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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제3대 토고 공화국 대통령 냐싱베 에야데마 Gnassingbé Eyadéma | |
출생 | 1935년 12월 26일 |
프랑스령 토골랑 피야 | |
사망 | 2005년 2월 5일 (향년 69세) |
튀니지 튀니스 | |
재임기간 | 제3대 토고 대통령 |
1967년 4월 14일 ~ 2005년 2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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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대 토고 대통령, 독재자.사실 그의 독재 자체는 당대의 다른 아프리카 독재자들과 비교하면 특출난 수준은 아니었지만, 부정선거를 통해 무려 38년간 대통령으로 장기 집권하여 아프리카 역사상 최장기 집권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 생애
2.1. 집권 전
냐싱베 에야데마는 1935년 12월 26일에[1] 토고의 카라 지역의 퍄 마을에서 개신교 신자인 카바이족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의 이름은 에티엔 에야데마(Étienne Eyadéma)였다. 1878년생인 에티엔의 어머니는 무려 57세에 에티엔을 출산했으며, 아버지는 에티엔이 어렸을 적에 프랑스인들에게 맞아 죽었다.고향의 복음주의 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였던[2] 에야데마는 고향 서쪽의 바사르 지역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다가 군인이 되고 싶어서[3] 초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다호메이[4]의 우이다로 떠나고는 1953년에 우이다에서 프랑스 외인부대에 자원입대하여[5]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에 참전했고, 1960년에 토고가 독립한 후에는 니제르와 베냉에 주둔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육군 중사에 오르고는 알제리 전쟁이 끝난 1962년에 다른 식민지 군인들과 함께 프랑스군에서 동원 해제된 후 고국으로 돌아와 고국 군대에 복무하게 된다.
다른 프랑스 식민지 출신 국가들은 동원 해제된 프랑스 군인 출신 인사들을 새로운 국군에 편입시켰으나, 토고는 동원 해제된 프랑스 군인 출신들(총합 626명)을 '이전 식민지 권력에 봉사한 용병'이라고 판단하여[6] 토고 국립 헌병대에 편입하는 것을 거부했고,[7] 이로 인한 좌절감과 초대 토고 대통령 실바뉘 올랭피오[8] 정권 하에서 가난하게 있던 북부 지역에 대한 소외감 때문에 에야데마는 프랑스군 출신 인사들과 함께 쿠데타 계획을 짜게 된다.
1963년 1월 13일에 에야데마는 상사 신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9] 올림피오 대통령을 축출시키고 살해한 후 수도 로메의 미국 대사관 정문 앞에서 직접 총살하고는[10] 같은 친불 부역자 출신인 니콜라스 그루니츠키(Nicolas Grunitzky, 1913~1969)[11] 전 총리를 대통령에 추대한 후 1965년에는 중령 계급으로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고, 1966년에는 대령으로 승진했으며,[12] 같은 해에 토고 남부인을 중심으로 하는 토고통일당 지지자들에 의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발하자 그루니츠키가 자신을 올림피오 대통령 살해 혐의로 소추할 것을 두려워한 에야데마는 이 시위를 군을 동원해 무력 진압했다. 그럼에도 그루니츠키의 통치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시민들은 군부의 권력 장악을 요구할 정도였다.
2.2. 대통령에 오르다
이후 1967년 4월 14일에는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추대한 그루니츠키를 몰아낸 후 프랑스로 추방시키고는[13] 동년 4월 15일에 대통령, 정부 수반, 국방부 장관에 등극하며 정권을 장악, 5월 15일에 모든 정당을 해산했고,[14] 1969년에는 나라의 유일한 합법 정당인 토고 인민 집회(RPT)를 만들고 1972년 1월 9일에 99.9%의 찬성표로 찬성된[15]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79년과 1986년에 단독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대통령에 재선했다. 물론 이 선거들은 다 반대표가 거의 없는 부정선거였으며,[16] 일당제 하의 국회의원 선거 역시 결과는 뻔했다.[17]에야데마는 친척과 그의 부족인 카바이족 지지자들이 장악한 충성스러운 군대, 프랑스 등 외국의 풍부한 지원[18], 자기 일족을 요직에 앉힘,[19] 국가의 빈약한 경제 자원에 대한 접근을 영리하게 차단, 대규모 억압은 하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음모를 꾸면서 정적을 숙청하는 식으로 토고를 경찰 국가로 만드는 등의 수법을 이용해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다.
