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22:04:49

야쿠부 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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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 제3대 대통령
야쿠부 고원
Yakubu Gowon
파일:uGhTmHG.jpg
출생 <colcolor=#000000,#008751>1934년 10월 19일 ([age(1934-10-19)]세)
영국령 나이지리아 북부 플래토 지방
국적 나이지리아 파일:나이지리아 국기.svg
재임기간 제3대 나이지리아 대통령
1966년 8월 1일 ~ 1975년 7월 29일
직업 나이지리아 대통령, 군인
종교 기독교(성공회)
학력 영국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
정당 무소속
참전 경력 비아프라 전쟁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생애
2.1. 집권 전2.2. 집권 기간 - 비아프라 전쟁의 주도자2.3. 축출 후
3.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oKdByh2.jpg 파일:노년의 야쿠부 고원.jpg
1970년 1월 22일의 모습(중앙) 2019년 12월 21일의 모습

나이지리아의 군인, 나이지리아 제3대 대통령, 독재자, 학살자.

비아프라 전쟁 당시 3년 동안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 전범이지만 이와는 별개로 물러난 후에는 생전에 축출된 독재자들 중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한 여생을 보내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집권 전

1934년 10월 19일에 나이지리아 북부 플래토(Plateau)[1]주의 칸케 지방에 있는 루르라는 촌락에서 앵거스(Angas)족의 일원으로 11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2] 고원은 부모가 선교를 위해 나이지리아 북부의 자리아로 가면서 자리아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실제로 무슬림이 많은 나이지리아 북부인들과 달리[3] 고원 본인은 성공회 신자였다. 어린 고원은 학교에 입학한 첫 해에 학교의 마일 완주 기록을 깼을 정도로 운동에 재능이 많은 아이었다.

20세가 된 1954년에 나이지리아군에 입대한 후 21세 생일이었던 1955년 10월 19일에 소위로 승진했으며 1955년부터 1956년까지 영국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았고 1960년에 나이지리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신생 나이지리아군의 장교로 임관하였으며 1961~1962년에는 콩고에서 유엔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도 일했고 1963년 6월에는 중령으로 승진했다.

1966년 1월 15일에 추쿠마 카두나 느제오우(Chukwuma Kaduna Nzeogwu, 1937~1967) 소령이 주도한 군부의 유혈 쿠데타로 나이지리아의 초대 총리이자 당시 총리였던 아부바카르 타파와 발레와(Abubakar Tafawa Balewa, 1912~1966)를 포함한 22명이 사망했는데 이 쿠데타를 진압한 소장이자 나이지리아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존슨 아귀이-이론시(Johnson Aguiyi-Ironsi, 1924~1966)가 바로 다음 날에 나이지리아 최초의 군사정권 지도자로 집권하고 같은 날에 고원은 만 31세라는 젊디젊은 나이로 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고원은 정치에 관심조차 없는 직업적 군인이었는데 고원은 먼 훗날인 2020년에 "내가 국가 원수로 취임했을 때 겁이 났다."고 회고했다.

이 쿠데타 당시 나이지리아는 인종적, 종교적으로 심하게 분열된 상태였는데 아귀이-이론시는 이런 상황 속에서 기존까지의 통치 제도였던 연방제를 폐지하고 나이지리아를 단일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 북부 지역의 분리를 제창하던 무르탈라 무하메드(Murtala Muhammed, 1938~1976) 장군을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 출신 군인들은 연방제를 폐지하고 단일 국가를 추구했던 아귀이-이론시에 반발했는데 이들은 1966년 7월 29일에 이바단을 순방하고 숙소에서 쉬고 있던 아귀이-이론시를 위시한 300명을 살해한 후 1966년 8월 1일에 고원을 국가원수에 추대했다. 이렇게 고원은 만 31세라는 젊디젊은 나이로 나이지리아라는 한 국가의 수장이 되었는데 당시 아프리카의 최연소 국가원수였다고 한다.

2.2. 집권 기간 - 비아프라 전쟁의 주도자

고원은 집권 후인 1967년에 후술할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는 소장으로 진급했고 1969년에는 빅토리아 자카리(Victoria Zakari, 1946~)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 이브라힘(Ibrahim)과 딸 사라투(Saratu)를 낳았으며 1970년에 내전이 끝난 후에는 대장으로 진급했다.

고원은 집권 후 아귀이-이론시의 정책을 뒤엎어 버렸으며 남부 이보족 출신인 C. 오두메구 오주쿠(Chukwuemeka "Emeka" Odumegwu-Ojukwu, 1933~2011)가 1967년 5월 26일에 비아프라 공화국을 세워 독립을 선포하자 고원은 동부의 분리 가능성에 불안해하면서 이로부터 바로 다음날인 1967년 5월 27일에 비상사태를 선포한 후 기존 4개 주를 12개 주로 쪼개 각 지방정부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으며 고원은 비아프라 연방의 탈퇴를 막기 위해 '경찰 조치'를 요구하며 1967년 7월 6일에 비아프라를 침공하여 비아프라 전쟁을 일으켰다.

