 군대가 샤먼을 떠나고 친왕산을 따라 푸저우로 갔다. 우리가 푸저우에 도착할 때, 거리에서 ‘친왕산 동지가 당의 업무를 주관하는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표어를 보았다. 이정규은 친왕산에게 농담으로 “왕산, 조심하시오. 오늘은 환영하지만, 장래에는 타도하자고 소리칠 것이오.”라고 말했다.[9]

하지만, 공산군을 추격하던 천밍슈(陳銘樞)의 제 11군이 푸젠성으로 진입하면서 사정이 급변하였다. 즉 선봉대였던 제 5사단의 사단장 차이팅카이(蔡廷楷)가 친왕샨(秦望山)에게 자신들의 공산군을 추격하면서 토비들까지 소탕할 터이니 뒤에서 정지작업을 해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에 민남25현민단편련처(閩南25縣民團編練處)라는 깃발을 내걸고 차이팅카이(蔡廷楷)의 군대를 따라 취안저우에 입성하였다.

민단편련처는 11월에 개청식을 거행하였는데, 관할 지역을 푸젠성 정부의 요청에 따라 취안저우(泉州) 용춘(永春) 중심의 11현으로 축소하였고, 명칭도 천(주)영(춘)이속민단편련처(泉州永春二屬民團編練處)[10]로 바꾸었다.
본부위원장 친왕샨(秦望山)
비서장 이정규
총무부 쩡진리(鄭今日), 이을규(회계담당)
조직연락부 어우양젠핑(歐陽建平), 판치엔쥔(范天均)
선전교육부 유기석, 량룽광(梁龍光), 창첸디(張謙第) 강종인(姜種仁)
훈련지도부 천춘페이(陳春培), 이기환, 유지청
민남은 군벌 루씽빵(盧興邦)의 제어 하에 있었고, 민남 연해는 또 해군 해병대와 지방의 작은 군벌 천궈후이(陳國輝) 등이 할거하고 있었으며, 좀 편벽한 현(縣)과 향(鄕)은 모두 토비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취안저우 부근 퉁안(同安)ㆍ안시(安溪) 등지는 까오이(高義)ㆍ까오웨이궈(高爲國)ㆍ예띵궈(葉定國)ㆍ궈주이(郭祖儀) 등의 크고 작은 토비들이 각각 한 지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스스로 연대장ㆍ대대장으로 호칭하며 농촌의 ‘지방군벌’을 맡았다.

민남은 군벌 루씽빵(盧興邦)의 제어 하에 있었고, 민남 연해는 또 해군 해병대와 지방의 작은 군벌 천궈후이(陳國輝) 등이 할거하고 있었으며, 좀 편벽한 현(縣)과 향(鄕)은 모두 토비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천주 부근 퉁안(同安)ㆍ안시(安溪) 등지는 까오이(高義)ㆍ까오웨이궈(高爲國)ㆍ예띵궈(葉定國)ㆍ궈주이(郭祖儀) 등의 크고 작은 토비들이 각각 한 지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스스로 연대장ㆍ대대장으로 호칭하며 농촌의 ‘지방군벌’을 맡았다.

토비들은 그들이 독점하고 있는 지역 내에서 농민에게 양귀비를 심도록 하였는데, 세금 징수가 과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하였다. 매 그루의 양귀비 작황에 따라 계산하여 세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토비가 징수한 세액은 그래도 국민당 정부가 받는 것보다 많이 가벼웠다. 토비의 세금 징수는 물론 심하였지만 구실이 많지 않아 1년에 단지 수차례였지만 정부 측은 교묘하게 구실을 만들어 세금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는 어민이 자라를 잡아 거리로 나가 파는 것도 어업세와 생선 도매상의 수수료를 내야만 하였다. 민중은 모진 고난 중에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신촌을 건설하려면 반드시 먼저 토비를 척결하는 것부터 착수해야한다. 토비를 척결하려면 우선 민단을 만들어야 하고, 군대를 조직해서 지방의 질서를 유지한 연후에 농촌건설 작업을 전개해야 하였다.

