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1:34:39

칼리닌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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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닌그라드주의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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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8b76d><colcolor=#000> 설립 <colbgcolor=#fff,#010101> 1255년 9월 1일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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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파일:external/a2ua.com/kaliningrad-001.jpg
승리 광장[1]

1. 개요2. 명칭3. 역사4. 관광5. 교육6. 행사7. 칼리닌그라드주8. 독일과 칼리닌그라드9. 여담

[clearfix]

1. 개요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의 주도이자 발트해에 면한 항구 도시.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명칭인 쾨니히스베르크로도 잘 알려져 있다.

러시아 본토와는 떨어져 있는 월경지로서 북쪽과 동쪽으로는 리투아니아, 남쪽으로는 폴란드, 서쪽으로는 발트해와 접한다.

역사적으로는 독일을 최초로 통일한 독일 제국의 주역이자 전신이었던 프로이센 왕국의 두 주역 중 하나인 독일 기사단국-프로이센 공국의 수도였고,[2]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고향이며 동프로이센의 주도로 독일 역사에서 손꼽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러시아가 보유한 몇 안 되는 부동항이자 군사적 요충지로서 소련 시절 이곳은 비밀도시였다. 선박 관련 중공업이 발전했으며 그 외에도 어류 가공업 등의 경공업이 조금 있다. 또한 해군발트함대 사령부가 위치한다.

2. 명칭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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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cdcdc,#1f2023> 러시아어 Калинингра́д (Kaliningrád)
Кёнигсберг (Kjónigsberg)
독일어 Kaliningrad, Königsberg
폴란드어 Królewiec[3]
리투아니아어 Karaliaučius
영어 Kaliningrad }}}}}}}}}
과거 명칭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는 독일어로 '왕의 산'을 뜻한다. 발트 십자군 원정을 도운 보헤미아 왕국 국왕 오타카르 2세(1233-1278)를 기념하여 붙은 이름이다.[4]

한편 칼리닌그라드는 인명 유래 지명으로, '미하일 칼리닌의 도시'라는 뜻이다. 비슷하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폴란드 인민공화국에 할양된 동프로이센의 남부 지역 바르미아마주리주는 그나마 원래 이름을 폴란드어 표기와 발음으로 바꾼 경우가 많지만, 소련에 할양된 북부 동프로이센(칼리닌그라드주)만큼은 완전히 새로 지은 이름으로 바뀌었다.[5] 할양 초기처럼 쿄닉스베르크(Кёнигсберг)처럼 발음만 러시아어로 바꾸거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한때 러시아어인 페트로그라드(Петроград)로 불렀던 경우처럼 러시아어로 번역차용하여 '코롤레베츠(Королевец)' 식으로 부를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폴란드에서는 이 방식을 따라 크룰레비에츠(Królewiec)라 부른다.[6]

또한 러시아 본토 지명 중에서도 소련 공산당에서 유래된 명칭은 소련 붕괴 후 원복되곤 했으나(레닌그라드 →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탈린그라드 → 볼고그라드 등) 이 도시는 그러지 않았다. 원래 이름 없는 황무지였다가 소련 시절에 와서야 도시로 개발된 곳 정도나 소련식 명칭이 남아있는 것에 비하면 이례적이다. 똑같이 독일식 지명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수백 년 가까이 확고한 러시아 영토이니 독일식 명칭이어도 큰 부담이 없지만, 원래 독일 땅이었던 칼리닌그라드에서 독일의 흔적을 최대한 없애야 러시아가 이 땅을 계속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기존 독일어 지명이 문화재의 대외적인 이름에 남아있는 경우는 간혹 있다. 가령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은 지금도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이라고 한다.[7] 또한 수학 문제로 유명한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건너기 문제도 문제 자체가 고유명사화된 감이 있어 러시아에서도 그냥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문제(Задача о семи кёнигсбергских мостах)#라고 한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동유럽 전반에 반러 정서가 확산되면서 러시아어 지명을 지우는 국가들이 생기고 있다. 2023년 4월 12일에 개최된 폴란드의 대외지명표준화위원회 회의에서 폴란드어 표기를 크룰레비에츠(Królewiec)로 변경했고, 그 결과를 5월 9일에 발표했다.# 이에 따라서 구글 지도의 폴란드판에도 새로운 명칭이 반영되었다. 관련 자료. 그 과정에서 과거의 독일식 지명으로 환원되는 경우도 보이는데, 2023년 9월에는 에스토니아 의회에서 이 도시를 칼리닌그라드가 아닌 쾨니히스베르크로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3. 역사

