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12 07:19:23

바르바로사 작전


<colkeepall>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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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전투 이름 교전 국가 및 세력
<rowcolor=#FFF> 공격 측 방어 측
<nopad> 1939년
<colbgcolor=#b31c31> 폴란드 침공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단치히 우체국 방어전
바르샤바 전투
비츠나 전투
브주라 전투
코츠크 전투
겨울전쟁
수오무살미 전투
콜라 전투
<nopad> 1940년
가짜 전쟁
노르웨이 침공
프랑스 침공
아라스 전차전
됭케르크 철수작전
이탈리아의 프랑스 침공
북아프리카 전역
몰타 항공전
캐터펄트 작전
칼라브리아 해전
영국 본토 항공전
독수리의 날
동아프리카 전역
유고슬라비아 침공
그리스 침공
타란토 공습
<nopad> 1941년
마타판곶 해전
라인 연습 작전
크레타 섬 전투
시리아-레바논 전역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
브레스트 요새 방어전
발트해 전역
브로디 전투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계속전쟁
은색 여우 작전
뮌헨 작전
제1차 스몰렌스크 전투
우만 전투
모스크바 폭격
제1차 키예프 전투
페르시아 침공
레닌그라드 공방전
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
모스크바 공방전
툴라 전투
세바스토폴 공방전
로스토프 전투
알렉산드리아 습격
<nopad> 1942년
류반 공세
르제프 전투
데미얀스크 전투
영불 해협 돌파작전
마다가스카르 전투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
류반 구원 작전
빌헬름 작전
프리데리쿠스 작전
청색 작전
보로네시 전투
엘 알라메인 전투
PQ-17 호송선단 전투
자이들리츠 작전
칼라치 전투
제1차 르제프-시쵸브카 공세
비르벨빈트 작전
디에프 상륙 작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횃불 작전
튀니지 전투
천왕성 작전
벨리키예루키 전투
화성 작전
겨울폭풍 작전
바렌츠 해 해전
<nopad> 1943년
북캅카스 공세
콜초 작전
이스크라 작전
보로네시-하리코프 공세
스카쵸크 작전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쿠투조프 작전
제1차 돈바스 공세
므가 공세
플로이에슈티 공습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
제2차 스몰렌스크 전투
브랸스크 공세
드네프르 강 전투
도데카니사 전투 파일: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국기.svg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무솔리니 구출 작전
슈바인푸르트 공습
제2차 키예프 전투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
노스케이프 해전
<nopad> 1944년
칼린코비치-모지리 공세
몬테카시노 전투 파일: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국기.svg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안치오 상륙 작전 파일: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국기.svg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나르바 전투
비텝스크 공세
논쟁 작전
로가체프-즐로빈 공세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
크림 반도 공세
노르망디 상륙작전
빌레르보카쥬 전투
비보르크-페트로자보츠크 공세
바그라티온 작전
레지차-드빈스크 공세
프스코프-오스트로프 공세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루블린-브레스트 작전
타넨베르크 선 전투
바르샤바 봉기
타르투 공세
코브라 작전
팔레즈 포위전
용기병 작전
도펠코프 작전
제2차 야시-키시네프 공세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파일:체코 국기.svg 슬로바키아 봉기군
동부 카르파티아 공세
발트해 공세
라플란드 전쟁
베오그라드 공세
휘르트겐 숲 전투
마켓 가든 작전
아라쿠르 전투
아헨 전투
스헬더 전투
데브레첸 전투
페차모-키르케네스 공세
판처파우스트 작전
굼비넨 작전
벌지 전투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임시정부
부다페스트 공방전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국민단결정부
<nopad> 1945년
보덴플라테 작전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동프로이센 공세
한니발 작전
하부 슐레지엔 공세
드레스덴 공습
남풍 작전
봄의 새싹 작전
모라바-오스트라바 공세
상부 슐레지엔 공세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텍셀 봉기
파일:Georgische_Legion.png 조지아 군단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 저항군
삼란드 공세
베를린 공방전
오드자크 전투 파일: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깃발.svg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공화국
이터 성 전투 파일:슈츠슈타펠 깃발.svg 항전파 무장친위대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 저항군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VIP
프라하 봉기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 저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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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rowcolor=#fff> 연표 사건
1936년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1939년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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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발발
1940년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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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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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그리스 침공
1941년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발발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1942년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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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1944년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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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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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1945년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습(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옥음방송)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바르바로사 작전
Unternehmen Barbarossa
Операция «Барбаросса»
Operation Barbarossa
제2차 세계 대전독소전쟁의 시발점
파일:external/ww2db.com/battle_barbarossa5.jpg
▲ 바르바로사 작전 전개도
날짜
1941년 6월 22일 ~ 12월 5일
원인
아돌프 히틀러소련 정복 야욕, 레벤스라움
장소
소련의 유럽 국경 전역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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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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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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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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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핀란드 국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if 출력 != n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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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추축국의 압도적인 전술적 승리, 전략적 목표 달성 실패[1]
추축군이 소련 영토 약 1,600,000km2 점령
영향
독소전쟁 발발, 동부전선 개전
전력 330만 이상
- 북부전선군
- 북서전선군
- 서부전선군
- 남서전선군
- 남부전선군
- 예비전선군
- 전차 11,000대
- 항공기 9,100대
410만 이상
- 북부집단군
- 중부집단군
- 남부집단군
- 동맹국군
- 전차 3,350대
- 항공기 4,389대[2]
피해규모 총 사상자 497만 3,820명
- 전사 802,191명[3]
- 부상 1,336,147명
- 실종 및 포로
2,335,482명
- 예비군 동원 도중
포로 500,000명
- 전차 20,500대
- 항공기 21,200대
총 사상자 108만 3,90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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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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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기 == null && 문서 == null
[[틀:깃발|{{{#!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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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깃발.svg|width=24]]}}} {{{#!if 출력 == n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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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기 == null && 깃발 == null
[[독일 국방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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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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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 1,788명
- 전사 186,452명
- 부상 655,179명
- 실종 40,157명
- 전차 2,735대
- 항공기 2,82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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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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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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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기 == null && 깃발 == null
[[루마니아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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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만 4,000명[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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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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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육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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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만 5,000명[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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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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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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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깃발.svg|width=24]]}}} {{{#!if 출력 == n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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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기 == null && 깃발 == null
[[이탈리아 왕국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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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이탈리아 왕국군}}}{{{#!if 출력 != n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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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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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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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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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기 == null && 깃발 == null
[[틀:깃발|{{{#!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svg|width=24]]}}} {{{#!if 출력 == null
문서명}}}{{{#!if 출력 != null
}}}}}}]]
4,420명

1. 개요2. 배경
2.1. 독일의 의도
2.1.1. 역사적 배경: 양면전선의 두려움2.1.2. 군사적 의도: 1941년의 '기회의 창'2.1.3. 이념적 배경: 유대-볼셰비즘의 절멸2.1.4. 경제적 측면: 금 강탈과 자원 확보
2.2. 소련의 내부상황: '잘못된 전쟁' 준비
2.2.1. 징후 파악: 쏟아지는 경고들2.2.2. 스탈린의 '합리적인' 오판2.2.3. 최악의 타이밍: 소련군의 재편과 강화2.2.4. 쓸모없어진 요새선2.2.5. 철도망 확충과 내선 기동
2.3. 영국의 대응: 주변부 전략
2.3.1. 그리스유고슬라비아 전역: 5주 지연2.3.2. 지중해와 중동에서의 압박2.3.3. 소련으로의 경고
2.4. 일본 제국의 참전 준비
3. 작전 수립: 방황하는 목표들
3.1. 에리히 마르크스의 '마르크스 구상'3.2.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수정안: 오토 계획3.3. 총통 훈령 제21호 (Weisung Nr. 21): Fall Barbarossa
4. 작전 준비: 기습을 위한 집결
4.1. 각국의 준비 태세
4.1.1. 독일 국방군
4.1.1.1. 독일군의 오만: 10주짜리 병참 계획
4.1.2. 소련군
4.1.2.1. 약점: 대숙청의 여파
5. 전개
5.1. 초기: 개전과 초기 공세(6월 22일 ~ 7월 20일)5.2. 중기: 작전의 수정 및 키예프 함락(7월 20일 ~ 9월 30일)
5.2.1. 작전 수정 : 8월의 대충돌5.2.2. 스몰렌스크에서의 반격5.2.3. 총통 훈령 제34호
5.3. 후기: 태풍 작전과 소련의 반격 공세 (10월 2일 ~ 1월 말)
5.3.1. 태풍 작전의 발동과 또 한번의 대승리5.3.2. 최후의 도박 : 모스크바 공방전
6. 결과
6.1. 나치 독일6.2. 소련

1. 개요

Wir müssen nur die Tür auftreten, und das ganze verrottete Gebäude wird krachend zusammenbrechen.
우리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기만 하면, 완전히 썩어빠진 저 건물은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로서 4년에 걸친 독소전쟁의 서막을 연 나치 독일소련 침공작전이다. 또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한 단일 군사 작전이기도 하다.[6][7]

바르바로사(Barbarossa)는 이탈리아어로 붉은 수염(red beard)라는 뜻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에는 세 가지 견해가 있는데, 프리드리히 1세가 동방으로 십자군 원정을 갔듯이 소련을 침공하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8] 또 하나는 붉은 수염이라는 뜻이 공산주의의 주도국인 소련이오시프 스탈린을 연상하게 한다는 데서 착안했거나, 마지막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의 작전 암호명 중 색상이 사용된 사례 - 녹색 상황[9], 백색 상황, 청색 상황, 황색 상황/적색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사용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2.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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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의 유럽 지도. 추축국이 대부분의 유럽을 석권한 것을 알 수 있다.

2.1. 독일의 의도

히틀러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이 이기고 있다고 보고받았지만, 실상은 그와 달랐다. 공군원수 헤르만 괴링이 자신했던 루프트바페의 공격은 초기에만 성공을 거두었을 뿐 그 이후부터는 영국 왕립 공군에게 패배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나중에는 수도 베를린이 공습을 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독일군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바다사자 작전 역시 차질을 빚고 있었다. 애초에 내용부터가 마땅한 상륙정이 없어 물자 운송에나 쓸 법한 바지선으로 상륙을 진행하야 하는 위험천만한 작전이었고, 설상가상으로 도버 해협의 물살은 9월 말부터는 바지선 따위로는 접근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거칠어지기 때문에 독일군은 늦어도 8월 말까지는 영국 공군을 궤멸시키는 등 작전의 사전 준비를 마치지 못한다면 영국 침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헤르만 괴링의 엉터리 보고를 기준으로 해도 영국 공군의 소멸과 해안 방어 거점 소탕은 8월 안에는 불가능한 것이 자명했다. 심지어 당시 영국의 전시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확고한 의지로 국민들을 단결시키며 독일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기에, 미국과 소련이 건재한 이상 영국 역시 굴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확실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이래로 나치 독일이 겪은 사실상 첫 패배였다.

그러나 영국 본토 항공전이 한창이던 1940년 7월, 이미 히틀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상술했듯 항공전에서 패배하면서 영국을 항복시키는 것은 실패했음에도 나치 독일의 패권은 여전히 굳건했다. 이미 폴란드,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가 독일의 군홧발 앞에 짓밟혔고, 헝가리 왕국,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의 동맹(추축국)이었으며, 중립을 표방한 대부분의 국가들 역시 친독일 성향이거나 나치 독일의 기세에 눌려 추축국을 지원하기에 바빴다.[10][11] 대부분의 독일군 장성들도 굳이 전선을 한 개 더 늘릴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기는 했으나, 소련을 만만하게 보는 것은 히틀러와 별 차이가 없었다.[12] 전쟁을 확대하지 않는 결정을 제외한다면, 실패시 바다 건너편에서 고립될 육군을 보내는 모험에 비해서 약소국에게 망신을 당한 나약한 거인을 먼저 꺾는 판단은 어찌 보면 나름대로 현명한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히틀러가 영국이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 소련 침공을 개시한 것은 전략적으로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러나 히틀러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나름대로 이유는 가지고 있었고 경제적, 이념적 이유 외에도 군사적인 이유도 나름대로 있었다.

2.1.1. 역사적 배경: 양면전선의 두려움

아돌프 히틀러의 레벤스라움 사상은, 물론 그의 개인적인 광기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을 수는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독일의 지정학적 숙명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유럽 정중앙에 위치한 독일은 역사적으로 항상 서쪽의 프랑스와 동쪽의 러시아라는 두 강국 사이에 끼어 양면전선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7년 전쟁 시기 독일은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 삼국 동맹에게 동시에 공격당해 국가 멸망의 기로에 놓인 적이 있었는데, 만약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러시아의 이탈)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프로이센은 정말로 멸망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후 독일은 전 유럽을 휩쓸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대육군(Grande Armée)이 러시아의 광활한 영토와 동장군으로 처절하게 몰락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며 러시아의 '무한한 잠재력'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13]

때문에 1914년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졌을 당시, 독일군은 양면전선을 피하고자 슐리펜 계획을 통해 상대적으로 동원이 늦을 것이라고 예측되는 러시아 방면에는 비교적 소수의 병력을 배치하고, 대신 동원령이 빠른 프랑스 전선에 병력을 집중시켜 최소 6주 안에 수도 파리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총참모장 소(小) 몰트케의 오판과 제1차 마른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서부전선은 참호전의 수렁으로 빠져들어갔고, 결국 독일은 4년여 간의 기나긴 소모전 끝에 붕괴하고 말았다.

여기에 참전한 바 있던 히틀러에게 있어 이러한 경험으로 얻은 교훈은 매우 단순하고 명확했다. 그의 말마따나 독일 민족이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 비로소 유럽의 패권을 쥐기 위해서는, 러시아라는 이 거대하고도 무서운 변수를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던 것이다.

2.1.2. 군사적 의도: 1941년의 '기회의 창'

독일의 이러한 '역사적'이고 '이념적'인 숙명론은, "왜 하필이면 1941년 지금인가?"라는 군사적인 타이밍의 문제와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히틀러는 언젠가는 소련과 싸워야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1941년이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히틀러의 이러한 생각은 어느정도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그가 1941년을 소위 '기회의 창'으로 본 가장 큰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국제 정세 때문이었다. 1939년 폴란드 침공과 1940년 베저위붕 작전, 그리고 프랑스 침공으로 독일군은 유럽 본토의 대다수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영국은 바다 건너 섬에 고립되어 유럽 대륙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악몽과도 같았던 양면전선이 일시적으로 해소된 유일한 순간이었다.

서쪽의 영국은 바다에 막혀서 건너올 수 없는 상태로 브리튼 섬에만 꽁꽁 쳐박혀 있을테고, 대서양 건너의 미국은 1930년대 내내 고립주의를 고수하며 참전하지 않았기에, 지금이야말로 독일이 러시아라는 단 하나의 전선에만 모든 힘을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영국이 미국의 지원을 받을 것을 히틀러는 어느정도 예측하고 있었고, 대륙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소련에게 가능성을 걸 것도, 그리고 소련이 언젠가는 독일을 공격할 것도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히틀러는 이 희망을 먼저 꺾어버려 영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하락시키고, 소련을 선제공격하여 예방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해답이라고 여겼을 것이었다.

때마침 소련의 군사력은 대숙청을 겪으면서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소련군은 미하일 투하쳅스키알렉산드르 예고로프, 바실리 블류헤르 등 최고위 군 장성들을 포함하여 대다수의 군 장교들이 대거 숙청됨에 따라 지휘력이 굉장히 저하된 상태였기에, 1940년 겨울 전쟁에서 자신들보다 훨씬 작은 국가였던 핀란드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는 추태를 보인 바 있었다. 독일의 눈에는 지금 러시아를 쳐들어간다면 1914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의 기적, 그리고 1917년 러시아 제국이 내부로부터의 혁명(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무너졌던 상황을 다시금 재현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생각은 1941년 히틀러와 할더의 머릿속에서 희망회로를 거쳐 완벽한 '망상'으로 이어졌다.
우리의 선제공격으로 스탈린의 썩은 건물에 막대한 충격을 가한다면, 러시아는 1917년처럼 정치적으로 붕괴할 것이다.

2.1.3. 이념적 배경: 유대-볼셰비즘의 절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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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의 파시스트들, 그리고 수많은 독일인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원인을 배후중상설이라고 믿고 있었다. 즉 독일 제국 내부의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이 사보타주를 감행하고 적국의 스파이 노릇을 하여 자국이 무너졌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나치 독일은 공산주의를 이데올로기로써 내세우며 자국 지도부에 유대인이 많이 분포해 있던 소련에 대해 '유대-볼셰비즘의 총본산'이라고 부르면서 매우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였으며, 여기다가 나치즘 특유의 인종우월주의가 결합하여 "게르만족이 열등한 슬라브족을 유라시아에서 몰아내야만 우리가 번영할 수 있다!"고 진지하게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에게 있어 소련은 단순한 적국이 아니라 아리아 인종을 파괴하려는 역병이자 열등인종들이 지배하는 '썩어빠진 건물'이었다. 그렇기에 러시아 침공은 이전까지 그들이 수행했던 전통적인 전쟁(Krieg)이 아니며 "세계관의 전쟁(Weltkrieg)"이자 인종적 · 이념적으로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고 맞부딪히는 "절멸전(Vernichtungskrieg)"이었다.[14]

이에 따라 볼셰비즘의 요람과 같은 곳이었던 레닌그라드에 대한 비합리적인 수준의 포위 고사작전이 이루어졌다. 히틀러에게 있어 그곳은 군사적 목표였던 모스크바나 경제적 목표였던 우크라이나와 동등한 수준의 목표였으며, 이른바 "공산주의의 예루살렘"이자 "절멸시켜야 할 이념적 상징"이었다. 따라서 1941년 9월에 히틀러는 "레닌그라드의 항복은 절대로 받지 말라"면서 약 300만에 가까운 도시 시민들을 포위망 안에 가두어 굶겨 죽이라는 지극히 비군사적인 절멸 명령을 하달하였다.

2.1.4. 경제적 측면: 금 강탈과 자원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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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독일은 전세계로부터의 무역 제재를 받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와 같은 우호국들과 교역이 성사되더라도 세계의 바다는 결국 영국의 통제 하에 있었기에 필수적인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1940년 베저위붕 작전을 감행하여 노르웨이의 고품질 목재와 스웨덴산 고순도 철광석은 겨우겨우 확보했지만, 그밖에 대다수의 자원은 이미 고갈 상태에 있었다. 특히 석유, 고무, 텅스텐 및 비철금속류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때문에 1940년 나치 독일은 소련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여, 소련에게 6억 5,000만 라이히스마르크 상당의 기술 및 공산품을 제공하는 대신 그와 동등한 수준의 원자재를 제공받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그러나 예상 외로 영국이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자, 히틀러는 딴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 말인즉 "소련과 돈을 받고 거래하느니, 차라리 우리가 쳐들어가서 그곳을 빼앗으면 되는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경제적인 또 다른 문제로서, 당시 나치 독일은 메포어음이라는 방식으로 사실상 담보가 없는 어음을 발행하여 인플레이션 발생 없이 통화량을 늘리는 편법을 사용해 경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방식이 민간용으로는 수익을 거두기가 매우 어려운 군수산업 위주라서 정부가 갚아야 할 빚을 계속해서 늘리고 있었다. 1939년 중후반부터 어음들의 상당수가 만기가 도래하자, 나치는 강제로 연장을 진행했으나 이 어음으로 인해 진 빚은 총국민소득의 10%에 달했다. 당시 국가은행(라이히스방크) 총재였던 얄마르 샤흐트는 지금이라도 군비 지출을 줄이고 수익성 있는 민간 산업에 투자할 것을 강력하게 건의했으나, 나치 지도부는 다른 나라로부터 금을 빼앗고 이것으로 어음 빚을 갚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15] 결국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는 점령한 국가의 금이란 금은 모두 써서 빚을 돌려막기하고 있었지만, 상술했듯 영국의 저항으로 전쟁이 점점 장기화의 길을 걷자 추가적인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미 유럽에서 털어먹을 수 있는 국가는 모두 털어먹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치 지도부는 소련이 공산주의 종주국으로서 보유한 금이 많은 데다가 스페인 내전 시기 공화정부가 무기 대금으로 지불한 금을 가져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연하게도 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련을 굴복시켜서 강탈해야 했다.[16]

거시적인 관점에서도,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곡창지대와 캅카스의 유전지대, 우랄산맥의 광물자원, 시베리아의 목재 등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고 이것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는 당시 중립국에 머물러 있었던 미국도 영국에 대한 지원 정책을 지속하는 것을 보며 언젠가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가진 미국도 상대해야 할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렇기에 그 전에 소련의 자원과 인력을 미리 확보하기 위한 노림수도 있었다.

