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01 23:06:23

루돌프 1세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하영웅전설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루돌프 폰 골덴바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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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dolf I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
생몰년도 1218년 5월 1일 ~ 1291년 7월 15일
출생지 독일 자스바흐 암 카이저슈툴
사망지 독일 슈파이어
재위기간 신성 로마 제국로마왕 1273년 9월 29일 ~ 1291년 7월 15일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최초로 신성 로마 제국독일왕에 오름으로써 앞으로 가문이 유럽에 맹위를 떨치게 한 인물

2. 생애

루돌프 1세는 1218년 독일 자스바흐 암 카이저슈툴 인근의 림부르크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합스부르크 백작의 지위에 있는 알브레히트 4세였으며 어머니는 키부르크 백작인 울리히의 딸 헤드비히였다. 루돌프 1세는 123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알자스의 북부와 브라이스가우, 아르가우에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모두 상속받았다.

루돌프 1세는 1245년, 27세 때 호엔베르크 백작인 부르카르트 3세의 딸 게르트루데와 결혼하였다. 이로써 루돌프 1세는 대대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거지였던 슈바벤 지방에서 가장 막강한 영주가 되었다.

독일은 오래 전부터 여러 봉건 군주들의 분규로 혼돈에 있었지만 루돌프 1세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루돌프 1세는 그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영지를 확장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막강한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대가 끊기자 그들의 영지를 차지하였다. 슈타우펜 왕조라고도 불리는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인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하인리히 6세,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루돌프 1세가 그러한 프리드리히 2세의 총애를 받아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받았다는 것은 비록 가문은 달랐지만 루돌프 1세로서 장래에 환한 희망이 보이는 대단한 일이었다.

루돌프 1세의 대부였던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 왕이면서 동시에 이탈리아 왕과 부르고뉴의 왕을 겸직하고 있었다. 루돌프 1세는 어린 시절부터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전을 자주 찾아가서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나중에 루돌프 1세는 합스부르크 백작으로서 할아버지인 독일왕 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아들인 콘라트 4세에게 철저하게 충성하였다. 이로 인하여 루돌프 1세는 여러 영토를 하사받았다.

프리드리히 2세의 뒤를 이어 독일 왕에 즉위한 콘라트 4세시칠리아 왕국을 장악하였으며 계속하여 북부 이탈리아, 특히 그 중에서 롬바르디아 왕국을 자신의 영역에 넣고자 했다. 당시 북부 이탈리아의 독일 접경 지역에는 교황이 지배하는 교황령이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콘라트 4세의 이탈리아 정책에 상당한 위협을 느껴 콘라트 4세를 견제하고 경계하였다. 하지만 루돌프 1세가 합스부르크 가문을 대표하여 콘라트 4세이탈리아 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나서자, 교황은 독일 왕과 그에게 충성하고 있는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가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교황령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프리드리히 2세, 콘라트 4세, 루돌프 1세를 파문하였다.

이로써 프리드리히 2세와 콘라트 4세는 독일왕일 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차지하지 못했으며 나중에 루돌프 1세가 독일왕으로 선출된 뒤에도 교황과 화해와 협약을 맺은 후에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루돌프 1세의 출세가도에 부인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루돌프 1세의 부인인 게르트루데는 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다. 게르트루데의 아버지인 키부르크 백작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삼촌인 하르트만 6세가 키부르크의 백작의 지위를 승계하였다. 그러나 하르트만 6세도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게르트루데가 적법한 상속자가 되어 키부르크의 영토를 모두 물려받았다. 게르트루데의 키부르크 영토는 결론적으로 결혼을 통해 루돌프 1세의 소유가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루돌프 1세는 슈트라스부르크와 바젤의 영지를 관할하던 추기경들과 가문의 명예를 건 영토투쟁을 벌여 성공함으로서 이들의 영지까지 흡수하였다. 이로써 루돌프 1세는 아버지인 알브레히트 4세로부터 물려받은 현재의 알사스 지역과 스위시 상당 지역의 영토를 합하여 막강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루돌프 1세는 명예와 부로서 유럽에서 무시 못할 당당한 존재가 되었다.

