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식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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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식민주의의 영향에 대한 문서. 식민지를 지배함으로써 생기는 지배국의 영향(이득/손실)과 피지배국의 영향을 포함한다.2. 지배국
2.1. 이득
17세기까지의 거점형 식민지와 스페인 제국, 포르투갈 제국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남아메리카 진출의 가장 중요한 이점은 바로 그곳만의 특별한 자원을 지닌 해당 식민지와의 교역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근세 이후 유럽 열강들이 식민지를 건설한 것 역시 처음에는 동양과 향신료를 무역하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자원을 독점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원주민들에 대한 약탈의 목적도 있었다.노예무역 역시 식민지 경영의 원인이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데려온 노예들로 인해 유럽의 열강들은 헐값으로 대량의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었고, 당시 노예무역은 큰 이득을 남기는 사업이었다. 이 시절 아프리카에서 끌려간 노예가 최소 수천만 명에서 최대 억대일 수도 있다고 한다.
다만 아메리카 노예들은 역병에 시달린 데다가 지구력도 아프리카 노예들에 비해 떨어져 금방 대체되었고, 아프리카 노예들은 쓸 만했으나 이들을 거래하는 형태는 식민지로 정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지인들과 교역하거나 그들을 납치하는 등의 형태였다. 심지어 19세기까지도 유럽인들 외에 아랍인들도 노예무역의 주된 수요층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아프리카가 식민지 정복에 시달리는 19세기에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은 노예제를 금지했다. 특히 아메리카 식민지의 이주민들은 현지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아프리카의 노예들을 대량으로 구입했으며, 기타 노예가 필요한 국가들과 교역했다.
식민지 현지에서 유럽에서 인기 있는 작물들을 대량으로 경작하기도 했는데 커피나 설탕, 각종 향신료 등이 당시 유럽에서 큰 인기 품종이었으며, 이러한 식민지 시대의 영향으로 지금까지 이런 품목들이 해당 국가의 유명한 수출 품목으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인도 제국의 사탕수수를 들 수 있는데, 당시 영국은 한해 설탕 소비량이 무려 7만톤에 달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에서 대량의 사탕수수를 재배하였고, 대중국 무역에서 차수입으로 적자를 보자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의 밀수출과 아삼 지역의 차 재배로 이를 대체하였다. 또한 현지민들을 농노로 부려먹거나 금광을 채취하게 강요하기도 했으며, 식량 자원을 수탈하기도 하는 등 그 유형도 다양했다.
이렇게 열강이 식민지에서 얻은 이득은 그야말로 막대했다. 실제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같은 경우는 동양과의 향신료 무역과 아메리카에서 나는 풍부한 자원[1]으로 순식간에 세계적인 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2]
다만, 적어도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들어서면서부터, 식민지에서 얻는 이득이 그렇게 컸다고 보기는 어렵다. 19세기 중반부터 먹어치운 식민지, 특히 아프리카 식민지는 돈이 목적이 아니라 국가 위신을 높이고 자국의 하층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강했다. 그리고 밑의 부작용 단락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단적으로 말해 식민지의 경제 규모가 너무 작아서 식민지보다는 다른 선진국과 교역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이익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가령 프랑스는 4공화국 당시 식민지와의 무역 비중은 전체 교역 비중 중 5위에 불과했고, 지금도 그렇지만 서방권과의 교역이 압도적이었다. 게다가 식민지의 경제 사정은 본토의 물건을 사줄 만큼 좋지 못해서 시장으로도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본국 물건을 대량으로 소비할 정도의 경제력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약간 다른 예시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자신의 사유지인 콩고 자유국에서 사실상 자신의 노예나 다름없는 콩고의 원주민들에게 고무 채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수족을 절단하는 형벌을 가하여 최소 1,000만에서 최대 3,000만에 달하는 원주민들을 학살하였다. 그 결과, 1893년엔 250t도 되지 않았던 콩고 자유국의 고무 수출량은 1901년엔 6,000t으로 엄청나게 증가하여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재산을 크게 불린 것은 물론, 벨기에에 크고 아름다운 수많은 공공건물들을 건설하기까지 했다. 다만 콩고 자유국은 금을 비롯한 광물자원과 고무와 열대작물 등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자원이 풍족한 땅이었다. 콩고 자유국은 19세기 제국주의 열풍으로 개척한 식민지라기 보다는 17세기의 경제적 이득을 노린 거점형 식민지에 가깝다.
식민지의 경영은 경제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가령 영국은 인도와 본토를 연결하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인수하고,[3] 아프리카를 종단으로 개척하기도 했다. 일본 역시 조선을 대륙 침략의 기지로 활용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식민지 개척을 통한 국수주의적 열망 충족은 산업혁명 시절에 만연한 각종 정경유착 및 기업비리 및 노동착취, 산업재해, 빈약한 사회복지제도와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극심한 양극화 등 각종 사회문제로부터 하층민들의 시선을 돌리기 좋은 소재였다. 또한 종교적 열망, 국가적 위신, 군인 등의 일자리 보전 등이 동인으로 꼽힌다.
식민지 지배가 경제적으로 생각보다 이득을 보지 못한다는 얘기가 많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국가경제 전체로 볼때나 그런것이고 정치가들이나 식민지에 자본금을 투자한[4] 식민지에 거점을 둔 관료들은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구체적으로 따져 본다면 고대, 중세의 식민지 개척은 인구 분산이나 거점 확보적 측면이 강했다.[5] 그리고 대항해시대 이래 19세기 초까지는 시대가 지날수록 원료 독점과 같은 경제적 목적이 상대적으로 더 강했다. 마지막 19세기 말 이후에 들어서는 애국심 고취, 사회갈등 해소, 군사적 필요 등과 같은 비경제적 목적이 강했다.[6]
그나마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식민지는 이득이 있기 때문에 유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누벨칼레도니는 세계 니켈 매장량의 약 20%를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니켈 채굴로 인한 막대한 수입이 프랑스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는 프랑스의 배타적 경제수역의 약 40%를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프랑스는 이 식민지 덕택에 세계 제1위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이나 영국은 프랑스처럼 떨어진 곳에 섬 영토가 있는데 영국도 프랑스와 비슷하다. 미국은 전세계에 미군을 깔아둬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태평양과 카리브 일대에 상당수의 식민지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식민지들이 거점으로써의 이득을 보는 편이다. 이를테면 괌이나 북마리아나 제도, 푸에르토리코라든가, 아예 50번째 주가 된 하와이라든가. 이쪽은 아예 태평양 함대의 최중요 거점이기도 하고. 이들은 워낙에 인구 규모가 적어 통제에 필요한 국력이 크지 않으며 그런 반면 지정학적/자원상의 이득은 크기 때문에 이득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식민지가 다 군소 제도인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
2.2. 부작용
2.2.1. 일반적인 교역이 낫다
식민지는 분명 초중반에는 식민지를 경영하는 국가들에게 물질적ㆍ경제적으로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런 주장에는 반론이 있다. 사실 영국은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산업혁명으로 본토의 경제력이 늘어났고, 식민지 자체는 엘리자베스 1세 시절부터 아메리카 쪽에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질이 좋지는 않았다.[7] 인도나 아시아, 아프리카 쪽은 산업혁명 이후부터 제대로 먹기 시작했고, 그나마도 막대한 인력과 시장을 제공해서 유지하던 인도를 제외하곤 돈이 별로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인도의 시장이라는 것은 영국이 굳이 인도를 정복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것이었고[8] 그나마 확실히 도움됐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인도의 인력밖에 없다. 아니, 그 인도조차도 100만 명 이상의 군인을 1차대전에 투입한 것이나[9]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저항에서 보듯이 억지로 지배하면서 이익까지 보는 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계속 나오고 있었고, 2차대전 이후 영국은 국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식민지들을 유지할 수가 없어 자발적으로 독립을 시킬수밖에 없게 된다.사실 이미 세계 각국의 동인도 회사는 미국이 독립했을 때인 1776년부터 서서히 맛이 가기 시작하였고, 이익은커녕 손해가 커서 19세기엔 거의 사라지기에 이른다. 또한 스페인의 경제 성장은 네덜란드의 덕을 본 것도 있다. 네덜란드 역시 인도네시아를 먹으면서 향료 무역을 독점한데다 고무가 대량으로 나오면서 본국의 경제력에 큰 보탬이 되긴 했지만 얘네 역시 이전부터 경제력이 높긴 했다. 포르투갈 역시 브라질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대항해시대의 포문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국의 국력이 너무 약해 결국 스페인에 합병되었고, 독립한 뒤에도 스페인-프랑스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의 2중대가 되었다.
스페인, 포르투갈의 항로 개척 등에서 들 수 있듯이 식민국이 피식민국을 병합하기 이전에는 보통 양자간 교류가 없거나 미미한 경우가 많았다. 어쨌건 이런 접촉을 통해 식민국과 피식민국간 상품 등의 교류가 이뤄지므로, 식민지 개척 이전과 비교하면 분명 이건 득을 본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양자가 정치적으로는 독립적인 상태에서 무역을 하는 것과, 식민지 무역에서 발생하는 통제 비용 등을 고려하면 전자가 후자보다 낫다. 그나마 후자가 더 나은 점이라면 식민국이 피식민국의 정책을 통제할 여지나 교류의 안정성 정도를 들 수 있다.