2.2. 소련의 내부상황: '잘못된 전쟁' 준비

물론 이오시프 스탈린을 비롯해 소련의 지도부 역시 독일과의 전쟁을 상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1942년 이후, 최소한 1943년이 되서야 독일과의 전쟁이 개전될 것이라고 예측했지, 당장의 전쟁 가능성을 예측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소련 측에서는 영국이나 다른 국가들의 경고, 그리고 자국의 스파이들의 첩보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전쟁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2.2.1. 징후 파악: 쏟아지는 경고들

히틀러가 소련 침공을 준비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스탈린과 소련 지도부는 문자 그대로 전 세계로부터 침공 경고를 받고 있었다.

전 세계에 산재한 소련 간첩망은 1940년 가을부터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테니 대비해야 한다는 첩보를 계속 보냈다. 당시의 소련은 공산주의의 종주국 겸 사실상 유일한 공산주의 국가였기에 공산주의자들은 이념과 신념으로 소련에게 자발적으로 스파이 행동을 하면서 소련에게 정보를 전달해주고 있었고, 소련도 코민테른 같은 조직이나 각종 기구들을 통해서 외국의 공산당 활동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물론 스탈린의 독재와 대숙청 및 소련 내부의 실상이 알려짐으로 인해 소련과 소련 공산당에 대한 외국 공산주의자의 인기는 추락하고 있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소련이 멸망하고 공산주의 국가가 소멸하는 파국적인 상황은 원하지 않는 공산주의자가 많았다.

실제로 나치 독일 내에는 히틀러 집권 전부터 수십만 명의 공산당원과 수백만 명의 공산당 지지자들이 있었는데, 그 위성국들과 동맹국 내에도 상당수의 공산당 동조자들이 있었다. 독일 정부 내에도 신분을 위장한 간첩망이 엄연히 존재했다. 일례로 일제 스퇴베(Ilse Stöbe)[17]는 1940년 가을부터 독일이 1941년 5월에 침공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왔고, 일본 제국에서 신문 기자로 위장하고 있었던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는 일본 주재 독일 대사로부터 6월 22일이라는 정확한 개전날짜까지 알려주었다. 심지어 독일계 반나치 첩보조직이었던 스위스의 루시(Lucy spy ring) 역시 소련에게 나치 독일의 침공징후를 예견한 바 있었다.

소련 주재 독일 외교관들이 가족들을 미리 대피시키거나, 독일군의 정찰기가 소련 국경을 비행 정찰하다가 돌아가고, 심지어 독일군 내부에서 탈영한 이들이 각종 증언을 해대는 등 심상치 않은 징후가 이어졌지만 소련은 당최 이를 믿지 않았다.

2.2.2. 스탈린의 '합리적인' 오판

스탈린은 이 모든 징후를 묵살했다. 하지만 이는 어느정도까지는 상식에 기반한 합리적인 오판이었다.

첫째, 스탈린은 나치 독일이 스스로 양면전선을 만드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당시 독일의 입장에서는 적국인 대영제국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본국과 그 식민지들 간의 주요 항로가 건재한 상황이었는데, 소련과 전쟁을 시작해 양면전쟁을 벌이는 것은 천년에 한 번 나올 바보나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히틀러가 스탈린에게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고 한 이유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이 양면전쟁을 벌이다가 파멸한 것을 교휸삼아 소련과의 양면전쟁을 미리 차단하고자 함이었는데, 이것을 모를 리 없는 스탈린이 히틀러가 그토록 피하려 했던 양면전쟁을 또 다시 벌일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둘째, 스탈린은 나치 독일이 여러 자원의 부족과 북아프리카 전역 등 각 지역에서의 국지적인 전선으로 인해 새로운 대규모 전쟁을 벌이려면 아직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것은 사실이었고, '사막의 여우'라고도 불렸던 그 에르빈 롬멜마저도 독일 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로 영국군을 겨우겨우 물리치는 데에만 만족해야 했고,[18] 본래의 목적이었던 이집트 점령 및 수에즈 운하 장악은 꿈도 못 꾸었다.

셋째, 스탈린과 소련 지도부는 자국의 군사 현대화가 빨라도 1942년 하반기에야 끝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완전히 준비되지 않은 지금 전쟁이 터지는 것을 광적으로 두려워했고, 사라예보 사건과 같은 우연한 사고가 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 역시 걱정하고 있었다. 심지어 상대는 전통적인 육군 강국이었던 폴란드와 유럽 제1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를 압살한 독일군이었다. 이것이 그의 편집증적이고 과도하게 의심하는 성격과 맞물리면서, 스탈린은 이 모든 경고가 소련을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영국의 이간계이거나, 혹은 자신이 먼저 방어 태세를 갖추려고 군대를 국경에 배치하는 것을 선전포고의 빌미로 삼으려는 히틀러의 함정이라고 매우 의심했다.

이 때문에 그는 군부의 모든 경계령 요청을 묵살했다.

2.2.3. 최악의 타이밍: 소련군의 재편과 강화

1940년 겨울 전쟁에서의 졸전, 그리고 동시기 독일의 프랑스에 대한 승리에 큰 충격을 받은 스탈린은 이후 소련군의 강화에 매달리게 된다. 특히 스페인 내전의 전훈을 분석하여 쓸모없다고 판단해 해체해버렸던 기계화군단을 1940년 말부터 재창설하고 황급히 재편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이 실행된 시점은 그야말로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1941년 중반은 이 재편성이 한창 이루어지던 혼란기였다. 각 부대들은 정신 없이 이동 중이었고, 지휘관들은 자신이 맡을 병과와 교리도 확실하게 숙지하지 못한채로 이리저리 교체당하고 있었으며, T-34KV-1와 같은 신형 전차는 막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승무원들은 그에 대한 훈련을 받지 못해 제대로 운용조차 할 줄 모르는 실정이었다. 붉은 군대 지도부에 따르면 이것은 빨라도 1942년 하반기가 되서야 완료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2.2.4. 쓸모없어진 요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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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스탈린은 1939년 독일과 폴란드를 분할한 이후, 발트-벨라루스-우크라이나 국경에 건설했던 기존의 견고한 요새선인 스탈린 선을 폐기하였다. 이미 완성된 방어선을 해체한 이유는, 기존 소련 국경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러시아 내전, 그리고 그 이후의 여러 분쟁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었기에 자연 국경이라고 할만 할 곳이 딱히 없어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취약했다. 그렇기에 소련은 기회만 되면 러시아 제국 시절의 국경선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실제로 어느정도 그렇게 되자 이제는 후방의 예비 방어선이 될 스탈린 선을 굳이 신경써야 할 이유가 없게 된 것이었다.[19]

문제는 이때 스탈린 선을 폐기하면서 시설과 장비를 분리, 그것으로 폴란드 국경에 새로운 방어선인 몰로토프 선을 건설하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련의 국력이 부족하고, 전차 등 다른 무기와 장비도 생산해야 하는 상황에서 새롭게 방어선을 건설하는 것은 매우 무리였다. 결정적으로 시간이 없었다.[20] 그렇게 1941년 6월 22일 당시 몰로토프 선의 건설 현황은 고작 15% ~ 20%도 채 안되는 수준이었고,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이 국경지대에서 마주한 것은 만들어지다가 만 '방어선인 무언가'와 그보다 훨씬 뒤에 있는 '방어선이었던 무언가',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드넓은 평야였다.

2.2.5. 철도망 확충과 내선 기동

파일:1943년 소련 철도망.jpg
전쟁 발발 시점에서의 소련 철도망 지도
한편 스탈린이 준비했던 것 중, 1941년 6월의 기습은 막지 못했지만 소련의 붕괴를 막아낸 결정적인 요소가 존재했는데, 그것은 바로 대대적인 산업화와 함께 건설된 각지의 철도망이었다.

스탈린은 제1차 세계 대전러시아 내전에서의 교훈을 통해, 광활한 러시아의 영토에서는 철도를 통한 병력의 빠른 수송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1928년부터 중공업 위주의 5개년 계획을 강하게 밀어붙힘과 동시에 각지의 철도망을 긴밀하게 연결하고,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유럽-러시아와 우랄, 시베리아 등지의 새로운 공업지대와 자원지대를 연결하였으며 철도 구성과 운용 시스템을 강화하는 데에 각고의 노력을 쏟았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1917년 81,000km에 불과했던 소련의 철도망은 1940년까지 106,100km로 늘어났고, 물류 운송량은 200억 톤에서 4,000억 톤으로 약 20배나 증가하였다.

1941년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이 철도망들은 기습을 막는 데에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전선이 모스크바에 가까워질수록, 이 철도망들은 서부지대에 있던 산업시설과 공장들을 우랄산맥 너머로 이동시키고 동쪽에서 징집된 신규 사단과 새롭게 생산된 군수 물자들을 서부로 실어나르는 대동맥 역할을 수행하며 소련의 붕괴를 막아내었다.

2.3. 영국의 대응: 주변부 전략

1940년 프랑스가 항복한 이후, 영국은 유럽에서 홀로 나치 독일과 맞서고 있었다. 그리고 유럽 전역을 석권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영국이 전면전을 벌이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영국의 전쟁 수행방식은 독일과의 전면전이 아니라 독일 주변의 나라(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를 우선으로 타격하는 이른바 '주변부 전략'으로 선회하게 되었고, 이는 1941년 초 지중해와 발칸반도에서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의 시선이 동쪽의 모스크바로 향하는 동안 영국의 이러한 움직임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시간표 자체를 결정적으로 뒤틀어버리게 되었다.

2.3.1. 그리스유고슬라비아 전역: 5주 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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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침공을 위한 독일의 대전략을 어그러뜨린 것은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1940년 10월 28일, 이탈리아는 무솔리니의 독단으로 그리스 왕국에게 주요 거점의 할양, 이탈리아 왕국군의 주둔 허용 등을 포함한 최후통첩을 보냈고, 당시 그리스의 실권자였던 총리 요안니스 메탁사스가 이를 단호히 거부하면서[21] 그리스 전역이 개전되었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게 쳐들어갔던 이탈리아군은 삽질만 거듭하면서 그리스에게 처참하게 패퇴하였고, 이 틈을 놓치지 않은 영국은 1941년 3월 그리스 본토에 영연방군을 상륙시켰다. 이는 독일의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던 루마니아의 플로이에슈티 유전이 영국 폭격기의 사정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히틀러는 이러한 위협을 외교적으로 타개하고자 당시 친독 성향이었던 파블레 왕자 치하의 유고슬라비아를 압박, 1941년 3월 25일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불과 이틀 뒤인 3월 27일, 영국 특수작전집행부(SOE)의 지원 하에 친영국 성향의 페타르 2세와 그 측근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히틀러는 격노했다. 이미 독일군은 1940년 12월을 기점으로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중이었는데, 이탈리아의 뻘짓과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쿠데타로 인해 자신이 상정했던 대전략이 전제부터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제압하지 않고서는 소련을 침공할 수 없다고 판단, 본래 1941년 5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일을 약 5주(38일) 뒤인 6월 22일로 지연시킨 뒤, 4월 6일경 주력 부대를 차출하여 발칸 전역(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을 개시하였다.

2.3.2. 지중해와 중동에서의 압박

한편 영국은 발칸반도 뿐만 아니라 그외의 지역에서도 독일의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고 있었다. 특히 지중해의 불침항모였던 몰타와 대서양으로의 창구였던 지브롤터를 결사방어하여 지중해의 재해권을 사수하고 북아프리카 전역의 독일-이탈리아군 보급선을 끊임없이 괴롭혔으며, 친 추축국 성향의 비시 프랑스 통치 하 식민지인 시리아와 레바논 일대를 침공하여 독일군이 이라크 및 시리아와 연계하여 캅카스 남부를 위협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이탈리아는 전쟁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왕립 해군이 영국 해군을 쳐부술 수 있다며 호언장담했으나, 이는 말뿐이었고 실제로는 영국 해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는 것도 힘들어했다. 또한 1940년 11월의 타란토 공습으로 인해 전함 3척이 손실되며 지중해의 재해권을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이탈리아군의 졸전으로 인해 영국군이 오히려 이탈리아령 리비아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독일의 전략은 지브롤터와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여 지중해를 막고, 영국 해군이 개입할 가능성을 아예 막아버리는 것이었으나 이는 1940년에 접어들며 아예 실행조차 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이에 독일로써는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수 밖에 없었다.

2.3.3. 소련으로의 경고

영국은 암호명 '보니페이스(Boniface)'로 알려진 암호해독체계 울트라를 통해 독일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독일이 머지않아 소련을 침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영국의 정치인들은 주 소련 대사 스태퍼드 크립스(Stafford Cripps) 등을 통해서 스탈린과 소련 지도부에게 임박한 독일의 침공 위협을 수차례 경고했다. 스탈린은 영국의 이간계라고 생각하여 이를 믿지 않았지만, 해당 정보를 전달받은 일부 소련군 장성들은 독일의 침공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를 해놓았고, 이는 추후 소련이 동부전선의 승기를 잡는 데 있어 조금의 도움이 되었다.

2.4. 일본 제국의 참전 준비

파일:Ussuri_Breakthrough_Zones.png
일본제국의 연도별 연해주 침공계획. 독일의 계획과 무관하게 처음부터 소련과 다시 싸운다면 연해주부터 공략한다는 목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일본 외무상 마쓰오카 요스케(松岡 洋右)는 1941년 4월경 베를린을 방문하며, 급변하는 유럽의 국제 정세에 대해 관찰을 하게 된다. 이때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소련에 대해 관계가 나빠질 가능성은 있다는 식으로 둘러둘러 암시는 했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독일과 소련의 관계는 매우 좋다는 확신을 보여주면서 그에게 독일의 소련 침공에 대한 정보를 따로 전달하지는 않았다. 이는 소련이 침공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려는 조치였지만, 이는 어마어마한 나비효과를 불러버리고 만다.

여기서 오판을 해버린 마쓰오카가 귀국길에 소련을 들러 일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만 것이다.

애초에 바르바로사 작전 자체가 극비로 진행되었던 탓에, 일본은 작전 개시일인 6월 22일까지 동맹국인 독일로부터 아무런 정보도 받지 못하게 된다. 독일은 6월 22일 새벽 소련에 대한 선전포고 직후, 주독 일본 대사관의 오시마 히로시(大島 浩)를 호출하여 구두로 대소전쟁 참전을 요청한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일본 대본영 측에서는 독일에 대해 배신자라고 욕까지 나오는 등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승승장구 중인 독일의 편에 탑승하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또한 동시에 강대국이었던 소련을 상대로 며칠만에 전쟁을 시작할 수 있을리도 만무했다. 이에, 일본으로부터 별다른 대답을 듣지 못한 히틀러는 7월이 되자 직접 오시마 대사를 소환해서 정식으로 참전 요청서를 전달한다.

한편, 외무성의 움직임과는 무관하게 일본 육군 참모부는 독일의 소련 침공을 접하자마자 이 기회에 편승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즉각 소련 침공을 골자로 하는 내용의 계획인 관동연(関特演)[22]을 입안하여 대본영과 히로히토에게 올린다. 이는 익은 감(熟柿) 전략에 기반한 것으로, 독일의 승리가 확실해졌다고 판단되면[23] 소련이 극동 주둔군을 서쪽 전선으로 빼낼 것이고, 그 사이에 텅 비어버린 시베리아와 연해주를 손쉽게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을 위해 일본은 그해 7월 13일부터 제1차 총동원령을 발동하여 300여개의 각 부대들을 동원하고, 16일에는 제2차 총동원령으로 14여 사단 규모의 부대를 추가로 동원하여 대략 70만 명 이상의 대병력을 준비하였다.

히로히토는 7월 7일에 열린 어전회의에서 「정세의 추이에 따른 제국 국책 요강(情勢ノ推移ニ伴フ帝国国策要綱)」을 채택해 이 관동연의 발동, 즉 총동원령을 사실상 승인하였다. 하지만 이는 즉각적으로 소련을 침공하라는 것이 아니라, "익은 감이 저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만주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고 침공 준비 훈련을 시작하라는 조건부 승인이었다. 비록 일본의 의도는 기회주의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지만, 만주에 집결한 대규모 관동군 병력은 러일전쟁을 기억하고 있던 소련으로서는 즉각적인 위협으로 보였다. 때문에 스탈린은 극동지역의 정규 사단들을 일본과의 국경에 집결시켜 혹시 모를 일본의 침공을 대비하려 했다.

3. 작전 수립: 방황하는 목표들

3.1. 에리히 마르크스의 '마르크스 구상'

파일:Marcks_Plan_for_Operation_Barbarossa.jpg
바르바로사 작전의 초기 계획안이었던 마르크스 구상.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프란츠 할더는 1940년 프랑스 전역 당시 자신의 작전안을 비판하고 낫질 작전을 입안해 히틀러의 신임을 얻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에 대해 개인적인 시기심과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할더는 만슈타인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대신 당시 참모본부 내에서 '엘리트 브레인'으로 평가받던 제18군 참모장 에리히 마르크스(Erich Marcks)에게 소련 침공의 초기 계획안 작성을 지시한다.

그가 구상한 마르크스 작전(Operationsstudie Marcks)의 개요는 독일군을 북부 집단군 · 중부 집단군 · 남부 집단군의 세 전구로 나누고 각 전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개시, 돌파하여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우크라이나 등 전략적 요충지를 신속히 점령함으로써 소련의 산업 · 농업적 기반을 무력화하는 내용으로, 초동 약 3주 내에 400km를 돌파해 드비나 - 드네프르 선을 확보하고 이후 2~4주 내의 보급과 정비 기간을 거쳐 필요하면 추가로 약 100km를 추가로 전진한 뒤 마지막 3~6주 동안 소련의 주요 심장부에 결정타를 가한다는, 이 전 과정을 통상 9~17주 안에 완료할 수 있다는 다소 낙관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작전은 2단계로 구분되었다.
  • 1단계 (발트 전역): 일단은 전선을 세 전구로 나누되, 주력은 벨라루스 이북의 북부 집단군에 집중한다. 북부 집단군은 이를 바탕으로 핀란드군과 협력하며 발트해 연안을 신속하게 장악, 목표인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고 발트해 해상보급로를 통해 북부 전선을 안정화시킨다. 이후 남하해 중부 집단군과 협공하여 작전 개시 후 9주 안에 수도 모스크바를 점령한다.
  • 2단계(남부 소탕): 모스크바를 장악하여 소련의 지휘체계와 통신망, 물류교통망을 마비시킨 후, 주력을 남쪽으로 선회시켜 흑해와 루마니아 사이에 갇힌 우크라이나의 소련군 주력을 거대한 포위망을 통해 섬멸한다. 그뒤 주력을 포함한 남부 집단군은 우크라이나에서 계속 진격하여 돈 강까지 진출하고, 북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은 서로 합류하여 볼가 강까지 진출한다.