1273년 9월, 선제후인 콘월 왕 리처드가 세상을 떠나자 독일의 군주들은 새로운 독일 왕을 선출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에 모였다. 루돌프 1세는 자신이 독일 왕에 선출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루돌프 1세는 당시 55세였다. 그런 그가 신임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실제로 몇 명의 강력한 후보들이 있었다. 가장 막강한 후보는 보헤미아 왕인 오타카르 2세[1]였다. 오타카르 2세는 독일 왕이었던 필립의 외손자[2]였다. 더구나 오타카르 2세는 현직 보헤미아 왕이었으므로 동맹들이 많아 상당히 유력하였다. 오타카르가 왕에 오르는 것을 방지하고 루돌프 1세를 독일 왕으로 선출되도록 하기 위해 루돌프와 처남인 호엔촐레른 가의 프리드리히 3세가 발 벗고 나서서 지원하였다. 이와 함께 루돌프 1세 자신도 기왕에 후보에 들어가 있으므로 확실히 하기 위해 영향력 있는 라인-팔츠 백작 겸 니더바이에른 공작인 루트비히 2세와 작센-비텐베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2세를 자기의 사위로 맞아들이는 결혼 작전을 펼쳐 이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였다. 또 다른 후보자는 마이센의 프리드리히였다. 파문당한 프리드리히 2세의 손자였다. 그러나 마이센의 프리드리히는 아직 영지가 없었기 때문에 세력이 미약했다.

결국 독일 왕에 선출된 루돌프 1세는 1273년 10월 24일에 아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장엄하고 화려한 대관식이었다. 각지의 영주들과 제후들이 모두 참석하여 루돌프 1세의 대관을 치하하였다. 훗날 프리드리히 쉴러는 ‘합스부르크의 백작’이라는 소설을 통해 루돌프 1세의 대관식 이후에 벌어진 축제에 대하여 찬양의 글을 썼다. 독일 왕으로 즉위한 루돌프 1세는 자기를 파문한 교황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사면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루돌프 1세는 로마를 포함하여 교황청 영지, 그리고 시칠리아에 대한 독일 제국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다. 또한 루돌프 1세는 또한 교황의 의중을 존중하여 십자군을 일으키겠다고 약속했다. 루돌프 1세가 자기에게 순종한다고 믿은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루돌프 1세를 정당한 독일 왕으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루돌프 1세의 선출에 불복하고 있던 오타카르 2세를 설득하여 더 이상 항의하지 못하도록 했다.

1274년 11월, 제국 의회는 뉘른베르크에서 회의를 가지고 프리드리히 2세가 세상을 떠난 이후 제후들이 다투어서 차지한 영토들을 원상복구시키도록 결정했다. 이와 함께 제국 의회는 보헤미아오타카르가 독일 왕 루돌프 1세에게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복종하도록 결정하였다. 오타카르는 프리드리히 2세의 사후, 자기의 첫 번째 부인이 바벤베르크 가문의 후계자임을 내세워 또 다른 바벤베르크의 후계자인 바덴의 헤르만 6세와 분규를 일으켜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카르니올라 지방들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었다. 이에 루돌프 1세는 오타카르가 바벤베르크 가문의 세습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내세우고 오타카르가 추가로 획득한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카르니올라의 4개 지방 영토를 당연히 독일 왕에게 돌려주라고 선언했다.

오타카르가 이에 불복하자 루돌프 1세는 4개 영토에 대한 오타카르의 지위를 전부 박탈했다. 이에 오타카르가 크게 반발하자 루돌프 1세는 1276년 6월 오타카르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했다. 루돌프 1세는 오타카르의 편에 있던 남부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1세를 설득하여 자기편으로 만든 후 전쟁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몇 달 후에 루돌프 1세는 오타카르가 소유하던 4개 지방을 독일 왕의 소유로 만들었다. 다만 오타카르에게는 보헤미아 왕을 계속 맡도록 하고 다시는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자기의 딸을 오타카르의 아들인 벤체슬라스와 결혼토록 했다.

이어 루돌프 1세는 빈에 당당하게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여 몇 년동안 머물면서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카르니올라에 대한 영향력을 다지기 시작했다. 허나 영지를 내주기로 약속한 오타카르가 결국 반발하여 약속을 뒤집고 결혼도 무효가되자 다시 병력을 소집하여 오타카르와 전쟁을 치뤘고 헝가리왕 라슬로4세와 동맹을 맺은 뒤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오타카르를 패사시키고 오스트리아 변경백령을 완전히 합병하였다.