1972년에는 나이지리아의 야쿠부 고원[20] 대통령과 회담하여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의 설립을 추진해 1975~1978년에 초대 의장이 되었고, 이후에도 1980~1981, 1999년에 2차례 더 의장직을 역임한다.
2.3.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남다
1974년 1월 24일에 에야데마와 그의 정치적, 군사적 측근 3명, 조종사 1명을 태운 C-47 기체가 토고 북부 사라카와 마을 근처 수풀 한가운데에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21] 다른 탑승객들은 모두 사망했지만 에야데마 1명만 홀로, 그것도 상처도 입지 않고 살아남았기에 에야데마는 이 생존을 '신비한 힘'의 덕으로 돌리고 1월 24일을 '경제 해방의 날'[22]로 선언한 후 이날을 기억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도 '에티엔'에서 자기 일족의 언어인 카비아어로 '용기'를 의미하는 '냐싱베'로 개명하고는 이와 동시에 국민들에게 아프리카식 이름으로 개명할 것을 권유했다. 거기에 에야데마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기에 토고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식당에서 에야데마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을 정도였다.에야데마는 이 사고가 단순한 사고가 아닌, 이 사고 2주일 전에 자신이 나라에 있어서 중요한 인산염 광산 회사를 국유화해 더 이상 프랑스 자본이 광석을 착취할 수 없게 된 것을 마음에 안 들어한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이 꾸민 사고라고 주장했지만, 이 사고로부터 거의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 추락사고의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사실 그의 측근들이 사고를 조사하며 이 사고의 원인이 기체 결함이라고 발표하자 에야데마는 이를 '이 기체 결함은 분명히 (프랑스측의) 사보타주일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23] 참고로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사고로 생존한 사람은 에야데마 1명만이 아니었는데, 에야데마의 친구이자 이 사고기의 동승자였던 프랑수아 루(François Roux) 목사는 적어도 2013년에도 생존해 있었다. # 즉, 에야데마가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사고기 탑승자 수까지 6명에서 5명으로 축소해가며 사고 정보를 일부러 잘못 전달한 셈이다.
여하튼 이렇게 국유화된 인산염 광산 회사는 수익성이 좋아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어 국가 개발을 위한 세입을 증가시켰고, 주변국과 비교하면 정치 상황도 안정적이었기에 1970년대에 토고는 상당히 성장세를[24] 달리며 언젠가는 '서아프리카의 스위스'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얻었으나 1980년대에 정부의 잘못된 관리와 막대한 부정부패 때문에 토고의 경제사정은 악화되었다.[25]
1980년에는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독재에 대해 "개를 죽이려는 사람은 먼저 개가 분노했다고 비난한다. 토고는 번영하고 생존할 수 있으며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부러워한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올림피오의 자식들이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토고에 없다."[26] "내가 그런 억압적인 정권을 이끌고 있었다면 왜 그들(에야데마의 반대파들)은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국민들에게 가지 않고 용병들에게 가는가?"[27]라고 전면 부인한 바가 있다. #
2.4. 짧은 '로메의 봄'
1990년 10월부터 토고의 수도 로메에서 토고 역사상 최대의 반정부 시위가 열리자 에야데마는 정치적 다원주의를 제공할 것으로 예상되는 새 헌법의 초안을 위한 제안을 승인했고, 1990년 12월 13일에는 토고 내 최초의 야당인 토고민주동맹(ADT)이 창립되었으나 아직 승인은 받지 않았으며,[28] 1991년 1월에는 정치적 망명자들을 사면했다.1991년 3월 1일~4월 30일에 로메에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 시민들의 파업과 폭력 시위가 잇따랐고, 이에 군대는 시위대를 곤봉으로 구타하거나 최루탄 투척, 실탄 발포를 통해 여러 명을 살해했다. 결국 1991년 4월 10일에 에야데마는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압력으로 다당제로 전환했고, 1991년 5월에 에야데마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에야데마는 1967년부터 역임한 국방부 장관직에서 사임했다.