전자의 예시로 미국을 들곤 하는데, 미국은 식민지가 손해를 가져다줄까봐 그런 건 아니고, 남북 전쟁을 수습하고 뒤늦게 식민지 쟁탈 경쟁에 뛰어들어들었다는 점, 그리고 미국의 영토 자체가 굉장히 넒으며 특히 서부를 중심으로 미개발지가 많아 이 쪽을 개발하는데 온 신경을 썼기 때문에[10][11] 직접 식민지화를 하는 것을 가급적 피해서 그런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필리핀[12] 정도를 들 수 있다. 나머지는 섬 지역이라 독립 운동을 할 역량이 거의 없기도 하고.[13] 아무튼 이는 미국이 의도한것은 아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주의로 인해 기존의 식민제국들이 해체되고 독립한 신생 국가들에게 한동안 '미국은 사악한 대영제국, 프랑스 제국과는 다른 인도적인 국가.' 라는 좋은 인식을 갖게 되었다.[14]
일단 19세기 이전의 거점 식민지 형식과 달리 19세기 이후의 땅따먹기식 식민지 경영은 본국의 병력 + 관료 + 유지 관리 비용[15]이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이런 문제로 향료 무역의 이익에도 불구하고 유지 비용이 너무 많아서 적자, 부정부패 등에 시달리다가 결국엔 해체된다.
네덜란드는 아시아 국가간의 무역이 쇠퇴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고, 여기에 분식회계 문제, 영국 및 아메리카와의 경쟁 문제 등이 겹치면서 영란전쟁 이후로는 세가 축소되었으며, 영국은 국방비를 충당하기 위해 미국에 무리하게 세금을 매기려다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났고, 결국 미국의 독립을 허용하고 말았다. 거기에 식민지 지역 중 상당수가 본국 사람들이 살아가기에는 영 환경이 좋지 않거나 본국 사람들의 숫자가 적어서, 지배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본국민들을 투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2.2.2. 인구 유출
그나마 19세기 유럽은 프랑스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출산율이 매우 높아서 인구 유출이 심각해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16] 20세기에 이르면서 그 출산율이 떨어지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식민지를 너무 많이 만들어서 인구 유출이 가속되다 보면 오히려 본국의 활력이 떨어지는 아이러니가 생기기도 한다.과거의 헬레니즘 제국이 이런 사례이며, 마케도니아-그리스의 인구 팽창이 정지하자 로마와 파르티아에게 다 같이 몰락하고 말았다.[17] 현재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이 시기의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국가 막장 테크를 밟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의심되고 있는데 본국의 인력, 그것도 국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엘리트 청년층이 구 식민지로 대량 유출되고 있기 때문. 거기에 식민지의 인력, 자원을 써먹기 위해 인프라부터 재투자를 하느라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상황이 생겨났고, 식민지인들의 경제력이 좋을 리도 없으니 식민지인들이 식민제국의 물건을 사서 손해를 메꿀 리도 없다.
2.2.3. 국내산업 경쟁력 둔화
또한 식민지 경영에 지나치게 힘을 쏟다보니 자연히 국내 산업에 대한 투자가 소홀해져 결과적으로 본국의 국가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단점이 발생하였다. 독일이 영국, 프랑스 등 기존의 강대국들을 상대로 2번의 세계대전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식민지 경영을 하는 대신 국내 산업의 육성에 힘을 쏟았기 때문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몰락한 것도 지나치게 해외 식민지에만 집착하다 보니 자연히 본국의 국가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영국의 공업 중에서도 식민지 수출로 먹고 살던 방직공업은 1920년대 이후로는 몰락했다. 그리고 영국은 이 식민지 제국의 부작용인 영국병을 1990년대까지 끌고 가야 했다.스페인은 본디 목축 위주의 산업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양모를 팔아서 돈을 벌고 그걸로 강대한 스페인군을 유지하는 구조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신대륙 개척 이후로는 신대륙산 금은으로 바뀌어 덕분에 스페인은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신대륙에서 대량으로 들여온 금, 은으로 인한 발생한 인플레[18]로 오히려 타 산업이 붕괴되어 경제 구조를 취약화시켰단 거다. 결국 그 군대가 칼레 해전과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다 갈러나갔다. 포르투갈의 경우 분명 인도 무역 자체는 짭짤했지만, 결국에는 무역이 낫냐 식민지 정복이 낫냐의 문제. 더 심각한 것은 인도 무역은 이문도 짭잘했지만, 리스크도 그만큼 큰 산업이라 선원이나 선박 손실이 심각했단 거다. 특히 숙련된 선원은 쉽게 양성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손해는 극심.
19세기 식민제국의 대표주자인 영국과 프랑스도 지나치게 식민지 경영에만 힘을 쏟다보니 세계 대전이 발생할 즈음에 가면 결국 기술과 산업에서 미국과 독일에게 완전히 추월당하게 된다. 이후 식민지들이 독립하고 자국 경제성장에 전념하면서 오히려 독일을 따라잡았을 정도. 그나마도 1870년대 이후에 먹은 식민지들에게선 이득 본 것도 없이 순전히 자존심 싸움만 했다. 영국의 동아프리카, 남아프리카 회사는 주주들에게 투자 배당금도 주지 못해서 쩔쩔 맸고 아프리카 투자 기피 현상까지 벌어졌다. 수익이 창출될 수 있는 하부 구조 자체가 없으니 뭐 돈이 벌릴 구석이 있나. 오히려 네덜란드나 영국, 프랑스 등에서 드러나는 점은 식민지들을 다 독립시키니까 경제성장률이 더 크게 상승했단 거다. 특히 영국, 프랑스에서 중산층들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진 시기도 식민지를 독립시킨 뒤였다.
2.2.4. 식민지인의 저항
외국에 정복당한 피지배민들이 본국에 협력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성이 떨어졌다. 점령 초반에는 어떨지 몰라도 결국 열강과의 충돌로 인하여 식민지의 정치적 각성이라는 결과는 좋든 싫든, 빠르던 느리던 결국 따라왔고, 결국 식민지들은 지배국에 맞서서 들고 일어나게 되니까, 원래도 돈 안 되는 식민지는 오히려 돈을 쓰는 곳이 되었다.다만 모두가 협력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가 된 곳 중 한국처럼 통일된 정치 체계가 성립된 곳은 흔치 않고, 서로 동족의식도 없고 오히려 적대감정이 넘치는 부족, 세력, 번국들이 넘쳐나는 곳이 대다수였다. 19~20세기 초반에 조선처럼 통일되었던 지역들은 적었고, 대부분 지역별로 별개의 국가 정도의 차이가 나는 데가 훨씬 많았다. 때문에 열강들은 이런 부족 간 갈등을 이용하는 식으로 협력자를 얻었고, 식민지배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식민지 엘리트들이 등장하여 식민지배에 협조하게 된다. 어쨌거나 외부 세력이 와서 좌지우지하는 만큼, 이전 체제에 비해서 저항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영국은 미련없이 식민지들을 차례로 독립시켜줬다. 그 예로, 영국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말레이시아 등의 국가가 독립할 때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케냐 등 일부 국가에선 유혈사태가 일어나긴 하였다.) 사실 윈스턴 처칠을 포함한 영국도 식민지들을 독립시켜줄 생각이 없었으나, 이미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국력을 심하게 소모하여 식민지들의 독립을 막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포기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영국과 똑같이 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프랑스가 없는 힘 다 쥐어짜서 식민지 이탈을 막으려 한 것에 비하면 현명한 행동이었다. 이런 점에서 옛 영령 식민지들의 독립을 순순히 용인해준 영국은 그나마 앙숙 프랑스에 비하면 평가가 좋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과 알제리에서 수십만 젊은이들의 피를 뿌리며 국력을 심각하게 소모하게 되어, 나중에는 식민지들을 잡아둘 힘이 없어져 차례로 독립하게 된다. 물론 베트남은 프랑스인들의 농장이 꽉 들어차 있었고, 알제리는 석유, 천연가스 등 자원도 풍부한데다 공식적으로는 식민지가 아니라 프랑스의 영토확장 개념이라 해외영토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없긴 했다. 네덜란드도 이 전철을 밟았다.
특히 이 분야의 끝판왕은 포르투갈이다. 포르투갈은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독재정권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기니비사우, 앙골라,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대륙의 해외 식민지에 집착하다가 나라가 그야말로 개판이 되어버렸다.