샤먼에 도착한 이후 나는 ‘선전양성소’의 교관을 맡았고, 담당한 것은 사회학 과목이었다. 사용할 수 있는 갖추어진 교재가 없었기 때문에 표트르 크로포트킨Pyotr A. Kropotkin의 학설 개요에 근거하여 한편으로는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강의안을 써서 복사하여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실은 나는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학설에 대하여 완전히 문외한으로 심지어는 그의 주요 저작 『빵과 자유』ㆍ『전원ㆍ공장ㆍ작업장』ㆍ『근대과학과 아나키주의』 등의 책도 한권 읽은 적이 없었다. 스스로도 명백히 이해하지 못하고 학생을 가르쳤다.[11]

량룽광(梁龍光), 친왕샨(秦望山), 이정규, 유기석 등은 취안저우에 있는 토비, 토호 등 난동분자 숙청 문제에 대해 차이팅카이(蔡廷楷)와 토의하는 한 편, 중국 농촌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농민의 자주, 자치, 협동노작, 협동자위를 실시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우선 각 부락의 중견 청년으로 향토조직을 만들고 아울러 무장자위 조직을 겸하게 하며, 그 향토조직이 경제적 문화적 임무를 띠고 활동하기로 하였다. 이 방침 아래 1,500~3,000명을 모집하여 기본대오로 삼고, 이들에 대해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아나키스트 활동의 주력군으로 만들며, 선전원양성소에서 훈련받은 청년들을 지방 곳곳에 파견하여 중견 청장년들의 훈련을 맡도록 하며, 군중들에게 농민을 조직할 것을 선전하여 민단을 조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민단편련처는 자유자치의 생활, 협동노작의 생활, 협동 방위의 생활이라는 3대 목표를 내걸고 각 지방을 조직하는 한 편, 네스토르 마흐노 전법의 훈련을 시작하는 등 무장투쟁 본거지를 건설하기 위한 활동으로 전개하였다.

4. 결말

편련처가 성립되고 몇 개월간 비록 양성소 졸업생을 농촌으로 보내 활동하도록 파견하였으나, 민단 대오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편련처도 편성 훈련할 병사가 없는 유명무실한 기구가 되었다. 취안저우 시내는 단지 수백 명의 해군 해병대만이 주둔하여 지켰다. 그러나 해군 해병대는 ‘두부군대’로 불렸다. 단지 현지 세금징수만 관할할 뿐 기타는 문제삼지 않았다. 지방 토비와도 ‘평화공존’할 수 있었으며, 서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취안저우 근교의 토비는 다시 꿈틀거렸다. 그들은 친왕산의 편련처를 눈 속의 못으로 생각하여 피맺힌 깊은 원한을 갚기 위하여 모든 잔여 토비부대, 뜻을 이루지 못한 군벌 탄슈샹(譚曙鄕) 잔여부대 및 지방 봉건부대 천궈후이(陳國輝) 등과 연합하여 천주 시내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형세 하에서 기본 무력도 없는 편련처만으로는 할 수 없어 취안저우에서 철수하여 깊은 산으로 들어가 때를 기다려서 재기하려 하였다. 우리는 여러 조로 나누어 취안저우를 떠났는데, 일부 사람은 안하이(安海)에서 배를 타고 샤먼(厦門)으로 가고, 일부는 걸어서 황산(黃山)으로 출발하였다. 나는 연락임무를 맡아서 우선 퉁안同安으로 가서 그곳에서 샤먼의 일군의 사람들이 오길 기다려서 함께 황산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황산에 근거지를 건립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나는 동안 현정부 소재지에 도착할 즈음, 시내의 행인이 아주 적고, 상점의 문도 모두 닫혀있음을 발견하였다. 담벽에는 까오이(高義)ㆍ예띵궈(葉定國)를 환영하는 많은 표어가 붙어있었다. 상황을 보고 퉁안(同安) 시내가 이미 토비의 수중에 함락되었음을 비로소 알았다. 이때 나는 이미 내 옆에 곧 다가올 위험을 느꼈다. 그러나 아직 토비부대를 만나지 않았다. 어떻게 곧 다가올 큰 재난에 대처할까를 궁리하고 있었다. 손에 땀을 쥐었다. 동안 시내가 이미 적의 수중에 점령된 이상 나의 연락임무 또한 효과를 잃었다. 그러므로 할 수 없이 빨리 토비 구역을 벗어나서 샤먼으로 가야했다 [12]

