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18:15:28

이강(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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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0066><colcolor=#fff>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13대 의장
이강
李剛 | Lee Kang
파일:이강.jpg
출생 1878년 4월 18일
평안도 용강현 산남방 의방리
(현 평안남도 룡강군 옥도리)
사망 1964년 10월 13일 (향년 86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재건주택 88호 자택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19호
재임기간 제13대 임시의정원 의장
1927년 5월 6일 ~ 12월 12일
서명
파일:이강(독립운동가) 서명(한문).png
|
파일:이강(독립운동가) 서명(영문).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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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0066><colcolor=#fff> 본관 광주 이씨
오산(吾山, 鰲山)
부모 부친 - 이병훈(李秉勳), 모친 - 박성심(朴誠心)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1962년) }}}}}}}}}

1. 개요2. 생애
2.1. 공립협회 활동2.2. 대동공보 창간 및 주필2.3. 대한인정교보 발간2.4. 천영이속민단편련처 활동2.5.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2.6. 한국광복군 한교전지공작대 징모지원2.7. 흥사단 활동
3. 여담4. 대중매체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1878년 4월 18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산남면(山南面) 의방리(義方里, 현 봉산면 의산리)에서 아버지 이병훈(李秉勳)과 어머니 박성심(朴誠心)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본명은 이정래(李正來) 또는 이필례(李弼來)라고도 하였다. 호는 오산(吾山)·(鰲山)이다. 연해주로 이주한 뒤에 이강(李剛)으로 불렸다. 부인 안혜반(安惠盤)은 1893년생으로 함경북도 경흥(慶興) 출신이다. 1909년 내지 1910년 연해주에서 만나 결혼해 슬하에는 딸 이신애(李新愛)와 아들 이숙(李肅)을 두었다.

어린 시절 고향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용강에 온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가 전래되자 집안이 모두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2년에 하와이 이민 모집 광고를 보고 1903년 홀로 이민을 결행하여 사탕수수 농장에서 근 1년간 노동에 종사하였다. 노동 계약이 끝나자 1904년 3월에, 미국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로 건너갔으며 이곳에서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상항(桑港)[1]한인친목회에 가입하였다. 이후 안정적 일자리를 찾아 리버사이드(Riverside)로 이주하였는데, 당시 리버사이드는 오렌지농업이 크게 번성해 값싼 노동력을 구하는 수요가 많았다. 리버사이드로 모인 한인들은 파차파(Pachappa)에 캠프를 만들어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일을 하면서 기독교 미이미교회(미국 북감리회) 전도사로 활약하였다.

2.1. 공립협회 활동

파일:공립협회.jpg
앞줄 왼쪽부터 송석준, 이강, 안창호.
뒷줄 왼쪽부터 임준기, 정재관.

1905년 4월 공립협회(共立協會)가 출범하면서 공립협회 리버사이드 지방회장에 선임되었다. 노동소개소를 열어 철로공사장과 오렌지 농장 등지에서 노동일을 주선해주고 리버사이드 한인 공동체를 지도하였다. 1907년 1월 초순 리버사이드에서 안창호 · 임준기(林俊基) · 박영순(朴榮淳) · 이재수(李在洙) 등과 함께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를 발기하였다. 1907년 6월 30일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려다 실패한 정재홍(鄭在洪)을 비롯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인 이준(李儁)과 박승환(朴昇煥) 등의 사망 소식이 연이어 전달되자 공립협회가 열은 추도대회에서 정재홍의 사적과 애국정신을 연설해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07년 공립협회 원동위원으로 임명되자 제1차 원동위원으로 파견된 김성무(金成武)에 이어 아세아선박 편으로 9월 중순에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제대로 된 언론이 없었던 상황에서 언론 활동을 전개할 생각으로 귀국 도중 일본 도쿄(東京)에서 신문발간을 위한 주자(鑄字)를 구입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초등학교 교과서류를 구입해 귀국하였다. 이들 교과서는 연해주에서 교육활동을 전개할 때 사용되었다. 국내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서우학회(西友學會)에서 구국계몽운동에 참여해 활동하다가 1908년 3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2.2. 대동공보 창간 및 주필

1908년 2월에 창간된 『해조신문(海潮新聞)』 편집인으로 참여하고 배일성향이 강한 인물들로 구성된 재러 한인거류민회와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 등 기존 조직의 유력인사들과 민족운동의 방향을 함께 하기로 의기투합하였다. 『해조신문』이 폐간되자 이를 계승해 1908년 11월 18일에 『대동공보(大東共報)』를 창간하고 주필이 되어 활발한 항일 언론투쟁을 펼침과 동시에 기독교회를 설립해 직접 설교를 담당하였으며 1년 과정의 사범학교를 신설해 한국어 교사를 양성하였다.

