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4-16 17:56:58

프리드리히 1세(신성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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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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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rederick_Barbarossa_Portrait.jpg
Friedrich I
가문 호엔슈타우펜 가문
생몰년도 1122년 ~ 1190년 6월 10일
재위
기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155년 1월 2일 ~ 1190년 6월 10일
독일 국왕 1152년 3월 4일 ~ 1190년 6월 10일
이탈리아 왕국 국왕 1155년 ~ 1190년 6월 10일
부르군트 왕국 국왕 1152년 ~ 1190년 6월 10일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5.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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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어: Friedrich I. (프리드리히 1세)
이탈리아어: Federico I (페데리코 1세)
라틴어: Fridericus I (프리데리쿠스 1세)
신성 로마 제국황제.

붉은 턱수염 때문에 별명은 바르바로사, 즉 붉은 수염이라 불렸고 후대 프로이센의 동명 국왕인 프리드리히 1세와 오인하지 않기 위해 바르바로사라고 더 많이 불린다.

능력과 업적이 과장된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였는데, 실제로 황제가 직접 십자군 전쟁에 나간 거의 유일한 사례였기 때문에 중세 시절을 거치면서 많이 신화화, 신격화되었다. 하지만 전설로 미화된 설화와는 달리 실상은 굴욕적인 패전도 많이 당했다. 능력에 비해 욕심이 지나치게 앞선 나머지 이리저리 전쟁을 많이 벌였으나, 실제 성과는 미미하고 오히려 실패가 많아서 신성 로마 제국 황권을 약화시킨 주범 중 한명이다.

해외에서는 이탈리아의 군주들 및 교황들과 대립했고, 독일 국내에서는 특히 하인리히 사자공과 평생에 걸친 라이벌이었다. 사자공은 황제가 아니었을 뿐, 소유한 영지의 넓이에서 뿐만 아니라 전쟁 및 영토 확장 성과, 도시 건설, 문화 장려 등 여러 면에 있어서 프리드리히 바로바로사 황제에 필적하는 인물이었다. 사자공은 특히 동방식민운동의 대표적인 군주로, 동쪽으로 가장 넓은 땅을 확장한 독일 군주였다. 바르바로사가 평생에 걸쳐 이탈리아 공략에 골몰했으나 큰 성과가 없었고 오히려 망신만 당했던 반면, 사자공은 동방으로 활발하게 진출하여, 엘베강이 경계였던 독일의 영토를 포메른 지방까지 확장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사자공은 잘나갔지만 만년에 결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로바로사가 오랜 시간 동안 파놓은 덫에 걸려 몰락하고 말았다. 이후 역사의 승자인 바르바로사는 위대한 인물로, 그리고 사자공은 보잘것 없고 오만한 인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 두 사람은 모두 재평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2. 생애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의 아들로 1152년 슈타우펜 왕조(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연 작은 아버지 콘라트 3세의 지명으로 독일왕위(로마인의 왕)에 올랐다. 황제가 된것은 1155년부터. 즉위하자마자 독일 국내의 안정에 주력해 "국내 평화령"을 발표해 치안안정에 주력하는 한편, 대립관계에 있던 벨펜가의 하인리히 사자공에게 바이에른을 양보한 후 일단 화해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오스트리아 공국 등을 신설했고 폴란드, 헝가리, 덴마크를 굴복시켰으며 부르군트의 왕위를 획득하여 위세를 전 유럽에 떨쳤다.

특히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 경략에 적극적이어서 1154년부터 여섯 차례에 걸쳐 대규모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 롬바르디아를 장악하고 롬바르디아 왕에 올라 교황을 억눌렀다. 그러나 교황과 대립하여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구엘프당(교황지지자)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쳤고 1176년, 레나노 전투에서 결국 패배하여 화의를 맺으면서 전유럽에서 망신을 사게 된다.

1180년에는 자신을 원조하지 않던 하인리히 사자공를 추방하고 그 영지를 부하들에게 분할하여 나누어 주었고, 1186년에는 아들인 하인리히 6세를 위해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계승권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의 중앙집권적 봉건주의식 통치는 의도하지 않게 영방국가들의 발전으로 이어져 후에 황제권 약화의 길을 열고 만다.
파일:external/www.bryanhoey.com/richard_dramatic.jpg

십자군 전쟁 3차 원정(1189-1191)에서 유럽 국가들 중 가장 많은 병력[1]을 이끌고 참전했으나 소아시아의 살레프강을 건너던 중 사망했다. 사인으로는 심장마비 혹은 익사가 거론된다. 아마도 고령에 찬물에 입수한 것이 원인인 모양.[2]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에서도 십자군 캠페인을 하다보면 이 이벤트가 떠버린다.