그리고 에야데마는 1991년 6월 12일에 국민회의 개최를 인정했는데, 7월 8일에 시작된 국민회의는 1991년 8월 27일에 조셉 코쿠 코피고(Joseph Kokou Koffigoh, 1948~)를 실권자 총리로 추대하고 에야데마는 형식적인 대통령으로 격하했다.[29] 에야데마는 코피고를 총리로 추대할 때 국민회의를 군대로 에워싸며 반발했으나, 얼마 안 가 코피고의 총리 추대를 인정했다. 그러나 국민회의가 얼마 안 가 내부적으로 분열하고 코피고가 야당의 단결 대신 공기업 사장직에 자신의 지지자외 친구들을 임명하여 자신의 권력만 추구하는 등 정계가 혼란에 빠져들었다.
1991년 11월 26일에 코피고가 이끄는 과도 정부인 공화국 고등평의회(HCR)가 RPT를 금지하자 이에 반발한 군인들은 이틀 뒤에 코피고의 퇴진과 에야데마가 임명하는 새 총리 임명, HCR 해산과 모든 결정 무효화, RPT 합법화를 요구하며 코피고를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겠다'고 위협했고, 이에 굴복한 코피고는 '에야데마 지지자들을 정부에 포함시키겠다'고 말했다. 에야데마는 두려움에 떨며 프랑스에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프랑스는 바로 하루 뒤인 11월 29일에 토고에 거주하던 3천 명의 프랑스인을 보호하기 위해 300명의 프랑스군을 이웃 국가인 베냉에 파견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1991년 12월 3일에 군인들이 그의 관저를 탱크와 기관총으로 포위한 후 최소 17명, 최대 200명이 사망한 군부의 유혈 쿠데타가 있었다.[30] 물론 이 군부의 배후는 에야데마였고, 에야데마는 이를 통해 '코피고의 이전 정부를 대체할 새로운 과도 정부를 구성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12월 31일에 개각을 발표하며 다시 권력을 쥐게 되었고, 이렇게 토고의 짧은 민주화는 끝나게 되었다.
2.5. 다시 독재자가 되다
1993년 1월 25일에 경찰이 수도의 시위에 발포한 후 22~50명이 사망하며 토고의 정치적 위기는 다시 고조되었고, 1월 29일에 군인 중 1명이 민간인에게 살해되자 이에 분개한 군인들은 바로 다음날에 거리를 약탈하며 최소 6명의 민간인을 살해했고, 이에 로메 인구의 절반인 최소 30만 명이 가나와 베냉으로 피신했고, 8월 25일에는 토고 역사상 최초의 다당제 대통령 선거를 열었으나 대부분의 야당이 선거를 보이콧해 야당 후보는 단 2명만 나왔고, 에야데마는 36.12%의 저조한 투표율 속에서도 96.42%의 득표율로 당당히 당선되었다. 참고로 이 투표에서 유효 득표수 합산이 총 득표수보다 1만 명 이상 많게 잡히는 등 석연치 않은 면들이 많기에 이 선거 역시 부정선거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 해에 유럽은 독재와 인권 탄압을 이유로 토고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다.이후 1996년 1월 17일에는 야당 신문인 차우조의 편지(The Letter of Tchaoudjo)의 국장 무다시루 카탁파우 투레(Moudassirou Katakpaou Toure)를 '국가 원수 명예 훼손' 혐의로 징역 5년, 벌금 1만 달러, 신문 무기한 정간을 선고했고, 동년 6월 19일에는 또 다른 야당 신문 '민주당 트리뷴(The Tribune of Democrats)'의 발행이사 에릭 로슨(Eric Lawson)을 제복을 입은 미확인 특공대에 대한 살인을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증오를 선동하고 거짓 뉴스를 퍼뜨린' 혐의로 궐석재판에서 징역 5년, 벌금 6천 달러와 신문 6개월 정간을 선고하기도 했다.[31]
1998년 6월 21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에야데마는 5명의 야당 후보와 맞붙어 52.08%의 득표율로 힘겹게(?) 당선되었다.[32] 이 선거 이후 에야데마는 수백 명의 반대파들을 처형하고는 그 시신을 바다에 유기하는 잔혹성을 보여줬는데, 1999년 5월에 국제앰네스티가 이를 폭로하자 에야데마는 이것이 '국제앰네스티가 정부에 대해 제기한 조사와 혐의는 토고 내 야당 단체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우기며 2명을 앰네스티와 연관되었다는 이유로 체포한 것을 넘어 무려 국제앰네스티를 정부 차원에서 고소하기도 했다.[33][34]