그러나 제 11군 남하 이후에 있었던 토비의 공격과 극심한 자금난으로 인해 1928년 2월 중순 이후 모든 활동이 중지되고 말았다. 농민자위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흩어졌으며, 이기환은 오산 이강선생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샤먼 일본영사관에 구금되었다. 이기환을 구출하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졌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더욱이 천영이속민단편련처에 대한 화교로부터의 자금지원 마저 불가능해졌다. 이에 천영이속민단편련처는 그 깃발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유기석이 먼저 상하이로 가고 이정규, 이을규, 정화암[13]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 아카가와(秦希同, 赤川啓來) 등은 민단편련처를 수습한 다음 1928년 5월초 상하이로 갔다. 결국 취안저우와 용춘(永春)에 대한 농민자위대를 조직하여 이를 기반으로 혁명근거지를 구축하고자했던 농민자위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5. 한계


이상촌 건설사업은 민족해방운동의 물적 기반을 전적으로 중국인에게 의존함으로써, 아나키즘의 세계성의 원칙에는 충실하였을지는 모르지만, '자기 문제는 자기 스스로 해결한다.'는 아나키즘의 기본원칙에서 벗어나는 등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문제점으로 인해 이상촌 건설사업은 하나의 허망한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농민자위운동은 중국에서의 아나키스트 사회 건설을 지향하였다는 점에서 이상촌 건설계획과 마찬가지로 민족해방운동으로 규정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다. 하지만, 혁명근거지 건설과 그것의 전 지역으로의 확산을 통한 아나키스트 사회 건설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민족해방운동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다.

6. 참고문헌


함용주, 「민족해방운동과정에서 아나키즘 역할에 대한 연구-정치사상적 측면 중심으로」
이정규, 「중국 푸젠성 농민자위운동과 한국 동지들의 활동」, 『우관문존(又觀文存)』
이정규, 「네스토르 마흐노 약전」, 『우관문존』
이문창, 「네스토르 마흐노의 생애 및 그의 운동」
친왕샨(秦望山), 「푸젠성의 일부 아나키스트 활동(安那其主義者在福建的一些活動)」, 『푸젠문사자료(福建文史資料』 24
유기석, 『삼십년 방랑기-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부, 2010
[1] 다수의 개인 또는 집단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함께 행동하면서 성립되는 사회적 관계[2] 함용주, 「민족해방운동과정에서 아나키즘 역할에 대한 연구-정치사상적 측면 중심으로」, 18쪽[3] 이정규 선생은 8.15 광복 직후 귀국하여 1945년 9월 서울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의 총체인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조직했다. 1946년 이후 성균관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7년 아나키즘 연구단체인 '국민문화연구소'를 설립했다. 1958년 청주대학교 총장과 1963년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했고 1966년에 퇴임했다. 1984년에 사망했으며 평생 독립유공자에 지원하지 않았다. 자발적인 미서훈 애국지사이다.[4] 이정규, 「중국 푸젠성 농민자위운동과 한국 동지들의 활동」,(이정규, 『우관문존(又觀文存)』, 130~132쪽)[5] 이정규, 「중국 푸젠성 농민자위운동과 한국 동지들의 활동」,(이정규, 『우관문존(又觀文存)』, 129쪽)[6] 네스토르 마흐노는 러시아인 아나키스트로서 러시아 혁명 후, 농민 유격군을 조직하여 농민자위운동을 전개했다. 혁명을 위협하는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연합군을 우크라이나에서 몰아냈으며, 러시아 백군과 싸워 그들을 격퇴시켰다. 이후 볼셰비키와의 싸움에서 패배해 외국으로 망명하였다.(이문창, 「네스토르 마흐노의 생애 및 그의 운동」, 「네스토르 마흐노 약전」(이정규, 『우관문존』, 155~161쪽)[7] 친왕샨(秦望山), 「푸젠성의 일부 아나키스트 활동(安那其主義者在福建的一些活動)」, 『푸젠문사자료(福建文史資料』 24.[8] 밀정 김달하 처단 사건[9] 유기석, 30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부, 2010, 404쪽[10] 해석하자면 '취안저우-용춘 제 2 민병대 훈련소'라는 뜻이다.[11] 유기석, 30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부, 2010, 403~404쪽[12] 유기석, 30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부, 2010, 406~407쪽[13] 정화암은 천영이속민단편련처 운동이 거의 끝날 무렵에 합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