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5:07:25

공개처형

1. 개요2. 목적3. 사례
3.1. 공개형
3.1.1. 영국
3.2. 참여형3.3. 부관참시3.4. 중계형
4. 비유적 의미

1. 개요

/ public execution

사형수에 대한 사형 집행을 하면서 그 과정을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것. 저잣거리처럼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집행하는 처형의 경우이다.

2.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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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사진은 중국에서 공개처형을 하기 전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중국에서는 건국 초기와 문화대혁명 기간과 엄타 중에 공개처형이 흔했지만, 중국내에서도 국가 위신에 별로 좋지 않고, 대중들이 보기에는 잔인하다는 이유로 2008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한 2007년 이후로는 공개처형을 한 번도 집행하지 않았다가 2017년부터 공개처형을 재개해서 몇 차례 시행하고 있다. # 2018년에도 묻지마 범죄를 저지른 흉악범을 공개처형했다. 2020년에 다시 한 번 공개처형이 집행됐다고 한다.

공개처형은 범죄자에게 커다란 모욕과 좌절감을, 대중이나 그 한패에겐 공포감을 주어 추가 범죄 예방과 불만을 가라앉힐 수 있다고 보았던 각국 정부들에 의해 근대까지 빈번했다. 실제로 전근대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지면 거의 공개처형이고, 정적이나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경우 조용히 암살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경고 목적으로 최대한 잔인하게 처형했음에도 그대로인 범죄율, 그리고 시민 혹은 선진화된 타국으로부터의 비판, 사회 전반에 증대되는 폭력성 등으로 현재는 대부분이 비공개로 진행된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사형제에 대한 논란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북한에서는 외부의 눈초리가 너무 심할 때는 덜 하기도 했다가, 김정은이 한류에 대해 굉장히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인 이후 2023년 들어 평양문화어보호법에 대놓고 '공개투쟁'의 일환이라며 처벌의 종류 중에서 공개처형이라는 문구를 명시하였다. 압권인 것은 수령이 아닌 일반 직책에 '님'자를 붙이는 것도 '괴뢰말투'로 규정되어 사형이 가능한데, 그 중에서도 공개투쟁이 명시되어 있으니 진짜로 남을 조금이라도 높여 부르다가는 저렇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대에는 대부분의 사형 존치 국가에서도 공개처형 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이란, 북한,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소말리아, 예멘에서는 여전히 공개처형 제도가 남아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정치가 불안한 중동 국가에서는 정부군이나 반군 가릴거없이 길 한복판에서 갑작스럽게 공개처형을 진행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3. 사례

3.1. 공개형

일반 민중 앞에서 정부나 해당 지역 통치자가 공개적으로 처형(=사형)하는 것.

많은 문화권에서는 마녀사냥, 인민재판 등으로 죄목을 공표&형 집행 혹은 조리돌림이나 낙인을 찍는 걸 병행해 범죄자의 명예를 더럽히는 걸 형벌로 삼았다.

미국의 일부 주는 살인 피해자 유족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 중에 선발된 사람도 사형 집행에 참관가능하다. 사형제도를 가진 38개 주 중에 약 10여 개 주에서는 피해자와 관련이 없는 일반 시민 대여섯 명 이상이 반드시 사형집행에 참관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다. 이는 재판에 시민이 참여하는 배심제도와 마찬가지로 사형이라는 법의 집행과정에서도 시민들을 참여시켜 투명성을 보장하고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시민 사회가 범죄자를 공적으로 단죄한다는 명분을 삼는 제도이다. 법과대학원생, 신입경찰, 신문기자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다. 참관인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끔 신문 등에 사형참관인을 모집하는 광고가 나기도 한다. 사형수를 모욕하거나 잠재적 범죄자에게 겁을 주려는 의도는 아니므로 공개 처형으로 보기는 애매하다.

전근대에는 공개처형을 관람하는 것은 서유럽 성인들의 놀이문화였다. 당시의 인권 의식이 지금보다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중세 시대에는 지금과는 달리 TV나 인터넷 및 영화도 없었고 사람들이 즐길 오락거리라고는 체육경기와 연극, 음악회 관람 수준으로 충분하지 않았으며, 그것도 일반 평민이 보고 싶다고 아무때나 볼 수 있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공개처형이 흥미로운 오락거리로 여겨진 탓도 있었다. 유럽인들은 극장에 가듯 처형장에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사형집행인의 이름과 그들이 어떻게 사형을 집행하는지 논의하며 아는 척하는 것이 매너로 여겨졌다. 중세 유럽에서 공개처형이 벌어지면,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즐겁게 구경을 하거나 도시락을 싸와서 처형을 관람하며 먹기도 하고, 심지어 사형수가 흘린 피에 빵을 적셔 먹거나 사형수를 다루는 데 사용된 못을 빼가면 행운이 온다는 미신도 있었다.