이후 에야데마는 이미 2003년을 마지막으로 물러냐아 하는 상태였음에도[35] 퇴진 시기 직전인 2002년 12월 30일에 또다시 헌법을 바꿔 대통령직을 이어 나갔고, 대통령의 연령 제한을 45세가 아닌 35세로 낮춰놓았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급사할 경우 아들 포르 냐싱베[36]에게 권력을 세습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품었다. 어쨌든 에야데마는 2003년 6월 1일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57.79%로 당선되었지만, 이 역시 야당 UFC가 '실제 당선자는 71%를 차지한 엠마누엘 밥-아키타니(Emmanuel Bob-Akitani, 1930~2011)이고, 에야데마는 단 10%만 득표했다'고 주장하며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37]
2000년부터 2001년까지는 아프리카 단결 기구(OAU) 의장을 역임했으며, 말년에는 자신의 독재자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2002년부터 시작된 코트디부아르 내전을 종전시키기 위해 코트디부아르 정부와 반군의 중재를 시도하는 등 아프리카 지역의 평화 이니셔티브에 참여하기 시작했지만 눈에 띄는 성공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2.6. 사망
에야데마는 2005년 2월 5일에 고향인 퍄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보잉 707 전용기를 타고 프랑스로 응급 치료를 하러 가다가 튀니지의 튀니스로부터 남쪽으로 250km 떨어진 지역에서 심장마비로 69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그가 사망할 때 그보다 더 오래 집권한 아프리카 독재자는 없었다.[38]그의 사망 직후 토고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2005년 4월 24일에 아들인 포르 냐싱베가 60%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만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토고의 차기 대통령직으로 선출되며 권력 세습에 성공했다. 포르 냐싱베는 2024년 현재까지도 토고의 대통령직을 역임하고 있다.
3. 우상화
에야데마의 우상화는 워낙 우스꽝스러웠기에 국제적으로 악명이 높았다. 에야데마는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를 모델로 해서 자신을 우상화했는데,[40] 대부분의 상점에 자신의 초상화를 장식하게 하고는 15초마다 자신의 이름이 사라졌다가 다시 빛나는 손목시계를 만들었으며, 토고의 라디오 방송국은 '에야데마는 토고를 통치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노래를 송출해야 했고, 그가 순행할 때에는 1천여 명의 무희들이 그를 수행하며 노래와 춤을 제공한 데다가 수도 로메에는 에야데마의 동상[41]까지 세워졌다고 한다. 출처거기에 매일 로메의 시민들은 하루에 에야데마가 대통령궁과 관저를 오가는 4번 동안, 정확히는 아침에 관저에서 대통령궁으로 가고, 정오에 점심을 먹으러 관저로 돌아오고, 오후 2시에 대통령궁으로 돌아오고, 저녁에 관저로 돌아왔을 때 길 위에서 박수를 쳐야 했고, 박수를 치지 않거나 박수를 너무 빨리 멈추면 체포되거나 사망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
그리고 에야데마는 비행기 사고와 여러 번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은 것을 '불멸의 인간'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이용했고,[42] 그가 암살시도에서 살아남은 날들은 빠짐없이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향연'이라고 묘사되었으며, 특히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은 날 중 하나는 '전승의 향연'이라는 이름의 국경일이 되었다. 심지어 에야데마의 생전에는 에야데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일종의 무적 슈퍼히어로로 묘사되는 만화책까지 만들어졌다고 한다.