2.3. 독립 이후
독립이 된 이후에도 식민지는 과거 종주국에게 이득이 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종주국의 언어, 종교 및 문화 영향력 확대이다. 과거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은 독립한 이후에도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기니비사우와 모잠비크, 앙골라 등을 정복한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처럼 대부분 그 종주국의 언어를 공용어로 쓰는 일이 많다. 거기다 식민지 시대에 쌓인 학맥과 인맥으로 구 식민지 국가의 지배층과 지식인은 구 식민지배국의 대학에서 학문을 수입하거나 유학하여 구 식민지배국의 문화 지배가 계속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종주국들은 인재난이 심한 분야인 건설업과 제조업 등에 언어가 통하는 과거 식민지였던 개도국의 인력들을 충당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경제난을 극복하고 또한 경제를 성장시킨 나라들이 대표적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이다.하지만 포르투갈과 브라질처럼 식민지 종주국이 개판이 되고 반대로 식민지였던 나라가 잘 나가면 본국이 오히려 구 식민지 국가들에게 인재를 제공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현재 포르투갈이 가진 가장 큰 고민이 자국 청년층 및 엘리트들이 한창 자원 개발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앙골라, 모잠비크, 브라질 등 과거의 '식민지'로 이주하고, 젊은층의 부재로 사회가 활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2.4. 종합
식민지는 어떤 지역을 차지했느냐에 따라 (경제적) 순이익 측면에서 강대국에 이득[19]이 될 수도 있었고, 손실이 될 수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초기에는 남미, 아프리카, 동남아의 주요 자원, 향신료, 기호품 생산지가 주요 식민 지역이 되었고, 열강은 이러한 생산물을 독점하면서 재미를 보았다. 다만 여기에는 식민지 경영에 따른 이득 외에도 기존에 교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경제권의 연결에 따른 이득도 포함되어 계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점차 식민지 획득 과정에서 경제보다는 정치적 요소가 개입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프랑스의 서아프리카 식민사업, 영국의 종단 정책, 일본의 한국 병합, 스페인의 모로코 병합, 이탈리아의 리비아, 에티오피아 병합 등이 대표적이다.
그 결과 식민지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서 애물단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나마 일본의 한반도와 대만 병합의 경우는 중국 및 동남아시아 침략의 전진 군사 기지로 기능했고, 리비아 역시 2차 세계대전 당시 본토의 방패 노릇을 하기라도 했다.
오늘날까지도 유럽과 같은 정치사회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에서도 황금시대이고 천국이자 파라다이스라며 그 시절을 아직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나 유럽과 일본의 경우 경제에 문제가 생길 경우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타나며 인종차별로 이어지는 일들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억 보정일 뿐이다. 유럽, 일본의 진짜 '황금기'는 해당 국가들의 극우(대안우파 포함)들의 인식과 달리 제국주의 시대가 아니라 식민지를 놔주고 고도의 경제 성장으로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져 중산층이 두터워진 1950~1980년대라 볼 수 있다. 영광의 30년, 라인강의 기적,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항목을 참고해보면 좋다.[20] 이런 착각을 하는 이들은 대개 사회의 하류층으로, 피지배층인 식민지 주민들을 내려다 보면서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다.[21]
식민지에 관련해서는 홉슨과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유명하다. 홉슨은 보다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레닌은 공산주의적 시각에서 분석했다. 홉슨의 경우 식민지는 경제적 목적이 강하기 때문에 개척된다고는 하지만 정말 경제적 가치가 있는지는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식민지는 그 국가의 경제에 정말로 이바지한다기보다는 이익 집단들의 열망과 한 몫 잡고 싶은 열망[22]에 따라 나온 바가 크다. 또 홉슨은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국가가 피할 수 있는 비극"이라고 봤다. 반면 레닌은 이를 부정했다.
3. 피지배국
노예가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노예가 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식민지의 경험은 한 민족의 넋에 드리운 그림자다.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다.
- 소설 비명을 찾아서 중
- 소설 비명을 찾아서 중
우리는 풍요로운 예속보다 빈곤한 자유를 원한다!(Nous préférons la Pauvreté dans la Liberté à la richesse dans l'esclavage!)
- 아메드 세쿠 투레, 기니의 독립운동가, 초대 기니 대통령.
- 아메드 세쿠 투레, 기니의 독립운동가, 초대 기니 대통령.
식민 지배를 당한 나라는 독립하더라도 자주적인 국가 운영이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3.1. 부역자들의 생존과 기득권 유지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를테면 식민지 시절 차별받는 동포/피지배민들을 뒤로 한 채 외세 지배자들에게 빌붙으며 얻어낸 콩고물로 거대한 부와 권력을 축적한 부역자들이 독립 후에도 꺼삐딴 리마냥 여전히 부와 권력을 쥐어잡고 있다. 이들은 식민지가 독립하고서도 부와 권력을 변함없이 쥐고 있어[23] 사회 발전에 심각한 걸림돌이 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필리핀.문제는 식민지에서 갓 독립한 국가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고급 인력은 대부분 식민제국에 협력적인 인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행정 관료나 법조인들, 군대나 경찰의 상급 지휘관을 실무 지식과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식민지 국가에서 실무 경험이 있는 인재는 그 수도 적을 뿐더러, 이들조차 대다수가 식민지 시절 관료나 법조인, 경찰, 그리고 식민 제국 군대의 장교들이었을테니까 식민 제국에 크건 작건 협력할 수밖에 없던 인물이 대부분일 수 밖에 없다.[24] 이런 현실적 문제 때문에 식민지 시절 부역자들이 해방 후에도 등용되며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25]
이렇듯 부역자들이 식민지 시절 쌓은 국가 유지 경험과 재력을 바탕으로 기득권층으로 자리잡고 그 후손들도 가문 환경과 이를 기반으로 한 좋은 교육환경 속에서 대대로 호의호식하는 반면 독립 후 운이 좋거나 기득권층의 마음에 들지 못하면 대개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며 대대로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독립운동가들[26][27]을 바라봐야 하는 독립국의 일반인들은 이러한 부조리한 모습에 불만을 갖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필연적으로 사회갈등이 일어나게 된다.[28] 사실상 부/가난이 대물림되는 것이다. 덤으로 한국을 제외하면 식민지, 점령지 시절 자국인 부역자들을 공론화하는 경우는 드물며,[29] 이들의 후손들까지 공론화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30]
여담으로 한국에서는 미진한 친일파 청산을 아쉬워하며 나치 잔재를 청산하는 데 성공적이었던 프랑스를 모범적인 과거사 청산 사례로 평가하고 있는데,[31] 사실 이 둘은 애초에 부역자 청산 당시 처한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기에 일대일 비교는 불가능하다.[32] 일단 프랑스는 해방 후의 이념갈등의 유무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원래 전쟁 전에 제대로 된 인프라 하나 없는 최빈국이기는커녕 오히려 대영제국 버금갈 정도의 열강이었던 만큼 공무원이나 법조인, 경찰, 군인, 언론인, 지식인 같은 인적 인프라가 풍부해 나치 부역자들을 모조리 처벌해도 인력 공백은커녕 이를 대체할 인력이 넘치고돌았던 데다가 나치 점령 기간도 민주주의 국가의 정권 교체 기간에 불과한 4년 정도에 불과했으니 부역자 식별, 색출이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월했다.[33] 비드쿤 크비슬링 내각 청산에 성공한 노르웨이[34] 역시 과거에도 금속 제련업, 조선업 등 중공업이 발달했던 나라라 독립 직후의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건실한 나라였고,[35] 경제적으로 건실했던 만큼 나라에 인적 인프라 역시 충분했으니 부역자를 엄격하게 처벌해도 국가 운영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반면 한국은 식민 지배를 받은 기간이 한 세대에 육박하는 35년이고, 심지어 그조차 식민지 국가 중에서는 짧은 편이었으니 식민지였던 기간이 수십~수백년인 국가들이 갓 독립해서 부역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후술하듯 아예 식민지배국 출신 인사까지 등용하며 국가 운영을 해야 했다. 더구나 한국은 추축국의 식민지었기에 2차 대전 후 일본인 고위층들이 모조리 쫓겨나고 일본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졌는데도 독립 후 오랜 기간 동안 부역자들[36]이 여전히 기득권을 잡고 있었고, 훗날 사회도 안정되고 잘 사는 나라가 된 후에야 뒤늦게나마 식민지 시절 잔재 청산을 시작했는데도[37] 현재까지도 식민지 시절 잔재를 온전히 청산하지 못한 마당이니, 연합국의 식민지 출신이었다가 독립 후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가난하고 차라리 식민지 시절이 낫다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국가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38]
실제로 독립한 국가들이 해방 후에도 부역자를 울며 격자 먹기로 고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주는 사례가 존재한다. 벨기에령 콩고 군대의 마지막 지휘관이던 에밀 얀센스(Émile Janssens, 1902 ~ 1989)는 벨기에령 콩고가 독립국으로 가기 위한 준비 없이 독립하자 식민지 콩고의 군대를 독립국 콩고의 군대로 전환하려 하던 때에 독립 후에도 콩고가 벨기에 식민 시대에 확립된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관점을 고수하여 1960년 7월 5일, 회의에서 콩고의 독립 후에도 콩고군은 백인 장교들의 지휘를 따라야 한다며 '독립 전 = 독립 후'라는 문구를 칠판에 적었는데, 당연히 이에 분노할 수밖에 없던 흑인 병사들은 얼마 안 가 반란을 일으켜 백인들을 공격, 콩고에 있던 백인들을 쫓아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백인 행정관과 백인 군 장교가 증발해버렸고, 이런 와중에 독립 초 콩고민주공화국은 대학교 졸업자는 16명, 정부에서 일자리를 가진 흑인은 단 3명뿐이었으니 안정적인 나라 운영과 사회적 질서 유지가 완전히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독립한 콩고민주공화국은 이런 상황을 어찌어찌 해결하기 위해 군 복무 경험이 전혀 없는 흑인 1천 명에게 장교 지위를, 국가 실무에 참여한 경험이 전혀 없는 흑인 수천 명에게 행정직을 줘야만 했고,[39] 당연히 콩고민주공화국은 국가 운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으며, 이런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내전, 독재자, 부정부패까지 겹치며 세계에서 한 손에 꼽히는 파탄국가가 되었다. 적도 기니도 독립 극초기에는 스페인 식민지 치하에서 일한 관료들과 군인들이 나라를 지탱했으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40]의 극단적인 반서방 정책으로 죄다 쫓겨나고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로 대체되면서 적도 기니는 말 그대로 석기시대에 준하는 수준으로 박살이 났고,[41] 앙골라도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에는 식민지배국보다도 경제 사정이 양호한 편이었으나 독립 후 백인 기술자들과 백인들에게 협조한 흑인들을 모조리 추방, 숙청하면서 경제 기반이 뿌리가 뽑혔고, 짐바브웨도 2000년대에 백인 농부들의 토지를 폭력적으로 몰수해 흑인 독립유공자들에게 분배했다가 그 과정에서 선진 농업 기술을 가진 백인들이 죄다 쫓겨나고 기술력도 없는 흑인들이 농사를 망치면서 짐바브웨는 한때 세계 최악의 파탄국가[42]로 전락했다. 또 우간다는 독립 초에는 영국 식민지 시절 들어온 인도인들이 경제를 지탱해왔으나 이디 아민이 이들을 모조리 쫓아내면서 우간다의 경제 기반의 뿌리가 뽑혀버렸다.
