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2-05 15:09:34

국민돌격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1971-033-15%2C_Vorbeimarsch_des_Volkssturms_an_Goebbels%2C_Berlin.jpg
1944년 11월 괴벨스가 참석한 베를린 지역 국민돌격대 사열식 사진[1]

파일:external/www.dhm.de/pl004024.jpg
(국민돌격대 선전 포스터 "자유와 삶을 위해(Um Freiheit und Leben)")

1. 개요2. 배경3. 발등에 불이 떨어지다4. 막장
4.1. 무장4.2. 피복4.3. 여성 부대원
5. 국민척탄병6. 매체7. 유사 사례

1. 개요

Der deutsche Volkssturm. Volk(s, s는 접미사)+Strum. 독일어를 직역하면 그렇다는 거고, 실질적으로 '국민' 내지 '국가'의 '민병대' 정도의 뜻이 된다.[2]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에서는 향토예비군이라는 구수한 명칭으로 번역했다. 그게 진실이긴 하지만 국민돌격대가 정식 명칭이 된 이유는 실제로는 이들은 예비군도 아닌 민방위 이하의 전투력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나치가 자국민을 상대로 강요한 최악의 추태이자, 광신적인 정권이 어디까지 발악할 수 있나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물론, 영국의 홈 가드 같은 조직과 비교하면 정말 두려움에 떨며 있는 무기 없는 무기 만들어서 지급하는 건 같았으나 연합국은 미국이라는 든든한 조력자와 바다라는 장벽, 그를 지키는 정예 홈 플릿이 있었으나 대전 말 독일에겐 그런 조력자가 없었다. 그런데 나치는 누가 봐도 되살아날 가망이 없는 가운데, 국민들을 나치의 저승길 동무로 데려가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국민을 생각했다면, 신속히 항복하고 법적 지도자가 전쟁을 도발한 책임을 지며 일반 국민들을 구해야 했을 텐데, 나치 지도부는 아예 국민들을 역전의 가능성은 1%도 없는 가운데 자신들과 순장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없다.

2. 배경

본래 나치 정권은 과거의 독일 정권 및 국가조직 전체에 대해 비판적인 국가사회주의가 기반이었으며, 이 때문에 오래 전부터 정당 내에서는 독일의 국방 조직인 국방군(정규군) 전체를 척결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애초에 나치 돌격대(SA)부터가 예전의 군대는 제국 시절의 잔재이자 부르주아 계급의 앞잡이이므로 국가사회주의 이념으로 뭉친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근거해서 창설된 조직이었고 무장친위대 역시 이와 같은 이념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나치는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이라는 정당명과 국가사회주의라는 정당 이념에서 알 수 있듯 사실 이념적 기반을 사회주의에 두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내에 우파와 좌파가 공존하고 있었으며, 우파의 경우 유대자본만 기피하는 정도인 데 반해 좌파는 모든 자본가 및 구체제 엘리트 전체를 증오했다. 특히 돌격대는 후자에 가까웠고, 이런 이론적 대립은 돌격대의 수장이던 에른스트 룀의 숙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장검의 밤으로 인해 나치 좌파는 거의 다 숙청당했으나 돌격대의 군편성에 대한 관념은 힘러에게 어느 정도 계승되어 무장친위대의 건설에 영향을 주었고, 나치당내에 퍼진 정규상비군에 대한 혐오에 가까운 감정과 시민군에 대한 호감에 대한 연원은 19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19세기 독일 지식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시민군이라는 개념이 나치 돌격대와 무장친위대로 발현된 것이다.

심지어 헤르만 괴링공군으로 돌격대나 무장친위대와 비슷한 짓을 하려고 할 정도로, 나치 정권에서는 기존의 군부를 대체할 새로운 군을 만들 생각을 꽤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3] 그리고 이런 기존 군부 세력에 대한 불신과 그간 전쟁 수행 및 군사력 확보에 직접 기여하지 못했던 나치당 선전부장 겸 독일 국가계몽/선전상 요제프 괴벨스의 권력욕이 결합하여, 나치당은 1940년대 초반부터 나치당은 전국민의 총동원을 근간으로 하는 제5의 군대 창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것이 국민돌격대의 창설 기반이었다.