초안은 소련군을 약 96개 보병사단, 23개 기병사단, 28개 기계화여단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추정했고, 독일 측은 초기 돌파와 기동을 위해 기갑부대를 중점으로 운용하되 약 40사단 정도는 예비대로 남겨두어 돌파구의 확대와 약화된 적들의 추격, 그리고 포위전에서의 완전섬멸을 위해 사용하자는 구상을 세웠다. 전술적으로는 이전 프랑스에서 실행했던 낫질 작전의 연장선상으로써 적이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기갑을 통한 재빠른 기동과 포위섬멸을 내세웠으며, 이를 위해 항공기의 정밀 공습 및 근접항공지원을 통해 교통망을 무력화하고 정찰을 통해 적군의 배치와 후방상황을 신속히 파악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다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육군의 관점에서만 작성되어, 루프트바페에게 할당되는 자원의 분배 및 우선순위 문제는 별도로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 특히나 보급 문제는 이 초안에서조차 핵심적인 문제로 지적되었는데, 초기 돌파 이후 각 부대들의 보급선이 급격히 연장되고 철도의 재궤도화, 교랑 재건, 도로 정비 등의 작업이 필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독일군 장성들은 이들 작업의 난이도를 다소 낙관적으로 본 측면이 있고, 그 결과 장거리 보급능력에서 연료 고갈, 동계 장비의 부족, 예비 물자의 확보 실패가 장기전에 큰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완전히 생각치 못했다. 마르크스는 작전 성공의 전제조건으로서 초기 돌파의 전격성, 신속한 보급선의 확보, 철도 재가동, 루프트바페의 항공우위 유지, 그리고 소련 지도부의 혼란과 조직적 반격 실패를 명시했으나, 이러한 대전제들이 깨질 경우의 대체계획은 구체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 유연성 면에서 취약했다.
  • 지형적 제약 또한 분명했는데, 프리피야트 습지대[24]와 같은 자연지형이나 소련 특유의 열악한 도로망은 기갑과 보병의 진군은 물론이거니와 보급의 수송도 느리게 만들었다. 마르크스는 후자를 감안하여 벨라루스 지역을 중심으로 전구를 2개로 나누는 방안도 고려해 보았으나 도로/교량의 파괴, 늪지 통행 불가와 같은 현실적인 제약들은 그다지 상세하게 다뤄지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초안을 구상할 당시 소련군이 즉각적이고 광범위하게 방어태세에 들어가지 못한 채로 우왕좌왕할 것이라는 가정을 깔았으나 소련의 동원력과 군사력이 그의 예상보다 훨씬 신속하고 강력할 경우, 그로 인해 작전기간이 길어지고 보급과 기후 문제가 결합되어 작전이 실패로 이어질 위험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 침공에 낙관적이었던 당시의 독일군이 이를 알리는 없었고, 때문에 이 계획은 프란츠 할더를 통해서 1940년 8월 5일 히틀러에게 제출된다.

3.2.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수정안: 오토 계획

파일:마르크스 작전 지도.jpg 파일:오토 작전.jpg
마르크스 계획(왼쪽)과 오토 계획(오른쪽)의 비교.

마르크스 계획은 이제 좀 더 구체화 될 필요가 있었다. 1940년 9월 1일, 프란츠 할더는 육군 참모본부의 제1작전과장(OQu I)으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를 임명하고, 그에게 기존 작전의 수정안을 작성하도록 명한다. 파울루스는 만슈타인 같은 '창의적인 이단아'와는 정 반대인, '지적이고 꼼꼼하며 순종적인' 인사였고 때문에 그는 할더에게 있어 마르크스 계획이라는 청사전을 완벽한 설계도로 완성시킬 적임자로서 보여졌다.

약 3개월 간의 시간이 흐른 후, 파울루스가 내놓은 수정안 '오토 작전(Otto plan)'은 마르크스 계획으로부터 크게 3가지의 내용이 수정되었다.
  • 프리피야트 습지대 남쪽에는 남부 집단군을, 북쪽에는 중부 집단군과 북부 집단군을 배치한다.
  • 기갑사단은 분산 배치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을 한데 묶어서 기갑집단군을 만들고, 이들이 쐐기 역할을 수행하여 적군의 전선 사이를 돌파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한다.
  • 발트 방면보다는 모스크바까지 최단거리의 철도와 도로가 있는 바르샤바 - 민스크 - 스몰렌스크의 중앙 축선으로 전력을 집중시킨다.[25]

이 작전안은 1940년 12월 5일 자로 프란츠 할더를 거쳐 히틀러에게 제출된다.

한편, '오토(Otto) 작전'의 실행 가능성을 검증하기 위해, 파울루스는 1940년 11월 29일부터 12월 7일까지 일련의 워게임을 주관했다. 워게임 결과 1단계(국경 돌파)와 2단계(스몰렌스크까지의 진격)는 계획대로 '성공'했지만, 두 가지 '예고된 재앙'이 즉각 현실화되었다. 특히 거대한 러시아 평원에서 보병과 기갑부대 사이의 간격과 병참문제가 치명적으로 드러났다. 작전적 휴지 없이는 이후 모스크바 진격이 불가능 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후 12월 17~20일에 실시된 두번째 워게임 역시, "모스크바 함락을 달성하기에 병력이 '간신히 충분'할 뿐이며, 모든 예비대가 소진될 것"이라는 동일한 비관론을 재확인했다. 파울루스는 요약 보고서에서, 보급 시스템이 드비나-드네프르 라인(스몰렌스크 이전)에서 붕괴할 것이며, A-A 라인 도달은 독일의 능력을 훨씬 초월한다고 명시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이 두 번째 워게임의 결과는, 의도적으로 소련군의 전력을 50%로 낮추고, 모스크바에 집중하는 OKH의 계획 원안으로 시뮬레이션 한 결과였다는 점이다.

히틀러가 이 '실패'의 전체 범위나 심각성에 대해 보고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할더는 이 '결함 있는' 계획안을 1940년 12월 5일, 히틀러에게 '성공 가능한' 것처럼 제출했다.

3.3. 총통 훈령 제21호 (Weisung Nr. 21): Fall Barbarossa


독일 국방군은 영국과의 전쟁이 종결되기 전이라도, 신속한 작전을 통해 소비에트 러시아를 분쇄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암호명: 바르바로사 작전)

육군은 이를 위해 점령지의 안전 보장을 전제로, 가용한 모든 부대를 투입해야 한다.

공군의 임무는 지상 작전의 신속한 완료를 보장하고 적의 공습으로부터 독일 동부 영토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육군을 지원하기에 충분한 전력을 동부 전역에 할당하는 것이다. 동부에서의 이러한 전력 집중은, 우리가 지배하는 모든 전투 및 군수 지역이 적의 공습으로부터 충분히 보호되어야 하며, 영국 본토, 특히 영국의 보급선에 대한 공세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 하에 제한된다.

해군의 주력은 동부 전역 중에도 명백히 영국을 향해야 한다.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병력 집결은, 만약 필요하다면, 내가 의도한 작전 개시 8주 전에 명령할 것이다. 더 긴 준비 시간이 필요한 작업은 -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면 - 지금 즉시 시작하여 1941년 5월 15일까지 완료되어야 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공격 의도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최고 사령부의 준비는 다음의 기초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

I. 일반 의도 (Allgemeine Absicht)
서부 러시아에 주둔한 러시아 육군 주력은, 기갑 쐐기의 깊은 돌파를 통한 과감한 작전으로 섬멸되어야 하며, 전투 능력이 있는 부대들이 광활한 러시아 영토로 후퇴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

신속한 추격을 통해, 러시아 공군이 더 이상 독일 영토(Reichsgebiet)를 공격할 수 없는 전선까지 도달해야 한다.

작전의 궁극적 목표는 아시아 러시아(Asiatischen Rußland)로부터 볼가(Wolga) - 아르한겔스크(Archangelsk)를 잇는 일반선(A-A 라인)을 확보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필요할 경우, 이 선의 동쪽에 남아있는 러시아의 마지막 산업 지대(우랄)는 공군을 동원해 파괴할 수 있다.

II. 예상 동맹국과 그 임무
...중략...

III. 작전 수행 (Führung der Operationen)
A. 육군 (Heer):
(육군 총사령관(OKH)에 의해 나에게 보고된 작전 계획을 승인하며)
프리피야트 습지대(Pripetsümpfe)에 의해 남북으로 양분된 작전 구역에서, 무게중심(Schwerpunkt)은 이 습지대 '북쪽'에 둔다. 이곳에 2개의 집단군(북부집단군 및 중부집단군)을 투입한다.

이 2개 집단군 중 북쪽의 것 (즉, 북부집단군)은 동프로이센을 출발, 강력한 기동부대를 이용해 발트해 연안의 적 주력을 격파하고, 레닌그라드(Leningrad)와 크론슈타트(Kronstadt) 항구를 신속히 점령하여 러시아 발트 함대의 기지를 박탈하는 임무를 갖는다.

이 2개 집단군 중 남쪽의 것 (즉, 중부집단군)은 가장 강력한 기갑부대와 보병부대로 구성하여, '바르샤바 및 그 북쪽'에서 출발하여 민스크 방면으로 돌파하여 벨라루스(스몰렌스크)의 적 주력을 섬멸한다. 그러고 나서(Sodann), 이 집단군(중부집단군)은 강력하고 신속한 부대들을 '북쪽'으로 선회(einzuschwenken)시켜, 북부집단군과 협력하여 발트해 연안에서 섬멸되지 않고 아직 저항 중인 적 부대(즉, 레닌그라드 방면)의 완전한 섬멸을 완수해야 한다. '오직 그 이후에야(Erst dann)', 새로운 기동부대와 보병부대의 충분한 집결을 전제로, 모스크바 점령을 위한 공세를 착수해야 한다.

프리피야트 습지대 '남쪽'에서 작전하는 집단군 (즉, 남부집단군)은 루마니아군의 지원 하에, '루블린(Lublin)' 방면에서 출발하여 키예프(Kiev)를 목표로 하여 드네프르 강 서안의 소련군을 격파하고, 강 도하 지점을 확보한다.

(2단계 목표) "프리피야트 습지대 남쪽 및 북쪽에서의 전투가 종결된 후, 추격의 일환으로 다음과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

남쪽에서는 군사-경제적으로 중요한 도네츠 분지(Donez-Beckens)의 조기 점령, 북쪽에서는 모스크바의 신속한 점령. 이 도시(모스크바)의 점령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결정적인 성공을 의미하며, 나아가 가장 중요한 철도 교차점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후략...


1940년 12월 5일경의 보고를 받은 뒤, 아돌프 히틀러는 로그베르그를 통해 최종적인 작전안을 작성하였다. 히틀러는 13일 뒤인 12월 18일 자신의 최종 결정을 "총통 훈령 제21호(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하달했다.

파일:바르바로사 작전 최종안.jpg
바르바로사 작전의 최종 계획안

이는 사실상 두 개의 상충된 계획을 억지로 봉합한 것에 지니지 않았다. OKW는 수백만에 달하는 대군의 편제, 보급, 기동로를 세밀하게 설계할 실무 능력이 없었고, 따라서 그들은 OKH가 이미 완성한 작전 계획안을 기본 틀로 삼아서 이후의 계획을 짜야 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2개의 모순된 목표가 담긴 누더기 계획이 완성되었다.
  • 구조: 작전안의 주된 목적은 소련의 수도이자 교통망의 요충지였던 모스크바였다. 따라서 3개의 기갑집단 중 2개를 중부집단군에 배속하여 소련 중부로의 돌파를 우선적으로 실시한다.
  • 목표: 다만 모스크바 외에도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 역시 점령해야 하므로, 중부집단군에 병력을 집중시키되 너무 과도하지 않도록 한다.

딱 봐도 알겠지만 OKH가 작성한 최종 목표인 모스크바와, 히틀러 개인이 구상했던 목표인 레닌그라드&우크라이나가 동시에 들어가 있다. 히틀러와 OKW는 거기다가 훈령에 핵심적인 독소 조향을 삽입하니, 그 내용이란 즉슨...
"가장 강력한 중부집단군은 스몰렌스크의 점령 이후 모스크바로 계속 진격하되, 그 전에 먼저 기갑부대를 차출하여 북부집단군의 목표 달성(레닌그라드 점령)을 지원해야 한다."
이 모호하고도 구체적이지 않은 훈령은 1941년 8월, 스몰렌스크에 도달한 중부집단군이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두고 격렬하게 충돌할, 이른바 '8월의 위기'를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도 그렇고 이 작전을 구상한 OKW도 그렇고 심지어는 OKH마저 이에 대해 그닥 반대하지 않고 여기서 큰 맥락의 수정 없이 이듬해 바로 작전을 수행할 준비로 돌입하게 된다.

각각 북부 집단군, 중부 집단군, 남부 집단군으로 명시된 3개 집단군의 목표는 각각 레닌그라드, 스몰렌스크, 키예프였으며 제2차 목표가 바로 모스크바였다. 흔히 최종 목표로 알려져 있던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 통칭 A-A 라인은 군사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아니라, 유럽-러시아 영토에서 축출된 소련군을 그곳까지 밀어내고자 하는 목적지에 가까웠다.

4. 작전 준비: 기습을 위한 집결

1940년 12월 '총통 훈령 21호'가 하달된 후, 독일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병력 집결 작전, 아우프마르슈 오스트(Aufmarsch Ost, 동방 집결)를 개시했다. 1941년 4월, '발칸 전역'이라는 돌발 변수로 인해 '5주의 지연'이 발생했지만, 6월 22일 새벽까지 300만 명이 넘는 독일군과 동맹군이 소련 국경에 비밀리에 집결을 마쳤다.

4.1. 각국의 준비 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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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의 동부전선
구분 추축국 소련 비율
사단 수 166개 190개 1:1.1
총 병력 3,487,900명 2,743,000명 1.3:1
화포 45,091문 59,787문 1:1.4
전차/자주포 4,171대 15,687대 1:3.8
전투기 4,389대 11,537대 1:2.6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것과는 달리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병력 수는 독일군이 많고 장비는 소련군이 많다. 사단의 수는 소련이 더 많은데, 독일 측의 병력수가 더 많은 이유는 편제의 차이 때문이다. 개전 당시 독일 보병사단의 정원은 17,000명으로 1941년에는 보병대대 9개, 포병대대 4개의 편제로 13개 대대를 보유했다. 심지어 독일 기갑사단의 정원은 12,000명 정도였지만, 소련 소총사단의 정원은 11,000명이었다. 그래서 소련군의 병력이 의외로 모자랐다.

물론 소련군의 편제가 모두 작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확실하게 소련군이 독일군보다 작은 편제는 개전 이후 새로 생기는 전차군단과 기계화군단이며 해당 편제의 경우에는 타국 기갑사단 규모이기 때문에 명백히 한 단계 낮은 제대가 맞다. 그러나 개전 직전에 만들어진 구식 기계화군단이나 구식 전차사단의 경우에는 오히려 나치 독일군의 기갑사단보다 오히려 전차 보유수량이 많다. 개전 초반의 브로디 전투에 투입된 나치 독일의 제3 기갑군단 소속의 제13 기갑사단과 제14 기갑시단은 모두 합쳐서 296대의 전차를 보유했지만 소련의 제4 기계화군단 소속의 제8 전차사단의 경우에는 혼자서 300대의 전차를 보유했다.

그리고 보병의 경우에는 소련의 편제가 작긴 했지만 압도적으로 작다고 보기는 힘들다. 청색 작전 이후로는 독일 보병사단이 보병대대 6개, 포병대대 3개로 줄어들어서 원래의 2/3 수준으로 줄어들었으며 1943년의 쿠르스크 전투 시기쯤 되면 소련군 소총 사단은 9,000명이 정원이지만 독일 보병사단 역시 12,000명으로 줄었기 때문에 차이가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에는 병력 정원에서 6,000명이나 차이가 나므로 병력만 따져봐도 소련군 보병사단 1개가 독일군 보병사단 1개를 막기가 곤란해진다.

장비는 소련군이 많았지만 실질적인 화력면에서는 독일군이 앞섰다. 그래서 독일 사단이 소련 군단급의 화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전차와 대포가 훨씬 많은데 왜 화력의 차이가 발생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는 교리의 차이, 적절한 장비 부족, 정비 부족, 숙련도 부족, 정찰의 한계 등등으로 화력의 효율이 독일군이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나치 독일군은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베저위붕 작전, 영국 본토 항공전, 유고슬라비아 침공, 그리스 침공 등 여러 실전을 겪었고, 이들 전역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기에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엄청난 강군이었으며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당시에는 아직까지는 정예병력의 상실량이 적은 상태에서 2년간의 치열한 실전 경험까지 얻었기에 장비 숫자의 부족을 베테랑급 운용법으로 해결했다.

소련군의 장비는 독일군에 비해 그다지 뒤떨어지지는 않았고 일부 분야에서는 오히려 우세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KV-1T-34-76는 초기에 독일군의 주력인 3호 전차를 대학살하면서 독일군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기습을 당한 데다가 실전 경험이 없었고 경험 많은 장교들이 숙청을 당한 것 때문에 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특히 소련 공군 같은 경우에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행되는 날에 루프트바페의 전투기들과 폭격기들이 소련군 비행장을 향해 기습을 하러 왔는데도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서 멀뚱멀뚱 보고만 있다가 기습당해서 이륙도 못해본 채로 상당수의 전투기가 파괴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소련 공군은 독일군의 동진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1943년에 재건될 때까지 해군 항공대가 이를 채워야 했다.

4.1.1. 독일 국방군

독일군의 주요 전법은 이른바 '쐐기와 솥(Keil und Kessel)'이라고 불리는 양익 포위였다. 소련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일단 소련군의 주력을 패퇴시키더라도 후방으로 소련군이 도주하면 섬멸하기 어려웠다. 그러면 동원 가능한 병력이 많은 소련군이 시간이 갈수록 유리해지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 보병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가해 정면의 적을 붙잡아둔 후, 기갑 부대가 양익을 돌파하여 적의 주력을 포위하는 전법이었다.

해당 전법은 바르바로사 작전 중반까지 제대로 먹혀들어가면서 소련군은 대규모의 병력 손실과 장비 손실을 동시에 겪는다. 아무리 기습적인 개전이었다고 해도 소련군의 전력 손실이 매우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을 포위했다고 해서 소련군이 바둑돌처럼 바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포위망 내부의 소련군을 섬멸하기 위해서 상당한 화력과 병력을 투입해야 했으며 희생도 나오게 된다. 그리고 포위당한 소련군이 빠르게 소멸하지 않으면서 포위망을 구성하는 병력이 빠져나간 독일군이 후속하는 소련군을 다시 포위할 병력이 부족하게 되었다.[26]
4.1.1.1. 독일군의 오만: 10주짜리 병참 계획
한편 독일군의 군수 계획은 모두 '소련과의 단기결전'을 예상하고 그에 맞게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장기전에 대한 대비는 매우 부족했다. 흔히 독일이 러시아의 악명높은 동장군라스푸티차를 몰랐다는 것은 결과를 먼저 놓고 원인을 분석한 탓에 어느정도 과장된 경향이 있다. 프로이센 군대도 동원되었던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의 사투는 당시 독일군에게 매우 잘 알려져 있었고, 심지어 독일 사관학교의 핵심 교육과정이었으며, 결정적으로 1941년 당시 독일군 지휘부는 러시아의 환경과 기후가 얼마나 위험한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명백한 위험에 대한 독일군의 유일한 대책은, 그것을 대비할 장비를 준비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번개같이 빨리 끝낸다"라는 시간표가 전부였다. 히틀러와 할더를 비롯한 나치 독일의 그 누구도 '나폴레옹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노래를 부르며, 겨울이 닥쳐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10주짜리 승리 계획'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들은 작전 개시일까지 동계용 활동복, 부동액, 저온 윤활유와 같은 필수적인 동계 장비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알고도 체크리스트에서 배제시켜 놓고 있었다.