[1] 일각에서는 그가 1930년생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2] 이 때문에 집권 초의 에야데마는 프랑스어로 적힌 연설문을 더듬거리며 읽었다고 한다.[3] 참고로 당시 토고는 UN의 신탁통치령이라 군 입대가 불가능했다고 한다.[4] 오늘날의 베냉. 다호메이 지역 역시 토고처럼 프랑스의 식민지였다.[5] 에야데마는 이에 대해 '프랑스 용병'이라고 표현했다.[6] 당장 한국에서 박정희, 백선엽, 정일권을 비롯한 관동군, 만주군 출신 인사들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이 어쩐지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7] 겉으로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들었지만, 사실 이는 토고의 초대 대통령 실바뉘 올랭피오가 국가 발전과 현대화에는 군대가 불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인데, 실제로 올림피오는 군인이 250명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고 하며, 이 때문에 콩고군의 인원 수를 250명으로 정했다. 심지어 원래 올림피오는 독립 후의 토고는 군대를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가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의 위협이 우려되며 겨우 소규모 군대를 두게 된 거였다. 참고로 이는 웬만한 대대보다도 작은 규모이며, 한국광복군의 인원이 정확히 564명이었다.[8] Sylvanus Olympio, 1901~1963. 1941년부터 토고통일당(CUT)를 결성하고 이끌면서 프랑스가 개입한 선거를 보이콧하는 등의 정치 활동을 벌이다가 프랑스에 체포되고 시민권까지 박탈당하는 일도 겪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고, 1947년에 UN 신탁통치이사회에 청원해 토고 독립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해결을 요구하는 등[43] 토고의 독립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였고, 이와 동시의 기니의 아메드 세쿠 투레 등 아프리카 대륙의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연결되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후에는 일당제를 실시하는 독재자가 되었고, 그의 암살 이후 전체 정치범도 아닌 석방된 정치범만 2,500명이었다고 한다.[9] 참고로 이 쿠데타는 2차 대전 후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 내에서 일어난 역사상 최초의 쿠데타였다고 한다. 아프리카 내에 쿠데타&쿠데타 시도로 정세가 혼란스러운 나라가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안 좋은 선례를 남긴 셈.[10] 이는 에야데마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장한 게 아니라, 에야데마 본인이 쿠데타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직접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에야데마는 1967년에 대통령이 된 후 자신이 암살했다는 것을 부인하며 이를 보도했다는 이유로 르 몽드 신문을 금지시켰다.[11] 아버지가 독일인인 흑백혼혈로, 1946년에 창당된 토고진보당(PTP)의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CUT의 반불 성향과는 선을 그었고, 1951~1958년까지 프랑스 국회의원이었으며, 올림피오 초대 대통령의 처남이었다.[12] 참고로 토고군의 군인 수는 쿠데타 직후인 1963년 5월에는 550명, 1966년 1월에는 1,200명으로 크게 늘었다.[13] 이후 그루니츠키는 코트디부아르에서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 부상의 후유증으로 1969년 9월 27일에 향년 5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14] 참고로 집권 초에 에야데마는 초졸이었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아도 행정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의 아프리카 수석 고문 자크 포카트(Jacques Foccart, 1913~1997)에게 전화를 해가면서 토고를 통치해야 했고, 이 때문에 포카트는 '전화로 토고를 통치한다'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15] 투표율도 98.6%에 달했다.[16] 1979년 12월 30일 선거는 투표율이 99.45%에 달한 것은 물론 1,296,851명의 투표자 중 무효/공백표를 낸 단 267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찬성표를 던져 찬성율이 무려 99.98%였고, 1986년 12월 21일 선거 역시 투표율은 98.93%에 달한 데다가 1,738,611명의 투표자 중 840명이 무효/공백표를 내 던져 찬성율이 99.95%로 근소하게 떨어졌다.[17] 1979년 대통령 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의회 선거는 투표율 96.65%로 치러지며 67명의 후보자 명단이 1,250,942명의 투표 중 무려 43,301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찬성표를 던져 찬성율이 이전보다 대폭 떨어진 96.35%였고, 1985년 3월 24일에 열린 의회 선거는 78.59%의 투표율을 기록했고, 77석에 단일 정당의 216명의 후보자와 22명의 예비위원이 경쟁했는데도 1,024,533명 중 12,422명을 제외하고는 다 찬성표를 던져 찬성율이 98.8%였다.