3.1. 건설 초기

12세기 이전에는 서발트계 민족이 살던 지역이었지만 1255년 튜튼 기사단이 칼리닌그라드를 비롯한 발트해 연안을 정복하면서 독일인들이 대거 칼리닌그라드로 이주하고 발트계 종족들의 독일화가 진행되었다. 위에서 보듯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는 '왕의 산'이라는 뜻으로 튜튼 기사단에게 성의 건설 자금을 지원해 준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오타카르 2세[8]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다. 즉, 초기의 쾨니히스베르크는 북방 십자군의 전진 기지 역할을 했던 쾨니히스베르크 성을 기반으로 발달한 군사도시였다.

본디 독일 기사단국의 수도는 마리엔부르크였으나 1454년 폴란드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수도 마리엔부르크를 폴란드에 내주며 쾨니히스베르크가 기사단국의 새 수도로 선정되었다. 이후 1525년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에 의해 세속화되어 프로이센 공국으로 전환된 후에도 이곳에 수도를 두었다.

1618년 호엔촐레른 가문의 방계가 다스리던 프로이센 공국이 요한 지기스문트[9]가 통치하던 직계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통합되면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수도는 브란덴부르크의 수도 베를린으로 정해졌고, 쾨니히스베르크는 160여 년간 이어오던 프로이센 수도의 지위를 상실했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인되었을 때도 수도는 여전히 베를린이었다.

다만 이와 관련하여 '독일의 오랜 수도인 쾨니히스베르크가 영광을 잃고 베를린으로 그 권세가 넘어갔다' 식으로 생각하곤 하나 이는 명칭에 이끌린 오해이다. 독일 통일을 주도한 프로이센 왕국의 실질적 거점은 원래부터 쾨니히스베르크가 있는 동프로이센이 아니라 베를린이 있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었다. '프로이센'이란 이름을 쓰게 된 것은 프로이센이 유럽의 완전 변두리여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과는 상관없는 별개의 왕 칭호를 얻기 위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프로이센은 호엔촐레른 가문이 국왕을 칭하기 위해 이름만 빌려준 입지였다. 베를린이 수도가 된 것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다스리는 호엔촐레른 가문 직계의 중심지가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프로이센 국왕들 중에서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대관식을 치른 국왕은 프리드리히 1세빌헬름 1세 뿐이었고 다른 국왕들은 생략했다. 7년 전쟁 중이었던 1757년부터 1763년 사이에는 러시아 제국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대왕동프로이센은 전쟁 나면 내다 버리고 브란덴부르크, 슐레지엔이나 제대로 지키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3.2. 독일쾨니히스베르크 시절

파일:attachment/b0013361_4ce5ed0e0174e.jpg파일:attachment/b0013361_4ce5ebe5bb38a.png
쾨니히스베르크 시 문장 현 칼리닌그라드 시 문장
1806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수도 베를린을 함락당했을 때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쾨니히스베르크로 임시 천도하여 이곳에서 프랑스군에 항전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K%C3%B6nigsberg_Castle.jpg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쾨니히스베르크 성
파일:Konigsberg_Nordbannhof-colorized.jpg
쾨니히스베르크 북역 앞 모습(컬러화)

1945년까지 프로이센의 국가기록원(Preußisches Staatsarchiv Königsberg)이 있었을 정도로 독일 제국 시대에는 베를린, 포츠담, 호엔촐레른과 더불어 위상은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도시의 상징성과는 별개로 19세기 당시 루르 공업 지대로 대표되는 독일 서부 지역이 고도의 산업화를 달성한 반면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동부의 구 프로이센 지역은 융커 위주의 낙후된 농업 경제에 머물렀기 때문에 도시의 위상이 18세기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락했다.