나치 독일군의 수뇌부가 전략적인 면에서 병참 계획을 제대로 만들지 않았더라도 실무진들은 최소한 10주간의 전투에서 모스크바까지 진격할 수준의 보급 계획을 만들어놓아야 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불충분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기본적인 병참 목표는 350만에 육박하는 병력으로 출발지점에서 1,500km까지 진군이 가능해야 하며, 진군중에도 보급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야 하며, 소련의 척박한 도로와 함께 독일이 사용하는 표준궤와는 호환이 안되는 광궤 철도를 사용해야 하고, 소련 침공과 동시에 나치 독일에게 필수적인 석유부터 고무까지 광범위한 부분의 전략물자 공급이 상당부분은 중단된다는 어려운 목표였다.

이런 문제에 대해 나치 독일군의 실무진들은 일단 낙관적인 목표를 설정했다. 탄약 소비량은 프랑스 침공 수준으로 적을 것이라거나, 소련군은 드비나 - 스몰렌스크 - 드네프르강 서쪽에서 완전하게 패배할 것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제 진행상황을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수준의 낙관론이었다.

이렇게 낙관적인 가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급물자를 확보하는 것부터 문제가 일어난다. 예를 들자면 고무의 경우에는 공급량 부족으로 인해 고무를 사용하는 타이어 공급이 부족했으므로 일부 차종은 강철제 바퀴로 교체를 검토하기도 했고 군화의 고무 구두창 부품이 생산정지되었다. 연료의 경우에는 더 심각해서 당시의 연료 소비량을 독일 육군이 예상한 필요최소량 이하로 줄였다고 하더라도 경유는 고작 1개월분, 전체 연료를 기준으로 하면 3개월분의 연료만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서 비축이 가능했다. 루마니아 왕국이 1940년 11월 23일에 추축국에 가입하면서 플로이에슈티 유전으로 대표되는 루마니아의 유전에서 동부전선으로 직접 석유를 보급할 수 있게 되었으나 기반시설 조성이 부족하고 전선으로 수송할 준비가 모자랐기 때문에 개전 1개월 후인 1941년 7월부터는 연료부족이 예상되었다. 노획으로 부족한 연료를 확보하려는 것도 벽에 부딪쳤는데 소련군이 사용하는 모든 연료는 옥탄가가 부족하기 때문에 독일이 사용하는 차량에 그냥 넣게 되면 노킹을 비롯한 각종 증상이 발생하기 때문에 고급 정유시설에서 벤젠을 정확하게 추가해야만 사용이 가능하다.

그리고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나치 독일군이 대규모 증강을 하면서 병참소요가 추가되었으므로 장비에 들어가는 예비부품을 비축하기는 커녕 신규 장비를 채우기에도 부품이 모자랐다. 애초에 기갑사단이 9개에서 19개로 대규모 증강이 이루어졌고, 보병사단을 포함한 다른 사단들도 120개 사단에서 207개 사단으로 늘어난 상황에서는 예비품 자체의 확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나치 독일군은 다양한 국가에서 제조한 차량을 사용하고 있기에 2,000여종에 이르는 다양한 장비를 운용중이라서 부품조달의 어려움이 더 커졌다. 이미 전투를 개시하기도 전에 중부집단군의 예비부품 요청량만 따져도 100만개를 돌파할 지경이었다.

탄약의 경우에는 비축량도 문제지만 전선으로 수송할 수 있는 역량부족까지 발생했다. 그래서 기본계획에 등장하는 12개월분의 전투를 생각한 예비 탄약량 확보는 아예 불가능했고, 전투 개시 당시에는 일선부대에 지급된 2~3회 분량의 기본휴대탄약과 20개 사단이 사용할 분량의 예비탄약만 확보한 상태로 전투에 돌입해야 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애초에 병참으로 공급할 물자도 부족한데 후방에서 전선까지 수송할 수단은 참담했다. 대규모 군대를 육상통로로 먹여살리려면 철도로 보급하는 것이 유일한 수단이지만 소련의 철도는 광궤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독일의 표준궤와 호환되도록 개궤를 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그리고 이렇게 벌어들인 시간을 소련군이 활용할 경우에는 거대한 영토를 활용한 종심방어에 돌입해버리므로 나치 독일군이 승리할 가능성은 급격하게 추락해서 바닥을 치게 된다.

그러므로 이미 프랑스 침공에서 사용했던 것처럼 트럭같은 수송차량으로 보급을 진행해야 했다. 그래서 나치 독일은 프랑스군에게서 노획한 차량 + 민간에서 징발한 차량 + 스위스같은 중립국에서 구입한 차량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차량을 모은 후에 나치 독일군이 자체적으로 보유한 차량까지 상당부분 집결시키는 방식을 사용해서 간신히 3개 집단군 후방에 평균 2만톤의 물자를 수송가능한 중수송부대를 편성 및 배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워낙 다양한 차종 및 예비차량 부족으로 인해 중수송부대는 수리부품과 예비차량을 전혀 확보할 수 없었고, 보병사단의 차량까지 상당수 징발했기에 75개의 보병사단은 소나 말로 견인하는 짐수레를 수송수단으로 지급받을 수 밖에 없었다.

중수송부대가 어디까지 수송가능한지도 도마 위에 올라갔다. 나치 독일군의 낙관적인 전망대로 소련군이 국경선에서 500km 이내에서 최종적인 패배를 당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중수송부대만 가지고는 스몰렌스크까지 진격한 후에 잠깐 진격을 멈추면서 철도가 개궤되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상황좋게 작전이 진행된다고 해도 물리적인 한계가 중수송부대에게 적용되므로 중수송부대는 500km 거리에서는 기갑사단, 기계화사단, 사령부를 포함한 33개의 고속기동이 가능한 중요한 사단급 부대들만 보급이 가능하며 나머지 111개 사단은 전혀 보급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가정도 중수송부대의 트럭들이 고장나지 않거나 수리부속을 즉시 얻어서 수리가 가능하다는 가정 아래에서 6일 이내에 왕복 1,000km 거리를 방해를 받지 않고 운행한다는 비정상적인 기준에서나 달성가능하기에 실질적으로는 500km에 도달하기도 전에 보급두절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나치 독일군이 채택한 임기응변은 최전선의 기갑시단이나 기계화사단, 차량화사단 소속 전차나 장갑차나 차량에 추가적인 연료 탑재를 위해서 드럼통이나 견인 가능한 이륜식 연료 트레일러를 추가해서 기본적인 항속거리를 늘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수송부대는 일선부대까지 직접 물자를 수송하지 않고 선두에 선 기갑사단과 후위의 보병사단 사이의 지점에 물자를 하역하고 귀환하며, 해당 물자는 보병사단에서 파견된 별도의 분견대가 경호하는 가운데 기갑사단같은 최선두의 부대에서 자체적으로 보유한 보급부대가 물자를 수령해서 최전선으로 복귀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여기에 더해서 물자보급은 최전선의 부대에만 집중시킴으로서 500km 거리 근방에 있는 드비나 - 스몰렌스크 - 드네프르강 서쪽까지 도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중수송부대를 활용한 보급의 한계였다.

근본적으로는 철도 수송이 이루어져야 500km의 한계를 돌파가능하다. 하지만 중수송부대에 차량을 집중시키는 바람에 우선순위에서 크게 밀린 철도부대는 고작 1,000대의 차량만 보유해서 완전히 차량화가 이루어진 철도부대는 고작 1/6에 불과하고 2/3의 철도부대는 차량이 거의 없는 상태로 도보로만 움직여야 하므로 개궤 작업에도 지장이 올 정도였다. 그리고 독일 본토에서 소련의 국경선까지 철도 수송이 원할해야 하므로 철도 증설을 비롯한 각종 작업에 철도부대가 동원되면서 개궤작업 훈련도가 크게 미흡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철도부대에게 주어진 차량은 영국제와 프랑스제 노획차량이라서 품질도 좋지 않을뿐더러 철도부대가 사용할 연료도 부족했으며 통신 및 연락시설도 부족해서 실제로 개궤작업에 돌입하면 얼마나 효율성이 나올 지 의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전투부대가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철도부대의 우선순위를 최하위에 가깝게 낮춘 나치 독일군의 수뇌부와 실무진의 실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병참체계에서 조직이 이중화된 것도 만만치 않은 불협화음을 가져다주었다. 육군최고사령부 휘하의 병참감과 병참감부는 보급에 대해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고 중수송부대를 비롯한 병참부대와 보급창을 관리한다. 그러나 철도 분야에 대해서는 국방군 수송국이 장악했기에 철도 수송에 대해서는 열차의 목적지와 수량같은 세밀한 분야까지 2개의 조직이 서로 협의해야 운용이 가능했다. 그리고 지도자원리에 따라서 양대 조직이 서로 협조보다는 자신들의 입장과 이해만 따르려고 했기에 실질적인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각각의 집단군에 철도선 1개 정도만 연결되는 정도의 낮은 지원만 가능해졌으며 그것도 개궤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달성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바르바로사 작전의 병참은 말 그대로 실행불가능에 가까울 수준으로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바로사 작전을 진행한 것은 폴란드 침공프랑스 침공도 병참준비를 개판같이 했지만 결국 속전속결로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승리한 것에서 비롯된 잘못된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치 독일군은 수뇌부나 실무진이나 10주내에 속전속결이나 국경선에서 500km 이내에서 소련군이 완전패배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그것도 충족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실한 병참준비를 했다. 애초에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침공에서의 나치 독일의 병참준비를 생각해본다면 바르바로사 작전의 병참준비는 그나마 신경을 쓰고 어느 정도는 물자도 마련하고 대책도 세운 것이라 발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동계 전투에 대한 대비책 같은 것을 거론할 단계조차도 아닐 수준으로 매우 미흡했다. 따라서 병참의 문제점은 이미 상황을 알고도 저지른 오만에 가까웠다.

4.1.2. 소련군

한편 소련군 역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동부전선 초반의 대패로 인해 통상적으로는 소련군이 전혀 준비를 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나, 실제로 소련은 1920년대부터 강력한 국방 정책을 밀어붙혔으며 1930년대의 급속한 공업화 덕분에 전투기, 잠수함, 전차의 보유량은 1940년 기준으로 세계 1위였다.
4.1.2.1. 약점: 대숙청의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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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37~1938년 사이에 벌어진 군 내부의 대숙청, 특히 사단급 이상의 단위 부대의 절반이 넘는 군 지휘관들이 처형되거나 굴라크로 끌려가는 바람에 큰 혼란과 질적 저하를 겪게 되었다.[27] 상술했듯이 소련군은 많은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것을 활용할 병력들도 충분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이를 운용할 군사 교리 또한 차근차근 발전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 대숙청의 결과로 이러한 교리를 발달시킨 장성들이 대거 쓸려나가게 되면서 그들이 세운 교리들이 부정되었으며, 그 이후로도 군사 이론가들이 스탈린에 반대했다는 명목으로 자주 숙청되었다. 그러다 보니 계속해서 운용 사상이 바뀌는 바람에 부대들은 해체와 재편을 반복하고 있었고, 보유한 전차와 항공기들은 스펙상 독일군 장비들을 상대로 우위를 가질 수 있었음에도 결과적으로는 적시에 활용되지 못하고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독일군에 의해 대량으로 격파되었다.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침략적인 의도를 내비치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군은 병력을 약 2배 가량 늘렸으나, 갑자기 몸집이 커지자 대숙청에서 기인한 부작용과 함께 장교의 부족이라는 큰 문제가 벌어졌다. 상급 장교도 물론 부족했지만 초급 장교는 그 수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대학생들에게 속성으로 몇 주 동안 교육을 시킨 다음에 바로 소위 계급을 달아주는 식으로 장교를 마구 양성하였다. 당연하게도 속성훈련도 제대로 거치지 못한 초급 장교는 현장에서 제대로 지휘능력을 발휘할 수 없으므로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소련군이 매우 둔중하게 움직이거나 주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태를 만들었다.

고위급 지휘관도 상황이 안좋았다. 대표적으로 1938년에 끝난 스페인 내전에서의 전훈을 잘못 해석한 것을 들 수 있다. 원래 스페인의 산악 지형에서 T-26같은 경전차를 보병의 호위 없이 단독으로 투입하는 짓을 저지르는 바람에 무용지물이 되버렸는데, 이런 것을 파악하지 못한 채 단순하게 전차가 산악지형에는 어울리지 않으며 보병과의 합동작전이 힘들다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장교들이 보고한 오류를 수정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기갑을 중요시했던 미하일 투하쳅스키처럼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해버리는 병크를 저지르는 바람에 고위급 지휘관에도 전문가가 부족해지는 문제가 생겼다.[28] 이 와중에서 독일군의 침략을 받았으니 결과는 뻔한 일이다.

공군에도 숙청의 올가미가 덮쳐서 유능한 지휘관 상당수가 "항공사고가 너무 잦은데 이거 사보타주 아냐?" 라는 NKVD의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 결과적으로 공군도 몇 년간 발전이 지체되었다. 사실 항공산업의 초창기에는 소련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상당히 많은 사고가 났고, 이는 소련만의 문제는 아니었으나, 항공기 문외한인 NKVD는 이를 반동들의 사보타주라고 생각, 저명한 항공공학자들을 수용소로 보내는 삽질을 하게 만들었다. 당장 소련의 저명한 항공공학자였던 니콜라이 폴리카프포프, 안드레이 투폴레프, 블라디미르 미야시쇼프, 세르게이 코롤료프 등은 수용소나 감방에서 몇년 복역을 했다. 그나마 수감된 상황에서도 항공기 개발이나 개량 업무를 담당할 수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신체의 자유가 없고 생활이 불편하며 감시당하는 상황이라서 발명같은 창조적인 생각을 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막대한 비효율이 발생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항공공학의 선도국중 하나였던 소련은 미국, 독일, 영국에 비해 몇 년 뒤쳐지게 되었다.

예외적으로 소련군이 핀란드군을 상대로 고전하다가 겨우 승리한 1939년에서 1940년까지 벌어진 겨울전쟁 때의 교훈은 헛되지 않아서, 소련군의 이후 월동 장비나 동계 작전 능력이 대폭 향상되었다. 후에 겨울에 발생한 모스크바 전투 때 겨울전쟁에서 붉은 군대 병사들이 흘린 피로 체득한 귀중한 전훈들은 유용하게 사용되어 소련군은 겨울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던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 승진한 키릴 메레츠코프알렉산드르 노비코프는 후에 소련군의 중추가 되었고 국방장관이 된 세묜 티모셴코는 군 개혁을 조용히 이끌었다.

그리고 냉전 당시 독소전 초반 소련군 참패의 원흉으로 간주되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도 러시아의 자료가 풀리면서 재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그는 야전지휘관으로서는 무능했고, 이는 겨울전쟁과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여실히 드러났지만, 스탈린과의 친분으로 군과 정치권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면서 나름 붉은 군대의 기계화를 소련의 경제가 감당하는 내에서 착실히 이끌었다. 보로실로프는 기계화를 주창한 투하쳅스키와 앙숙이었고, 투하쳅스키를 숙청하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의 기계화가 필요하다는 전제는 공감하고 있었고 소련의 경제가 감당하는 내에서 착실히 기계화를 이끌었다. 그리하여 BT 전차 시리즈T-34, KV 전차 시리즈 모두 그가 국방장관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소련군은 러시아 내전 이후 겨울전쟁 때까지 대규모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다. 실전경험의 부재는 1차 대전 이후 다른 나라도 유사했지만, 소련군이 독일군에 비해 이런 점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했던 점은 1차 대전에 대대장 이상급으로 참전한 고급 지휘관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러시아 고급장교 대부분은 귀족이나 반혁명세력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붉은 군대에 가담한 고급장교 수는 극히 적었고, 기본적으로 붉은 군대 장성급 고급장교들은 부사관이나 사병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전에서의 지휘 경험이 적다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았던 장교나 장성들은 있었으나 이 전쟁은 기본적으로 내전 성격을 띠었던 데다가 산악 지형에서 치러진 보병간의 교전이었던 만큼 여기서 쌓은 군사 지식, 병법이 대평원처럼 넓고 지형의 기복이 적은 소련에 바로 적용될 수 없었다. 독일군의 원수-상급대장들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대위급 이상이었기 때문에 작전참모나 현장 지휘관으로 활동하며 풍부한 지휘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대조된다.

작정하고 대규모로 전면전을 벌이는 데는 교리, 즉 종심돌파이론이라는 선진적인 교리가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의 선구적인 이론가들에 의해 어느정도 확립되어 있었으나, 1940년 당시는 이 이론을 개발한 이는 물론이고 스페인 내전에서 그나마 실전 경험을 쌓았던 인물들도 대숙청으로 상당수가 황천길을 밟은 상태였다. 특히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워 본 공군 참전자들이 숙청된 결과 소련 공군은 초기에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된다.

미하일 투하쳅스키같이 기동전의 개념을 제안한 유능한 장성들까지 처형되었던 데다가 이론까지 폐기되어서 나머지 사람들은 숙청될까 봐 투하쳅스키의 '투'자도 못 꺼냈다. 투하쳅스키가 제시한 기동전은 독소전쟁 도중 소련에서 다시 부활하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대숙청이 도움이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래도 납득이 안 된다면 그 게오르기 주코프조차도 대숙청 와중에 저승 갈 뻔했다. 다행히 전공을 세워서 칼날을 피했지만 만일 일본군이 그런 식으로 국경지대에서 도발을 한다는 운이 작용하지 않았으면 주코프도 끝장났다.

이런 식으로 지시 없이 훈련했다고 장교나 장성이 모가지가 날아가는 미친 피바람 속에서, 안 그래도 훈련 부족이었던 소련군은 더욱 더 경직되어 갔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군사 교리 또한 답보 상태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소련군은 2,90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감수하게 되었다. 이 수치에는 민간인 사망자의 비율이 상당했는데, 나치의 인종 청소 정책 때문이었다. 군인 총 사망자는 1,0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360만 명 정도의 포로 사망자도 포함된다. 바르바로사 작전 기간 동안 소련군의 손실은 전사자와 부상자 및 실종자, 포로를 합쳐서 490만 명이 넘어가며 전차와 전투기의 손실은 각각 20,500대와 21,200대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방어전 당시에는 쓸 전차조차 없어서 NI 전차라는 이름을 붙이고 민간용 트랙터를 되는 대로 엉망진창으로 개조한 테크니컬 경전차를 주력 기갑으로 내세워 쓸 지경이었다. 첨언하자면 이때 소련이 날려먹은 항공기의 수는 독소전쟁 전체 기간 동안 소련이 날려먹은 항공기의 40% 정도 된다고 한다. 포병의 피해도 극심해서 소련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중포병이 거의 삭제당했다.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이겨내는 데 활약한 40대 연령의 지휘관들도 전쟁 초기엔 실전 경험 부족으로 인해 전쟁에 대한 감각이 없기는 마찬가지라서 주코프마저도 독소전쟁 초기엔 수십만 명의 병력을 날려먹기도 했다. 결국 소련군은 계속 얻어터지면서 독일군 교리를 학습하여 이를 극복해 나간 것이다. 훗날 소련군의 명장 반열에 드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이반 코네프, 안드레이 예료멘코 등도 개전 초기에는 실전 경험 부족 때문에 계속 참패했고, 후퇴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원래 연대장이나 여단장급 인물들이 군단장이나 사단장을 맡고 있었으니... 다만 이 당시의 독일군은 2년간 계속 폴란드, 노르웨이, 프랑스, 영국, 유고, 그리스군 등을 상대로 실전을 치러 봐서 수준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감안하면 소련군이 졸전을 벌였다기보다는 독일군이 잘 싸웠다고 보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당시 독일군은 스스로가 자신했던 것처럼 규모, 전술에 있어서 최강이었던 것이다.