비록 고원 본인은 온건파였다고 하지만[4] 나이지리아 정부군은 전쟁기간 중 비아프라 지역 주민을 상대로 집단 살인은 물론이고 무자비한 강간, 약탈을 자행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특히 나이지리아 정부군 공군은 '도살자'로 불렸는데 융단폭격 대상에 난민캠프와 시장을 포함했기 때문이었다. 난민 구호활동을 벌였던 국제적십자사 직원과 전쟁 취재에 나섰던 서방 특파원도 폭격으로 숨졌다. 이러한 폭격은 나이지리아의 다른 소수 종족이 독립을 꿈꾸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로서 르완다 학살 등 이후의 아프리카 대륙 종족 분쟁의 선례가 됐다. 이 전쟁으로 인해 군인 4.5만~10만 명, 민간인 100만 명이 사망했으며 심지어 민간인 사망자 중 절반인 50만 명 이상은[5] 나이지리아군이 비아프라인들의 저항을 마비시키기 위해 비아프라를 의도적으로 봉쇄해 식량 공급을 막으면서 발생한 기근으로 사망했다.[6]

비아프라 전쟁은 1970년 1월 15일에 비아프라가 '무조건 휴전'을 제안하며 나이지리아 정부군의 승리로 끝났는데 고원은 전쟁이 끝난 후 치유와 화해를 촉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승자도 패자도 없다(No victor, no vanquished)'는 선언을 했으며 비아프라의 정치범 대다수를 사면한 뒤 이후의 기간은 '재활, 재건 및 화해의 기간'으로 선포하고 동부 지역의 복구에 나섰다. 1972년 3월에 고원은 나이지리아 기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민간 부문의 대부분을 1973년 3월까지 외국인들에게서 나이지리아인의 손으로 이전하도록 명령했다.

1973년석유 파동이 발생하자 나이지리아는 석유를 팔아 번 돈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 경제 회복을 누렸고 전국적으로 개발을 진행하면서 라고스를 크게 성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에 의한 부정부패뇌물 수수가 급증했다. 비록 고원은 직접적으로 부패에 가담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신의 참모들과 측근들이 저지르는 부정부패를 묵인했다.[7] 그리고 1974년 10월 1일 고원은 이전의 약속과는 달리 '나이지리아는 1976년까지 민간 지배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민정으로의 반환 날짜를 무기한 연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군의 온건파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집권 9년이 되는 날짜로부터 정확히 3일 전인 1975년 7월 29일에 고원은 우간다 캄팔라에서 열린 아프리카 통일기구[8] 방문 중 조셉 난벤 가르바(Joseph Nanven Garba, 1943~2002) 대령이 이끄는 군부의 쿠데타로 실각하여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고원을 몰아낸 군부는 무르탈라 무하메드 준장을 군부의 새 지도자로 앉혔다.

2.3. 축출 후

고원이 영국으로 망명한 후 1976년 2월 13일 부카 르수 와딤카(Buka Rsu Wadimka, 1940~1976) 중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무하메드를 암살했는데 와딤카는 쿠데타 전에 런던에 가서 고원에게 쿠데타에 대한 지원을 받고 고원을 다시 국가 원수로 추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무하메드의 후계자 올루세군 오바산조(Olusegun Obasanjo, 1937~) 참모총장에 의해 진압당했고 와딤카는 공개처형을 당했다. 고원은 나이지리아 정부에 의해 수배자로 공포되었고 궐석재판에서 모든 직위와 연금 수령권을 박탈당으며 이때 나이지리아 정부는 고원의 범죄인 인도를 영국 측에게 요구했으나 영국 정부는 고원의 인도를 거부하였다.

이후 고원은 그의 교구의 교회에서 교회 감독관 일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워릭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고 이 무렵에 나이지리아 정부로부터 사면을 받았으며 1983년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딴 후 고국으로 돌아와 1980년대 중반에는 나이지리아 중부의 조스 대학교의 정치학과 교수로 일하기도 했고 1987년에는 박탈당했던 군대 직급도 회복되었다. 1992년에는 '야쿠부 고원 센터'라는 조직을 만들어 에이즈, 메디나충, 말라리아 등의 전염병 통제와 나이지리아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결에 나서고 있으며 제네바 글로벌 펀드의 에이즈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 고원은 가나, 기니, 잠비아, 라이베리아, 레소토 등의 선거를 참관하는 등 아프리카의 정계 원로로 대접받고 있다.