유럽에서는 교수대와 사형 도구를 가리켜 '마셴카 교수대', '여윈 표클라(사형용 도끼)', 같은 애칭으로 불렀다. 영국은 마셴카를 '리틀 메리'라고 불렀고, 사형용 도끼를 독일쾨니히스베르크에서는 '여윈 거트루트',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빠른 알베르트'라고 불렀다.

독일에서는 사형수를 목매달아 죽인 밧줄이 집안에 행복을 가져다 주고, 프랑스에서는 사형수의 손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해준다는 미신도 생겨났다(영광의 손 문서 참고). 1788년 영국에서는 사형당한 죄수에게 군중들이 달려들어 말 그대로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시신을 부위별로 나누어 가진 사건도 있었다. 운이 좋았던 어느 선술집 주인은 사형수의 머리를 가져가 썩은 냄새가 나기 직전까지 자신의 가게에 걸어놓고 손님들을 끌어 모았다.

프랑스 파리의 그레브 광장에서 벌어진 공개처형은 파리 시민들을 흥분시켰다. 그들은 사형 장면을 보면서 즐기고 노래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러시아 작가인 표트르 드미트리예비치 보보리킨은 1864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리에 반 년만 살면 알 것이다. '라 코케트' 감옥 근처에서 집행된 공개처형이 얼마나 잔혹한지! 이보다 더 잔혹한 장면은 상상할 수 없다. 호색가, 고급 매춘부와 퇴물, 바람둥이, 도둑, 도망간 유형수에 이르기까지 수천 명의 사람이 주변 술집에 모여 술에 취해 형편없는 노래를 불렀다. 새벽이 되어서야 사형수들이 매달려 있는 광장을 둘러싼 경비대쪽으로 다가가 이 소름끼치는 기구를 불렀다. 멀리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 매혹적인 구경거리를 기다리며 사형장에 있다는 기쁨으로 환호하며, 즐겁게 밤을 지새웠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교수대가 기요틴(거대한 칼날을 장착해 죄수의 목을 자르는 기계)으로 대체된 후, 프랑스인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재미가 없어졌다면서 다시 교수대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이런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나폴레옹 시대와 부르봉 왕조 시대 이후, 프랑스의 사형 집행 기구는 다시 교수대로 바뀌었다. 파리에서 최후의 공개처형은 제2차 세계 대전 바로 전에도 벌어졌다.

소련의 배우, 알렉산드르 베르틴스키는 그가 사랑하는 파리의 광장에서 군중들이 소리지르고 즐긴 공개처형 장소에 있었다. 사형장면을 본 알렉산드르는 그가 본 참혹한 광경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실만큼 사형을 저속하게 평가했다. 그의 오랜 팬이었던 연미복을 잘 차려 입은 어느 신사가 다가와서 술집에서 그를 만나 같이 술을 마셨다. 이 신사는 그에게 공개처형은 예술활동에 좋은 것이 아니니, 더 이상 그런 구경거리에 가지 말라고 부탁했다. 알고 보니 이 신사는 파리의 공식 사형집행인이었다.[1]

독립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공식적으로 공개처형 방식을 채택한 경우가 있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의 주범이자 국민방위군 사령관인 김윤근을 비롯해 총 8명을 공개적으로 총살했다. 보통 비공개되는 사형집행이 공개처형으로 바뀐 까닭은 김윤근이 국방부장관이던 신성모의 사위이며 이승만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므로 해외도주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체제 유지를 위한 공포감 조성을 목적으로 남녀노소 상관 없이 공개처형시키는 경우가 많다. 보통 머리, 가슴, 다리에 3발씩 총 9발을 쏘는 총살형으로 집행되며, 과거에는 교수형으로 집행하는 사례도 있었다. 90년대에는 공포조성용으로 무려 화형을 쓰기도 했고, 김정은 집권 초에도 몇몇 고위층들[2]고사총으로 처형했다. 북한은 그동안 자국의 공개처형을 부정해왔으나 2024년 11월 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보편적 인권 정례검토 회의에서 박광호 북한 중앙재판소 국장이 공개처형 제도를 인정했다.

3.1.1. 영국

계몽사상이 뚜렷하고 권력분립이 이루어진 시기(명예혁명 이후)의 영국에서는 창고 2개를 불지른 죄로 8세 소년을 사형시킨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구경하면서 노래하고 웃었다. 영국에서는 어린 아이가 손으로 사형수를 만지면 행복을 가져다 주고, 교수대의 나무조각을 빨거나 이쑤시개처럼 사용하면 치통을 막는 약이 된다는 미신도 널리 퍼져 있었다.

해적영화에 흔히 나오는 소품 중 해골이 갇혀있는 새장 모양의 작은 철창을 교수대같은 곳에 매달아 놓은 것이 있는데, 이는 본래 사형수의 시신을 본보기로 전시하는 것으로서 지빗팅(Gibbeting)이라고 부른다. 이는 1751년에 재정된 영국의 살인처벌법 Murder Act 1751에 의한 것이었는데, 살인자의 시신은 어떠한 경우에도 매장하지 않고 카데바로 사용하거나 방치할 것을 명시한 이 규정 때문에 1832년 마지막 집행때까지 많은 이들이 교차로나 수로 근처에서 썩어가는 시체 때문에 지독한 불편을 겪었다고 한다. 시체의 부패도 부패지만, 죄수를 살아있는 상태에서 철창에 집어넣고 매달았기 때문에 죄수가 살아있는 동안 온갖 절규를 해대는 통에 주변 주민들은 죄수가 죽을 때까지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문제까지 있었다.