이런 연유로 프랑스 식민지 출신 아프리카 국가들만 해도 독립 초에는 (프랑스에 부역하던 아프리카인들도 아닌) 프랑스인들이 정부의 참모나 대통령 고문으로 일하는 등[43] 한국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못해 기절초풍할 수준의 일들이 버젓이 벌어졌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우에는 독립 극초기에는 인도군과 파키스탄군의 육군, 해군, 공군의 참모총장이 모두 영국인들이었으며, 케냐도 1963년 독립한 후부터 1994년까지 재직한 대법원장 7명 중 4명이 영국인이었고, 말라위 역시 처음으로 말라위인 대법원장이 취임한 해가 독립 21년 후인 1985년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출신 국가들은 현재까지도 식민지배국의 군대를 자국에 주둔시키고 있는데,[44] 이 역시 한국의 유사시에 자위대가 개입할 수 있다는 것도 일본의 한국 침략처럼 받아들이는 한국 입장에서는 쇼크를 먹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식민지배를 했던 이민족들이 독립 후에도 여전히 기득권을 차지한 만큼 그 부역자들도 자연스레 기득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된 셈이다. 심지어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동티모르, 짐바브웨조차 독립 후 동티모르군, 짐바브웨군에 인도네시아군, 로디지아군 출신 군인들을 편입해야 했다.[45]
해방 후 한국에서 미군정이든 (지독한 혐일이던) 이승만이든 친일 관료&법조인&경찰들과 일본군 출신 장교들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도 사실은 인적 수준이 낮은 상황에서[46] 국가 운영에 필요한 경험을 쌓았던 사람이 크건 작건 일본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데다가 전술한 콩고민주공화국, 적도 기니의 사례와 같은 후유증을 막고 국가 질서 유지를 위해 할 수밖에 없었던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며, 반민특위도 현실적 문제 때문에 전술한 대상들을 전혀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47] 조선귀족, 중추원 참의, 독립운동 탄압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고등경찰이나 밀정, 친일 자본가 등 당대 기준으로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 악질 부역자들만 처벌하려고 했다.[48]
나미비아는 독립 한참 후에도 인구의 1%도 안 되는 독일인들이, # 마셜 제도는 일본인 혼혈들이 경제적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고, #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소수의 백인들이 여전히 토지와 국가 산업 자산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49] # 캄보디아도 독립 초반에는 캄보디아에 사는 프랑스인들이 오히려 독립 전보다 더 번창했으며,[50] # 독립 초반 짐바브웨에서 소수의 백인 농장주들이 비옥한 토지 절대다수를 독점한 것은 로버트 무가베의 토지개혁의 빌미가 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51]
아프리카 식민지들의 부역자들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하면 된다. #
3.2. 독립 후에도 남아있는 식민지배국의 잔재
독립한 식민지 출신 국가들은 독립한 고국을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 때에도 식민지배국의 법과 제도를 따르게 되고, 식민지 시절의 유산들이 아직도 국민들의 자유를 얽매는 경우도 많다.대표적으로 인도와 가나는 독립 후 법을 만드는 데에 영국 법을 참고했으며,[52] 가나의 판사들은 영국식 법복과 가발을 착용한다고 한다.[53] 덤으로 케냐에서는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행동까지 통제하는 식민지 시절의 '지방자치법'이 아직도 현행이며,[54] 1992년부터 2020년까지 있던 나이지리아의 경찰부대 SARS가 잔혹행위로 악명을 떨친 것도 식민지 시절 경찰들의 영향을 받은 것인 데다가 참고자료 인도에서도 정부 비판 표현을 억압하기 위해 영국령 시절 만들어진 '선동법'을 쓰고 있는 중이며,[55] 싱가포르도 식민지 시절 만들어진 치안유지법을 반대파 탄압에 악용하고 있는 중이다. 과거 사례를 살펴보면 르완다의 쥐베날 하뱌리마나도 식민지 시절의 강제노역을 부활시켜 후투족 농부들에게 적용해 르완다 농민들의 처우를 악화시킨 바가 있다. 당장 한국의 민법과 국가보안법도 일본의 법을 본떠 만든 것이며, 한국 법에서 내란죄와 외환의 죄를 따로 구분하는 것도 일본 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56]
체제와는 무관하긴 하나 애국가를 비판하는 책을 쓴 강효백[57]의 말에 따르면 피지배국 출신 국가의 국가(國歌) 대다수의 국가가 과거 식민지배국의 국가와 유사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58]
심지어 르완다 내전처럼 식민지 시절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간질이 고이고 고이다 끝내 내전, 대량학살로 번지는 일도 많으며, 대한민국[59], 파키스탄[60], 동티모르[61], 토고[62]처럼 식민지배국의 부역자들이 정부 수립 이전~초기부터 독립한 고국을 혼란에 빠트리는 경우도 있다.
여담으로 제국주의 시절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이 영어, 프랑스어 등 식민지배국의 언어를 아직도 공용어로 써야 하는 것이 식민주의의 영향이라는 말도 있으나 실은 식민지 시절 한참 전부터 아프리카 대륙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난립해서 국가 전체에 통용되는 언어가 없어서 사용하는 것이다. 영국의 지배를 받은 미얀마나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베트남, 캄보디아나 일본의 지배를 받은 대한민국, 대만에서는 식민지배국의 언어가 현재 거의 통용되지 않는다.
3.3. 독립투사가 독재자로
아니면 반대로 독재자가 된 영웅 문서에서도 보이듯이 독립 운동 투사가 모든 권력을 움켜쥐며 독재자로 변모하기도 한다. 특히 식민지 주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무지로 인한 각종 부정부패와 경제적 혼란이 만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그 때문에 정부와 지배층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여 공권력 무시도 심하고 치안이 엉망이며 나중에는 정부와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반군이 결성되어 내전까지 일어난다. 또한 식민 지배 시절 지배국들이 멋대로 혹은 의도적으로 헤집고 갈라 놓은 그 나라의 민족, 문화, 역사 등의 이유가 있다. 더구나 그 독립운동가 출신 지도자가 권력에 눈이 먼 나머지 자신의 반대 진영에 있거나 같은 진영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일은 흔하며,[64] 식민지 부역자 출신 인사들을 동원해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다.[65][66] 최악의 경우에는 독립유공자 가문이 새로운 기득권이 되어 자신들이 독립시킨 조국을 망가뜨리라는 경우도 있다.[67][68]
가장 대표적인 사례만 꼽아도 대한민국의 이승만, 북한의 김일성,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 기니의 아메드 세쿠 투레,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에리트레아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69]가 있다. 심지어 이들도 극히 일부이다.
그나마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보츠와나의 세레체 카마, 모리셔스의 시우사구르 람굴람, 동티모르의 대통령들처럼 독립영웅이 독재자로 타락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극히 일부일 뿐이다.