1909년 10월에 들어서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동공보사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해 이토를 처단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여러 지원자 중에 안중근(安重根)이 적임자로 추천되자 안중근에게 편지를 보내 연해주에 와줄 것을 청하였다.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는 본격적으로 준비되었다. 하얼빈으로 떠나는 안중근 일행을 유진률(兪鎭律)과 함께 환송하며 “지금 삼천리강산을 너희가 등에 지고 간다”며 격려하였다.

안중근이 사망하자 고향에 남은 유족들을 러시아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안중근의 의로운 의열투쟁의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살아있는 민족정신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안중근기념사업을 일으켰다. 대동공보사를 반일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라 여긴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 폐간을 종용하며 압력을 가해 대동공보사 주필을 사퇴하였고 『대동공보』는 1910년 9월 1일자(지령 135호)의 종간호를 발행한 후 폐간되었다.

2.3. 대한인정교보 발간

또한 공화주의를 전파하는 친미 세력이라는 혐의를 받고 러시아 당국의 탄압을 받았다. 이에 시베리아 지방총회를 자바이칼주 치타(Chita)로 이전하고 안정된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고 1912년 1월 『대한인정교보』를 발간하였다. 『대한인정교보』는 종교 신문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일제의 학정과 탄압을 강도있게 비판하는 논설을 실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러일 간에 동맹관계가 형성되면서 독립운동은 침체상태에 빠졌다. 일제는 『대한인정교보』의 폐간을 러시아 당국에 계속 요구하였다. 러시아 당국에서도 “가장 위험한 반일 선동 요원은 의심할 여지없이 치타주 한국인 정교선교사단 산하에서 교리문답을 담당하는 이강”이라고 확신하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성공하자 혁명의 정세를 이용해 재러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부흥시키고자 가장 발 빠르게 행동하였다. 1918년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공하였을 때, 치타에서 니콜스크(현 우수리스크)로 이주해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에 적극 가담해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을 방해하고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해 무기제공을 주선하는 역할을 하였다.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성립되자, 서파 대표로서 참석하였으며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 결성 때에도 참여하고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끊어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와도 조직적 연계를 시도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해성병원 안에 기독청년회를 설치하고 총무로 활동 중에 1919년 9월 일제 영사관 경찰에 붙잡혔으며, 서울로 압송되어 종로경찰서에서 1개월 17일 동안 구금당해 취조를 받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약 8개월간 국내에 체류하며 상태를 관망하다가 또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하였다. 1920년 8월 재러 한인 독립운동가와 북간도지역 한인들의 주도로 결성된 신민단(新民團)의 부단장으로 임명되어 항일 무장투쟁 전면에 나섰다.

한편 기독교청년회를 통해 한국과의 관계를 유지해 1921년 5월 해삼위[2] 한국인 학생 음악단 일행 10인을 이끌고 단장으로서 한국을 방문해 마산(馬山)·군산(群山)·이리(裡里)(현 익산)·광주(光州)·목포(木浦) 등지에서도 연주회를 개최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2.4. 천영이속민단편련처 활동

그 뒤 상하이를 떠나 1927년 12월 푸젠성 샤먼에 도착하여 천영이속민단편련처에서 인삼행상이자 의열단 이기환과 활동했다.

1928년 2월 이강은 중국인 교회의 초청을받아 “조선의 현재와 기독교의 상황”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였으며, 이 자리에서 반일적 발언을 하였다. 그의 연설은 일본영사관이 태백산인삼공사에 체류 중인 한인교민들을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영사관 경찰은 1928년 3월 2일 밤 태백산인삼공사를 급습하여 이강, 이기환, 이명재, 이윤병 등 독립운동가 4명을 체포하였다.