그리고 고원은 '마지막 좋은 사람(last good man standing)' 등의 호칭으로 불리며 고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있으며 단 한 번의 재판에도 회부되지 않는 등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9] 실제로 2019년 모하마두 부하리 나이지리아 대통령이 그의 85세 생일을 축하하는 축전을 보내기도 했으며# 이후에도 고원은 매년 생일마다 부하리 대통령으로부터 생일 축전을 받고 있다.[10]

2018년 4월 23일에는 "나이지리아가 또 다른 내전을 겪기 않지를 바란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

비아프라 내전 종결 50주년을 맞이한 2020년 1월 15일에는 자기는 전쟁 과정에서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으며 '나이지리아의 분열을 원하는 사람들이 전쟁을 시작했다. 나는 나이지리아의 통합을 사랑했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

2020년 11월 24일에 영국의 외교특별위원회 의장이었던 톰 투겐햇(Tom Tugendhat, 1973~)[11]가 '고원이 축출된 후 나이지리아 중앙은행의 돈 절반을 약탈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나이지리아 내에서 항의가 빗발쳤고, 고원도 이에 반발하여 동년 11월 26일에 트위터 계정을 만들며 이 주장이 가짜 뉴스라고 전면 부인한 데다 나이지리아 정부도 영국에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으며 이에 영국 외무부는 "하원의원의 언급은 여왕의 정부의 견해를 반영하지 않으며 영국 정부는 의회 의원들의 행동과 연설을 통제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2022년 8월 5일에는 누나인 라미 딤카(Lami Dimka)를 떠나보냈고 # 같은 달 22일에는 2023년 총선에 참여할 유권자들에게 '국가를 평화와 번영으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될 후보를 선택하라'는 충고개소리를 했다.#

3. 기타

  • 고원을 '나이지리아의 민족 통합'의 상징으로 여기는 나이지리아의 정치인들은 고원의 성을 'Go On With One Nigeria'의 두문자어처럼 여기고 있다.

[1] 여담으로 'Plateau'는 영어로 '고원(高原)'을 의미한다(...).[2] 여담으로 고원의 아버지는 미래의 엘리자베스 2세의 어머니가 미래의 조지 6세와 같은 날에 결혼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3] 실제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단체인 보코 하람의 본거지도 나이지리아 북부다.[4] 전쟁에서 그는 비아프라의 민간인들이 적이 아닌 나이지리아인에 의해 오도되었다고 믿었으며 고원은 나이지리아군에 '행동 강령'을 제시하면서 비아프라의 민간인을 연맹에 반환해야 하는 나이지리아인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고 외국인들이 나이지리아 군대의 행동을 주시하도록 허용했다. 출처 실제로도 고원이 직접 민간인 학살을 지시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나이지라아군 통수권자로서 나이지리아군의 전쟁 범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인 만큼 기무라 헤이타로처럼 부하들의 전쟁범죄를 인지하면서도 눈감아 준 것에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다.[5] 이들 중 절반이 어린이들이었다. 전쟁 당시에는 200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다고 보고되었다.[6] 실제로 1968년에 나이지리아 평화 회의 대표단의 지도자는 "굶주림은 합법적인 전쟁 무기이며 우리는 그것을 반군에게 사용할 모든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발언은 일반적으로 고원 정권의 정책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1968년 7월 17일자 경향신문에 의하면 나이지리아 정부는 구호활동을 위해 비행기가 나이지리아 상공에 접근하면 무차별 사격을 가하겠다는 위협까지 했다. 당시 기사[7] 고원이 한 외신기자에게 "나이지리아가 가진 유일한 문제는 '가진 돈을 어떻게 쓰는가'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8] Organisation of African Unity(OAU), 1963년부터 2002년까지 존속한 아프리카 연합의 전신격 단체. 참고로 이로부터 하루 전에 OAU의 신임 의장으로 임명된 사람이 바로 당시 우간다의 독재자였던 이디 아민이었다.[9] 참고로 냉전 시기의 아프리카의 주요 독재자들 중 오늘날에도 생존한 인물은 고원을 제외하면 에티오피아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정도밖에 없다.[10] 참고로 부하리 대통령은 고원의 집권 계기가 된 군부 쿠데타에 참여했던 사람이며 고원 정부 시절에 일어났던 비아프라 전쟁에서도 전공을 세운 바 있다.[11] 영국 보수당 의원으로 2023년 기준으로 리시 수낙 내각의 안보담당부장관(Minister of State for Security)이다.[12] 국가원수는 아니었지만 냉전 시기의 주요 인물 중 헨리 키신저도 개인 트위터 계정이 있었다. 다만 키신저는 2023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