3.4. 종속적인 경제 시스템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식민지 시절 본국의 이해관계로 만들어 놓은 경제환경이다. 피지배국의 경제 상황과는 무관하게 식민 모국의 분업화 과정에서 플랜테이션 등 특정 산업만을 기형적으로 발전시킨 경우가 많다. 비유하자면 식민 모국이 자동차를 만들면서 A 식민지는 유리창만, B 식민지는 타이어만 만들게 특화시켜서 독립 후에도 식민 모국에 경제가 종속된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보니 피지배국이 독립했지만 해당국의 산업 구조 자체가 식민 모국 없이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경제적 혼란 및 침체 상황이 발생하고, 이는 결국 나라만 형식적으로 독립했지 산업 전반은 식민 모국을 본거지로 하는 기업 집단에 의해 또다시 지배되어, 사실상 식민지 시절이나 다름 없는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발생한다. 대표적인 게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들. 거기다 기존의 지배국이 만든 경제기반외에는 해방된 피지배국이 다른 경제기반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도 해방된지 수십년이 넘었지만 자원수출이나 플랜테이션 농업에만 의존하는 국가들이 많다.다만 식민지 출신 국가 중 한국은 이런 종속적인 경제 시스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편이다. 일제가 남겨놓은 지주 기반의 기형적인 경제로 해방 후 혼란에 빠졌다가 6.25 전쟁으로 전국토가 초토화 되어 0에서 시작한 덕분에 일본이 남겨놓은 기형적 경제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경제발전을 할 수 있었고, 일본이 패전국이었기에 일본 자본이 한국 경제를 독립 후에도 직접적으로 잠식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3.4.1. 인구특성의 변질
게다가 식민지 시절 지배국이 식민지 주민들에 대한 교육 거부 및 축소, 강간 및 강제노역 동원, 차별 등으로 인해 식민국 인구 특성이 변질되어서[70] 생기는 인종 및 민족차별 등의 문제도 있다.[71] 식민지배자가 물러간 대신 냉전 시대가 도래하면서 민족 외에도 이념과 종교 차이로 인해 나라가 갈라지기도 한다. 한반도의 남북분단은 이념 차이로 인해 갈라진 대표적인 경우이고[72], 인도의 독립 후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갈라진 것은 종교 차이로 인한 대표적인 경우다.4. 국가별 예
4.1. 지배국
4.1.1. 독일
독일 제국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런 이유로 식민지 정책에 부정적이었다. '이미 먹을 만한 식민지는 선발주자들이 다 먹었으니 이미 먹은 영국, 프랑스 식민지를 뺏으면 심기를 건드릴게 뻔하니 우리는 그냥 닥치고 산업화랑 인재육성, 기술개발에 몰빵하자!'라는 게 그의 국가정책 기조였던 것.[73] 때문에 그는 처음엔 "독일 제국은 식민지를 확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가 이를 번복하고 1884년 베를린 회담을 통해 토고, 카메룬, 나미비아, 탄자니아, 뉴기니 등의 약간 식민지를 얻긴 했지만, 그 뿐이었고 금세 그만두었다. 그나마도 경제적인 요인과는 전혀 상관없이 국가 내부의 불만 세력의 이목을 해외로 돌리고 민족주의를 고취하려는 의도였다. 북마리아나 등 여기저기 더 얻은 것도 있지만 그냥 있으나마나.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고 나서 협상국이 독일에게 "식민지를 포기하라"고 하자 바로 포기했다. 알자스-로렌 지방과 달리 독일 제국의 식민지들은 독일 입장에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수준이여서 딱히 크게 아쉬워하지는 않았다.[74] 오히려 독일은 식민지 보유국들보다 오히려 국력 및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더 앞섰다. 당장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의 지원을 그렇게 받고도 경제적으로 힘들었는데[75] 독일은 양 사이드로 전쟁을 자그마치 4년간 하고도 비록 순무로 버티는 세월이었다지만 국가 근간을 마지막까지 유지했을 정도이다. 독일은 2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패전 후 잿더미가 되어 분단까지 되었지만, 서독은 전쟁이 끝난지 불과 20년도 안 돼서 영국과 프랑스를 앞지른 선진국이 되고, 동독도 공산권 국가에서 가장 잘사는 국가 1위를 유지했다. 물론 다른 요인들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독일의 역량이 어느 정도 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76] 더군다나 영국은 전쟁비용을 치르느라 미국에 대량으로 발행했던 채권 때문에 빚더미에 올라버려서 2006년이 되어서야 그 빚을 전부 갚을 수 있었다.
반면 야심만 크고 현실에 대한 인식 능력은 떨어지던 빌헬름 2세와 독일 내 식민지 획득파들은 쓸데없는 식민지 확장에 나섰다가 결국 신나게 얻어 터지고 망했다. 유사한 생각에서 일본 제국의 이시바시 단잔[77] 같은 자유주의 성향의 인사들도 "한반도, 대만을 독립시키고, 중국, 동남아 등 다른 국가들과 무역해서 잘 먹고 잘 살자"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그리고 일본의 경제 규모가 세계 2위[78]에 이른 건 식민지 독립을 다 시키고 자국민들 살찌우는데 전념하게 된 뒤다.
4.2. 피지배국
4.2.1. 한국, 대만, 싱가포르
한국이나 대만, 싱가포르 등은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상대적으로 근대 국가 구축이 뒤늦었지만 경제성장을 이루고 삶의 질도 끌어올려 자주적인 국가 운영이 이뤄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케이스이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도 식민지 시절에 만들어진 문제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며, 그 시절의 잔재가 아직도 국가의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79][80] 다만 이 경우는 식민지배 기간이 짧은 것도 한 몫 한다. 대부분 30~40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탈당하고 많은 피해를 입긴 했지만, 세기단위로 식민지 상태였던 아프리카보다는 그나마 나았던 편.[81][82]4.2.2. 아메리카 대륙과 호주, 뉴질랜드
다른 방식의 예외는 미국, 캐나다,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칠레, 우루과이, 호주, 뉴질랜드 같은 국가들이다. 이런 나라들은 하나같이 독립 국가를 세운 주체가 원주민이 아니라 원주민들을 억압하고 홀대했던 유럽 출신 백인 식민주의자들이 본국에서 독립했다는 공통점이 있다.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식민지배 시절만큼이나 독립 이후에도 큰 탄압을 받았는데, 대부분의 신대륙 국가의 독립 주도세력들은 원주민 땅 뺏어서 유럽인 이주자한테 더 많이 주지 못해 안달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독립 이전에는 오히려 가톨릭교회와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후안 데 미라아나 등의 양심적인 학자들 주도로 원주민과 노예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와 자치를 존중했으며, 북미의 경우도 원주민들과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신대륙 독립운동가들의 대의에는 "원주민 땅 마음대로 못 빼앗게 하는 잔소리 시어머니 본국 정부를 엎어 버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다 뺏어 먹자!"라는 계산이 노골적으로 깔려 있었다.
이런 나라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원래 살던 민족의 수와 영향력을 줄여 혼혈 소수민족으로 만들어 찍 소리 못하게 함으로써 자국 건국에 얽힌 약탈과 학살의 역사를 부정하고, 권위주의적인 본국에서 해방되려 투쟁한 자유의 나라들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이런 나라들이 '유럽 본국의 폭정으로부터 스스로의 자유를 얻기 위해 저항한 민주주의의 종주국' 소리를 들으며, 프레드릭 잭슨 터너 같은 미국인 역사학자는 이를 프론티어 데모크라시라 하여 아예 식민주의와 민주주의를 깊이 연관지었다.
그런 점에서 독립 후 백인이나 메스티소의 권력이 강한 것과 별개로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의 후신이라는 정체성도 강한 멕시코, 과테말라, 페루, 볼리비아 같은 케이스는 어찌 보면 기적적인 경우라고도 볼 수 있다.
4.2.3. 아프리카 대륙과 중동
그리고 종교와 민족주의 문제 특히 열강들에 의해 민족, 종교적인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국경이 반듯하게 나뉘어진 아프리카 대륙과 중동 쪽이 가장 심각하다. 물론 이쪽 지역도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의 역사가 없었음에도 내전이 터진 라이베리아같은 사례도 있다.라이베리아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서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이력은 없었고, 19세기 미국의 해방 흑인 노예들이 미국 정부의 지원을 얻어 아프리카에 땅을 차지하여 국가를 건국하는 등 제2차 세계 대전 후 서구 열강의 식민지에서 독립국으로 독립한 다른 아프리카의 나라들과 달리 처음부터 독립국에서 시작한 나라였으나, 국가를 세운 소수의 미국 노예 출신 흑인 기득권 세력들이 국민 다수 아프리카 흑인 토착민들을 차별하고 억압하여 20세기 내내 권력을 독식하는 등, 내부 통합에도 실패하여 내전이 터질 위험성이 매우 높았던 국가였다.