죽은 뒤 그의 시체를 예루살렘에 매장하기 위해 식초에 절여서 부패를 막아보려 했지만,[3] 결국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썩어가는 시체는 어쩔 수 없이 뼈와 살을 분리해서 살은 안티오키아의 대성당에, 뼈는 티레 대성당에, 심장과 다른 장기들은 타르수스에 각각 매장했다.

3. 평가

서임권 투쟁 이후 황권이 약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즉위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카롤루스 대제 시절의 강력한 제국을 꿈꾸며 적극적인 황권 강화와 영토 확장을 추구했다. 그 결과 그는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강력한 황권을 행사했고, 영토도 확장했다. 당대 유럽엔 프리드리히를 능가하는 권력자는 보기 힘들었다.[4] 애초에 제국의 제2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하인리히 사자공이 추방돼버린 걸 보면...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세 시대의 여느 왕들의 전설처럼 바르바로사의 활약도 낭만적인 전설이 되어 과장된 감도 있다. 그의 황권 강화는 그의 개인적 역량과 카리스마에 힘입은 바도 컸지만,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벨프 가문 출신이라는 막강한 백그라운드가 큰 힘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전 어느 황제보다도 화려하고 강력했던 출신 배경 덕분에 손쉽게 제후들을 결집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하인리히 사자공 역시 작센바이에른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가졌고 뛰어난 역량을 보유한 인물이었지만, 바르바로사의 화려한 배경에는 미치지 못했고 결국 추방당하고 만다. 사실 프리드리히 1세 때 확장된 신성 로마 제국 영토의 상당 부분은 그의 정적 하인리히 사자공이 적극적인 동방식민운동을 펼치며 엘베 강 동쪽으로 대대적으로 영토를 확장시킨 덕분이었다.

그는 황권 신수설을 주장하며 교황에 대한 황권의 우위를 주장했고, 실제로도 강력한 황권을 구축했지만, 역설적으로 후대의 황제권 약화에는 기여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프리드리히 1세가 실시한 제국제후 정책은 당시엔 프리드리히의 강력한 황제권의 밑바탕이었으나[5], 영방국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며 후대에 황권 약화의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제국제후 정책을 통한 중앙집권적 봉건제는 오늘날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프리드리히 1세는 전쟁에서 전설적인 무공으로도 유명하다. 중세 전설과 결부된 그의 활약은 후대인들의 숭배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무공, 특히 그가 많은 공을 들였던 이탈리아 경략에 대해서는 그가 들인 많은 노력과 희생에 비해서 실제로 거둔 성과는 크지 않다는 냉정한 평가도 존재한다.

매우 긴 기간 동안 제위에 있었으며, 이러한 긴 치세가 그의 업적과 위대함을 이루는데 무엇보다도 큰 보템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프리드리히 1세의 사제였던 자는 그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그의 인격은 그의 힘을 시기하는 자조차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균형잡힌 사람이다. 그는 매우 큰 키의 사람보다는 작지만 보통 키의 사람보다는 더 크고 고귀하다. 그는 금발이고 이마에서 웨이브가 있다. 그의 눈은 날카롭고, 그의 수염은 붉고, 그의 입술은 곱다. 그의 모습은 밝고 기운차다. 그의 이빨은 눈 같이 희다. 분노 대신 겸손으로 그는 얼굴을 붉힌다. 그의 어깨는 넓은 편이고, 건장한 체격이다.'

무장으로서의 완전한 자질과 예리한 웅변술을 갖추었고, 인재등용에도 뛰어나 라이날트 폰 다셀(Rainald von Dassel)[6], 오토 폰 프라이징(Otto von Freising) 등의 성직자를 등용하였다. 중세 말기 이후에는 곤궁과 오욕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는 영웅으로서 황제 전설 속에 오래도록 살아 있었다.

4. 여담

똥통에 빠져죽을뻔 했다.#

1994년에 다윈상을 받았다.