루돌프 1세는 오스트리아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소유로 만들며 아울러 오스트리아의 주위에 있는 슈타이어마르크 역시 합스부르크의 소유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케른텐 등의 반발이 의외로 심심치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루돌프 1세는 1282년 아들들인 알브레히트와 루돌프에게 각각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의 통치를 맡김으로서 일단 독일 제국의 동부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반을 다져놓았다. 루돌프 1세는 아들인 12세의 루돌프를 콘라트 4세의 사후 통치자가 없던 슈바벤의 대공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슈봐비아도 완전히 루돌프 1세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한편, 27세의 장남 알브레히트는 티롤의 마인하르트 백작의 딸과 결혼하여 티롤까지 합스부르크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만들었다. 이어 루돌프 1세는 1286년 케른텐을 완전히 장악하여 큰 아들 알베르트의 장인이 되는 마인하르트 백작에게 케른텐의 통치를 맡겼다. 제국의 제후들은 루돌프 1세가 원상복귀한 영토들을 자기의 아들들과 측근에게만 통치토록 맡기는 것을 반대하였다. 루돌프 1세는 군주들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루돌프 1세는 눈을 서쪽으로 돌려 팔라타인 부르군디 백작인 필립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보토록 강요했다. 필립은 이를 거부하였다. 얼마 후 필립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오토 4세가 뒤를 잇자 루돌프 1세는 군대를 거느리고 팔라타인 브루군디에 진군하여 오토 4세를 굴복시켰다. 루돌프 1세는 그때까지 독일 왕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거부해온 베른 시민들에게도 세금을 바치도록 했다.

루돌프 1세는 1281년 부인 게르트루테가 세상을 뜨자 1284년 오토 4세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된 위그 4세의 딸 이사벨라와 결혼하여 결국 부르고뉴도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안에 들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의 루돌프 1세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은 다소 어려운 문제였다. 신성 로마 제국은 당시 여러 제후들에 의해 분할통치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돌프 1세는 바바리아, 프랑코니아, 슈봐비아 등지의 영토를 합스부르크에 정식으로 속하도록 칙령을 내렸지만 효과적이지 못했다. 이들의 반발이 심했고 후속조치를 마련하기 위한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중에도 라인강을 따라 할거하던 도적 기사 영주[3]들을 응징하고 상인들이 라인강을 자유롭게 왕래토록 해주었다.

1291년에 루돌프 1세는 자신이 노쇠한 것을 느끼고 독일 왕의 지위를 아들인 오스트리아 대공 알브레히트에게 이양했다. 일부 제후들이 합스부르크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반대했지만 루돌프 1세는 모처럼 자신이 닧아놓은 합스부르크 가의 기반을 잃고 싶지 않았다. 루돌프 1세는 1291년 7월 15일 독일의 슈피아어에서 세상을 떠났다.

루돌프 1세와 첫째 부인 게르트루데는 9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 중에서 장남인 알브레히트 1세가 루돌프 1세의 뒤를 이어 독일 왕 및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의 대공이 되었다. 루돌프 1세의 유해는 슈파이어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역사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을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로 기억된다. 그러나 교황에게 파문당하였던 일, 영토를 넓히기 위해 무리하게 무력을 행사했던 사건들은 그의 명예에 손상을 주는 것이었다.

3. 대중매체에서

징기스칸 4에서 등장한다. 시나리오 2(국왕), 시나리오 3(재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77/82/83 ABAE이라는 균형잡힌 인재로 자랑한다.


[1] 당시 그의 이명이 '황금의 왕'이었던 부분에서 그 세력의 강성함을 엿볼 수 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유래가 된 쾨니히가 바로 오타카르 2세를 가리킨다.[2] 독일 왕 필립의 유일하게 생존한 딸의 아들이 오타카르[3] 라인강 연안의 영주들은 마치 강도와 마찬가지로 라인강을 운행하는 상인들로부터 강제로 세금을 징수했기 때문에 이들을 '도적 기사'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