[1] 오죽하면 스페인은 식민지에서 나는 은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을 겪을 정도였다. 또 아메리카 식민지의 효용성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도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랬다면 자원의 저주라는 말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2] 정확히 말하자면 스페인은 이전부터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금 조달이 시급했다. 이게 신대륙 개척 이전 레콩키스타를 할 적에는 양모 같은 상품을 팔아 조달하는 식으로 해결했다. 이 외에도 아라곤은 지중해 무역으로 돈을 벌었다. 신대륙 개척 이후에는 네덜란드 같은 부유한 동네에서 거둔 세금과 귀금속으로 해결했다.[3] 물론 수에즈 운하 인수는 경제적으로도 큰 이득이었다.[4] 물론 알다시피 노동착취나 토지강탈을 통해서 이득을 본 경우가 많았다. 사실 식민본국도 양극화가 극심했고 각종 기업들의 비리같은것도 횡행하던 시절이었는데 거기에다가 백인우월주의 및 사회진화론이 극성이던 시절이었던지라 식민당국에서도 이를 방관하거나 조장한 경우가 많았고, 필요하면 문화파괴까지 일삼았다. 더군다나 이러한 횡포를 막을만한 시스템은 식민지에서 없다시피하거나 매우 미약했으니 당연히 식민본국내에서 벌어졌던 문제점들이 몇배 이상으로 농축되고 거기에 피식민지민의 정치권력 박탈 및 문화파괴같은 문제가 더해지며 문제가 더욱 심해졌던 것이다.[5] 사실 이러한 주요 거점의 인구 분산이 원래 그 식민지의 컨셉이다. 식민지의 한자를 풀이하면 나무를 심듯이 사람을 심는 땅이라는 의미이므로. 근대 이후에도 이러한 인구 분산적 경향은 어느 정도 수행된 바 있다. 히키아게샤가 대표적이다.[6] 19세기 말 이후의 식민지 경영은 주로 경제적 관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홉슨의 제국주의론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레닌 역시 홉슨의 제국주의론을 발전시켜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관점에서도 제국주의론을 저술했다. 홉슨의 아이디어는 일본의 이시바시 단잔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7] 지금의 아메리카 대륙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북아메리카 중에서도 꿀땅이라고 할만한 곳은 미국이다. 캐나다는 미국보다 춥고 눈이 많이 오기 때문. 게다가 이 당시 아메리카 식민지는 미 동부 13개 주와 주변 도서가 한정이었던 데다가, 이곳에서 산출되는 자원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미국의 자원과 지리적 역량이 사기적으로 커지게 된 계기는 독립 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구입하고,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를 병합하고, 서부개척을 통해 태평양까지 확보하게 되면서 부터다.[8] 독일 제국의 경우 수출품을 자국령 아프리카 식민지가 아니라 영국령 인도에 더 많이 팔았다. 관세가 있으니까 식민지 모국이 다른 나라보다는 물건 파는 데 유리했지만 못 파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 관세라는 것도 대공황 시절이 아닌 이상 수입을 금지하다시피 한 수준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당시엔 식민지 시장이라는 것 자체가 별것 없었다. 그나마 토착 산업과 인구가 막대한 인도 정도니까 방직공업 같은 일부 분야에 한해서 어느 정도 도움이 된 거지.[9] 이 병사들이 영국군에게 총을 겨눈다고 생각하면 딱 답이 나오는 문제다.[10] 사실 이 서부개척마저 미국이 서부를 가진 이후 100년 가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는 여전히 동부에 있었기 때문에 딱히 서부를 개발할만한 계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일본군이 진주만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여론이 서부개발을 지지하는 쪽으로 바뀌게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미국 서부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11] 그 이전에 미 서부는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라 부를 정도로 미개발 된 데가 정말로 많았다.[12] 이마저도 경제적/위신적인 면보다 군사적인 면이 더 크다.[13] 민다나오 섬의 경우 독립하려 했으나 미군의 초토화 전술에 큰 타격을 입어 독립하지 못하고 필리핀이 독립할 때도 그대로 필리핀의 영토가 된다.[14] 물론 필리핀, 쿠바 같이 미국의 보호령이던 국가에서는 이와 달리 미국을 부정적으로 보긴 한다. 잊지 말자. 미국 또한 엄연한 식민제국을 운영한 나라다. 독일보다도 그 영역이 대단히 넓지 않았을 뿐이지. 거기다가 원래 서부가 미국의 땅도 아니었으니 서부까지 포함해서 보면 미국도 어마어마한 악행을 저질렀다.[15] 마른 수건을 짜서 뭘 얻겠는가? 일단 유지 관리 비용은 필요하다. 그런데, 영국에 100억을 투자하는 게 이득일까? 수단에 1조를 투자하는 게 이득일까? 당연히 유지비용이 수익을 한참 넘어설 수 밖에 없다.[16] 오히려 자국민 중 사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되는 인력을 외부로 보내려고 일부러 식민지를 확장한 영국 같은 나라도 있었다. 호주를 죄수들 보내려고 개척한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17] 그래도 로마는 헬레니즘 제국의 후예인 이집트, 시리아, 마케도니아 왕국을 다 정복하고도 이슬람에 밀려 상실하기 전까지 몇 백년을 지배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것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유화정책도 병행하여 식민지 출신들이 자신들도 로마인이라고 생각할 만큼 잘 동화시켰기 때문이다.[18] 물론 종교재판 등의 다른 요소도 있다.[19] 자원 원산지를 차지하거나 무역하기 좋은 곳을 차지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전자의 사례는 콩고민주공화국, 후자의 사례는 홍콩.[20] 이탈리아의 경우 식민 제국이었던 이탈리아 왕국 시대보다 훨씬 더 강대해져서, 한때 1990년대에는 무려 영국을 추월하고 5위의 경제대국이 된적이 있다. 스페인도 그 당시 7위의 경제대국이었다.[21] 남북 전쟁 당시 남부연합의 주민들 중 노예가 없는 이들도 노예제 존속을 원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본인은 노예가 없더라도 노예를 보면서 우월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22] "식민지로 가면 보다 고래등 같은 집에서 원주민들을 종처럼 부리고 살 수 있다"는 열망이 하층민들에게 적지 않게 퍼졌다. 한 몫 잡은 이들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고 비교우위 원리에 따라 오히려 식민지인들 때문에 3D 산업, 농업 등지에서 몰락하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모토야마 히로시의 <나라가 불탄다>라는 만화에서는 조선 등지에서 가져오는 쌀로 일본 현지 농민들이 착취와 몰락을 겪는 장면이 나온다. 심지어 식민지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등 사실상 현지와 동화했던 사람도 있었다. 일본의 경우는 나라에서 강요한 히키아게샤 문서로.[23] 권력 기득권을 잃을지라도 경제적 기득권만큼은 변함없이 향유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후술.[24] 실제로 신흥독립국의 군사 독재자들은 상당수가 식민지배국 군대에 복무한 이력이 있다. 가장 가까운 사례로는 대한민국의 박정희가 있고 우간다의 이디 아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장 베델 보카사, 콩고민주공화국의 모부투 세세 세코, 토고의 냐싱베 에야데마, 베냉의 마티외 케레쿠, 가나의 조셉 아서 앙크라, 나이지리아의 야쿠부 고원, 소말리아의 시아드 바레, 적도 기니의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집권 초기 한정), 파키스탄의 이스칸데르 미르자와 아유브 칸과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베트남 공화국의 응우옌반티에우 등등 굉장히 많다. 군사독재자는 아니더라도 가봉의 오마르 봉고도 프랑스군 중위 출신이었으며, 적도 기니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는 식민지 공무원 출신이었다. 다만 라틴아메리카의 경우에는 시몬 볼리바르나 아이티의 장 자크 데살린처럼 독립운동가 출신들의 군사독재자가 대다수였는데 이 지역은 해당 지역의 원주민들을 배제한 크리오요들의 기득권 수호를 위한 독립운동의 성격들도 있어서 무조건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25] 반민특위도 오늘날 친일파로 간주되는 관료, 법조인, 군인, 말단 경찰들은 처벌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고위급 부역자와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부역자 정도만 처벌하려고 했는데, 하물며 독립 후에도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부역자를 처벌하려 하지 않은 타 식민지 국가들의 일반적인(?) 부역자들이 독립 후 갑자기 기득권을 잃는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긴 하다. 당장 르완다의 독립 과정에서 투치족들이 독립을 추구하던 이유도 독립 후에도 벨기에 세력에 부역하며 얻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는데, 참고로 당시 루안다-우룬디 지역에 살던 후투족들은 이민족인 벨기에보다도 투치족 기득권층들을 더욱 증오했다고 한다. 타 국가들의 독립운동가 출신 독재자들도 국가 운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26] 한국의 열악한 독립유공자 대우 외에도 케냐에서 마우마우족 봉기에 참여한 사람과 그 유족 대다수가 정부의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빈곤하게 살아가는 처지이며,(#1 #2) 방글라데시에서도 셰이크 하시나의 집권으로 많이 나아지긴 했어도 아직도 많은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참전 용사들이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과도한(빈말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도를 넘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독립유공자 대우 때문에 일어난 반정부 시위로 공식 수치로만 300명 이상이 사망하고 그 여파로 하시나가 사임하자 독립유공자들이 기존보다 더 천대받을 위기에 처해 있다. 인도에서도 부패한 정부 때문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름조차 잊혀지고 그 유족들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고 비난하는 여론이 있다.