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00:30:15

의열단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정당
대한제국 ~ 미군정
(1897 ~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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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
김원봉
고문
김대지 황상규
단원
강세우 강인수 고인덕 곽재기
권정필 권준 김광추 김기득
김방우 김병현 김상옥 김상윤
김성숙 김시현 김익상 김지섭
김철호 나석주 남정각 박문희
박자혜 박재혁 박차정 박희광
배동선 배중세 배치문 서상락
송천흠 신악 신영삼 신채호
신철휴 오성륜변절 유자명 윤세주
윤치형 이구연 이병철 이병희
이성우 이수택 이육사 이종암
이태준 정이소 최수봉 황옥불확실
최용덕 한봉근 한봉인 홍가륵
유시태 이원대 이원기 윤병구
유석현 정율성불확실 문시환 이춘암
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
의열단
義烈團 | Heroic Corps
파일:조선민족혁명당 당기.png 의열단의 단기(團旗)[1]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설립 1919년 11월 10일
중화민국 지린성 지린시 화성여관
이종암의 숙소
해체 1927년 8월
중화민국 장시성 난창시
설립자 김원봉
후신 조선의용대

1. 개요2. 상세3. 알려진 독립운동들4. 해체5. 평가
5.1. 비판
6. 단원7. 등장매체
7.1. 영화7.2. 드라마7.3. 문학7.4. 웹툰
8.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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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attachment/1051337863.jpg
광복 이후 촬영된 의열단 단원들의 모습.
의열단 투쟁이야말로 수많은 독립 투쟁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감동적인 투쟁이었다.
- 송건호
민중은 우리 혁명대본영(大本營)[2]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조선 혁명 선언'[3]의 마지막 구절, 단재 신채호, 1923년

의열단()은 1919년 11월 김원봉의 주도 하에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항일 무장 투쟁 단체였다. 의열단은 의로운 일(義)을 맹렬히(烈) 행하는 단체(團)의 약자로, 주로 일본 제국의 고위층에 대한 암살 활동이나 주요 시설에 대한 파괴 공작을 거행했다. 이 단체를 발족한 약산 김원봉3.1 운동의 대중화 단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조선인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 이로써 의열 투쟁 결사대를 조직하여 암살ㆍ파괴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내 동포들의 독립 정신을 환기시키고 나아가 이를 통하여 국내외 한인을 중심으로 혁명을 촉발함으로써 민족의 독립과 조국의 광복을 달성하고자 했다. 이 같은 구상 아래 1919년 11월 10일, 중화민국 지린성 지린시 바후먼(巴虎門)[4]화성여관(華盛旅館)[5]이종암의 숙소에서 김원봉·윤세주·이성우·곽재기·이종암·서상락 등 12명의 동지들은 의열단을 발족한 뒤 김원봉을 단장으로 추대하였다.

2. 상세

파일:dZ7cW9x.jpg

창단 당시의 단원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었으며 단장을 비롯해 김대지, 황상규가 고문을 맡았고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의 13명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이 13명은 광복 때까지 단 1명도 배신하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매우 유명하다. 한편 이 13명 중 단장 김원봉을 포함해 5명이 같은 밀양 동화중학교[6] 출신으로, 서로 이웃사촌 관계였기도 하다.[7]

창단 직후 "공약 10조"와 뒤에 "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 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했지만 암살과 테러를 위한 전문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않았던 탓에(사실 당시에는 가르쳐줄 사람이나 단체도 없었지만) 작전의 실행에 허술한 점이 많아 암살 대상의 자택 앞에서 귀가할 때를 기다리면서 술을 마시다가 졸아서 놓치는 등 실패할 때가 많았다. 이들 중에는 김시현 열사가 있는데 그는 8.15 광복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시인 이육사도 의열단 단원이었다.

비밀결사 조직인 탓에 단원이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2010년기밀 해제된 영국의 비밀 문서에 의하면 단원이 무려 2천여 명에 달했으며[8] 도쿄에도 50여 명이 상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작가 님 웨일즈는 김산을 인터뷰해 저술한 <아리랑>에서 1927년까지 체포돼 처형당한 의열단원이 무려 7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이 정도의 규모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게 정말로 대단한 사실.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9]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10]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11]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12]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13]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14]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15]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16]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17]
공약 10조

신채호는 1923년 1월에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 선언)>전문 링크에서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문화주의, 외교론, 준비론 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민중에 의한 직접 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독립 노선을 제시했다.