[18] 에야데마 시기의 토고는 샤를 드 골로부터 자크 시라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프랑스의 대아프리카 정책의 선봉이자 하위 지역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지켜내는 보루'로 여겨지며 풍부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에야데마는 시라크 대통령을 '개인적인 친구'라고 불렀을 정도로 절친한 관계였다.[19] 실제로 그의 사촌은 경찰 학교의 교장이었고, 그의 이복형은 대통령 경호 사령관에 올랐다.[20] 참고로 에야데마는 고원이 일으킨 나이지리아 내전 동안 비아프라를 인정했고, 나이지리아와 코트디부아르 사이의 격렬한 갈등을 해결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21] 오늘날 사고 현장 근처에는 이 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가 들어서 있다.[22] 이 날은 국가적으로는 '토고의 경제적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목숨을 잃은 국가의 아버지와 모든 동포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날'로 간주되었다.[23] 참고로 이 사고 후에 대통령 전용기는 걸프스트림 II로 교체되었으나, 이 기체도 동년 12월 26일에 충돌 사고로 승무원 3명이 사망하는 사고를 겪었다. 참고로 사고기에 탑승한 승객 3명은 전원 생존했으며, 이들 중 에야데마는 없었다.[24] 실제로 독립 직후인 1960년에는 73달러, 1970년에 116달러도 되지 않던 토고의 1인당 GDP는 1980년에 400달러로 정점을 맞았다.[25] 실제로 1984년에 토고의 1인당 GDP는 단 4년 만에 222달러로 떨어졋고, 이후에도 토고의 경제는 성장과 폭락을 거듭하며 그가 사망한 2005년 시점에는 1인당 GDP가 399달러를 기록하게 된다. 물론 화폐 가치 변동을 고려하면 실질 경제 수준은 오히려 추락한 셈이다.[26] 실제로 에야데마는 토고 인구의 80%를 차지하던 소작농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나 소수의 교육받은 엘리트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고 하고, 이런 인기 덕에 외부에서는 "만약 자유 선거가 있었다면 에야데마는 대다수의 표를 차지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여촌야도 유사한 케이스.[27] 실제로 에야데마는 1977년에 토고 망명자들이 용병을 동원해 자신을 전복시키려 한다는 것을 (영국 비밀정보국으로부터 전해들은) 미국 대사로부터 전해들었고, 이 계획은 실행조차 되지 않았다.[28] 사실 이전에도 토고에는 망명 야당이 민주주의를 위한 토고 운동(MTD)과 아프리카 민족 민주 협약(CDPA) 2개나 있었다.[29] 대한민국으로 치면 코피고가 장면, 에야데마가 윤보선 포지션이 된 셈이다.[30] 참고로 사망자 중에는 대통령 경호 사령관, 즉 에야데마의 이복형도 있었다고 한다.[31] 참고로 1996년에 토고의 1인당 GDP는 330달러도 되지 않았다. 벌금 수준이 가히 몇십년 치 연봉과 똑같았던 셈.[32] 참고로 이 선거에서 2등은 무려 34.18%를 차지한 길크리스트 올림피오(Gilchrist Olympio, 1936~, 성을 봐도 알 수 있듯 실바누스 올림피오의 아들이었다)로, 토고에서는 불법이던 야당 활동을 하다가 궐석재판에서 2차례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고, 1992년 2월 1일에 야당 연합인 변화를 위한 연합(UFC)를 설립했으나 동년 5월 5일에 그의 호송대가 에야데마의 아들이 지휘한 특공대의 공격을 받아 12명이 죽고 본인도 중상을 입어 프랑스에서 1년간 치료해야 했다. 참고로 야당에서는 올림피오가 실제 당선자라며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33] 참고로 국제기구를 정부 차원에서 고소한 국가원수는 에야데마가 처음이자 유일한 사례이며, 그 김정일, 김정은 부자와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조차 북한과 에리트레아의 인권 탄압을 지적한 국제기구를 정부 명의로 맹비난한 적은 있어도 정부 명의로 고소까지 한 적만큼은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 행각인 것은 물론이고 에야데마가 저지른 최악의 독재 행각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34] 그런데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로메에서 연 기자 회견에서 앰네스티의 보고서를 '대부분이 조작일 것'이라고 주장하며 에야데마의 고소가 '옳았다'고 주장하며 에야데마를 감싸고돌았다. #[35] 당시 토고의 헌법은 5년 임기 2번으로 대통령 임기를 정해놨다.[36] 아버지의 재정 고문관으로서 아버지가 해외에 은닉한 재산을 관리했고, 헌법 개정 당시 만 36세였다.[37] 참고로 밥-아키타니는 공식적으로는 33.68%를 차지했다.[38] 그와 같은 해에 집권한 가봉의 오마르 봉고는 1967년 12월 2일에 집권했기에 그보다 7개월 이상 늦게 집권했다. 다만 2023년 현재에는 아프리카 역사상 최장기 집권 독재자 6위로 밀려났고, 1위는 1979년부터 44년간 현역 대통령으로 집권 중인 적도 기니의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가 차지하고 있다.[39] 독립영웅을 손수 살해한 게 에야데마와 판박이다.[40] 참고로 모부투의 우상화는 독재자 우상화 중 압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한 김일성을 본뜬 것이었다. 따라서 에야데마는 김일성을 본뜬 모부투를 본뜬 것.[41] 동상 사진[42] 에야데마는 자신이 암살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경호원이 자신을 암살하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외과의가 제거한 총알을 부적으로 가지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