발트해와 폴란드를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많은 예비 병력들의 발이 묶였다.프리드리히 대왕의 말을 들었어야지 [10]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에도 차라리 다른 곳을 내줄지언정 동프로이센을 포기하지는 않았고, 단치히 회랑을 내주면서 독일 본토와 분리되었지만 이 지역은 계속 독일령으로 남았다.[11]
1928년의 동프로이센 지역. 쾨니히스베르크 시가지 모습
1942년 당시 쾨니히스베르크를 소개하는 영상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초반 폴란드단치히나치 독일에 점령당하면서 다시 독일 본토와의 육상 통로가 연결되었으나 몇 년 지나지 않아 1945년 독소전쟁에서 동프로이센 공세를 통해 소련이 독일을 밀어내고 도시를 점령하며 700년 가까이 이어지던 독일 시대는 종식되었다.[12] 1945년 4월 9일 쾨니히스베르크가 함락당했고 4월 25일 소련이 동프로이센 전 지역을 완전히 차지했는데 이 무렵이면 이미 소련군이 훨씬 서쪽까지 진격해서 베를린 공방전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독일 동부를 점령하며 베를린 목전까지 소련군이 진격한 시점에 정작 소련 본토와 훨씬 가까웠던 쾨니히스베르크가 아직 소련군에 넘어가지 않았을 만큼 이 도시는 독일에 있어 의미가 정말 남달랐으며 독일 국방군도 이곳 만큼은 끝까지 사수하려 하였다.[13]

쾨니히스베르크는 독일 학문의 메카였고 수많은 학자들이 이 도시에 거주했다. 특히 이곳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저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이다. 칸트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생전에 이 도시의 반경 150km 밖으로 나간 적이 없고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오데르-나이세 선 이서로 강제된 현 독일 영토를 밟은 적이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역사는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동프로이센 공세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3.3. 냉전

제2차 세계 대전 패전과 함께 독일인은 추방되거나 사망했고, 대신 러시아인이 대거 이주해 들어왔다. 1945년 이 지역은 소련의 최대 구성국인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946년 4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속 쿄닉스베르크주(Кёнигсбергская область)가 설치되었으며 도시 이름도 쿄닉스베르크(Кёнигсберг)였으나,[14] 동년 7월 미하일 칼리닌(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이 사망한 후, 도시와 주 모두 그의 이름을 따 칼리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 칼리닌그라드주 내의 모든 역사적 독일어 지명은 오늘날의 러시아어 지명으로 바뀌었다. 예를 들면 인스터부르크(Insterburg)는 체르냐홉스크(Черняхо́вск), 굼비넨(Gumbinnen)은 구세프(Гу́сев), 틸지트(Tilsit)는 소베츠크(Сове́тск)로 개명되었다.

소련의 서단에 위치한 이 지역은 냉전 시대에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했던 비밀도시였다.

3.4. 현재

이후 소련이 해체되고 리투아니아·라트비아·벨라루스가 독립한 후 칼리닌그라드주는 러시아의 일부로 남아 본토와 떨어진 기묘한 존재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러시아 본토와 칼리닌그라드를 국내선 항공으로 이동하면 상관없지만 육로로 오가려면 리투아니아·라트비아 또는 리투아니아·벨라루스를 거쳐야 한다. 소련 시절에도 러시아의 월경지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당시에는 소련 안에 있는 행정구역들 중의 월경지였으므로, 주권국가 소련 전체로 봤을 땐 월경지가 아니었고, 지금의 리투아니아 땅을 거치는 국내 이동도 자유로웠는데 이제는 러시아·리투아니아·라트비아·벨라루스가 각각 독립국이 되어서 미묘해졌다. 그만큼 칼리닌그라드의 경제 상황은 좋지 못하다.

폴란드는 2012~2016년까지 칼리닌그라드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한해서 폴란드 국경지대를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게 허용해 주었었다.