파일:1000045937.png

일본 경찰에 의해 평안남도 평양부로 호송되었고,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5.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다시 망명길에 올라 1933년 장쑤성(江蘇省) 진장(鎭江)으로 이동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복귀해 제 12대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38년 이후 장시성(江西省) 진장(晉江)(현 푸젠성)에서 사립 초급농업 직업학교에서 영어교사, 숭문(崇文) 중학교 강서분교의 교원으로 복무하며 교육에 종사하였다.

2.6. 한국광복군 한교전지공작대 징모지원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군대인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 충칭(重慶)에서 결성되고 중국 각지에서 특무활동을 전개할 때, 중국 학교에 교원으로 복무하며 장시성 옌산(鉛山)에 주둔한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3]의 모병 활동과 함께 닝안(永安)·난핑(南平)· 젠양(建陽)[4] 등지에서도 유기석한국광복군 한교전지공작대 징모 활동에 전력하며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조일문은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1943년 말, 나는 난징(南京), 벙부(蚌埠), 카이펑(開封) 일대에서 활동하던 동지 20여 명을 모아 적군 점령지역을 뚫고 중국군 제 3전구로 들어갔다. 거기서 이강(李剛), 정화암(鄭華岩), 박철원(朴哲原), 김문호(金文鎬), 신정숙(申貞淑) 등과 합류하였다. 그 때 일본군으로부터 탈취한 군사 기밀문서는 중국군 제 3전구 사령장관 구주퉁(顧祝同)을 통하여 장제스(蔣介石)에게 전달되고, 그 사실은 김구, 지청천에게 통보되었다.

김영관 지사도 이강 선생을 만난 경험을 본인의 회고록에 담았는데 다음과 같다.
오산 이강 선생은 평남 용강출신으로 미주로 건너가 안창호 선생과 같이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 후 러시아 해삼위로 가서 대동공보사 주필로 활약하던 중, 적괴 이토 히로부미를 주살하고자 하얼빈으로 가던 도중에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여행 일정을 탐지하는데 협력하는 등 그를 도왔고 중국관내로 들어와서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의장, 부의장을 역임하기도 한 분으로서 조국 독립운동에 거족을 남긴 원로이시다. 그 후 여러 곳을 전전하며 활동하시다 이 곳에 잠시 유숙하고 있었는데, 우리들은 그 분으로부터 경험담을 비롯하여 많은 것을 듣고 배우고 참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어회화도 지도 받았다. 60세 전후의 작은 체구임에도 건강하셨으며 안광이 빛나고 의지가 강한 분이셨다.[5]

2.7. 흥사단 활동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임시정부는 중국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포들을 조사, 구제하기 위해 중국 외교부 주대만(駐臺灣)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1946년 8월 타이완(臺灣)으로 갔다. 귀국을 미루고 이곳에서 선무단(宣撫團) 단장으로 임명되어 타이완에 있는 한국 동포의 안전 귀환을 위해 활동을 전개하였다. 무사히 임무를 마친 후

1947년 1월 22일에야 고국을 떠난 지 45년 만에 인천항을 통해 귀국하였다.한국독립당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1947년 3월 10일 , 서울YMCA에서 도산 안창호 서거 9주기 추모식을 거행해서 설립된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상무위원으로 안창호 기념사업에 착수하였다. 한중협회 활동을 계속하면서 흥사단 심사부장으로 복무하였으며 광복회 초대 회장에 임명되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이 수복되자 육영사업에 투신해 서울 남산고등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교육에 종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1964년 10월 13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재건주택 88호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1997년 6월 23일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 2004년 4월 독립기념관 선정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4. 대중매체

  • 1959년 영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에선 배우 김수천이 연기했다.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선 배우 정대홍이 연기했다.
  • 1996년 SBS 3.1절 특집드라마 <안중근>에선 배우 안병경이 연기했다.
  • 2024년 영화 <하얼빈>에선 배우 안세호가 연기한다.


[1] 샌프란시스코[2] 블라디보스토크[3] 민족혁명당 계열의 이소민 대장[4] 젠양구[5] 김영관, 저 산을 넘어서, 195~1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