(#) 특히 자유 폴란드군의 비극적인 결말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나아 보일 수준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인데, 심지어 폴란드는 독립 후 한국급 정세혼란은 겪지 않았는데도 이런 결말을 맞았다. 북한은 빨치산으로 불리는, 김일성과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의 일가는 대우를 해주지만 김일성에 반대했던 모든 독립운동가들은 온 가족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것은 물론이고 독립운동 공적이 완전히 말소되었다.[27] 어떻게 보면 제국주의 국가들 상당수가 메이저 선진국으로 자리잡은 것과 정반대로 제국주의 피해국들 대다수가 후진국으로 전락한 것이 축소판이 된 꼴이자 전술한 모습이 오버랩될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28] 인도, 파키스탄에서도 '영국 협력자들의 직계 자손들이 오늘날에도 지식인 계층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비난하는 여론이 있다. 인도인 트위터 글 파키스탄 레딧 글 다만 인도에서 친영파 후손의 근황에 대해 다루는 경우는 인도 내 매국노의 대명사 미르 자파르(직계 9대손이 상술한 이스칸데르 미르자다)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시피할 정도로 드물다.[29] 사실상의 백인 식민지 국가였던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군인, 경찰 등으로 백인 정권에 부역한 흑인 부역자들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편이다. 당장 한국도 군사정권 시절에도 을사오적, 노덕술, 배정자 같은 악질 친일파들은 활발히 언급되었지만, 친일파로 간주되는 범위가 오늘날과 같이 광범위해진 것은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된 이후이다. 다만 이는 그렇게까지 이상하지 않은 모습인 게 이들 국가에서 식민지, 점령지 시절 자국인 부역자들을 거론하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신원에 대한 확실성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내러티브'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6.25 전쟁 당시 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민주화 전까지는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언급이 금기시되었던 것과 오스트리아가 자신들이 나치의 희생자에 불과하다며 쿠르트 발트하임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30] 식민주의의 영향에 대해 다룬 레딧 글에서 '내가 협력자(정확히는 식민지에 저항도 제대로 못한 사람)의 후손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댓글에 '협력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생각이다'는 댓글이 달릴 정도.# 대다수의 식민지 출신 국가들에서 '식민지 부역자의 후손'이라는 개념이 사실상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31] 사실 이것도 내막을 뜯어보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후술할 배경 차이를 전혀 감안하지 않아도 제국주의 피해국에서 제국주의 가해국(그것도 식민지 독립운동을 가장 악독하게 탄압한!)의 행보를 동경하는 꼴이기 때문. 심지어 프랑스가 나치 청산 이후 식민지에 저지른 악행들(대표적으로 베트남과 알제리에서의 독립운동 탄압, 독립 후 자립을 표방하던 기니의 모든 인프라 파괴, 수도 중심부에서의 알제리 독립운동 시위대 학살 등이 있다)을 생각하면 프랑스의 나치 청산은 성과의 유무 다 떠나서 사실상 정치보복에 불과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감안하면 한국에서 친일 청산을 외치는 사람들이 프랑스의 나치 청산을 찬양하는 것은 일본 제국을 찬양함과 동시에 극렬 혐일이던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 운운하며 우상화하는 뉴라이트랑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꼴이다.[32] 쉽게 말해 프랑스와 한국의 부역자 처리 전 상황은 경제발전 전 상황에 있어서 서독과 한국급 차이가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었다. 개다가 전시 부역자 청산이라는 면에서는 오히려 6.25 전쟁 당시 서울 수복 후 부역자 처벌에 더 가까우며, 이것도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져 엄청나게 지탄받고 있다.[33] 더구나 프랑스도 해방 직후 사적제재로 독일군과 사소한 관계밖에 없던 무고한 사람들이 1만 명 가까이 죽어나가고(애초에 샤를 드골이 나치 부역자 청산을 학살 수준의 사적제재 이후에도 계속해야 했다는 것 자체가 저 사적제재로 린칭한 사람들 중 진짜 나치 부역자는 별로 없었다는 뜻이다) 독일군과 동침한 여성들이 머리가 밀리며 조리돌림을 당하는 대신 유대인 추방에도 관여한 진짜 나치 부역자인 모리스 파퐁이 살아남아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지 장관직에까지 오르고 자국인 부역자들은 독일군에게 빵 판 군인까지 죽여댄 주제에 진짜 나치 출신 독일인 군인들은 아예 "과거는 묻지 않겠다"는 말같지도 않은 핑계로 프랑스 외인부대에 등용시켜 식민지 독립운동 탄압에 이용하는 등 나치 청산의 부작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프랑스가 2차 대전 후 베트남,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고(그 과정에서 현지 여성들을 위안부로 써먹기도 했다) 기니가 독립하자 보복으로 모든 인프라를 파괴하고(이를 주도한 사람이 바로 나치 부역자 청산을 주도한 샤를 드골이었다) 1961년에는 파리 중심부에서 시위하던 알제리인에게 총기를 발포하여 수십~수백 명을 학살하는 등(이를 주도한 사람이 상술한 모리스 파퐁이었다) 나치랑 별반 다를 바 없어보이는(심지어 시대 변화를 감안하면 나치보다 더 질이 나쁘다고 볼 여지도 있다) 강약약강의 극한에 달한 만행들을 무수히 벌인 것을 고려하면 나치 청산을 왜 했나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수준.[34] 인구 비례로 따지면 프랑스보다 더욱 철저하게 나치 부역자들을 처벌했다. 다만 이쪽도는 단순히 독일군 병원에서 적십자 간호원으로 일한 사람까지 부역자로 몰려 처벌받는 등 프랑스보다 덜하긴 했어도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35] 노르웨이는 이미 1960년 기준으로도 웬만한 서유럽 국가들보다도 1인당 GDP가 높았을 정도로 잘 사는 나라였다.[36] 관료, 법조인 같은 실무 부역자 포함[37] 한국에서 친일파 문제는 군사정권 시절에도 간간이 언급되었지만,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이고 정부 차원에서 청산에 나서기 시작한 것도 김영삼 정부 시기이다. 두 시기 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경제력이 어느 정도 외부에 내세울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른 시기에도 속한다.[38] 상술한 케냐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안정적인 국가로 꼽힘에도 2020년대 기준으로도 독립유공자 보훈 제도가 전무하다시피 한 실정인데, 하물며 내전에 시달리는 국가들은 안 봐도 비디오다. 방글라데시는 독립 반 세기가 지난 후에도 겨우 최빈국을 면하는 수준일 정도로 빈곤국인데도 불구하고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공무원직 30%를 할당하려 했다가 항의시위가 일어나 총리가 사임하고 독립영웅이던 총리의 아버지의 공적까지 부정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39] 당시 콩고의 교육 수준을 고려하면 이들 절대다수가 무학~초졸이었을 수밖에 없다.[40] 웃기게도 응게마도 식민지 공무원 출신이었다.[41]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정상화한 것이 응게마의 조카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가 쿠데타로 삼촌을 몰아낸 것인데, 오비앙도 국경 수비대로서 적도 기니에 거주하는 스페인인을 보호한 명백한 식민부역자였다. 그리고 오비앙은 마시아스 응게마 시기 온갖 요직을 거치며 마시아스 응게마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탄압에 누구보다 앞장섰다.[42] 2009년에는 농담이 아니라 전란 하나 없이 취약국가지수가 소말리아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때문에 무가베의 후임인 에머슨 음낭가과 대통령은 농업 생산성을 복구하기 위해 본인도 백인 농장주의 피해자+독립운동가 출신이었는데도 집권 직후부터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백인 농부들의 기득권을 강력히 보호, 복원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43] 코트디부아르, 세네갈, 카메룬. 이 국가들의 초대 대통령들은 친불 성향 독립운동가였다. 사실 자와할랄 네루도 친영 성향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44] 심지어 정부 차원에서 이에 대한 항의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약소국의 비애를 제대로 보여주는 셈.[45] 그것도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식민지배 기간은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 기간보다 더 짧았는데도.[46] 해방 후 한국의 문맹률이 78%에 중졸 이상 학력을 가진 인구 비율이 1%에 달했을 정도였다. 중학교 중퇴(정확히는 교육 과정은 거의 다 마친 후 중퇴했다)인 김일성이 당대 조선에서는 엄청난 고학력이었을 정도.[47] 친일 예술가, 언론인들도 처벌하지 않았는데, 아마 반민특위 측에서도 이들의 친일이 자발적인지 강압에 인한 것이었는지 구분하기 힘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광수, 주요한처럼 일제의 강압을 감안해도 노골적으로 일제를 찬양한 사람 아니면 처벌 명단에 올리지도 못했다.[48] 사실 반민특위 해산이 후대에 아쉬움을 남긴 것도 실무 부역자에 대한 처벌보다는 노덕술 같은 악질 친일파들에 대한 처벌이 불가능해진 것에 대한 아쉬움의 영향이 더 크다.[49] 반면 백인들에게 착취받던 흑인들은 아직도 평균 소득이 백인들의 1/8 남짓에 불과할 정도로 빈곤하다. 한국의 친일파와 독립유공자 후손의 운명과도 너무나 판박이이며, 이 역시 부와 가난이 대물림된 것이다.[50] 일례로 1964년 캄보디아의 프랑스인 인구는 6000명으로 독립 전보다 두 배나 늘었다. 애초에 당시 국왕이던 노로돔 시아누크도 친불 인사였다. 프랑스인들이 대놓고 이렇게 번성했으니 친불 부역자들이 숙청되지 않았을 것임은 안 봐도 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캄보디아 내전과 킬링필드 등 혼란상을 통해 캄보디아를 떠나거나 기득권을 완전히 잃었다.