3. 발등에 불이 떨어지다

그리고 이런 국민돌격대의 소요가 실제로 제기된 것이 1944년 말이다. 1944년 11월까지 독일은 총 누적 영구손실 500만을 입어, 이때까지 동원한 전 남성 인구의 1/3 가까이가 죽거나 부상당하는 비참한 상태에 이르렀다. 일단 1944년 11월까지 독일이 동원한 총 인구는 약 1,200~1300만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전체 독일인 사망자 중에 군인 전사자, 기타 사망자[4]와 실종자만 270만여 명에 달했으며[5] 영구장애를 가진 사람과 부상자를 합하면 650만 명. 이 중 100만 이상이 아직 동원 상태에 있었는데 그 중에는 심각하지 않은 영구 장애를 가진 사람들까지도 포함됐다. 사실 상 이제는 군을 제대로 유지하는 것은 고사하고 한 나라의 남자 씨가 마르기 직전에 이른 셈이었다. 현재 동원이 유지되고 있는 인원은 이렇게 해서 사망, 실종자, 심각한 영구장애인과 중상자 빼고 650만이었으나, 이중 군인으로서 동원 가능한 인구는 이제 300만 이하였다. 그나마도 계속 빠른 속도로 전 전선에서 병력이 소모되어 1945년 즈음에는 대부분이 사상자가 되어 사실상 병력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다.[6]이 상태에서 괴벨스 이하 일부 급진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이 바로 모든 남성을 총동원해서 전쟁터에 내보낸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미 독일은 전체 남성 인구 3천 500만 중 1300만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고 있거나 참여했다가 손실된 상태였다. 독일의 고령화 비중이 7%였고, 유소년 비중은 대부분의 국가가 이 때 20~23% 안팎이니까 3500만 명 중 생산가능인구는 3분의 1 조금 넘는 2500만 명. 이는 성인이 된 독일 청년들 중 30세까지의 청년층 전원이 당연히 포함됐고 그 외에도 30세 이상 장년층 중에 상당수가 들어가 있었다. 수적으로는 1939년 기준 남성 청장년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었다. 나머지는 산업현장 등에서 일 시켜야 하거나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여 전후복구로 써먹거나 해야 할 인력이었다.

즉 독일이라는 국가가 멸망할 생각이 없으면 동원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라서 전선의 병력이 그렇게 부족하다고 비명 지르는데도 동원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국가가 망하거나 지속불가능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동원가능한 청년은 다 동원된 상태였다는 말이다. 이런 상태인데도 전선의 병력은 부족하고 국가는 사실상 패전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으니, 어차피 망할 거 전국민이 다같이 싸우다 죽는 게 낫지 않은가라는 주장이 현실적으로 보이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국민돌격대의 창설이 현실화되었고, 결국 1944년 10월 18일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명의로 국민돌격대의 창설 명령이 떨어졌다. 소집 대상은 16~60세까지의 모든 남성이었으며, 공식적으로는 독일국방군의 일원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독일국방군의 군수지원 및 작전협조를 받는 나치 정당의 군대였다. 훈련 또한 소집지역 인근의 육해공군이나 SS, 경찰 부대에서 맡았다. 소수의 시각이나 청각장애, 팔다리 등이 없는 중증 장애인 일부나 지적장애가 좀 있으면 면제받았는데, 애초에 선천적 장애인들은 순수하고 우수한 게르만 혈통을 유지한다는 히틀러의 미친짓으로 다는 아니지만 30년대에 좀 많이 죽은 상황이라, 이들은 1차 대전이나 30년대 말 이탈리아 반란군 진압지원을 위해 투입되었다가 의가사 제대했거나 전시 산업현장에서 산업재해로 장애가 생기거나 장애가 있긴 있으되 지적장애 3급이나 경계선 지능이라 가족들과 지역사회에서 원래 좀 어리버리하고 모자라지만 장애까진 아니고 일 시킬 수 있다고 둘러대던 사람들이었다. 이미 전쟁의 상처로 고생하던 사람들인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전쟁에 쓸만한 남자들 죄다 있는대로 징병해서 전쟁터로 다 내몰았는데 반이 죽거나 다치고 반으로는 전쟁을 할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진짜 노인들과 어린아이들 빼고 모든 남자들 중에 산업생산 등에 필요한 인력 빼고 아무 무기나 쥐어주고 전쟁터로 몰아넣어 그냥 죽을때까지 쥐어짜보자는 아이디어를 구상한 뒤 이걸 국민돌격대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하물며, 최종 결정권자는 군인도 아닌 나치당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였다.