3.4.1. 2004년 폴란드, 리투아니아 EU 가입

소련 해체 직후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따로 조치를 취해 칼리닌그라드 주민들은 비자 없이 폴란드나 리투아니아를 경유해 러시아 본토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두 나라가 2004년 EU에 가입해 솅겐 협정의 적용을 받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솅겐 지역과 러시아는 예나 지금이나 상호 무비자가 적용되지 않아, 칼리닌그라드와 러시아 본토 주민들은 왕래할 때마다 경유 국가인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의 입국 비자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에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EU 가입 뒤에도 칼리닌그라드 주민들에 대한 통행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EU는 불법 입국자와 범죄 행위를 막기 위해서 비자 발급이 불가피하다고 맞섰다.

당시 이 문제를 취재한 “모스크바 타임즈”에 의하면 2001년 8백여 만 명의 사람들이 칼리닌그라드 국경을 오갔지만, 비자가 필요해질 경우 매년 폴란드, 리투아니아 영사관에서 비자를 발급할 수 있는 수량은 20만 장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게다가 당시 95만 명에 이르는 칼리닌그라드 주 주민의 4분의 1 이상이 아직도 구 소련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연합 측의 “새로운 비자 체계는 요금 면에서 더 싸고, 발급 절차도 기존보다 간편하고 신속하게 처리할 것이며, 또한 옵션으로 장기간의 복수비자와 혁신적인 플라스틱 신분증 제도 등을 제공할 것”이라는 절충안을 냈다.

그럼에도 한동안 러시아는 비자 발급 의무화 요구에 부동자세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칼리닌그라드의 자유통행권 보장을 역설했다. 푸틴 대통령뿐 아니라 당시 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드미트리 로고진도 “일부 리투아니아 보수 정당에서 칼리닌그라드를 유럽에 편입시키자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이는 비록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러시아에 비우호적인 자세”라고 말하며 다시 한 번 칼리닌그라드의 유럽연합으로의 통합 움직임 가능성을 우려했다.

협상 당시 칼리닌그라드 주지사 라디미르 예고로프는 칼리닌그라드 내에서도 옛 영토인 독일로 복귀하자는 분리주의 정서가 나타나고 있는 데 대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5만 명이나 되는 소련군 병사들이 이곳에서 희생됐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며 여론 수습에 나섰다.

결국 칼리닌그라드에서 러시아 본토까지 육로로 이동할 때 간이 통행증을 발급받는 조건으로 합의되었다. 비자와 간이 통행증은 발급 난이도와 수수료에 차이가 있다. 비자는 말 그대로 다른 EU 국가들로 가는 비자와 동일하게 취급되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발급을 못 받을 수도 있으나, 간이 통행증은 육로로 24시간(철도로 6시간) 내에 통과한다는 조건으로 쉽게 내준다. 수수료도 일반 육로용은 5유로, 철도 통과 전용은 무료이며, 육로용 간이 통행증은 리투아니아 대사관을 방문해야 하지만 철도용 간이 통행증은 기차표 예약과 동시에 신청할 수 있다.

3.4.2.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벌어진 이후, 러시아군이 퇴각한 지역에서 엄청난 규모의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각종 잔혹행위가 잇따라 확인되면서 2022년 4월 4일, 칼리닌그라드와 접경한 폴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4개 국가는 러시아벨라루스와 통하는 모든 국경과 통신선을 48~72시간 안에 차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조치로 인해 월경지인 칼리닌그라드주는 해로와 공로를 제외하고는 본토와 완전히 단절되었다. 러시아는 이에 대해서 특히 수바우키 회랑 차단에 적극적인 리투아니아에 대해 보복이 있을 수 있다고 협박하고 있는 상태다.#

칼리닌그라드~본토 간 열차는 계속 운행하는데 리투아니아 내 여객취급을 중단하고 통과만 하는 것으로 보인다.[15]