의열단은 창단한 지 얼마 뒤 근거지를 지린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상하이 지방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경에는 약 70여 명의 단원을 이룰 수 있었다. 후일 한국 민족 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김구, 김규식, 김창숙, 신채호 등이 실질적인 고문 역할을 했고 장제스 중국국민당 총통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3. 알려진 독립운동들

1920년 3월부터 의열단은 곽재기, 이성우, 신철휴, 윤세주 등의 핵심 단원들을 행동대원으로 국내에 잠입시켰고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경성일보사를 폭파하려고 했지만 마지막 실행단계에서 비밀이 누설되어 최초의 대규모 암살∙파괴 활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의열단은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을 파견하여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고 서장을 암살했고 12월 27일에는 최수봉으로 하여금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게 하는 등 연쇄적으로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공격했다. 1921년 9월에는 김익상조선총독부 청사 폭파 의거를 성공시켰다.

그 외에도 1920년대에 지속적으로 일본 고관 암살, 관공서 폭파 등의 활발한 활동을 했다.(1923년 김상옥, 1924년 김지섭, 1926년 나석주 순)

4. 해체

그러나 의열단은 외부의 탄압은 물론 내부적으로도 혼란을 겪게 되었다. 1924년 김지섭이 도쿄 황궁에 폭탄을 던지는 일을 끝으로 김원봉과 같은 이들은 의열단이 이런 소규모 테러적인 항쟁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다른 방향으로 재정립해야 함을 느꼈고 황푸군관학교에 가입하여 의열단의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했고 1927년 난창 봉기에 일부 의열단이 참여하자 이에 의열단에서 마르크스주의자와 아나키스트, 좌파 민족주의자 등이 여러 투쟁의 방향성은 물론 사상적으로 많은 다툼을 겪었고 결국 의열단은 와해되었으며 이후의 테러는 의열단의 체계적 조직을 통한 테러가 아닌 개별적인 투쟁으로 성격이 변했다.

1928년 11월창립 9주년에 즈음하여라는 문건을 발표해 의열단은 본격적으로 단체를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바꾸기 시작했고 소련과의 동맹, 계급투쟁, 세계혁명적 단결, 독립적인 공산당의 창건 등을 내세우자 단체내의 아나키스트들은 이를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단체와 결별했고 1929년 비-공산주의적 민족주의자들마저도 탈퇴하면서 단체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고 당해 12월 "조선의 전 피압박대중이 요구하는 조직은 단순히 어떤 일계급의 전위적 조직이 아닌 대중적 협동전선의 형태인데 본단(本團)은 근본적으로 그 취지에 부응치 못했다."라는 말과 함께 스스로 해산을 선언했다.

이후 김원봉과 윤세주는 중국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에 참여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을 설립했고, 1935년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김원봉은 장제스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18]를 창설했고 군대 형태로 체재를 개편했다.

5. 평가

의열단의 단장인 김원봉이 1926년 황푸군관학교에서 저우언라이 등에게 직접 공산주의를 배운 이래 공산주의 활동을 해 왔고 1948년 월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으며 6.25 전쟁 때 훈장까지 받았지만 북한에서도 결국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하면서 남북 모두에서 의열단에 대한 깊은 연구나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21세기에야 남한에서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19]

<약산과 의열단>의 저자인 박태원은 김원봉을 직접 만나 증언을 들었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저술했다. 저자 후기에서 의열단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선생이 지금은 이미 없는 옛 동지들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줄 때, 나는 그들에 대한 선생의 뜨거운 애정을 내 자신 가슴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구경 나의 이 적은 기록은 선생이 옛 동지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 <약산과 의열단>의 저자 후기

<아리랑>(The Song of Ariran)의 저자이며 기자이기도 했던 미국인 '님 웨일스'(Nym Wales)는 1937년에 의열단원 김산에 대한 일대기를 기록했다. 의열단에 가입한 김산은 당시 조선과 중국을 넘나들며 혁명가로 활동했는데 1938년 중국 당국에 의해 '일제 스파이'로 몰려 34세에 처형되었다. 그에 대해서 '님 웨일스'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내가 7년 동안 동방에 있으면서 만났던 가장 매력적인 사람 중의 하나였다" - 님 웨일스

또 김산이 속한 의열단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의열단원들은 마치 특별한 신도처럼 생활하였고, 수영, 테니스, 그 밖의 운동을 통해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매일같이 저격연습도 하였다. 이 젊은이들은 독서도 하였고, 쾌활함을 유지하기 위해 오락도 하였다. 그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이 기묘하게 혼합됐다. 언제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생명이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기막히게 멋진 친구들이었다. 스포티한 멋진 정장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결벽할 정도로 말쑥하게 차려입었다."