국민돌격대는 예비군조차 아니다. 예비군은 이미 20대 남성들 및 30대 중 일부 군복무 경험자들로 따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예비군들은 이미 1940년 5월 시점에서 거의 전원 동원된 상태였다. 1944년 말 시점이면 독소전쟁으로 이미 30대 중에서 군복무 경험이 없는 사람들까지 40 아래이고, 산업현장 노동 등에 필수적인 인력이 아니고, 병역판정검사에서 현역판정이 난 사람들은 싹 다 군에 끌려간 뒤다. 산업 유지를 위해 나머지는 괴벨스가 아무리 정신상태가 이상하다 해도 도저히 징집할 수 없으니까 이제는 40~60대 보고 싸우라는 소리다. 1945년 독일군 보병의 평균연령이 40세인 게 다 이유가 있다.

현대 한국식으로 비유하면 국민돌격대는 방위산업체 직원, 민방위가 끝난 사람 중 60세 이하, 신체등급 6급, 경찰, 소방관, 중학생과 고등학생까지 긁어 모아다가 군복도 제대로 안 주고(주어도 우드랜드패턴이 아닌 더 앳날의 민무늬 군복이나 교련복을 지급하고) K2 소총이나 M16A1도 아닌 M1 카빈만 지급해서 싸우라고 내보낸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상황이다 보니 농담도 나왔다고 한다.
Q: 국민돌격대가 귀중한 자원인 이유는?
A: 머리카락은 이고(백발), 이는 이며(금니), 사지는 이기 때문(노인들이니 사지가 무거움)이지!

나중에 가면 이게 더욱 발전해서 독일 국민은 전원 전투병이란 정신나간 선언을 때려버린다. 전원 전투병이 돼버린 상황에서 후퇴하면 사살한다는 명령까지 내린지라, 피난민=탈영병으로 피난민이 되면 아군에게 사살되고 전쟁터에선 소련군에게 죽는 상황이 되고 만다. 하지만 동부전선의 국민돌격대원들은 항복하나 싸우나 다를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국방군이나 SS대원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싸우거나 적극적으로 교전에 협조했다.

물론 서부전선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히틀러 유겐트를 비롯한 몇몇 광신자들이 "패배주의자는 사형"이라며 사람들을 목매다는 일도 벌어졌지만, 대다수는 별로 싸우지도 않고 미군이나 영국군에 항복하거나 그냥 탈영(?)해서 민간인으로 돌아가버리는 사람이 많았다. 가끔은 방금 전까지 총쏘면서 미군들을 사살한 사람이, 총알이 다 떨어지니까 그 자리에서 완장 버리고 "나 민간인이예염. 웰컴 G.I." 하고 걸어나오는 대담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거 보고 뚜껑 열린 부하들이 이 새퀴 때려죽이겠다고 펄펄뛰는 걸 말리느라 내가 죽는 줄 알았다."고 기록한 미군 지휘관도 있었다. 다만 이 경우는제1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한 예비역 베테랑 출신(제1차 세계 대전에도 중년으로 참전했던)이 소집 연령을 한참 지난 뒤에 징집되서 투입된지라 정규군과 수준이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다.