4. 관광

2014년부터 한국인들이 러시아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게 되면서, 동유럽을 여행할 때 쉽게 들를 수 있게 되었다.[16] 폴란드 북부 그단스크나 리투아니아에서 정기 국제 버스를 이용하여 입국할 수 있는데, 입국 심사가 무슨 이스라엘만큼 빡세다. 만약 육로로 여행할 계획이라면, 운이 좋으면 그냥 빨리 끝날 수도 있지만 일단 폴란드에서 칼리닌그라드로 입국할 때 1시간, 다시 칼리닌그라드에서 폴란드로 들어갈 때 4시간 정도를 출입국 심사에 희생할 각오를 해두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돈은 러시아 루블을 쓰고 물가는 러시아 영역이라 서유럽보단 저렴한 편. 영문 안내 등 관광 인프라는 아직 부실하다.

볼거리는 구 쾨니히스베르크 시청이나 쾨니히스베르크 성당, 호박 박물관, 증권거래소, 쾨니히스토르(왕문), 칸트 동상 등 프로이센 시절의 주요 유적들이다. 독일인들이 비록 러시아에 넘겨준 땅이지만 프로이센 시절의 유물 유지보수에 꾸준히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 비록 독일이 영토 자체는 포기했을지언정,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 만큼은 남기길 원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건너기 문제의 그 다리도 걸어볼 수 있다. 이젠 5개 밖에 안 남았지만.

5. 교육

프로이센 공국 시절 세워졌던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의 후신인 임마누엘 칸트 발틱 연방대학교(IKBFU)가 있다. 칸트의 출신 대학답게 철학 연구가 유명하고 외국 대학과의 국제 교류가 활발하다. 그밖에 KSTU(칼리닌그라드 국립 공과 대학교) 등 몇 개의 대학이 있다.

6. 행사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의 개최도시들 중 하나다. 러시아 본토도 월드컵 경기와 무관한 지역이 널려 있는데 굳이 본토와 떨어진 이 곳을 개최지로 정했다는 점에서, 이 참에 분리주의 및 독일로의 귀속설 등을 가라앉히려는 행동으로 해석하는 반응이 많았다. 그래서 현지의 분리주의자들이 러시아 월드컵 보이콧을 부르짖기도 했다. 칼리닌그라드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독일전 조별리그는 없었고, 16강 이후로는 독일전 자체가 없었다. 심지어 토너먼트 경기도 칼리닌그라드에선 열리지 않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 곳에 오지 못했다.

2019년 10월 18일에 칼리닌그라드에서 러시아와 독일의 다큐멘터리 영화제가 개최되었다.#(러시아어)

7. 칼리닌그라드주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칼리닌그라드 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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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alinin.png
칼리닌그라드 시와 그 주변부의 지역으로 구성된 주이다.

8. 독일과 칼리닌그라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Kingsgate.jpg
쾨니히스토어(Königstor)
  • 환수 노력과 포기
    사실 나치 독일만 아니었어도 잃지 않았을, 명실상부한 독일의 고유 영토라고 할 수 있다.[17] 패전국들이 온갖 영토를 다 뜯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괜히 안 뜯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서독동독과의 통일을 앞두고 결국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독일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도시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잃어버린 국제적 신뢰를 회복해야 했고 또한 오데르-나이세 선과 이 일대를 러시아령으로 인정하지 않을 경우 동서독과의 통일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영유권 주장을 과감히 포기했다.

    게다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옛 독일 동부를 폴란드러시아에 할양했는데 이 지역은 위치상 독일에서도 육상으로 직접 접근할 수 없으며[18], 동프로이센의 남부 지역은 폴란드 영토가 된 지 오래인데 만일 이 곳을 되찾으면 다음 순서는 동프로이센의 남부 지역, 슐레지엔, 힌터포메른 등 폴란드 내 구 독일령도 위태해지기 때문에 폴란드가 독일의 통일을 방해할 충분한 사유가 된다. 당장 2차 대전 개전도 비슷한 일(단치히 회랑 문제) 때문에 벌어져서 폴란드가 멸망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 파괴된 건물
    쾨니히스베르크 시절의 고건축물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의 시가전 및 영국, 소련군의 폭격으로 상당수 파괴되었다.