- 님 웨일스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따르면 의열단원은 언제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해, 살아있는 한 자유롭게 생활했다고 한다. 그래서 언제나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머리를 잘 손질했으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언제나 이번이 죽기 전 마지막 사진이라고 생각하면서 찍었다고 한다.
"The Yi Nul Tan members lived like a special cult, keeping themselves in perfect physical condition by swimming, tennis, and other exercises. They practiced sharpsltooting every day. These young men also studied books and took recreation to keep themselves cheerful and psychologically fit for theiz particular duties. Their life was a strange combination of gaiety and seriousness. Death was always before them, so they lived life to the full while it lasted. They were a strikingly handsome lot. Yi Nul Tan members always wore good-looking foreign-style clothes of the sports type, took good care of their hair, and were at all times shining clean and fastidious in appearance. They were very fond of taking photographs—thinking them to be always their last—and of walking in the French park,All the Korean girls admired the Yi Nul Tan, and they had many love affairs. The girls from Vladivostok were part Russian and part Korean, very beautiful and quite intelligent. Affairs of the heart with these girls were short-lived but intense. "
-The Song of Ariran by Nym Wales

5.1. 비판

아이러니하게도 의열단은 독립운동계의 내부 분열을 초래하는 역할을 하면서 거센 비판을 들었다.

대표적으로 1928년 10월 의열단원 이구연이 베이징에서 박용만을 변절자라고 혼자 단정짓고 암살하는 일이 일어났다.[20] 박용만은 암살당하기 전까지 한국의 독립운동, 특히 항일무장투쟁 노선을 이끌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김원봉은 무장투쟁을 제외한 외교, 개화 등 다른 방식의 독립운동 형태를 매우 비판했고 이러한 이유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해체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이 때문에 1930년대 중반 임시정부가 큰 위기를 겪기도 했고 김구, 조소앙, 신익희, 지청천 등 임시정부 핵심 요인들과도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롯한 우파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대체로 의열단의 활동을 득보다 실이 많다고 생각했다. 일본인 한두 명 암살하는 것으로는 독립운동에 효과가 거의 없으며 오히려 테러로 비판받아 독립운동에 지장을 초래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다.[21]

거기다 사회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것도 우익으로 구성되어 있던 임시정부와 기타 독립운동가들한테 이질적으로 비춰졌다. 실제로 조소앙, 지청천, 김규식 등이 의열단 계열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결성한 후 의열단 계열에게 밀리게 되었다는 이유로 탈당했다.

6. 단원


이 외에 이태준이 소개해 준 '마자르'라는 외국인이 의거에 사용하는 폭탄을 제조하는 임무를 맡았다. 대표적으로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의거 때 사용한 폭탄은 이 '마자르'가 제조한 것이다. 다만 이 사람의 자세한 신원은 밝혀진 게 없다. '마자르'란 이름도 본명이 아니라 그가 헝가리 출신으로 알려져서 '마자르'라고 부른 것이다. 사실 이 사람이 정말 헝가리 출신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의열단이 해체된 후의 행적에 대해서도 알려진 게 없다.

7. 등장매체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비밀결사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관련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조선혁명선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의열단이 아나키즘에 영향을 받았고 급진좌파였던 데다 중공군을 거슬러 올라가면 의열단에도 닿아 있어서[28] 의열단까지 도매금으로 빨갱이 취급당했던 게 원인이다.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도 광복 후 월북해서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으니... 게다가 이 조선의용군 병력 중 일부가 국공내전 후 북한으로 귀국해 6.25 전쟁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게 의용군 대원들의 책임으로 보기도 힘든 게, 대원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김일성이 남침을 위해 중국에 요청해서 북한으로 귀국시켜 북한군에 배속시킨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대원들이 단순히 부대를 이동한다는 명령을 받고 차량에 타서 도착해 보니 북한이었고 북한군 군복으로 갈아입으라는 명령을 받고 나서야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았다고 한다.