19세기, 영국 상류사회의 신하들은 금요일이나 토요일마다 부인을 데리고 감옥으로 행차했다. 감옥에 갇힌 창녀들이 서로 대결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미리 좋은 좌석을 사 구경거리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잡아달라고 감옥소에 부탁까지 했다.

영국의 신사숙녀들은 이 흥미로운 행사에 다니면서 사형 집행인의 이름, 그들의 행동, 창녀들을 파악했다. 지난 경기, 또는 다른 창녀와 비교하거나 예전의 상처와 비교하는 일을 에티켓으로 삼았다.

1810년에서 1826년까지 영국 런던의 미들섹스 백작령에서만 2755명이 사형을 당했다. 미들섹스 백작령과 런던 전역에는 약 800만 명이 살았다. 3천명 당 한 명이 사형당한 것이다.

런던의 명소 중 하나가 사형대인데, 어떤 사형대에는 여러 높이의 기둥과 21개의 올가미가 있었다. 20세기 초까지 약 500년 동안 연속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3]

3.2. 참여형

군중들이 단순한 구경꾼에 머물지 않고, 공개처형에 참가하는 경우.
  • 투석형: 중동권에서 널리 행해지던 돌로 쳐 죽이는 형벌로, 군중들은 죄인에게 돌을 마구 집어던져 살해했다. 간음한 여인과 예수의 이야기가 이 형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담으로 무아마르 알 카다피의 경우 공개된 곳에서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돌 대신 총상을 입어 죽었고, 그 시체도 한때 정육점에 전시되는 모욕을 당했다.[4] 이탈리아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와 그의 아내는 게릴라에게 총살당한 직후 밀라노의 한 주유소에서 시체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거꾸로 매달렸다. 이 과정에서 분노한 시민들이 시체에게 침을 뱉거나 욕설을 하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거나 총을 쏘았다고 한다.

3.3. 부관참시

보복 차원에서 고인을 무덤에서 꺼내 시체를 공개처형 하는것.

상세한건 해당 문서 참고.

3.4. 중계형

비록 공개된 장소에서 형이 집행되지는 않지만,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등으로 실시간 중계되는 경우 공개처형에 포함된다. 대표적인 예가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이라크사담 후세인의 경우 몰래 찍은 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어 사실상의 중계형이 되고 말았다. 상당수는 불법이기 때문에 누가 찍어 유포했는지 발각될 경우 처벌된다.

4. 비유적 의미

자신의 부끄러운 비밀 또는 모습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공개처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개한 사람의 의도와는 별 관련이 없지만 대부분 쪽팔리라고 고의적으로 퍼트리는 것이 대부분. 예를 들어 숨기고 싶은 중2병 흑역사오타쿠 취미, 자뻑, 오글거리는 언행 등을 옛날 지인이 별 생각없이 현재의 주변인이 많은 모인데서 언급하거나 해서 강제로 덕밍아웃 당하는 일 등.

넷상에서도 키보드 배틀이 벌어질 때 상대방의 과거의 행적을 가지고 와서 "얘 이런놈임" 같은 식으로 공격하거나, 개인 쪽지가 날아온 것을 그대로 공개해 조리돌림 할 때 공개처형한다고 부른다. 가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으로 셀프 공개처형하는 경우도 있는 듯. 과거 행적을 파헤치는 데 능숙한 자는 저격수라고도 한다.

나무위키를 공개처형의 장으로 악용하기도 한다.

대부분 망신을 당하는 정도에서 그치므로 본래 의미의 공개처형과는 거리가 멀지만 경우에 따라 당사자가 우울장애에 시달리거나 자살까지 생각하기도 하는 등 예기치 못한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즉, 진짜로 사형에 가까운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마냥 가볍게 여길 것만은 아니다.


[1] 19세기 말 프랑스의 사형집행인들은 굉장한 지식인들이었다. 그 이유는 사형집행인이 갖춰야 할 자격 중 의사 면허가 포함돼 있었다고(...) 그래서인지 프랑스의 사형집행인들 중 사형제 폐지에 찬성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고 한다. 어차피 본업이 의사라 사형제 없어져도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기 때문.[2] 장성택은 확실히 아니다.[3] 블라디미르 메진스키, <러시아와 그 적들 그리고 거짓말>[4] 다만 이쪽은 공개처형이 의도되었던 건 아닌 게, 카다피의 시신을 명확히 확인하고 죽음을 알리는 한편 장기간에 걸쳐 부패되지 않도록 하고자 내린 결정이기 때문.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카다피의 죽음을 확인하고 정식 공표한 뒤 시신을 바로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