    랜드마크였던 쾨니히스베르크 성 역시 이때 복구조차 불가능할 만큼 치명적으로 무너졌다. 하지만 성 내부는 크게 불탔어도 외벽은 비교적 튼튼했던 탓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남은 잔해마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지시로 프로이센 군국주의 잔해를 없앤다는 명목 아래 1968년 철거되었다. 칼리닌그라드의 학생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도시의 주요 문화재인 쾨니히스베르크 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지만 서기장의 의지를 거역할 순 없었고 결국 철거는 강행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K%C3%B6nigsberg_Castle.jpg파일:800px-Dom_sovetov.jpg

    쾨니히스베르크 성 하우스 오브 소비에트

    그 자리에 1970년대부터 '하우스 오브 소비에트'(House of Soviets, Дом Советов)라는 건물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봇이 머리만 내밀고 있는 문어 머리 같은 디자인으로 혹평을 받았고, 지반 문제로 건설이 지연되더니 1985년부터 공사가 중단된 폐건물로 남았다. 마치 칼리닌그라드판 류경호텔이 되고 만 셈이다. 애초에 쾨니히스베르크 성 자리가 원래 늪이라 큰 규모의 건물을 세우기에는 지반이 약했던 탓도 있고, 쾨니히스베르크 성 지하의 터널이 무너지는 바람에 지반이 급격히 약해져서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현지 주민들은 이를 두고 '프로이센인의 복수'라고 불렀다.

    이후 겉에만 페인트 칠과 창문 설치를 해놓고 내부 공사는 중단된 상태로 한동안 있다가 2023년 5월 18일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로 철거가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쾨니히스베르크 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다시 이루어지고 있고, 성의 복원도 물리적으로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쾨니히스베르크 성처럼 잔해만 남았던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도 철거 예정이었지만 칼리닌그라드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의 반대와 독일 기업들의 제의로 재건되었다. 현지 거주 독일인들이야 숫자가 얼마 안 되고 가난한 편이니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독일 기업들의 제의를 무시하기에는 제의에 따라오는 조건이 좋았다.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의 정보와 설계도를 러시아에 넘긴 것도 다름 아닌 독일 정부였고 독일 기업들이 재건에 크게 관여했다.

    다만 외관은 비슷하게 재건했지만 내부는 거의 러시아 정교회에 가깝게 바뀌었다. 과거 독일 시절에는 프로이센 공국의 창립자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 그 외 역대 튜튼 기사단장들의 무덤이 남아있었으나 전쟁으로 다 파괴되어 현재는 알브레히트 공작의 세노타프(Cenotaph)만 복원되었다.
  • 여전히 남은 건물들
    구 쾨니히스베르크 역(Königsberg (Pr) Hauptbahnhof (Bahnhof Königsberg (Pr) Hbf) / Калининград-Пассажирский)이나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Der Königsberger Dom), 십자가교회(Die Kreuzkirche (Königsberg)), 증권거래소(Die Neue Börse (Kaliningrad)), 쾨니히스토어, 칸트 동상(Kantdenkmal) 등 프로이센 시절의 주요 건물들도 여전히 군데군데 잘 남아있고 특히 쾨니히스토어에는 프로이센의 상징인 검독수리 문양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 독일식 이름을 쓰는 것들
    칼리닌그라드의 대표 맥주 오스트마르크는 쾨니히스베르크 시절 맥주 브랜드명과 독일식 맥주순수령에 따른 레시피 그대로 부활하여 절찬리에 현지에서 판매한다.