5. 대중 매체에서

나치 독일소련 침공 작전명으로 이름붙여지기도 했다.원정나갔다가 급사한 사람 이름따서 그런지 처음에는 승승장구했으나 이후에 역관광 당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마지막 캠페인의 주인공으로 나왔고, 거기에서의 그에 대한 평가는 한사람의 의지로 제국을 통일한 사람이다. 이후 그의 손자 프리드리히 2세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의 DLC '서쪽의 군주들'의 오트빌 캠페인의 청자로 등장한다.
파일:attachment/프리드리히 1세/프리드리히1세.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7]

코에이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1의 신성로마 국왕으로 등장. 정치 76, 전투 84, 지모 74. A급의 능력치를 받았지만 함께 3차 십자군에 참전한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영국의 리처드 1세가 이 게임에서 워낙 먼치킨이라 이 둘에 비해 약간 딸리는 느낌. 하지만 신성로마의 세력 자체가 워낙 크고 프리드리히 1세의 수명도 사고사 취급되어서인지 사실보다 제법 긴 편이라 게다가 아들인 하인리히 6세도 있으니 무난히 플레이 가능하다.

문명 시리즈에서는 2, 6에서 독일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바우돌리노에서도 주요 등장인물인데, 성질이 급하지만 뒤끝 없고, 성실하고 현명한 어진 임금으로 묘사되고 있다. 바우돌리노가 살던 마을을 공격했지만 어린 바우돌리노의 계략에 공격을 그만두었고 이를 영특하게 여기어 바우돌리노를 양자로 삼는다. 이후 바우돌리노의 도움을 간간이 받으며 나중에 바우돌리노로 하여금 프레스터 존 왕국을 찾도록 후원해준다. 바우돌리노 본인도 친부와 함께 양부로서 극진히 사랑하고 모신다. 여기서도 결국 급사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은 후반부에 밝혀지는데...

모바일 게임 유럽전쟁:제국에서도 중세 시나리오의 주인공중 한명이다. 게임 자체가 역사의 유명 인물은 차용하되 역사적 고증같은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라 십자군 전쟁에도 멀쩡히 등장한다. 그런데 십자군 원정 미션 시작할 때 바르바로사의 대사가 "오는 도중에 사고가 있었지만 무사히 도착했다"이다(...)

섀도우버스에서 추종자 카드로 구현되었다. 바르바로사(섀도우버스) 참조.

은혼 48화에서 마요네즈 vs 팥 싸움에 언급하는 바르바로사는 이 사람으로 추정된다. 다만 만화가 만화인 데다 시기상 마요네즈를 먹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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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당수의 책들이 10만, 혹은 이를 전후하는 규모로 저술된 것으로 보아, 10만에 준하는 규모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과장으로 보며 실제 병력은 12,000~15,000으로 보고 있다.[2] 소설가 시오노 나나미의 표현에 의하면 "분명 더운 날씨였을 거고(아나톨리아 반도가 더운 지역인지는 차치하더라도) 막대한 군장은 군사들을 지치게 했다. 그런데 강이 나타났다? 식수다! 피서지다! 프리드리히 1세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체통은 지켜야겠지만 강도 건너면서 그짓도 할 겸 들어갔다 군장에 나이가 나이라 그대로 꼬르륵......(즉위한 당시 나이 30 추정, 이미 60은 넘었다)". "늙은이의 냉수"(나이에 걸맞지 않는 행동, 경거망동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볼 수 있겠다) 라는 일본 속담은 덤.[3] 사실 시체는 식초로 보존하는 게 아니라 소금으로 했어야 한다. 식초로 보존하면 단백질이 변형되어서 금방 부스러지게 된다.[4] 다만 비슷한 경우로는 동로마 제국의 마누엘 1세가 있다.[5] 후대에 제위를 독점하는 합스부르크 가문도 이때는 프리드리히의 눈치를 보는 한낱 백작가문이었다.[6] 프리드리히 전간기의 쾰른의 대주교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재상 [8]을 맡은 인물로,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수위권을 두고 황제인 프리드리히와 함께 대립한 인물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바우돌리노에서도 등장한다.[7] 신성엔터테인먼트에서 배포한 대만 체인지소프트사의 징기스칸(게임)에서는 호라즘 왕조모함마드 2세(한글판 명칭 의 포트릿이 이것과 굉장히 닮았다. 트레이싱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