[51] 다만 상술한 문제들 때문에 UN과 국제기구에서 짐바브웨에 대한 경제제재까지 걸 정도로 국제적으로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가베의 축출 이후 집권한 (독립운동가 출신의) 에머슨 음낭가과도 집권 직후부터 백인 농장주들에게 노골적으로 굴종적인 태도를 보이는 중.[52] 가나의 반동성애법도 식민지 시절 법이 근간이라고 한다. 덤으로 가나의 독립을 주도한 콰메 은크루마는 식민지 시절 지배 체계를 차용해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53] 물론 가나 주민들은 이런 판사들의 모습을 경멸한다고 한다. 2019년 짐바브웨에서도 판사들을 위한 가발을 수천 달러어치나 구매했다는 기사가 떠서 논란이 일었다. #[54] 참고자료[55] 참고자료[56] 다른 나라들은 내란죄와 외환의 죄를 뭉뚱그려 '반역죄'로만 간주된다.[57] 주중국대사관 외교관 출신이며, 현재는 경희대학교 법무대학원 교수를 역임하고 있다.[58] 일례로 니제르에서는 2019년 친불 성향 가사가 있던 구 국가를 폐기하고 새 국가를 만들게 한 바가 있다.[59] 친일파 출신 경찰, 군인들이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학살을 명령한 사람은 독립운동가였고,(이승만, 조병옥) 친일 부역자들은 학살의 실무를 담당했다.[60] 영국군 중령 출신의 이스칸데르 미르자 초대 대통령이 방글라데시 독립의 기반을 만들어내고 파키스탄을 (영국군 준장 출신의) 아유브 칸을 시초로 한 군부독재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참고로 미르자는 인도판 이완용인 미르 자파르의 직계 자손이었다.[61] 독립 전후로 독립에 반대하는 친인도네시아파 군인들이 유혈사태를 일으킨 바가 있다.[62] 프랑스군 출신인 냐싱베 에야데마가 1963년 쿠데타를 일으켜 토고의 독립을 주도하고 독립한 토고의 군대에서 프랑스군 출신 군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던 실바누스 올림피오 대통령을 손수 살해, 1967년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63] 벨기에령 콩고의 사회상을 오늘날의 콩고와 비교한 글이다.[64] 그 예시로 관료 출신 독립운동가였던 응오딘지엠이 군인 출신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것은 한국에서도 유명하며, 시몬 볼리바르는 그의 사상적 스승격이던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가 자신이랑 독립운동 방향이 다르다고 반역죄를 뒤집어씌운 사례가 있어 카를 마르크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우아리 부메디엔도 같은 독립운동가 출신이던 아메드 벤 벨라를 쿠데타로 몰아낸 후 유럽에 거주하던 알제리인 독립운동가 2명을 암살한 바가 있으며,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도 에리트레아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자신의 동료, 부하들을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구금하거나 암살 시도를 한 바가 있다. 로버트 무가베도 구쿠라훈디 학살에서 무가베파 독립군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제5여단을 동원해 은데벨레족뿐만 아니라 조슈아 은코모파 독립군 출신 인사들을 학살했다.[65] 한국에서 이승만이 노덕술 같은 악질 친일 경찰들을 총애하며 등용하며 좌파 성향 독립운동가들을 탄압, 살해한 것 외에도 소련군도 폴란드 점령 후 공산주의자로 신분을 세탁한 유대인 경찰들을 적극 등용했으며,(참고로 소련과 폴란드는 둘 다 나치와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나치로 인해 가장 참혹한 피해를 입은 국가로 꼽힌다) 독립전쟁으로 독립을 쟁취한 짐바브웨도 로디지아군 시절 흑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흑인, 백인 군인들을 로디지아군에 그대로 넣어주며 독립전쟁에 참전한 흑인 군인들을 탄압했고,(그런데 무가베는 친무가베 독립운동가들도 반무가베 독립운동가 탄압에 이용했다) 방글라데시에서 국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을 암살한 쿠데타를 일으킨 주범인 콘다케르 모스타크 아흐마드도 방글라데시 임시정부 외교부 장관을 역임한 저명한 독립운동가였으나 군부 내 친파키스탄 인사들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며 친파키스탄 인사들을 총애, 적극 등용하며 독립운동가들을 사법살인했다. 참고자료 콰메 은크루마는 식민지 출신 경찰들을 주축으로 오랜 독립운동 동지들과 반대파들을 탄압했지만 그 경찰 지도부가 계획에 참여한 쿠데타로 1966년 축출되었다.[66] 사실 공동의 적을 무찌르고 난 후 어제의 동지들이 오늘의 적이 되는 것 자체가 세계적으로 매우 흔한 일이며, 독립 후 권력을 손에 쥔 자신이 가장 위대한 독립운동가이니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위대함'과 자신이 이룩한 독립운동의 위업을 '감히' 넘보려는 존재로 여겨서 타 독립운동가들을 핍박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67] 짐바브웨는 토지개혁을 명분으로 흑인들을 착취하던 백인 농장주들의 토지를 몰수해 흑인 농부들이 아닌 독립유공자 기득권층끼리 나눠가지며 짐바브웨의 농업, 더 나아가 경제를 붕괴시켰고, 방글라데시는 셰이크 하시나 총리가 (셰이크 하시나를 지지하는)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공무원직 30%를 할당하려 했다가 분노한 시민들의 항의시위 진압 과정에서 공식 수치로만 650~1000명 이상이 학살당하고 총리가 그 여파로 사임하기에 이르렀다.[68] 전근대의 공신 가문의 문제와 비슷한 맥락이다.[69] 심지어 이 사람은 아직도 현직이다.[70] 대표적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던 라틴아메리카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주류가 아닌 메스티소들이 주류이며, 아이티 같은 흑인들이 주류인 국가들도 있다.[71] 미얀마의 로힝야족의 경우도 식민지배 시절 영국의 디바이드 앤 룰 정책하에 인도 뱅갈인들이 미얀마로 대거 이주하였다가 독립 후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여 민족차별을 받게 되었다.[72] 물론, 이것은 조선인들이 자의적으로 분열한 경우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에 승전한 미국과 소련이 '적대국 일본의 식민지'라는 전리품으로서 땅따먹기로 강제적으로 이뤄진 경우다.[73] 덕분에 19세기의 독일 제국은 국가주도의 경제개발 체제 하에서 길드 전통의 도제식 육성 프로그램을 기업에 접목하여 우수한 노동력과 이에 기반한 좋은 품질의 제품, 온건한 노사문화 등을 바탕으로 지금의 국가 브랜드 가치를 만드는 기초를 닦았다.[74] 실제로 나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알자스-로렌 지역은 다시 뺏어갔지만 독일 제국 시절의 식민지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옛 식민지들이 있었던 아프리카까지 갈 수 있는 여력이 없기도 했겠지만, 나치 독일에서 식민지에 미련이 남아있었으면 레벤스라움처럼 '옛 식민지들을 되찾자!'라고 말할 텐데 그런말조차도 안한걸 보면 그냥 구 식민지들에 대해서 관심없는게 맞다.[75] 그 지원에 미국의 채권 수매가 있었으니 당연히 안 힘들리가...[76] 기술의 경우 나치당의 집권을 전후하여 인재들이 탈독일해서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딱히 우위는 없다. 미국에 비해서는 확실하게 열세인 건 넘어가더라도 영국이나 프랑스와 비교하면 일장일단이 있는 정도?[77] 뒷날 일본 내각총리대신 역임.[78] 2010년 중국이 2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세계 2위였다.[79] 한국의 경우는 독립 이후 일본과 외교관계가 없다가 1965년 한일수교를 체결하였으나 졸속적인 외교관계를 형성했다는 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잘못 꿰여진 단추가 결국 2019년에 이르러서 곪았던 과거사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나오게 되었다. 단편적으로, 당장 2020년대에도 군대에서만큼은 구일본군 시절 정도의 가혹행위가 존재하는 걸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래도 한국의 경우는 국가적인 체급이 어느 정도 성장해서 지역강국의 최대 수준이 되는지라 일본과 외교, 경제에서 맞설 수 있으나 다른 동아시아, 동남아 중견국 이하 나라들의 경우는 일본에 국력이 한참 미치지 못하는지라 이들 국가들은 일본의 전범행위나 침략에 의한 피해에 대해서 약간의 보상금이나 국가 원조를 위해서 식민지 시절 문제에 관해 외면 내지는 부정에 가까운 입장이다.[80] 한국의 예를 들어 일본군의 잔재인 똥군기가 2020년대에도 군대에 남아있으며 친일파나 일제에 협력했다 의심되는 자들의 후손들이 현재 한국의 고위층, 부유층들에 있기도 하며 과거의 이야기긴 하지만 1990년대 초만 해도 어느 정도 사는 집에서는 손님 대접으로 스끼야끼, 나베 같은 일본 요리를 대접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직도 일본어에서 온 단어들이 많이 쓰이기도 한다.[81] 그나마 대만은 조선보다는 일제의 대우가 훨씬 더 나아 지금도 일본과의 관계가 좋은 편이다. 반면 조선은 아프리카 대륙과 비교될 정도의 가혹한 식민지배와 착취를 당한데다 아메리카 원주민 못지 않게 강제 동화 및 민족 말살 정책에 시달린 편이고, 싱가포르도 인구 대다수가 중국계라는 이유로 태평양 전쟁 시기에 단 3년 만에 일본군에게 5~10만 명이 학살당했다. 싱가포르는 워낙 짧고 굵게 탄압을 받았기에 일본인, 일본 문화, 정부간 관계는 나쁘지 않게 여기나 일본 제국, 일본 극우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82] 한국과 대만의 식민 통치 구조를 보면 판이하게 다른 면이 존재하는데 조선의 경우는 일본이 향후 중국 대륙으로의 진출을 위한 전진기지 + 내선일체를 통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아예 말살하고 일본인화 하여 영구 일본화를 꾀하기 위하여 유독 악랄하고 철혈적인 통치가 이루어진 경우이다. 그에 반하여 대만은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휴양소 + 설탕 플랜테이션 목적으로 다소 유한 수준으로 통치가 이루어졌고 전원 군인 출신인 조선 상황에 비해 민간 관료 출신도 일본이 대만을 통치하는 구조중 하나였다.(단, 조선도 3.1운동 터지고 나선 민간 관료를 총독으로 보내려 했지만 군부의 견제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대만인의 경우는 이전부터 이미 네덜란드, 명나라, 스페인 등 다른 민족의 피지배를 받아왔기에 어느정도 새삼스럽지도 않은 측면도 있고 도리어 이후 국부천대 이후 계엄령 내리면서 독재로 일관하는 외성인 이미지로 인해 이를 더 싫어하는 대만인들도 존재한다. 그래서 현 대만의 노선을 전통적인 민족주의가 아닌 탈민족주의적 시민 내셔널리즘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