    또한 동프로이센 지역을 대표하던 대학인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역시 소련의 점령 이후 폐교됐다가 칼리닌그라드 대학교로 재개교했고 2005년 대학의 유명 동문인 칸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 임마누엘 칸트 발틱 연방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독일령 시절 이 도시를 연고지로 삼던 유명 축구 구단으로 VfB 쾨니히스베르크가 있었으나, 이곳이 소련에 넘어가면서 이 구단도 해체되었다. 현재 칼리닌그라드를 연고지로 삼는 축구 구단으로 1954년 창단된 FC 발티카 칼리닌그라드가 있으나, 당연히 VfB 쾨니히스베르크와의 연관이 없다. 슈트라스부르크를 연고지로 삼던 FC 노이도르프는 이름만 바꿔서 프랑스 구단으로 존속 중이지만, VfB 쾨니히스베르크는 독일계 주민들 자체가 대부분 추방되었으므로[19] 구단을 해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지역을 대표했던 음식으로는 미트볼 요리인 쾨니히스베르거 클롭세#레시피(영문)가 있는데, 현재는 독일 본토로 추방된 실향민들을 중심으로 독일 전역에 퍼져있다. 갈아놓은 고기(돼지고기와 소고기를 섞는다.)와 계란과 향료에 유럽 멸치를 섞어서 반죽하고 소금물에 삶아 크림 소스를 뿌려 내오는 식. 삶은 감자도 곁들여진다. 러시아계 이주민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오늘날의 칼리닌그라드에서도 칼리닌그라드 분리주의자들과 극소수 잔류하고 있는 독일계 주민들이 러시아 본토와 다른 칼리닌그라드만의 독자성(독일풍)을 강조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 쾨니히스베르거 클롭세를 먹는 이들이 존재한다.

    현 공식 지명은 칼리닌그라드이지만 여전히 과거 러시아어 지명 쿄닉스베르크(Кёнигсберг)의 약칭 쿄닉·쿄니크(Кёниг)로도 통용되며 지금도 이 지역의 여행사들이 이 약칭을 많이 이용한다.
  • 기타
    독일인들이 이 시절 유적의 유지, 보수 및 고향 방문 등의 목적으로 적잖게 칼리닌그라드에 방문하며, BMW 공장이나 영사관을 설치하는 등 이 지역에 공을 들이는 중이다. 다만 1994년부터 운영하던 독일 총영사관은 독일-러시아 관계가 냉랭해지면서 2023년 12월 폐쇄되었다.[20]