좀 더 직접적인 원인을 찾아보자면, 바르바로사 작전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갑작스럽게 파기하고 기습을 감행한 공격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진주만 공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전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갑작스럽게 기습 공격을 당하면 엄청난 피해를 일방적으로 얻어 맞을 수밖에 없다. 특히나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독일은 독소전 초기 일본이 진주만 공격으로 큰 이익을 얻었던 것처럼 어마어마한 전과를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진주만에서는 산업 시설 등은 건드리지 못했는데 소련은 산업 시설과 곡창지대및 인구까지 날려버렸다. 갑작스런 기습이 아니었다면 독소전쟁 초기 교환비가 20대 1에 달하는 참패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소련에서 스탈린을 대신할 지도자는 없었다. 스탈린은 서구 국가들과 협상을 잘 이끌어 냈으며, 소련이 분열되지 않고 통합된 지휘와 통제를 받도록 했다. 스탈린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거의 있을 필요가 없었던 인물로 표현되는데, 대숙청과 초반의 무리수를 포함하더라도 독소전쟁에 대한 공로를 완전히 부인하기는 어렵다. 전선에서의 싸움뿐만 아니라, 후방에서 소련 인민을 통제하며 무기를 생산하고 병력을 동원하며 자원을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다. 소련 인민들의 자발적인 희생이 있었다고 한들 그것이 중앙의 효율적 통제 아래 수행되지 않았다면 그런 효과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1942년부터 스탈린과 스타프카는 소련 전체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행사했다.

물론 전선에 관여하면서 스탈린이 벌인 실책은 커다란 것이지만, 그래도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이긴 것은 기적이다"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이것은 지나친 비약에 가깝다. 스탈린은 전쟁이 진행되면서 점점 붉은 군대를 신뢰하게 되었고, 군대의 고위 지휘관에게 자율권을 맡기며 스스로의 단점을 개선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헨리 키신저는 저서에서 "'스탈린과 히틀러는 모두 중대한 판단 실수를 저질렀으나 스탈린은 그것을 만회할 능력이 있었고 히틀러는 아니었다.'" 라고 평했다. 스탈린은 분명 크게 보면 첫째는 유능한 인력들을 숙청하여 군대의 질을 저하시킨 것, 둘째는 독일의 침공과 관련된 정보를 받음에도 이를 무시했으며 셋째는 전문가가 아니면서 전선에 관여해서 소련군의 추가적인 대손실을 이룩한 대실책이 있었지만 그의 잘못을 깨닫고 후방에서의 지원에 힘썼고 소련의 지휘관들은 그 지원을 받으며 독일군을 격퇴했다. 물론 스탈린이 모든 것을 총괄했고, 스탈린이 2차 대전을 혼자서 이끌었다 하는 수준까진 아니지만 말이다.

5. 전개

파일:독일 대소 선전포고문(슐렌부르크 선언문).jpg
1941년 6월 22일 오전 5시 30분(현지 시각)에 작성된
독일의 대소 선전포고문인 슐렌부르크 선언문.
서두는 다음과 같다.
"독일 동부 국경에서 적군의 전 군대가 대규모로 증강되며 준비한 그 결과로 직면한 피할 수 없는 위협을 고려하여,
독일 정부는 즉각적으로 군사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해당 사항은 동시에 베를린의 데카조노프[29]에게도 전달될 예정이다."[30]
독소전쟁 개전 당시의 러시아 라디오 방송
22 июня 1941 года
1941년 6월 22일.

Внимание.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Говорит Москва.
모스크바에서 전해드립니다.

Передаём важное правительственное сообщение.
정부의 중대 발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Граждане и гражданки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сегодня в четыре часа утра без всякого объявления войны германские 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атаковали границы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 여러분, 오늘 새벽 4시,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그 어떠한 예고나 선전포고도 없이 독일의 군대가 국경에서의 침공을 개시했습니다.

Началась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советских народов против немецко-фашистских захватчиков!
독일 파시스트 침략자들에 맞선 소비에트 인민들의 대조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Наше дело правое, Враг будет разбит!
우리의 명분은 정당하며, 적들은 패배할 것입니다.

Победа будет за нами!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유리 레비탄, 1941년 6월 22일 오전 12시 15분, 대조국전쟁 안내 방송 전문.[31] 몰로토프 연설 전문(영어 번역본)

5.1. 초기: 개전과 초기 공세(6월 22일 ~ 7월 20일)

1941년 6월 22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독일군은 추축 동맹군까지 합쳐 3개 집단군, 총 305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소련을 선제공격했다. 소련군은 만일을 대비해 독일과의 국경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해 놓은 상황이였지만, 독일이 선제공격을 해오리라는 것은 상정하지 못하여 방어선에 병력을 적절하게 배치하거나 방어전을 고려해놓은 것이 아닌 단순히 병력을 모아둔 것에 불과했으므로, 개전 초반부터 독일군의 기습에 큰 타격을 입고 반격 능력을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기술의 발전으로 전장 환경이 바뀌었으나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유능한 장교들이 전부 쓸려나간 게 특히 한 몫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시절이었다면 국경 지역에 배치된 대규모 병력이 유의미한 결과를 내놓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기갑군을 최초로 창설한 독일이었다.

소련군의 전차는 우수한 성능과 기동성에도 불구하고 보병 지원 이상의 역할을 배정받지 못했다. 단일한 전차 군단은 당연히 없었고, 전차들은 드넓은 소련 국경에 흩어져 있었다. 이래서야 기동성과 충격 효과가 발휘될 리가 없었다. 물론 브로디 전투처럼 개전 직전에 만들어놓은 소련 기계화군단처럼 전차를 대규모로 편제한 후 기동전을 수행하려는 조직은 있었으나 창설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부대로서의 행동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보급 및 정비 부족으로 인해 전투는 커녕 이동도 힘든 상황이 많아서 병력 규모에 비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하고 독일 기갑군단들에게 격파당한다.

거기에다가 경직된 지휘 체계로 인해 각 부대들의 자체적인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황의 불리함을 알고 상급 부대로 집결한다던지 하는 임기응변적 대책은 물론 없었고, 소련군은 자신의 자리를 사수하다가 포위되어 죽어나갔다. 독일 기갑군이 뚫은 구멍으로 대량의 독일군이 유입되면서 전방의 소련군은 그대로 갇히고 만다. 또한 독일군의 주공인 중부집단군 쪽에 소련군 사단은 얼마 없었고, 우크라이나에만 100개 사단이 투입되어, 거대한 소련군이 양분되는 일도 발생하게 되었다.

소련의 전투기들은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육군이 공중 엄호, 무기, 첩보, 통신체계도 없이 단 몇 시간 만에 궤멸되는 일도 잦았다. 그나마 이상 징후를 감지해 숙청될 것을 각오하고 경계 태세를 유지토록 한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의 지시 덕에 소련 해군은 급습에도 피해가 가장 적었고, 살아남은 해군 항공대들이 궤멸한 공군의 역할을 상당 부분 대신해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스탈린은 여름에 히틀러의 공격이 없을 거라고 예상한 나머지 별다른 경계태세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스탈린만의 생각은 아니라서 전쟁 전에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인 프리드리히베르너 폰 데어 슐렌부르크 백작은 독일의 소련 침공을 의심해 베를린 주재 소련 대사인 블라디미르 데카조노프에게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의심을 귀띔해줬는데 데카조노프 대사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려 한다는 주장은 영국의 거짓 선전에 불과하다."라며 일축한 일도 있었을 정도로 소련 정계는 독일의 침공을 예상조차 안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소련은 정보를 수집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기습에 휘말렸다. 6월 27일에 스탈린은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유린되었으며, 국경에 있던 기존 병력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독일군은 폴란드 침공으로 소련이 얻은 영토를 모두 돌파해서 예전의 소련 국경 관문도시인 민스크에 도착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중립을 지키던 헝가리 왕국마저 독소전쟁에 참전하면서 전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32][33] 이때 스탈린은 통치를 그만두고 자기의 다차(러시아식 별장)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이때 스탈린이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는 추측밖에 알 길이 없다. 확실한 것은 스탈린은 정치적 천재였고, 권력에 대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실패를 덮고, 그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책략이었을 수 있다. 이런 행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모든 책임을 질 수 있는 절대권력자가 등장하여 모든 것을 일원화된 체계 하에 통제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스탈린의 부재가 더 심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당시 소련에는 스탈린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며, 비등비등한 약자끼리 하는 주도권 싸움이 소련을 붕괴시킬 가능성도 있었다. 소련 정부의 수뇌부는 스탈린을 찾아가 그의 복귀를 호소하였고, 그를 공산당의 최고 직위와 정부 최고 직위에 오를 것을 호소했다. 놀랍게도 스탈린은 당 총간사 직위 외에는 공식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소련의 복잡한 정치체계로 인해 평시에는 그렇게 해도 스탈린이 소련을 충분히 통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몇 번 거절하다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7월 3일 스탈린은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했고, 소련 인민들은 스탈린의 재등장에 안심했다.

개전 이후 1개월간의 공세의 결과 3개 방면의 독일군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 북부집단군 (vs 북서부전구)
    북부집단군은 처음부터 2선급 장비와 병력으로 가장 작은 규모로 편성되었으나 오히려 진격은 상대적으로 순조로웠다. 발트해를 통한 보급기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동프러시아부터 출발 했으므로, 상대적 진격 거리도 짧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발트 3국은 독일 기사단의 후예들로, 소련으로부터 탄압받던 친독일계 주민들의 땅이었고[34], 현지의 협조도 매우 순조로웠다. 스탈린은 다우가바강을 이용하여 방어선 구축을 명령했으나 이 명령이 도달하기도 전에 만슈타인의 56기갑군단에게 번개같이 돌파당한다. 더 이상 방어할만한 요충지가 없었던 북서 방면군은 레닌그라드 근처의 스탈린라인까지 후퇴해야했다.

    북부집단군의 공세는 일단 스탈린 라인에서 막히고 말았다. 레닌그라드는 남쪽으로는 일멘호와 발다이 고원으로 인해 크게 우회 기동하는 것이 불가능 했고, 도시 자체도 좌우로 바다와 호수로 막혀 있는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에, 독일군의 진격 가능한 경로는 뻔하게 정해져 있었고, 이 경로로 진입하면 소련군의 중야포들이 매섭게 불을 뿜어댔다. 빈약한 화력과 장비의 북부집단군이 더 이상 돌파 작전을 펼치는 것이 불가능 했다.
  • 중부집단군 (vs 서부전구)
    중부집단군은 동프로이센과 폴란드에서 출발하고 독일군에게 가장 강력한 원투펀치인 구데리안의 2기갑집단과 헤르만 호트의 3기갑집단으로 집게기동(Zangenbewegung) 양익 포위를 반복하며 전진했다. 개전 후 2주만인 7월3일,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에서 포위된 서부전선군은 말그대로 깨끗하게 증발해버렸고 경악한 스탈린은 서부전선군 사령관인 드미트리 파블로프를 총살하고 티모셴코를 소환해 구멍이 나버린 정면에 다른 전선의 예비사단을 끌어오고 벨로루시의 서부전선군을 재편성하고 예비전선군을 급파해서 비뎁스크, 오르샤, 스몰렌스크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재구축 했다.

    구데리안과 호트는 민스크 포위섬멸에 참여하지 않고, 다시 한번 신속하게 스몰렌스크 뒤로 흐르는 드네프르강까지 집게 기동으로 적을 포위하기로 한다.[35] 여기서 중부집단군은 이 두 기갑집단 사령관과 뒤따르는 보병중심의 야전군 사령관과의 충돌이 발생한다. 구데리안은 이 재편성 중인 서부전구가 방어선을 만들기 전에 스몰렌스크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포위섬멸전에 참여하라는 상부의 경고에 대응하기 위해 2기갑집단을 둘로 나누어 2a기갑 집단을 뒤에 두고 절반의 부대만으로 도박에 가까운 시도를 했고, 그의 판단은 주효했다. 2기갑집단은 보리소프와 오르샤를 돌파하고 티모셴코가 서부전구를 전개 하기 전 스몰렌스크 남동부를 파고들어 포위 기동에 성공한 것이다. 한편 중요 거점인 브랸스크를 함락하고 스몰렌스크의 북쪽을 돌파하던 왼쪽 집게발인 호트의 3기갑집단은 문제에 봉착하고 있었다. 스몰렌스크의 북쪽은 끔찍한 습지대였고, 이곳은 전차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마차도 짐을 싣고는 통과하기 힘든 지역이었다. 이 구멍을 통해 스탈린은 불같이 공격과 도시 사수 명령을 내렸고 티모셴코는 아직은 열려 있는 스몰렌스크의 북동쪽으로 병력을 밀어넣을 수 밖에 없었다. 이때가 7월 10일경이었다.

    첫 번째 진격이 돈좌되자, 구데리안과 호트는 더 대담한 작전을 생각한다. 습지 기동이 무리라면 차라리, 드네프르 강을 넘어 더 뒤로 크게 돌아 스몰렌스크에 더해 스몰렌스크를 구원하러 오는 구출 부대까지 포함하는 2배나 더 큰 포위망을 만들자는 계획이었다. 호트는 즉시 20기갑사단과 7기갑사단을 앞세워 스몰렌스크를 한참 넘어 야르체보를 향해 돌격하고, 구데리안은 10기갑사단을 이용해 엘냐를 향한 돌파를 감행 했다. 돌파에 이어서, 7기갑사단이 소련 제16군을 도륙하며 야르체보와 엘냐를 연결시켰다. 스몰렌스크를 포함하는 거대한 포위망이 완성 된 것이다. 한편, 민스크가 완전히 소탕되기 전 먼저 9군이 스몰렌스크로 진격했다. 9군은 두 기갑집단의 포위 시점에 정확히 맞춰 도착, 스몰렌스크 정면을 압박하고, 클루게의 4군은 섬멸전을 마치고 뒤늦게 출발해서 우크라이나와 스몰렌스크를 연결하는 남쪽의 모길레프를 포위하였다. 7월 20일 경, 모길레프가 함락되고, 스몰렌스크 방면의 소련군의 보급기지가 사라졌다. 이제 스몰렌스크 지역에서 소련군이 축출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 남부집단군 (vs 남서부전구)
    반면에 남쪽에서 출발한 남부집단군은 시작부터 삐그덕 대고 있었다. 이들은 규모면에서는 중부집단군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사단의 절반 이상은 슬로바키아 의용군과 동맹인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군이 주축이었다. 남부집단군의 창 역할을 하던 클라이스트의 1기갑집단은 브로디 전투에 이어 우만 전투에서도 엄청난 손실을 입은 상태였다. 우만에서의 사투 끝에 결국 포위섬멸에 성공하고 흑해방면에서는 드니프르를 따라서 헤르손자포리아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중부까지 진출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를 앞두고 남부집단군은 총참모부에 남부집단군의 역량으로는 키예프 방면에 대해 "공격 시도조차 수 없다"는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한편 흑해 함대의 기지였던 오데사 또한, 연약한 동맹군의 군대로는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이후의 작전 입안조차 스스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5.2. 중기: 작전의 수정 및 키예프 함락(7월 20일 ~ 9월 30일)

영국 본토 항공전부터 모스크바 공방전까지 바르바로사 작전 상황

5.2.1. 작전 수정 : 8월의 대충돌

7월 중순 시점, 상황이 이렇게 되자, 10주짜리 시간표는 망상이었다는게 드러났다. 독일 군부는 물론이고 나폴레옹과 프리드리히 대왕의 환생이라 스스로 생각하던 히틀러 또한, 이제 3개 전략 목표를 모두 달성 할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우선 독일군의 보급/병참 역량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3방향으로의 돌파는 처음부터 독일의 보급 역량의 한계를 한참 벗어난 계획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철도의 궤도 호환 문제였다. 유럽의 표준 궤간과 다른 소련의 궤간에서 처음 계획했던 철도 보급 계획이 완전히 어긋나 버렸다. 전선이 멀어질수록 보급은 어려워졌고, 기갑 장비들은 자력 주행을 병행하다 보니 전선에 도착하면 이미 신품이라 말하기 힘든 상태로 변해 버리고 있었다.

개전 1달동안 소련군 200만명을 제거했음에도, 전진 하면 또 새로운 사단들이 나타났다. 소련은 우랄 군관구(UrVO), 볼가 군관구(PriVO), 중앙아시아 군관구(SAVO)에서 쉬지않고 남성들을 징집하고 있었다. 이들은 최대 3주남짓의 사격과 수류탄 이용법만 가르치고 열차안에서 분대를 정하고 정훈 교육과 총기 관리법을 교육받았다. 질적으로 우수할 수 없었던 이들 사단은 대부분 총알받이 사단으로 동원되었다. 한편, 독일군은 과거와는 다른 전투양상에 당황하고 있었다. 최전선에서 포위 당해 통신이 두절되고 고립된 소대나 중대가 항복 대신 마지막까지 저항을 택했다. 개전 직후부터, 독일군은 포위섬멸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간과 비용의 청구서가 그들의 계산과 다르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 남부집단군은 지지부진한 성과를 내며,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히틀러는 물론이고 독일군은 자신들이 소련을 과소평가 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총통은 나에게 군사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최근 몇 주 동안 그것은 때때로 매우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소련의 추진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련군의 장비를 완전히 과소평가했습니다. [...] 총통은 볼셰비키의 잠재력에 대한 소련의 보고서에 속도록 내버려 둔 것에 대해 속으로 매우 분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적의 탱크와 공군에 대한 그의 과소평가는 우리의 군사 작전에 엄청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심각한 위기였습니다."'
- 요제프 괴벨스의 1941년 8월 19일 일기 중 -

7월 말, 중부집단군의 병참수석 디오 클엄펠트(Ihno Krumpelt)중령은 계획을 벗어난 공세를 지속한다고 할 때,
① '3개 전선을 동시에' 지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② '3~4주의 '작전적 휴지'가 필요하다'
는 병참 역량의 상태을 보고했다.

파울루스의 워게임 결과에서 경고한 데로 독일군은 모든 역량을 집중해 단 한개 전선에만 보급이 가능한 상황에 직면 했고, (그나마 북부집단군은 발트해를 통해 보급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당시 독일군은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 중 하나에 역량을 집중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이 하나의 선택을 두고, 여기서부터 독일 군부와 히틀러 사이에 8월의 대충돌(Augustkrise)이라 알려진 갈등이 시작된다.

히틀러의 생각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목표를 축소, 중부집단군은 '작전적 휴지'에 돌입, 모스크바를 포기하고 독일군의 최강의 전력인 중부집단군의 두 집게발(Zange)을 돌려서 호트의 3기갑집단은 북부집단군을 향해 돌파기동, 4기갑집단은 남은 전력을 3기갑집단에 넘기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신규 편성을 시작한다. 3기갑집단의 목표는 북쪽의 스탈린 라인을 크게 우회 포위하여 깨트리고 이어서 고립된 레닌그라드를 함락, 구데리안의 2기갑집단은 그대로 남쪽을 뚫고 키예프의 뒤를 향해 남쪽에서 돌파하는 1기갑집단과 새로운 집게발을 형성하는 작전을 생각해낸다.

육군최고사령부(OKH)의 생각
한편 육군 최고사령부는 다른 전선을 '작전적 휴지'로 전환하고 보급을 중부집단군에 모아 전진하여, 1분 1초라도 빨리 모스크바를 예리하게 잘라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로이센의 군인들은 모두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기본으로 사고 하고 있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입각해 독일군은 장교들에게 전시에 목표는 언제나 하나의 목표로 집중하되, 이 목표는 적국의 무게중심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독일 군 장성들은 모두가 클라우제비츠의 가르침에 따라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자 연속이므로 소련을 꺾기 위해서는, 소련 행정부의 머리이자 공산당의 심장인 모스크바가 먼저라고 본 것이다. 이 또한 독일군이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36]

양측 모두, 병참의 한계와 현실을 수용하고 단일 목표에 집중하자는 의견을 낸 것이다.