물론 김익상, 김상옥, 나석주 등 의열단 단원들은 군사정권 시절에도 높이 평가받았고,[29] 21세기에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으며 암살이나 밀정 등 의열단을 소재로 한 영화가 속속들이 개봉하고 있다. 의열단 활동 자체가 비장미가 있고 숨겨진 역사인 데다 직접적이고 희생적인 독립운동을 하는 등 극적이 상황이 많고 영화 소재로 삼기 좋은 암살, 폭파 등의 활동을 했다는 점도 있다.

일제강점기의 어두웠던 역사가 아직까지 청산되지 않고[30]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자손들은 일제에 빌붙은 대가로 얻은 기득권을 유지하고 대부분 호의호식하는 반면[31] 독립운동가의 자손들은 대부분 어려운 삶을 살고 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조차 일본 정부가 사과조차 않는 와중에 한국 정부조차 이에 동조하는 상황 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

문재인 정부 출범 후 2019년에는 아예 의열단 100주년기념사업추진회를 출범하여 서울시청 광장 및 김원봉을 비롯한 많은 단원의 출신지인 밀양시에서 창설 100주년을 기념했다.

7.1. 영화

  • 아나키스트 - 한국 영화계에서 처음으로 의열단을 소재로 삼은 기념비적 영화.[32] 위에서 묘사된 '멋진 옷을 빼입고 주색을 즐기며 목숨을 아끼지 않던' 불꽂처럼 살다 간 의열단원들의 행보 등을 충실하게 묘사했으며 독립단체 간의 파벌 싸움과 이권다툼 같은 어두운 치부도 그대로 고증했다. 다만 영웅본색을 연상시키는 액션신 탓에 홍콩 느와르의 아류작이라는 혹평을 받았고 흥행에는 실패했다.
  • 암살 - 극중 의열단장 김원봉이 등장하며 배우는 조승우가 맡았다. 영화상에서 김원봉과 함께하는 이들이 조, 단역으로 등장하는데 이들이 의열단일 가능성이 높다. 의열단 단원들답게 양복 맵시가 좋다. 사실상 한국에서 김원봉 본인에 한하는 경우이긴 하지만 의열단을 제대로 그린 첫 케이스다. 영화에 등장하는 안옥윤, 추상옥(별명: 속사포), 황덕삼은 의열단원이 아니다.
  • 밀정 - 의열단원 김지섭이 일본 황거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일제의 주요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과 이를 쫓는 일본 제국 경찰 사이의 숨막히는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을 그린 영화다.[33] 모티브 자체가 의열단원들의 의거인만큼 영화 아나키스트처럼 거의 모든 한국 측 주조연이 의열단원들이다. 암살과 달리 단장으로 김원봉 본인이 등장하진 않고, 그를 모티브로 하고 배우 이병헌이 연기하는 인물 '정채산'이 의열단장으로 등장한다. 역시 이 작품 속 의열단 주요인물들도 남녀 가리지 않고 멋쟁이처럼 빼입고, 의거가 있을 때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묘사된다.
  • 사바하 - 영화가 현대배경의 오컬트물이다보니 의열단 자체는 별 비중은 없지만 작중 등장하는 '김제석'이라는 인물이 일제강점기 당시 이들을 포함한 독립투사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는 대사로 짧막하게 언급된다. 그런데 작중 김제석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승려들뿐 아니라 조선 총독에게까지 추앙받은 존재라고 설명되는데, 다르게 보자면 과격한 아나키스트 독립 운동가들을 대놓고 지원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을 못 잡아족쳐서 안달이 된 조선 총독부의 수괴에게까지 개인적으로 존경을 받고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니, 그야말로 인간 이상의 경지에 도달한 김제석의 과거 모습을 잘 보여주는 설정인 셈이다.

7.2. 드라마

  • 절정 - 의열단에 가입하여 무력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육사의 일대기를 다룬 단편 드라마다.[34]

7.3. 문학

  • 약산과 의열단 - 작가 박태원이 쓴 책으로, 의열단 단원 유자명의 '의열단간사'와 근근이 보존되어 있던 의열단 단원들의 편지 및 당시의 신문기사를 참조하여 약산 김원봉의 구술을 받아 완성한 책이다.