9. 여담

  •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 땅을 이에 인접한 소련 구성국인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하려고 했으나 리투아니아의 공산당 지도자 안타나스 스녜츠쿠스(Antanas Sniečkus)가 거절해서 무산되었다는 설이 있다.
    사실 러시아에 소속되는 것보다는 (독일에 줄 게 아니라면) 리투아니아 소속인 것이 더 역사적 명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칼리닌그라드가 튜튼 기사단에 정복되기 이전에는 고대 프로이센인 같은 발트족의 땅이었고 프로이센 공국도 상당기간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러시아가 점령한 것은 고작 7년 전쟁이랑 제1차 세계 대전 초반 일시적으로 점령한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곳을 합병하면 리투아니아 인구 가운데 러시아계의 비율이 너무 높아져 버리는 상황을 꺼려서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에 칼리닌그라드는 독일인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군인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계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들 러시아인들이 발트 3국 주류 민족과 불편한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건 당시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흐루쇼프에 의해 크림 반도를 넘겨받았던 우크라이나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사태를 겪은 것을 볼 때,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발트 3국에서는 이곳이 아니어도 다른 지역에서도 러시아인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1] Площадь Победы(Ploshchad' Pobedy). 영어로는 Victory Square라고 치면 나온다.[2] 나머지 한 주역은 프로이센 왕국의 본체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다.[3] 쾨니히스베르크를 폴란드어로 번역할 경우 크룰레비에츠(Królewiec).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Królewiec Oblast로 바꾸었다.[4] 보헤미아 왕국은 현대 체코의 전신격 국가로 체코의 역사로 이어진다. 쾨니히스베르크가 오랜 시절 독일 도시였으니 은연 중에 독일왕의 이름을 땄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외로 체코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다만 보헤미아 국왕은 비록 독일인은 아니긴 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선제후로서 황제선거에 참석할 권리가 있는 중요한 입지에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섞여 지내온 독일인체코인관계를 잘 보여준다.[5] 리투아니아에 할양된 메멜(Memel) 역시 클라이페다라는 완전히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 다만 클라이페다(Klaipėda)라는 이름은 리투아니아에서 15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절부터 사용한 역사적 지명이다.[6] 폴란드어와 러시아어는 같은 동슬라브어 계열에 속하므로 상당수 어근을 공유한다.[7] 현재는 교도소로 쓰이는 그바르데이스크의 타피아우 성 역시 비슷한 예이다.[8] 신성 로마 제국대공위 시대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와 독일왕위를 놓고 대립하다가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패해 살해당하였다.[9]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의 손녀사위이기도 했다. 프로이센 공국을 노렸던 선조 요아힘 2세 헥토어 선제후의 근친혼 정책에 따라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장녀 안나와 결혼했고,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끝내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프로이센 공국을 물려받았다.[10] 동프로이센 출신 융커들이 많아 독일 제국군이 이곳에 묶여있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 아니다. 실제 독일 제국의 융커는 브란덴부르크, 포메른 출신이 대다수였다. 동프로이센 출신 융커들은 250년 전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에게 전부 진압당해 독일 제국 시기에는 오히려 씨가 말랐다.[11] 대신 항구 지역인 메멜란트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에 할양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약 500년간 프로이센의 일부였으며 차별 대우도 없었기 때문에 주민들 대부분이 자신을 리투아니아계 독일인으로 생각했으며 동족들의 국가에 통합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12] 사실 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 대한 야욕은 굉장히 오래되었다. 이곳이 러시아 본토에서도 무척 가까웠을 뿐 아니라 라이벌 프로이센-독일에 있어 상징성 높은 고도로서 승전 시 전리품으로 적합했기 때문이다. 7년 전쟁 당시에도 잠시동안 병합한 적이 있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서프로이센, 포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갈리치아와 더불어 러시아 제국의 합병 목표였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 후 합병은 이 오랜 숙원이 성취된 셈이다.[13] 상술했듯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동프로이센 대신 본토와 가까운 서프로이센을 포기한 이유도 바로 이 쾨니히스베르크 때문이었으며 결국 서프로이센의 상실로 인한 영토 단절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4] 러시아어에는 한국어에 있는 외래어 표기법 비슷하게 외래어를 옮기는 규칙이 있는데, 이 규칙에 따라 독일어를 러시아어로 비슷하게 옮긴 게 쿄닉스베르크(Кёнигсберг/ˈkʲɵnʲɪɡzbɛrk/)이다. 지금도 이를 줄인 '쿄닉(쿄니크)'이라는 별명이 여행사 등에서 사용된다.[15] 재밌는 점은 냉전 시기 이와 비슷한 일이 분단 시절 베를린에서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베를린 S반베를린 U반 중 기종점은 서베를린에 위치하나 중간에 동베를린을 지나는 구간이 있는 노선은 해당 구간을 무정차하는 식으로 운행했으며 동서독 통일 이후 이런 운행은 사라졌다.[16] 종전에는 러시아 본토를 안 가고 동유럽 여행 중 여기만 지나간다고 해도 비싼 러시아 비자를 시간 들여 받아야 했기 때문에, 어떤 동기가 있어서 반드시 여기를 가야만 한다는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 여행자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받았다.[17]폴란드 영토인 서프로이센 일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문서에서 보듯 서로 왔다갔다한 역사가 꽤 많기에 어느 국가의 소속임을 따지는 게 거의 무의미해졌다. 그러나 쾨니히스베르크가 있는 동프로이센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만큼이나 오래 전부터 독일인의 역사를 지닌 곳으로 그런 불명확함은 없다. 쾨니히스베르크가 독일인의 도시가 된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그 당시 유럽에는 개별 정치체조차 없던 민족들이 태반이었다.[18] 독일에서 육상으로 접근하려면 폴란드를 경유해서 가야 한다.[19] 2020년 기준으로 독일계 인구가 아직 2천여명 남아있긴 하지만, 40만에 가까운 칼리닌그라드 전체 인구의 0.4%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과거 독일인들의 후손들과 독일계 소련인들을 합친 수치다.[20] 인테르팍스의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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