사안: 동부에서의 전쟁 지속 (Fortführung des Krieges im Osten)

스몰렌스크 포위망이 닫힌 후, 중부집단군의 추가적인 작전은 다음과 같이 한다:
a. 육군총사령부(OKH)의 건의와 달리, 모스크바로의 즉각적인 진격은 주된 목표가 아니다.
b. 스몰렌스크 포위망 소탕이 끝나는 즉시, 중부집단군의 기동부대(기갑집단)는 분리되어 북부와 남부를 지원한다.

1941년 7월 19일, 총통 훈령 제33호,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는 자신의 뜻을 일방적으로 관철하여 총통 훈령 제33호를 통해 7월 19일 자신의 지침을 중부집단군에 하달한다.
중부집단군 장성들은 모두가 이 결정에 넊이 나갔으며, 각 군 장교들은 중부집단군 사령관 보크를 중심으로 불만과 저항의 목소리를 모았다.

5.2.2. 스몰렌스크에서의 반격

독일군의 이러한 사정을 모르고 있던 소련에서는 절망에 가득찬 대혼란이 벌여지고 있었다.
스몰렌스크는 모스크바의 열쇠라고 불리는 역사적으로 모스크바 방어를 위한 최호의 보루로 평가되는 곳이었고 모스크바에는 아직까지 참호선도 대전차 호도 없었다. 스타프카에게 스몰렌스크에서 물러서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7월12일부터 스타브카는 티모셴코에게 5개의 특수작전 그룹을 편성케하고 독일군의 돌출부를 두들기고 포위망 분쇄를 기도했다.
  • 로코솝스키 집단 (Rokossovsky) : 야르체보의 독일군을 축출하고 스몰렌스크-모스크바 고속도로를 회복
  • 카찰로프 집단 (Kachalov) : 남쪽으로부터 구데리안의 2기갑집단의 측면을 타격
  • 칼리닌 집단 (Kalinin) : 구데리안 2기갑집단의 돌출부 옐나 탈환
  • 마슬레니코프 집단 (Maslennikow) : 9군과 3기갑집단의 간극 돌파
  • 호멘코 집단 (Chomenko) : 호트의 3기갑집단의 측면 타격

이 '자살 돌격'에 가까운 처절한 반격은, (이후 8월 말~9월 초 2차 공세에서 이뤄진) '옐나 탈환'을 제외하고는 전술적으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공세들은 독일 기갑 돌파 전술의 약점(과도하게 노출된 측면)을 정확히 노렸음에도, 소련군은 결국 스몰렌스크의 포위망을 분쇄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바로 이 실패한 반격이 또 하나의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이 격렬한 저항은 '작전적 휴지'가 필요했던 독일 중부집단군의 예비대를 모두 소진시켰고, 2기갑집단과 3기갑집단을 스몰렌스크 전선에 일시적으로 묶여 있도록 만들었다.

2010년대 데이비드 글랜츠나 데이비드 스태헬(David Stahel)과 같은 연구가의 최신 전사연구에 따르면, 이 반격이 결과적으로 '8월의 대충돌(Augustkrise)'에서 독일군의 나침반은 망가뜨렸고, 그 결과 바르바로사의 추가적인 '8주의 지연'을 만들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5.2.3. 총통 훈령 제34호

최근 며칠간 소련군의 강력한 반격(스몰렌스크의 티모셴코 반격)으로 인해 중부집단군의 상황이 악화되었다.

이에 따라 '총통 훈령 33호'의 실행을 '일시적으로 보류'한다.

중부집단군은 기갑부대를 이동시키기 전에, 우선 '방어'로 전환하여 스몰렌스크 전선을 안정시키고, 노출된 측면을 정리하며, 보병이 기갑부대를 따라잡을 때까지 '작전적 휴지'를 갖는다.

1941년 7월 30일, 총통 훈령 제34호, 아돌프 히틀러

소련의 공세가 수습되자, 히틀러는 7월 30일, 총통 훈령 제34호를 하달하게 된다. 스탈린과 스타브카는 스몰렌스크-모스크바 선의 사수에 필사적이었고, 그들이 시행한 스몰렌스크 구출을 위한 거센 1차 반격은, 중부집단군에서 핵심전력인 2기갑집단과 3기갑집단을 동시에 빼냈다가는 아직 저항중인 스몰렌스크와 함께 중부집단군이 감당 불가능 할수 도 있다는 위기감을 불러 왔다. 이에 34호 훈령을 통해, 히틀러는 자신의 수정 계획을 하달한다.

3기갑집단을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대신 중부집단군의 기동방어를 위한 예비대로 두고, 2기갑집단만 기존 생각대로 키예프를 공략하는 집게발로 활용하겠다는 아이디어였다.

한편, 소련은 스몰렌스크를 지키기 위한 2차 공세를 퍼부었다. 다시한번 소련의 반격에 시달려야 했던 독일의 제 2,3기갑집단이 다음 돌파를 위해 전선에서 나와 다른 예비 사단들과 교체되며 10여 일간 휴식과 재편성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총통 훈령 제34호는 연기 됐고, 이 10여 일의 시간으로 중부집단군 장군들은 모두 안도를 했다.
중부집단군 전선이 안정화되었다. 따라서 '훈령 34호'의 '일시 보류' 조치를 해제하고, '훈령 33호'의 원래 의도를 즉시 재개한다.

북부: 제3기갑집단(호트)은 즉시 북부집단군을 지원하여 레닌그라드 공세를 재개한다.
남부: 제2기갑집단(구데리안)은 즉시 남쪽으로 선회하여 남부집단군과 협력, '키예프 포위전'을 실행한다.

중부집단군 보병부대는 점령지를 방어하고, 모스크바로의 공세는 이 모든 작전이 끝난 후에야 고려한다.

1941년 8월 12일, 총통 훈령 제34a호, 아돌프 히틀러
하지만, 이는 히틀러가 새로운 타협점을 구상하는 시간이었을 뿐이었다. 10여일 후인 8월 12일, 다시 히틀러는 총통 지시령 34a호를 하달한다. 히틀러는 여기서 목표를 원안에 가깝게 재수정, 중부집단군이 적의 반격거점이 되는 모스크바 주변의 보급기지들까지만 장악한 후 레닌그라드로 3기갑집단을 돌리고, 남부집단군은 2기갑집단의 지원으로 키예프를 점령 후, 도네츠 지역과 크림반도를 연내에 함락한다는 자신의 의지를 재확인 시켰다.

육군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는 8월 18일 육군총참모부(OKH)의 "오직 중부집단군만이 충분한 공세 역량을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서를 보고하며, "겨울이 오기 전, 지금 즉시 모스크바를 공격해야만 한다"고 마지막으로 간청했다.

8월 21일, 히틀러는 이 간청을 "겨울 전에 달성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는 모스크바가 아니라, 크림반도와 도네츠(경제/자원)이며, 북쪽에서는 레닌그라드를 폐쇄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설득이 안된다고 판단한 육군총사령부는 구데리안을 호출한다. 그에게 히틀러의 마음을 바꿔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구데리안은 8월23일 히틀러에게 날아와 교통, 정보, 정치, 행정의 중심지일 뿐아니라, 터키, 스페인, 남미 등 중립중인 제 3국들에게 모스크바 함락이 주는 인상에 대해서 설명 했으나, 히틀러는 독일 장군들은 경제를 전혀 모른다며 타협하지 않았다. 구데리안은 한번 더, 전차와 차량들이 남쪽으로 450Km, 다시 모스크바까지 800Km를 전진하기에는 마모와 연료소비를 감당 할 수 없음을 설명하며 마음을 돌리고자 간청했다.

결국, 이날 구데리안이 반대로 히틀러에게 설득 되면서, 육군총참모부도 41년의 모스크바 공격 가능성이 물건너 갔다고 판단하게 된다. 8월 25일, 구데리안은 구데리안 기갑집단으로 승격된 휘하의 2기갑집단과 2a기갑집단을 키예프로 돌파 시킨다. 이 시점에서, 구데리안 기갑집단과 호트의 3기갑집단은 스몰렌스크 포위임무에서 물러나 20여일 간 휴식과 보충을 받은 상태로, 돌파 공격의 역량은 다시 기갑 돌파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수준으로 회복한 상태였다. [37]


중기 시점의 주요 전개는 다음과 같다
  • 북부집단군 (vs 북서부 전선군)
    '루가(Luga) 방어선'에 막혀 멈춰 섰던 북부집단군은, 8월 중순 보병부대가 도착한 후에야 이 방어선을 겨우 돌파할 수 있었다. 9월 8일, 마침내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마지막 육로(슐리셀부르크)를 차단하여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점령'이 아니었다.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점령'이 아닌 포위 고사시키기로 결정했으며, 북부집단군의 주요 병력은 다른 전역으로 이동 시키려 하고 있었다.

    독일과 함께 영토 수복에 나선 핀란드의 총사령관 만네르헤임 원수는 9월 초, 1939년의 국경선(레닌그라드 북쪽)에 도달하자 전군에 '공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는 히틀러가 "레닌그라드 시내로 진격하라"고 강력히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핀란드의 영토 회복 전쟁이지, 독일의 정복 전쟁이 아니다"라며 '레닌그라드 공략'을 거부했다.[38]

    무르만스크를 향하던 독일의 에두아르트 디틀(Eduard Dietl) 장군 휘하 산악군단 노르베겐(Gebirgskorps Norwegen)은 핀란드군의 비협조, 그리고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소련의 14군에 고전하며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 중부집단군 (vs 서부 전선군)
    중부집단군은 작전적 휴지에 들어갔으며, 스몰렌스크 포캣의 섬멸에 집중했다. 티모셴코는 다시금 스몰렌스크를 구원하기 위해 2차 공세를 퍼부었으나 호트의 3기갑집단이 소방수로 활약하며, 모든 공세는 돈좌되었다.
  • 남부집단군 (vs 남서 전선군)
    구데리안 기갑집단의 키예프를 향한 쐐기 돌파 공격에 맞추어 남부집단군은 모든 보급을 1기갑집단에 집중하고 제1차 키예프 전투에 돌입한다. 구데리안은 2주 후 키예프 동쪽 후방에 당도하였고, 9월 15일경 남쪽에서 올라온 1기갑집단과 로크비차(Lokhvitsa)에서 합류하며 키예프 포캣을 완성시켰다. 그 결과는 무려 66만여명의 포로를 포함한 100만명이 넘는 전사상자가 나온 인류 사상 최대의 포위섬멸전이 었고, 구데리안의 출발로부터 단 4주만에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가 떨어지고 만다. 이 결과는 모두의 에측 밖의 일이었다. 이 당시, 구데리안은 물론이고, 독일과 소련의 지휘부도 모두 놀랐으며, 전세계가 충격에 빠져들었다.

  • 영국과 미국
    이 시점에서, 외교적으로 미국은 추축 동맹을 궁극적인 주적으로 확정했다. 미국은 추축동맹국에 대한 금수조치를 확대하며 소련을 돕기로 결정했고 소련으로의 안전한 보급선 확보를 요청했다.
    영국은 소련의 생명선을 확보하기 위해 무르만스크에 제151 윙(No. 151 Wing RAF)를 파견해 직접 독일 공군을 요격하고 또한 소련공군의 부활을 위한 교육 훈련을 수행하였다.
    한편 유보트가 없는 더 안전한 보급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소련과의 연계하여 기습적으로 페르시아 침공을 감행한다.

  • 일본 제국
    9월 초, 중부집단군에서 이탈, 키예프를 공격중인 구데리안 기갑집단의 소식을 접한 일본의 대본영은, 독일군의 전략이 수정되어 독일이 41년 모스크바 점령은 포기 했음을 간파하고, 얻을게 적은 연해주를 대신하여, 자원의 보고이자 무주공산인 동남아시아에 대한 침공 계획을 확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은, 9월 14일 리하르트 조르게에 의해 캐치되고 모스크바에 보고된다. 조르게의 보고로부터 2일 후인 9월 16일, 주코프 장군은 스탈린에게 시베리아의 정예사단들을 이동시키자고 건의 하지만 기각 당한다.

5.3. 후기: 태풍 작전과 소련의 반격 공세 (10월 2일 ~ 1월 말)

5.3.1. 태풍 작전의 발동과 또 한번의 대승리

할더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부터 집요하게 침공 추진이 끊기지는 않되, 교묘하게 히틀러가 모스크바에 관심을 쏟도록 유도해 왔었다. 하지만 히틀러와의 담판결과 태도를 바꾼 구데리안에 의해 그의 꿈은 무너지고 좌절과 경멸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구데리안은 8월 25일부터 남진을 시작했으나 8월31일, 데스나 강에서 한계에 봉착했다.[39] 보급과 증원을 두고 수 차례 싸운 결과 결국 구데리안은 46차량화사단과 GD사단을 증원을 받아내고 다시 돌파를 재개했다. 남서전선군이 아껴두었던 최정예 전차사단들이 연달아 격파되며, 결국 9월 5일 남서전선군의 북측방어선이 무너졌다. 이제 키예프 뒤쪽으로 방어 진공 상태가 열리게 된 것이다.

키예프의 포위 성공을 확신한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이날의 전과를 보고 받고 갑론을박 중이었던 모스크바 방면의 공격 계획 가동 여부에 대해서, "지금의 상황이라면 가능하다"는 의견을 도출하고 모스크바 공격 계획을 히틀러에게 제출했다. 히틀러는 이에 설득되어 다음날 태풍작전을 발표하게 된다.

주제: 모스크바 방면에 대한 작전

1.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 내익(內翼) 사이의 적 부대에 대한 초기 성공은, 레닌그라드 지역의 포위가 진행됨에 비추어, 중부집단군 정면에서 교전 중인 티모셴코 집단군(서부전선군)에 대한 결정적인 작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티모셴코 집단군)는 반드시 겨울 날씨가 시작되기 전에(bis zum Einbruch des Winterwetters) 가용한 제한된 시간 안에 섬멸적으로 격파되어야 한다(vernichtend geschlagen werden).

2. 이를 위해, 양익(북부/남부집단군)에서 '불필요하게 된(entbehrlich werden)' 육군과 공군의 모든 전력을 적시에 중부집단군으로 집결시켜야 한다.

3. 육군총사령관(OKH)의 보고에 따라, 본인은 이 작전의 준비와 수행을 위해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a) 북부집단군의 제4기갑집단(Panzergruppe 4)[회프너]과 제8항공군단(VIII. Fliegerkorps)[리히트호펜]을 즉시 중부집단군으로 이동시킬 준비를 하라. 이 이동은 남부집단군의 작전(키예프 포위전)이 성공적으로 종결되어, 중부집단군의 남익(南翼)[구데리안의 2기갑집단]이 다시 자유로워지는 시점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b) 제4기갑집단과 제2기갑집단의 적시 도착에 대한 확신이 설 때까지, 중부집단군은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며 방어 태세를 갖춘다.
c) 이 새로운 공세 작전의 목표는, 스몰렌스크 동쪽에 위치한 적군을 뱌지마(Wjasma) 방면을 목표로 하는 이중 포위(doppelter Umfassung)를 통해 섬멸하는 것이다.

4. 오직 이 포위 섬멸전이 완료된 이후에야(Erst dann),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를 향한 추격을 개시할 수 있다. 이 추격은 우측은 오카(Oka) 강 상류를, 좌측은 볼가(Wolga) 강 상류를 경계로 한다.

(이하 생략)

1941년 9월 6일, 총통 훈령 제35호,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는 이 작전을 10일 안에 마치라고 했으나 파울루스는 현실적으로 9월말은 되어야 보급과 재배치가 완료 될 수 있다고 보고했다.
특히 남쪽으로 크게 이동하며, 정예 전차사단과 격전을 치른 구데리안의 2기갑군[40]은 본국에서 그동안 새로 양산된 3호, 4호 전차 200여대를 모두 몰아받을 정도로 손실이 컸으며, 휴식과 재편성의 시간이 불가피했다.

'태풍 작전'은 9월 30일(구데리안 선공)과 10월 2일(주력 공세)에 시작되었다. 소련의 서부/브랸스크 전선군은 독일의 3개 기갑집단에 의해 또다시 완벽하게 포위되었고, 66만 명 이상이 궤멸되는 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이 완성되었다.

이 서부전선군이 소멸당하자, 소련은 국가 붕괴를 대비하는 비상 조치들이 시행된다.
  • 수도 이전 명령 (10월 15일): 수도를 1,000km 떨어진 쿠이비셰프(Kuybyshev, 現 사마라)로 이전하라는 비밀 명령 발동
  • 레닌 시신 안치소 이전: 레닌 시신마저 방부 처리되어 열차에 실려 튜멘(Tyumen)으로 긴급 대피
  • '모스크바 패닉'과 계엄령 선포 (10월 16~19): 노동자 파업과 약탈, 이어 계엄령 선포와 NKVD의 즉결처형 권한 발동
  • 불가리아 대사를 통한 강화 제의 : 독일에게 우크라이나와 발트3국을 포기하겠다는 강화안 제의[41]

한편 스탈린은 이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았다.
  • 모스크바 시민 의용군 징집, 패퇴한 사단과 신설 사단의 신속한 모스크바 재배치
  • 주코프의 소환과 전권 위임. 여성과 노인 30만을 동원, 모자이스크 방어선 구축
  • 소련의 최정예 부대인 시베리아/극동군 본대, 태평양 함대 해군육전대 등 이동 명령
무엇보다도 스탈린 본인이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고 매일마다 모습을 공개하며 사람들의 동요를 막았다.

5.3.2. 최후의 도박 : 모스크바 공방전

10월 10일, 이제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향한 마지막 진격을 시작했다. 민병대와 패잔병들을 상대로 한 최후의 전투만이 남았다고 믿고 있었다. 모스크바 서쪽으로 9군이, 남쪽을 향해서는 구데리안의 2기갑군과 2군이 이제 오룔에서 툴라를 향해 진격했다. 모스크바에 진입하는 목표 일정은 11월 7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악천후로 독일의 모든 기갑집단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악천후에 이어, 기동로는 진창으로 변했다. 10월말 간신히 당도한 모자이스크는 진지화 공사를 가까스로 마쳤고 소련군은 결사적으로 이들을 저지했다. 독일군은 이 진흙길을 돌파하는 동안 엔진과 변속기가 망가지고 연료가 고갈 됐다. 진흙길을 돌파한 선봉 부대는 커녕 이들의 후방 부대 조차도 육상을 통한 보급은 이미 닿지 않고 있었다. 루프트바페수송기들이 하늘을 통해 구데리안에게 교체용 엔진과 연료를 전달했으나 필요한 양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중부집단군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땅이 얼어붙는 순간을 노려 최후의 도박을 걸어 보기로 하고, 북부/남부집단군의 마지막 연료와 탄약까지 긁어 모았다. 승전 퍼레이드를 할 것이라 생각 했던 11월 2주차에 드디어 땅이 얼어 붙었으며, 이 마지막 자원으로 북쪽으로 회프너의 4기갑집단, 남동쪽으로는 구데리안 2기갑군이 돌파, 모스크바의 배후를 돌아 만나는 양익 돌파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 때를 기점으로 드디어 동계 장비를 완벽히 갖추고 겨울 전투를 위해 훈련해온 시베리아 사단들의 전개가 시작됐다. 10월 6일부터 출발한 선두 부대들이 슬슬 모스크바 전역에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42] 독일군은 기존과는 차원이 다른 강력한 적의 저항에 직면 했다.