7.4. 웹툰

  • 고래별에 등장하는 결사단이 의열단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8. 참고자료


[1] 이후에 설립된 조선민족혁명당의 당기와 동일하다.[2] 당시 일본군에서 총사령부를 일컫던 말이지만 당시에는 동아시아 전역을 불문하고 사용되었다. '혁명의 중심', '혁명의 근원지' 정도의 의미로 해석하면 된다.[3] 의열단 선언이라고도 하지만 '조선 혁명 선언'이 정확한 명칭이다.[4]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 촨잉구(船營區) 광화로(光華路)와 쿤밍가(昆明街)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5] 중국인 반씨(潘氏)가 운영하던 객점(客店)으로, 지금의 광화로(光華路)57호에 있었다. 현재 이 건물에는 중국농업은행 후이성(滙生)지점 등이 입점해 있다.[6] 민족교육을 하다가 일제에 의해 폐교 조치되어 지금은 없다.[7] 그래서 밀양시의 김원봉 생가터에 의열기념관이 세워졌다. 특히 핵심 단원이었던 윤세주 생가는 김원봉 생가에서 10m 거리에 있다. 그냥 태어날 적부터 바로 옆집 친구였던 사람들끼리 만주에서 독립운동 뛰었던 셈이다.[8] 쉬운 비교를 위해 예를 들자면 《기드온의 스파이》에 의하면 초기 모사드를 지휘하던 모사드 부장 등은 모사드의 적정 인원 수를 1,500명 내외라고 보고 그 전후한 범위 내에서 요원들을 양성해 작전에 투입하고 지휘했다. 물론 CIA와 같은 거대 정보기관이 수만 명에 달하는 인력을 운용하고 있는 사례도 있으나 적어도 의열단도 그 규모상으로는 최소한 한 국가 단위의 정보기관급에 달했다고 비교해 볼 수 있다.[9]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로 한다.[10]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몸과 목숨을 희생하기로 한다.[11] 단체의 뜻을 우선하고 단원의 뜻을 실행하는데 속히 한다.[12] 의백(義伯,올바른 성품을 가진 지도자) 한 사람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13] 언제 어디서든지 매월 일차씩 상황을 보고한다.[14] 언제 어디서든지 모이도록 요청하면 꼭 응한다.[15] 죽지 않고 살아있어 단의 뜻을 이루도록 한다.[16] 하나는 다수를 위하여 다수는 하나를 위하여 헌신한다.[17] 단체의 뜻에 배반한 자는 벌한다.[18] 이 부대는 국민당 장제스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한국인 독립부대다.[19] 다만 김원봉의 북한 정권 설립과 한국 전쟁에서의 역할로 인해 김원봉의 대우와 관련하여 진보와 보수 간의 대립이 첨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20] 사실 박용만이 그 즈음 변절했다는 의심을 받고는 있었지만 분명한 사실은 변절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박용만 항목 참조.[21] 하지만 당시에는 우파라고 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테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김구 본인도 1930년대에 할 수 있는 활동은 테러밖에 없어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윤봉길, 이봉창의 의거를 이끌어냈고 이를 바탕으로 장개석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편 한인애국단 활동을 본 김원봉은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이르렀다.[22] 일제 밀정으로 한봉근, 김시현, 황옥의 계획을 밀고하여 실패하게 만든 장본인이다.[23] 한 때 독립운동가였으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대한민국 부통령 김성수와는 동명이인이다.[24]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의열단에 가입되어 있느냐는 질문에 관계는 있다고 답한 적이 있다.[25] 1928년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박용만을 살해하여 독립운동계에서 내부 분열을 초래한 원흉이다.[26] 일제 밀정으로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단체에 가입한 것이며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투옥, 사형시킨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다.[27] 본명은 정부은. 광주 출신으로 1933년에 중국 난징으로 넘어가 의열단에 가입했고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교했다. 여담으로 일설에는 '율성'이라는 이름을 김원봉이 지어줬다는 얘기가 있다.[28] 의열단 → 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 →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 조선의용군 → 팔로군과 연합, 마오쩌둥의 중공군에 합류.[29] 이들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30] 당장 의열단의 수장이었던 김원봉부터 해방 이후 친일청산도 없이 버젓이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에 의해 기용된 친일파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었다.[31] 다만 통념과는 달리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의 자손들 중 유명인사가 된 경우는 민복기, 이종찬 외에는 없다시피하다. 이순용도 있긴 하나 본인은 독립유공자였기 때문에 논외. 또 식민주의/영향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 식민지 부역자들이 독립 후에도 잘 살고 독립운동가들이 철저히 무시받는 것은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32] 그 밖에도 '최초의 한중 합작영화'라는 타이틀도 있다.[33] 마지막 장면에서는 김익상조선총독부 폭파 의거가 묘사된다.[34] 참고로 '절정'은 이육사가 쓴 시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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