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29 17:45:19

김달하

김달하
金達河
출생 1868년
평안북도 의주군
사망 1925년 3월 30일
중국 베이징
배우자 김애란[1]

1. 개요2. 생애3. 밀정 발각4. 사망5. 여담6. 참고 문헌

1. 개요

일제강점기의 밀정, 친일반민족행위자.

2. 생애

그는 1868년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 아래에서 밀정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서우학회는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출신 관료·신지식층 집단이 설립한 애국계몽운동단체다. 을사조약(1905) 이후 이른바 일본 보호국 체제하에 합법·공개적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학교 설립과 잡지 발행 등 비정치적 영역 활동만 허용됐지만, 관서지방을 무대로 애국주의 열기를 고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달하는 서우학회 임원진이었다. 재정 총괄 직책인 ‘회계원’으로 선임됐고, 일반 회무의 의사결정 과정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단체 설립 이듬해에는 모든 업무를 지휘하는 ‘총무원’이자 부회장에 선출됐다.

기관지 발행에도 주도적이었다. 월간지 를 냈는데, 전체 15개 호 가운데 6회분 글을 썼다. 기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빈번하게 투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주로 중화민국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와 독립단체에 접근하여 정보를 캐내어 일제에 알려주거나 밀고하고, 이들을 회유했다. 그는 안휘군벌이자 중화민국 국무총리돤치루이의 비서로 잠입하기도 했다.

3. 밀정 발각


김달하는 김창숙을 은밀히 만나 귀국하여 경학원 부제학에 취임할 것을 제의하였다. 경학원은 일제가 유림들을 회유하고자 설립한 어용기관이었다. 그는 이미 조선총독부로부터 내락을 받았다고 덧붙혔다. 독립운동가들이 타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느라 궁핍한 실정을 파고들어 전향시키려는 고급 밀정이었다. 김창숙은 독립운동 진영에 김달하의 실체를 알렸다.

4. 사망

1925년 3월 30일 박용만의 귀순공작을 시도한 혐의로 의열단원 이종희과 무정부주의자 이기환에게 피살당한다.

처형 장소는 김달하의 자택이다. 주소는 베이징 안정문 차련호동 서구내로 북문패 23호다. 식구 10여 명이 사는 규모가 큰 집이었다. 두 집행자는 권총으로 가족 구성원을 위협해 결박했고, 김달하를 외떨어진 공간으로 이끌고 갔다고 한다.

처형 방법은 교살이다. 권총을 사용하면 총소리가 집 밖으로 울려퍼질 것을 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검 목에는 한 오라기 새끼줄이 감겨 있음이 발견됐다.

5. 여담

김달하는 1909년 이화학당에 재학 중인 19살 김애란과 결혼했다. 당시 42살이던 신랑과 나이 차이가 23년이나 지는, 몹시 치우친 혼사였다. 김달하는 두 번 상처했으며 아들 오형제를 둔 홀아비였다.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김달하는 가난한 처가를 위해 집을 한 채 사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김달하·김애란 부부는 결혼 뒤 5년 만에 베이징으로 이민 갔으며, 그곳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자 처갓집 식구를 불러들였다. 1921년 가을 장인, 장모, 처남 식구가 대거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사건이 일어날 때 그 집에는 김달하·김애란 부부가 낳은 두 딸 외에 전처 소생의 다섯 아들과 처갓집 식구까지 모두 12명이 살았다. 뒷날 미국 유학 이후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은 바로 김애란의 여동생이다.

6. 참고 문헌

1. 국사편찬위원회 편, 33책, 774쪽, 1972년.
2. 臨時統監府總務長官事務取扱 統監府參與官 石塚英藏, ‘機密統發第536號, 金東億의 身分取調 照會에 대한 回答’, 1909년 4월8일.
3. ‘회록’, 제1호, 45쪽, 1906년 12월1일.
4. 支那特命全權公使 小幡酉吉, ‘公제92호, 獨立紀念日에서의 鮮人의 行動 報告의 件’, 1, 1921년 3월5일.
5. ‘尋訪왔던 괴청년, 一去후에 流血慘屍’, 1925년 8월6일치 2면. 박태원, 초판, 174~179쪽, 1947년 9월.
6. KBS, 2019년 8월20일.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1]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여성운동가인 김활란의 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