지지부진한 돌파 끝에 10여일이 지난 11월 21일, 구데리안의 전방 정찰부대가 크램린 궁의 첨탑을 확인했다. 하지만, 평년보다 빠르게 찾아온 추위는 갑작스럽게 재앙으로 변했다. [43] 하계장비만 갖춘 수십만의 병력이 동상과 영양실조, 이질등으로 전투력을 상실했다. 11월 21일 구데리안은 휘하 부대 기동력의 완전한 상실했고 모든게 실패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렇게 봄에 시작해서 10주만에 끝내겠다던 독일군의 소련 침공은 혹한의 한파 속에서 정지 되었다.


작전 후기 경과는 다음과 같다.
  • 남부집단군(vs 남부전선군[44])
    같은 시간, 무리하게 로스토프까지 진격한 클라이스트의 1기갑집단은 소련의 남부전선군의 반격에 퇴각한다.[45] 그 결과 남부집단군은 도네츠크까지 물러났다. 이 문제로 히틀러에게 항명한 룬트슈테트 원수가 집단군사령관에서 해임당했다. 후임은 히틀러와 사상을 같이한 라이헤나우 장군이 됐다.
  • 중부집단군(vs 서부전선군[46])
    12월 4일 중부집단군 사령관 보크는 휘하 모든 부대에게 태풍작전의 중지를 명령한다. 주코프는 정예사단이 충분히 모인 12월 5일, 전 전선에서 반격을 시작, 모스크바를 앞둔 독일군은 르제프 돌출부를 남기고 수백Km를 다시 후퇴하기 시작한다. 히틀러는 이 반격에 대해 후퇴 금지를 명령했으나, 보크는 에리히 회프너구데리안과 합의 하여 자신의 직권으로 기갑군들을 퇴각시키고 사임하였다. 후임으로 4군 사령관 클루게가 집단군 사령관이 되었으며, 신임 사령관인 자신과 협의 없이 후퇴를 지속한 부대들을 모조리 히틀러에게 고발했다.
  • 북부집단군(vs 레닌그라드 전선군/카렐리야 전선군)
    레닌그라드를 포위한 북부집단군은 병력을 나누어 라도가 호수 남쪽을 치고 나아갔다. 북부집단군은 티흐빈까지 점령했으나 핀란드군이 더이상 치고 나오지 않을 것을 확신한 스타프카는 겨울전쟁부터 단련된 카렐리야 방면 제4군을 전부 빼내어 티흐빈에서 반격을 가했고 라도가 호수의 주도권을 탈환했다. 주력을 전부 모스크바로 보낸 북부집단군은 심각한 위기에 빠져 패퇴했고 레닌그라드 앞에서 간신히 전선을 형성했다. 이후 강추위로 얼어붙은 라도가 호수는 도시를 아사시키겠다는 히틀러의 야욕으로부터 인민들을 구원해줄 생명선이 되었다. 군사 작전이 아닌 도시에 대한 아사 작전을 수행하는 것에 환멸을 느낀 북부집단군 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는 사령관직을 내리고 군을 떠난다.
  • 미국
    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에서 소련군이 대 참패를 당한 직후, 미국은 공식적으로 소련에 대한 10억달러(2025년 원화 가치로 35조 규모)의 군수 물자 지원을 선언한다.
  • 일본제국
    독일군이 작전을 중지한 시점이었던 12월 7일 진주만을 기습했다.[47] 일본해군이 미국 전함을 여러척 격파했다는 사실에 고무된 히틀러는 영국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인 미국이 당분간 유럽에 힘을 쓸 수 없다고 보고 격정적으로 기뻐했다. 12월 11일 히틀러는 베를린으로 이동해서 미국을 상대로 화려하게 선전포고를 선언한다. 추축국의 전쟁광들은 자원과 자본과 기술을 모두 가진 미국의 잠재력을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6. 결과

파일:AAline.png
<rowcolor=white>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목표였던 A-A선과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획득하기로 계획된 영토.
붉은 선은 실제로 독일 국방군이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차지한 영토다.
“Die Operation ‘Taifun’ ist gescheitert. Unsere Kräfte sind erschöpft,
die Divisionen kampfunfähig.Der Führer will keine Rückzüge hören.”

“태풍작전은 실패했다. 우리 부대는 완전히 탈진했고, 대부분의 사단이 전투불능 상태다.
그러나 총통은 후퇴 이야기를 일절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1941.12.8, 프란츠 할더의 전쟁일지 중
“Mit dem heutigen Tag ist das Heer ohne eigenen Oberbefehlshaber.
Damit ist die Selbständigkeit des Generalstabs praktisch aufgehoben.”

“오늘로써 육군은 자체 최고사령관을 잃었다.
이로써 일반참모부의 자율성은 사실상 사라졌다.”
1941.12.19. 프란츠 할더의 전쟁일지 중

"1941년 안에 소련을 유럽의 변방이 아닌 아시아 끝으로 추방 시키겠다"는 나치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나치 독일의 대전략 자체가 크게 뒤틀려 버렸다.[48]

군사적 1단계 목표(레닌그라드, 스몰렌스크, 키예프)에서의 작전술적 대승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음 목표인 모스크바의 대참사를 불러왔다. 이들은 전쟁사에 전례가 없는 대승리로 인해 뒤틀린 시간표를 포기해야 한다는 현실을 망각하고, "아직 시간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치명적인 오판'을 낳았다. 병참/보급의 문제는 전략 수립단계부터, 패퇴하는 날까지 매일같이 보고되었으나 오만으로 덮어버렸다. 결국 독일군은 이 오판과 오만의 대가로 모스크바와 돈바스 장악이라는 최종 목표 달성에 모두 처참하게 실패했다.

이 작전의 결과,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추축동맹과 연합군의 전면전이 막을 올리게 됐으며, 한 배를 타는 것이 불가능 했을 수도 있는, 자유진영의 미국-영국과 볼셰비즘의 소련이 파시즘을 몰아내는 목표를 두고 끈끈한 동맹 관계에 들어가게 됐다.

소련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프랑스를 깨트린 독일 육군을 막아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자신감을 바탕으로 대원수 스탈린은 겨울이 끝나기 전 데미얀스크, 르제프 공세를 결단한다. 한편, 소련은 이번 위기 속에서 빠르게 자원의 분배와 재편성을 수행하는 저력을 보이며, 42년부터 즉시 총력전 체제를 완성한다.

6.1. 나치 독일

러시아의 영토는 독일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광활했으며 동쪽으로 진격할수록 우랄산맥까지는 점점 폭이 넓어지는 구조였다. 당시 나치 독일이 구상한 레벤스라움에서 절반 이상이 소련의 유럽쪽 영토일 정도였다. 따라서 나치 독일군은 현재 점령한 곳보다 더 많은 땅을 점령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며 진격할수록 어쩔 수 없이 병력을 분산해야 했다.

독일은 최초의 공세 때 소련군 주력이 소련 서부의 공업지대 방어에 매달려 후퇴하지 못하니 그것을 물리적으로 섬멸하면 소련은 무너져 내리리라고 예상했다. 이제까지 나치 독일이 수행한 전쟁은 프랑스 침공처럼 적국의 국토와 병력을 완전히 소모시키지 않아도 적국이 항복하는 결과가 나왔기에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예상이었으나 해당 예상은 전제조건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소련군은 쉽게 무너져 내리지 않고 끝까지 처절하게 저항했다. 독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수많은 소련군 장병들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죽을 힘을 다해 저항했으며 이는 지속적으로 독일군에 인명피해를 강요했고 1941년 12월 5일 기준으로 8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으며 여기에는 22,000명에 달하는 장교들이 포함된다. 게다가 이는 지원부대를 제외한 전투부대에서 난 피해인지라 더욱 뼈아픈 손실이었다. 1940년 시점에서 120개 사단 수준이었던 독일군이 소련침공을 위해 180개 사단으로 팽창하면서 이미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심각한 손실이었다.

이 시점에서도 소련은 소모, 섬멸은커녕 계속해서 전력을 증강하고 있었기에 독일군은 한 번의 결정적인 공격으로 소련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태풍 작전을 실시해 모스크바로 진격했지만 소련의 계절에서 그나마 상황이 좋은 여름이 끝나자 소련 특유의 혹독한 자연 환경이 시작되었다. 당장 러시아에 가을이 오자마자 라스푸티차 시즌이 시작되어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이 온통 뻘밭으로 변해 전차든 말이든 병사든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데 귀중한 2주를 낭비했고, 겨울이 되자 진흙탕이 얼어붙어 다시 기동이 가능해졌지만 얼마 못 가 이번에는 독일군이 예상했던 수치를 훨씬 뛰어넘는 역대급 겨울 폭풍으로 인해 동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고 전차와 무기는 얼어붙어 작동 불량이 속출했으며, 여기에 더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련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자 막대한 수량의 기갑 장비들을 버리고 긴급히 수십km를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현지사수 명령과 독일 장병들의 필사적인 분투, 소련군의 미숙한 군사운용에 의해 1941년 12월 17일에 소련의 공세가 사그라들면서 겨우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그 순간부터 독일군의 보급 체계, 진격의 통제, 포위섬멸과 돌파의 밸런스는 총체적으로 무너져 있었다. 단지 독일군의 기습 효과와 수적 우세[49], 소련군의 대숙청 및 군구제 긴급도입으로 인한 지휘체계 무질서에 따라 소련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일 뿐이며, 소련군이 퇴각하면서 질서를 잡기 시작하자 독일군의 내적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체급이 기존의 열강들과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다른 국가였던 소련을 다른 열강과 비슷한 수준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바르바로사 작전은 그 자체가 결함이었다.

독일군은 기존의 전략이었던 "기동하여 돌파하고 포위해서 섬멸하기"의 교리를 일체 바꾸지 않고 있었고, 이것은 동급의 국가가 아닌 압도적인 국토와 물자를 가진 적에게 시도하기에 부적절했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당시 나치 독일의 체급은 소련과 유사하였다고 평가받으나, 지도자원리 및 나치즘 특유의 인종차별주의로 인해 실질적인 생산 관리나 점령지 관리에서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의 행보로 인하여 그 역량에 비하여 한참 낮은 수준의 효율을 보였다. 덤으로 1차대전 당시에 고생을 한 독일 국민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각종 기호품과 생필품을 보급하면서 총력전 전환도 늦어져서 비효율성이 더 증가한 결과 독소전쟁 당시 독일이 소련의 주요 시설들을 재빠르게 점령하였음에도 도리어 소련에 비해 역량이 감소한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왔다.

독일군은 초창기에는 이와 같은 자신의 결함을 알지 못했고 모든 전선 지휘관들은 자기 부대와 자기 전선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들의 임무와 (자기가 생각하는) 전략적 성취를 위해서라면 최고 사령부에게 다른 부대와 지휘관을 유기하는 상황을 요구했으며 이것은 장성 간의 반목으로도 번졌다. 독일군 장성들이 입을 모아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던 북아프리카 전역은 그 붕괴와 동시에 유럽 추축국의 2인자였던 이탈리아를 패망으로 몰아넣었고, 중부집단군 장성들은 키예프에 대한 진군과 지원에 대해서 그 자신들의 포위섬멸을 막기 위한 히틀러의 선택이었음에도 이것 때문에 모스크바를 점령하지 못했다고 발광했다.

이후로도 독일군의 상황은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독일군은 인종주의를 철석같이 믿어 점령지 주민들에게 가혹한 정책을 펼쳤고 동부전선에서 계속 게릴라에 시달리게 된다. 애초에 점령지중 많은 지역들은 소련 치하에서 고통받기도 했던 지역들이었다. 그러니 적절한 대민작전으로 현지 주민들의 환영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날려버린 셈. 그나마 나았던 곳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였는데, 이 나라들은 인종이 완전히 슬라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증상은 점점 심화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더욱 치열해지면서 전투 부대에서도 인종청소부대들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광기를 드러냈다. 나중에 패퇴하는 독일군을 추격하는 소련군의 가혹한 부역자 색출과 보복까지 더해져 동부전선 기간 동안 동유럽은 생지옥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점령지에서도 게릴라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일은 가용한 보급품 및 장비 상당량을 소모해버렸고 이로 인해 전쟁의 결말은 예측하기 어렵게 되었다. 독일군이 남은 것들을 긁어모아 공세를 펼쳐도 바르바로사 작전에 비해 축소된 규모일 것만은 확실했다. 이러한 상황반전 속에서 독일군의 일부는 이미 독일이 패전할 것을 예감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적지 않은 수는 이 전쟁이 뼈를 깎는 장기전으로 변할 것임을 예상했다.

더군나나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련의 산업역량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에도 실패했다. 소련은 독소전쟁 개전 이틀 뒤 전시시설 대피 계획을 짜고 1941년 6월 30일 국가전쟁위원회를 만들어 스탈린이 위원장을 맡아 군수공장 이전 명령을 내렸다.# 독일군 폭격 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랄산맥 동쪽으로의 군수공장 이전은 광범위하고 빠르게 이뤄졌다.

11월까지 이전된 대형 군수공장만 1,503개. 연 923,000량의 화차와 수많은 우마차가 나치 공군의 주간공습을 피해 밤새워 모스크바 동쪽으로 설비를 실어날랐으며, 1941년 하반기 우랄 전시산업의 전차 생산량은 4,177량이었지만, 1942년 상반기에는 11,021량으로 배 이상 늘었다. 1942년 중반 이후 소련은 모스크바 근교의 산업생산력 회복과 더불어 주요 병기의 수량에서 독일을 추월하였으며, 이후 성능 면에서도 독일과 거의 대등하게 성장하였다. 1944년 소련은 전차 및 자주포, 각종 야포, 개인화기 생산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여 연합군의 최종적인 승리에 기여를 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물론 미국이 소련에 천문학적인 규모로 지원한 원조 물자가 소련의 보급을 사실상 책임졌으며 개전 초기 삭제당한 소련의 공군을 사실상 제로 상황에서 처음부터 건설해주다시피 했기 때문에 소련이 전차 및 자주포, 각종 야포, 개인화기 생산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크지만 말이다.

소련의 가혹한 추위와 라스푸티차로 인해 수많은 독일군과 장비들이 손실되었으며 독일군 야전부대들도 더 이상 전투를 치를 수 없게 될 정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40만 명의 인명 피해라는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었다.

한편, 모스크바 공방전으로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그래서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는 미처 병력 재편도 끝내지 않고 무리하게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 했다. 그래서 1942년 1월, 독일군의 돌출부 르제프에 게오르기 주코프이반 코네프가 대규모 공세를 가했다. 이것이 바로 르제프 전투다. 그러나 발터 모델이 소련군의 번개 같은 공세를 모조리 패퇴시켜버렸고 소련군 야전부대들은 수십만의 막대한 사상자를 발생한 채 패퇴해야 했다. 르제프 전투는 지금도 소련군의 수치로 기억되고 있다.

독일이 해상작전을 등한시한 것 역시 패착의 원인이 되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선 해상 봉쇄가 제대로 되기는커녕 이미 폭격을 제대로 맞아서 대파된 후 침몰하다가 착저한 전함 마라를 소련군이 간신히 물 위에 부유하도록 수리한 후 해안포대처럼 항구에 정박하여 계속 저항해도 막지 못해 결국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흑해에서도 소련이 착실히 처발리고 있었지만 제해권을 소련으로부터 빼앗지 못해 기어코 캅카스 유전지대를 탈취하는 데 실패했고 덕분에 소련 내 석유 고갈 사태를 피하게 돼 소련군이 열심히 탱크를 굴릴 자원이 마련되었다. 추후 무시무시한 기갑 웨이브를 생각해 보면 명백한 실수. 심지어 북극해에는 제대로 된 함대를 보내지도 못해 무르만스크로 들어오는 렌드리스 물자를 수수방관하게 되었고 말이다.

물론 나치 독일 해군U보트를 제외한 해군력이 워낙 답이 없을 정도로 약했던 것은 생각해줄 필요가있긴 하다. 소련은 바르바로사 작전 개전 당시 구식 드레드노트급 전함이긴 하지만 강구트급 전함 3척을 보유하고 수리불가능한 1척은 부유포대로 보유했는데, 독일은 침몰 전함을 제외하면 3척뿐으로 그나마 그나이제나우는 어뢰를 맞았고 샤른호르스트는 기관에 문제가 생겨 수리 중이라 가동 가능한 전함은 티르피츠뿐이었다. 이것만 가지고는 해안포와 요새의 보호를 받는 크론슈타트를 박살내고 발트함대를 격멸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티르피츠라도 좀 적극적으로 썼다면 모를까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하라는 해상포격은 안 하고 다른 해역에서 훈련에 투입해놓는 바람에 독일의 해상 장악력이 더 약화되었다. 흑해는 독일과 직접 닿는 바다조차 아니라서 다뉴브강 같은 하천을 통해 U보트와 어뢰정 몇 척 정도만 보내고 말았고 루마니아, 불가리아 역시 해군은 없는 것이랑 마찬가지라, 소련은 가장 위급했던 상황에서도 흑해의 제해권을 착실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독일 측의 바람으론 바르바로사 작전에 일본도 참전했어야 했다. 당장 소련군은 품질 좋은 보급품을 독일 쪽 전선으로 보내기 바빴기에 독일 입장에서는 일본군이 딱히 소련군에게 이기든 지든 상관없었다. 그저 숙청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유능한 지휘관의 발만 묶어두기만 해도 족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소련은 공격 안 하고 미국진주만 공습을 하여 태평양 전쟁을 개전했고 독일이 망하는 데에 지대한 원인을 제공했다. 소련은 일본이 대소련전에 참전하지 않겠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극동의 소련군 정예부대 다수를 모스크바에 재배치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독일만의 입장이고 일본 측에서도 할 말은 많았다. 일본은 할힌골 전투 이후 소련과의 전쟁을 두려워하게 된 데다가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만으로도 이미 경악하여 내각이 총사퇴할 정도로 당혹감을 느꼈었고, 향후 소련과의 충돌이 벌어져도 독일이 전혀 돕지 않아 국제 왕따가 될 것을 크게 우려했다. 때문에 바르바로사 작전 2달 전에 일본 역시 소련에 접근하여 소일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그런데 기껏 독일 따라 불가침조약을 맺었더니 그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총공격하니 일본 입장에선 매우 황당한 상황이었다. 전력 면에서도 중일전쟁에 일본 육군도 이미 수 년째 갈려들어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돌발행동을 한 독일을 도와줄 여력도 부족했으며 더 나아가 자신들이 돌발행동을 선사해 버렸다.

이런 요인들이 겹쳤기 때문에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전술적 대승리를 거두었으나 전략적 목표는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채 장기전과 소모전의 늪에 빠지게 된다.

6.2. 소련

독일이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음에도 소련이 받은 피해는 엄청났다.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결국 승리했기 때문에 크게 거론하지 않는 것 뿐이지 소련이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입은 피해는 어지간한 국가 수준에서는 그야말로 단숨에 나라가 망하는 수준의 대타격이었고 거대한 국력을 가진 소련의 입장에서도 치명타였으며 이후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요인을 만들었다.

직접적인 피해만 따져봐도 매우 심각하다. 490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로 모스크바 서쪽에 배치되어 있던 사단의 거의 전부가 증발했다. 소련의 절반을 먹여살리던 우크라이나와 막대한 가치를 지닌 돈바스 공업 지대의 상실은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에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거대한 패배만으로도 무조건 항복을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전략적 목표 달성을 저지한 소련군은 가능한 모든 예비 병력을 끌어모으며 저항하여 도리어 독일군에 반격을 가해서 모스크바 함락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아무리 소련이라고 해도 개전과 동시에 잃어버린 정예병력을 복구할 수는 없어서 말 그대로 훈련병보다도 못한 신병을 치열한 전투에 마구잡이로 투입해서 실전에서 전투경험을 쌓게 만드는 말 그대로 인력을 믹서기로 갈아버리는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이미 독일군이 점령한 서부 영토에 있던 인구를 상실해서 개전 직전의 소련의 전체 인구중 25%를 사용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병력이 대규모로 갈려나가니 소련의 인적자원에 심각한 타격이 오게 된다.

위에서 당시 소련군의 심각한 상태를 열거하긴 했으나 개전 직전까지 소련이 서부 국경에 집중시켜놓은 병력들은 최소한 군인 복무가 가능한 최전성기의 신체를 보유하고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했으며 철모와 제식 소총을 비롯한 장비를 충실하게 갖추었을 뿐 아니라 전차 승무원이나 운전병이나 포병같은 병과는 주특기훈련까지 수료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런 고급병력들에게 제대로 된 지휘관을 붙이고 실전경험을 쌓게 하면 충분히 유용한 정예병력으로 활용가능한데 개전 초반에 모조리 상실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개전 당시의 현역 병력은 한번 잃어버리면 재건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인구에서 청년이 차지하는 비중이 의의로 적은데다가 청년중에서도 군복무가 비효율적인 여성을 제외하고, 군복무에 부적합한 복무 부적격자를 제외하고, 군수산업 유지에 필요한 기술자들을 제외하는 등 여러가지 요소가 추가되면 실제로 군복무가 가능한 숫자는 매우 크게 줄어든다.[50] 프랑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호전으로 설명되는 소모전으로 인해 징집적령기에 있는 18세에서 27세까지의 남성의 27%, 5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프랑스 본토에서의 피해만 계산해도 130만여 명 사망, 350만여 명 부상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인구구조에 타격이 가해지고 마지노선같은 방어적인 전략전술을 채택했다. 나치 독일도 1944년 11월까지 전체누적 영구손실 500만을 입어, 이때까지 동원한 전 남성 인구의 1/3 가까이가 죽거나 부상당했기에 16세부터 60세까지의 모든 남성을 동원하는 국민돌격대를 창설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본다면 당시 소련이 입은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소련은 포위전으로 인한 실종 및 포로가 2,335,482명에 도달했고 나치 독일의 가혹한 포로대접으로 대다수가 사망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타격은 프랑스와 나치 독일을 단숨에 능가한다.

이렇게 되자 모스크바 공방전에서는 극동 방면에서 일본군을 경계하던 병력까지 끌어모아서 투입해야 했으며 이런 병력들도 1942년 초의 반격작전과 그 이후의 작전에서 소모되자 그 다음부터는 말 그대로 마구잡이로 징병한 병력을 훈련도 제대로 시키지 않은 채 치열한 전투에 바로 집어넣는 방식으로 전투가 이루어졌다. 당연하게도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1944년의 바그라티온 작전시기쯤 가면 편제만 9,000명이지 실제 병력은 2,000명 정도면 사단이라고 부르면서 실전에 바로 투입하는 지경에 처했으며 일선 병력의 증강을 위해서 영토를 탈환한 지역에서 무차별적인 징집을 감행하고 행정병, 보급병 같은 비전투병과의 인원까지 소총수로 투입해버리는 극약처방이 나치 독일의 최후의 전투인 베를린 공방전까지 유지되는 사태가 일어났다.[51]

무기와 탄약 및 각종 장비의 상실량도 엄청났다.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포위당한 후에 섬멸되는 식으로 패배하는 일이 연속되므로 전선에 배치된 보병장비와 전차는 기본으로 날려먹으며, 보통의 경우라면 최전선에서 약간 후방에 있는 포병진지에서 포격지원을 하기에 유사시에 쉽게 후방으로 후퇴시킬 수 있던 중야포를 비롯한 지원화기까지 모조리 상실한 것이다. 소련이 이후에 무기 생산에 집중하고 신형 전차를 개발해서 대량생산했기에 가려졌지만 중야포같은 대형지원화기들은 상실량 보충에 급급해서 신형 화기 개발이 지연되었으며 전후에나 제대로 된 개발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독일군에게 노획된 무기, 탄약, 장비가 너무 많아서 일반적인 노획과는 달리 자국의 제식무기로 채용해서 상당기간 운용해도 지장이 없을 수준이었다. 일례로 120mm M1938 박격포는 노획품이 너무 유용해서 나치 독일에서도 12cm 그라나트베르퍼 42를 개발하게 만드는 바람에 120mm 박격포 계열 화포의 표준화를 이룩할 정도로 많이 노획되었다. 그리고 소련의 구식 무기들은 독일군의 2선급 부대나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은 추축국용 장비로 대량보급되었으며 소련군 무기용 탄약도 워낙 노획 수량이 많아서 당장 사용에 지장이 없었고 나중에는 추축국에서 자체적인 생산 및 보급을 시도하고 성과가 있을 정도로 큰 몫을 차지했다.

그리고 식량 생산지인 곡창지대와 주요 광산을 빼앗기고 우랄산맥 근처나 너머로 멀리 피난보낸 산업시설은 아직 정상적인 가동이 덜 이루어진 상황에서 그나마 피난 보낸 산업시설의 대부분이 무기나 장비를 만드는 중공업이라는 소련의 상황은 식량 부족과 경공업의 미약함으로 인해 바르바로사 작전의 타격으로 잃어버린 무기와 장비를 보충하기에도 어렵고 장기전시에도 식량부족으로 고난을 겪을 처참한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소련이 군수공장들을 빠르게 후방으로 이동시킨 성공사례가 강조되는 경향이 있지만 피난이 불가능하거나 피난하지 못한 시설도 많아서 종합적으로 따지자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은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력의 75%, 식량 생산량의 50% 이상을 잃어버렸다.[52]

이런 상황에서 만일 나치 독일과 소련이라는 두 국가간에만 교전이 이어졌다면 소련이 승리는 가능했을 것이나 나치 독일군을 원래 영토까지 밀어내는 것이 최상급의 결과이며 보통은 다 밀어내지도 못하고 소련 영토의 일부가 점유된 상태에서 협상으로 종전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 것은 미국을 선두로 한 서방연합국의 존재였다.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이 참전하였다. 히틀러는 12월 11일에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며 알아서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12월 5일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에 정신이 팔린 탓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독일 육군은 이 결정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의 참전이 소련을 극한의 상황에서 소생시켰다. 애초에 소련은 중공업을 간신히 키워내어 어떻게든 군사 장비들을 생산하고 드넓은 국토에서 징집한 수많은 인구를 모아 독일군을 막아낼 군대를 만들었지만 군대를 유지시키고 사기를 올릴 수 있으며 전세를 역전시킬 목적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식량과 탄탄한 경공업에서 나오는 기본적 보급품은 매우 부족했다. 미국의 참전은 렌드리스로 일컬어지는 물자 보급으로 소련의 숨통을 트이게 만들어 주었고 특히 기습으로 치명타를 입고 사실상 삭제된 소련 공군을 무에서 유로 다시 건설하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소련이 독일을 막아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반격을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소련은 무기 생산에 공업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대규모의 소련군을 제대로 무장시킬 수 있게 됨으로서 나치 독일을 결정적으로 파멸시킨다.
[1] 군인이나 항공기, 전차 등 인적/물적 피해는 소련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추축군은 작전 초기에 계획했던 A-A선 도달에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중요 거점이었던 모스크바도 점령하지 못했다. 물론 모스크바에서 30km 지점까지 도달했긴 했지만.[2] 이 가운데 전투기는 2,770대였다.[3] 비전투 요인으로 인한 전사자 235,339명 포함.[4] 이 중 39,000명이 전사 및 실종[5] 이 중 26,355명이 전사[6] 이 작전 당시 독일군은 3개 집단군 소속 약 150개 사단 38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이게 얼마나 많은 숫자냐면, 현재 대한민국 국군 총병력의 7배에 달하고, 부산광역시의 전체 인구수보다 많은 머릿수를 동원한 것이다.[7] 단,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군사병기를 동원한 단일 군사 작전은 아니다. 가장 많은 군사 병기가 동원된 작전은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이 작전에서 소련군은 5,000여 대의 전차와 7천 기의 항공기, 3만 문의 포를 투입했다.[8] 프리드리히 1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을 가던 도중 익사하여 사망했다. 독소전쟁나치 독일의 패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9]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작전[10] 프란시스코 프랑코 치하 스페인국스페인 내전 이래로 추축에 우호적이었다. 발칸 반도 남부의 그리스도 실권자인 요안니스 메탁사스가 친독파. 핀란드는 겨울전쟁 이후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과 접촉 중이었고, 유고슬라비아 왕국 역시 당시 섭정이었던 파블레 왕자가 친독 성향이었다. 스웨덴은 추축국에 물자를 지원하며 달래기 바빴다.[11] 이 시점에서 유럽의 중립국들 중 진짜 중립이라 할만한 나라는 스위스아일랜드가 전부였고, 영국에 우호적인 나라라고는 전통적인 영국의 동맹국 포르투갈 정도였다.[12] 다만 예외적으로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이전에 소련의 인력과 미국의 물자가 합해지면 어떤 시너지를 낼지 모른다며 경고했다. 애초부터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이유가 소련을 적당하게 동유럽의 일부분에 묶어둔 상태로 나치 독일이 유럽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영향력을 증대하는 것이 나치 독일에게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13] 그리고 이것은 크림 전쟁 시기의 방관과 베를린 조약에서의 홀대로 인해 러시아의 적대감이 대영제국에서 독일에게로 옮겨가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14] 이 절멸 전쟁이라는 개념은 1941년 3월, 히틀러가 장군들을 모아놓고 "이것은 기존의 기사도적인 전쟁과는 다르다"라고 선언함에 따라 구체화되었다. 포로로 사로잡힌 소련군 정치장교를 즉결 처형하라는 정치장교 명령(Kommissarbefehl)이라던가, 아인자츠그루펜이 점령지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것 또한 이것의 일환이었다.[15] 이미 독일은 1939년 초엽 체코슬로바키아 제2공화국을 합병하며 중앙은행으로부터 상당수의 금을 빼돌려 어음 빚을 갚았던 경험이 있었다.[16] 당시 스페인에서 소련으로 넘어간 금의 일부는 스페인 제국 당시에 잉카 제국이나 아즈텍 제국에서 강탈한 금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스페인의 재정상황이 악화된 지 오래라서 금도 부족한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소련으로 넘어간 금의 절대적인 수량은 700톤으로 상당히 많았다.[17] 소련의 여성 스파이. 1931년에 GRU(소련 정보총국)에게 포섭되어 그때부터 대외적으로는 독일 외무부 직원으로 활동하였으나 내부적으로는 반나치 간첩으로 활동했다. 1942년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18] 심지어 그가 탈환했던 토브룩은 본래는 이탈리아군의 거점이었다.[19] 그 외에도 당시의 소련군 독트린과 전략전술상 2개의 방어선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나 스탈린 선이 지형지물적인 방어요소가 부족하고 너무 길다는 것도 있었지만 대외공개용이나 면피용 수준의 사소한 이유에 불과하였다.[20] 소련이 몰로토프 선 건설을 시작한 시점이 1940년 6월 26일이었으니 독일의 침공까지 채 1년도 안남은 시점이었다.[21] 외교적 수사로 돌려 말한것도 아니고, 아예 "그래, 전쟁해주마!"라며 직설적으로 말했다.[22] 정식 명칭은 관동군 특종 연습(関東軍特種演習) 작전이었다.[23] 즉, 수도였던 모스크바가 독일군에게 함락되었을 경우.[24]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국경의 대습지로, 프리피야트 시 북서쪽 벨라루스 영토지역과 남서쪽 우크라이나 영토지역에 걸쳐 영국 전체나 한반도 전체 크기보다 큰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엄청난 규모의 습지이다.[25] 이 사실은 파울루스가 소련측 검찰에 의해 뉘른베르크 재판의 법정에 세워진 1946년 2월 11일경의 증언으로 재차 확인되었다.[26] 이런 와중에 히틀러는 정치장교는 포로로 인정하지 않고 체포하는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것이 알려지자 병사들의 독전 임무를 맡은 소련군 정치장교를 자극하여 오히려 전투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포위당한 소련군이 전황을 뒤집지는 못한다는 걸 알고서도 최후까지 싸우는 경우가 자주 발생해서 안그래도 바쁜 독일군의 발목을 자주 잡았다.[27] 대숙청이 적어도 겨울전쟁과 동부전선 초반까지 큰 혼란을 야기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대숙청에서 날아간 인물들 중에 상당수가 정치적으로 출세한 무능한 사람들 혹은 현대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사라진 후 전문적이고 현대적인 교육을 받았던 유능한 40대 지휘관들이 전면에 나설 기회를 제공해서 결과적으로 소련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최근의 반론을 감안해도 그렇다.[28] 덕분에 전차 부대들을 모두 여단급 이하로 축소재편했다가 1940년 독일군의 전격전의 대성공을 보고 다시 군단급으로 재편하기로 결정했다.[29] 당시 베를린 주재 소련 대사.[30]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이 문서를 데카조노프에게 건네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모스크바에 전해주시오. 그래도 나는 대소 전쟁을 반대했다고."[31] 독소전쟁 개전 직후 스탈린이 11일간 잠수를 타면서, 개전 직후 급박한 사태를 알리는 연설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대신하였다.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1941년 7월 3일 라디오 방송에서 국난에 맞선 인민의 단결을 촉구하는 연설과 함께 공무로 다시 복귀한다.[32] 헝가리의 독소전쟁 참전은 좀 복잡한 내면이 있는데. 헝가리는 독소전쟁 발발 이후 1차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처럼 참전파와 중립파가 싸우고 있는 상태였다. 참전파는 독일 편에 참전해 승리의 과실을 얻고 향후 생길 트란실바니아 문제에서 독일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중립파는 소련을 침공할 명분이 없다고(독일과 헝가리간 추축조약은 조약국이 타국으로부터 침공을 당할 경우에만 도울 의무가 있었다) 주장하며 싸우고 있는 상태였던지라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1941년 6월 26일 신원 미상의 폭격기 3대가 헝가리의 도시인 커셔(Kassa, 현 슬로바키아 코시체)를 폭격했고, 이 폭격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군 수사관들이 사용된 폭탄이 소련제라고 주장했다(그 외에 폭격기 3대에 소련 공군 마크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마크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따라 커셔 폭격의 주범이 소련이라고 생각한 헝가리는 그 다음날인 6월 27일, 라즐로 바르도시 총리가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에서 대소선전포고를 함에 따라 독소전쟁에 참전하게 된다.[33] 다만 아직까지 커셔 폭격의 주범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주범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소련의 의도적인 폭격이라는 주장부터, 또는 소련 공군이 슬로바키아를 폭격하려다 실수로 헝가리를 폭격했다는 주장, 독일이 헝가리를 독소전쟁에 참전시키기 위해 저지른 짓이라는 주장, 또는 독소전쟁 참전을 위한 헝가리의 자작극이라는 주장, 아님 루마니아 왕국이나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의 공격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34] 이들은 나치로부터 열등인종 취급을 받지도 않았기에 오늘날까지도 나치를 중립적으로 보거나 해방자로 칭송하기까지 하는 경향이 있다.[35] 이 기동은 상부와 합의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36] 히틀러는 이후부터 이런 전문 군사교육에 대해 이후 죽을때까지 반감을 드러낸다.[37] 프란츠 할더의 '전쟁 일기(Kriegstagebuch)' 등에서 비롯된, 8월의 작전 중단이 기갑부대의 '가동률(%) 저하' 때문이라는 기존 통설은 최신 연구에 의해 정면으로 반박되고 있다. 2022년 Wojciech Aleksandrowicz는 잠들어 있던 독일 군사기록보관소(BA-MA)의 1차 사료(KTB)를 재분석하여, '가동률(%)'이라는 수치는 할더가 자신의 '작전 계획 실패' 책임을 '일선 부대의 역량 부족'으로 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강조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데이터임을 지적한다. 이 연구는 당시 작전 가능한 전차의 '절대 대수(Absolute Number)'와 일일 정비 역량('수리 속도')을 고려할 때, 독일군의 실제 공세 역량은 여전히 충분했다고 결론 내린다. 출처: "The Operational Readiness State of Tanks in Army Group Center's Panzer Groups in late August 1941", 2022. 10. 02, Wojciech Aleksandrowicz[38] 이 결정은 훗날 핀란드는 추축국이 아니다. 라는 명분을 만들어,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핀란드를 외교적으로 지켜주는 근거가 된다.[39] 할더는 이 보고를 듣고 구데리안의 정지와 위기에 대해 자업자득이라는 비난과 조롱을 일기로 남긴다.[40] 구데리안 기갑집단에서 2기갑군으로 승격[41] 이 제의는 90년대 소련 측 증거가 발굴 되었으나 독일측에서 이 제의를 받았다는 기록이 전무하여, 오늘날의 연구가들은 소련도 진심으로 던진게 아닌 시베리아 사단이 오기까지 시간을 끌려던 수단 이었고 독일측에서도 가치가 없다 보고 묵살 한것으로 보고있다.[42] 시베리아 횡단 명령은 10월 6일부터 10월 20일 사이에 각 사단에 순차적으로 내려졌으며, 명령 받은 시베리아 사단들이 모스크바에 전개 되기까지 4~6주의 시간이 필요 했다.[43] 최후의 양익돌파를 시도한 11월15일부터 11월 23일까지는 아침기온이 스몰렌스크 도심에서 -3.3°C ~ -10.6°C라는 관측 기록이 남아있다. 할더의 전쟁일기에 따르면 모스크바 근처에서 12월 6일 -36°C, 12월 7일 -38°C까지 기온이 내려갔다는 전선의 보고가 기록 되어있다.[44] 키예프에서 남서전선군이 깨끗하게 소멸되어 흑해방면의 남부전선군 중심으로 재편[45] 나치 독일 육군의 첫 번째 작전적 후퇴에 해당한다.[46] 뱌지마-브랸스크에서 서부전선군과 예비전선군이 소멸되어 주코프 중심으로 새 서부전선군을 편성[47] 일본제국 또한 이 작전을 사전에 독일에게 알려주지 않았다.[48] A-A선은 상징적 목표에 가까우며, 그 실제적 의미는 아인종인 슬라브인을 우랄 동쪽으로 영구히 추방하는 것이다.[49] 일반적인 착각과 달리 바르바로사 개전 직후부터는 소련군보다 독일군이 더 많았다.[50] 전사(戰士)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에서 전투가 가능한 소질과 능력을 가진 사람은 의외로 적다. 기본적으로 전쟁터에서는 방해만 되므로 투입이 불가능한 복무 부적격자의 비율이 30%가 넘어가는 것은 기본이며, 나머지 인원들도 전투에 참여만 가능할 뿐 제대로 싸우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이런 사람들은 군수공장이나 산업체로 돌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가가 붕괴되기 때문에 군복무가 가능한 연령의 남성 중에서 보통 30% 정도만 군인으로 만들어서 전선에 투입가능하다. 그래서 현역 병력을 한번 상실하면 복구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51] 당시에 군복무가 가능한 청장년 남성 인구가 너무 많이 죽는 바람에 소련의 인구 구조가 파탄상태가 되었으므로 전후에도 포로까지 강제노동시켜서 다시 산업력을 복구해야 했고 다산을 크게 장려하고 팔 1개가 없는 장애인도 결혼이 가능할 수준으로 여성이 넘쳤다. 소련이 전쟁 전 인구를 복구하는 것은 1955년이었지만 노동인구의 여초 현상은 참전 세대가 모두 은퇴한 1985년에야 해소되었다. 이런 문제로 인해 핵무기를 개발 및 대량보유한 소련이 냉전 시기에도 적극적인 충돌을 꺼렸던 것도 독소전쟁의 대타격을 소련의 국민들이 모두 절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52] 그래서 스탈린도 승전 후에 측근에게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소련 공업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상황이니 무기대여법 없이 독일과 1대 1로 싸웠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