4. 막장

물론 총력전 상황에서 나라가 곧 망할 판에[7] 청년만 부족하다면야 다소 나이가 있는 장년층에게 싸우라고 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만한 조건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4.1. 무장

당연히 장비 보급은 형편없어서 정규군 쓰기도 부족한 MG42MG34는 사실상 지급할 계획 자체가 없었고[8] 대부분은 폭격기용으로 생산되었으나 폭격기가 쓸모가 없어진 상황이라 놀리게 된 항공기용 기관총 MG15나 과거 제1차 세계대전때 쓰던 수랭식 MG08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도 제대로 지급할 계획이 없었다.(다만 기록으로 남은 사진 중 MG34를 들고 있는 사진들도 간간히 보인다. 죽은 독일군 시체나 함락된 참호 혹은 군수창고에서 탈취내지 노획한것으로 보인다.)

소총도 부족해서 Kar98k, StG44, 게베어 43, MP40 등의 제식 총기는 정규군 수요도 맞추기 턱없이 부족한 양이어서 노획한 총기나, 과거 1차 대전때 쓰이던 구식 Gew98, MP18[9], 한참 전에 성능이 별로라 사용하지 않았던 게베어 1888, 그리고 또 그 전에 사용했던 단발식인 게베어 1871까지 등장했다. 심지어 9mm 파라벨럼탄이나 22구경 탄환 등을 사용하는 민간용 엽총과 산탄총도 징발 혹은 소유자가 소집시 자체 구비하여 사용하였으나, 이것도 턱없이 부족하여 비밀 병기 독일군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각종 국민돌격소총(VolkssturmGewehr, VG)이라는 국민돌격대용 급조 병기가 만들어졌다.

파일:external/i161.photobucket.com/VG1andVK98.jpg
  • 위 사진의 상부에 있는 VG-1 소총은 10연발 탄창이 달려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반자동 소총으로 보일 수 있지만 밑의 VG-98과 같이 볼트액션 소총이다. 탄창은 게베어 43에서 쓰이던 탄창으로써, 어디까지나 재고로 쌓여있던 G43 소총의 탄창을 재활용하는 것이다. 위 사진의 하부에 있는 VK-98은 다른 이름으로는 VG-5인데, Gew98의 극단적인 간략화 버전으로 탄창 따위는 없고 그냥 1발 쏘고 장전하는 식이었다. 불량 부품까지 때려넣은 것도 모자라, 가늠자-가늠쇠도 소총이 아니라 권총 수준이다.

파일:external/i161.photobucket.com/MP3008.jpg
  • MP3008스텐 기관단총을 강하게 참고해서 만든 기관단총으로 생산성 향상을 위해 오히려 더 개악한 물건이었다. MP3008은 그래도 '강하게 참고해서' 만든 수준이지만, '포츠담 장비'라고 해서 대놓고 스텐을 거의 그대로 베낀 장비도 있었다. 얼마나 똑같이 베꼈는지, 독일이 패망한 뒤 연합군이 '포츠담 장비'들도 다 똑같은 스텐 기관단총인 줄 알고 회수해 버렸고 남은 건 생산 직원이 가지고 있다가 공개한 1정이 전부이다.
파일:external/i161.photobucket.com/user7196_pic2286_1248113912.jpg
  • VG 1-5은 다른 급조병기와는 달리 반자동 소총으로 다른 물건들 보다는 확실히 괜찮은 무기였다. StG44용의 탄약과 탄창을 사용하였지만 국민돌격대가 30발이 넘을 만큼 탄약을 지급받을 일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대부분의 국민돌격소총들은 남아도는 공군용 기관총 총열[10]을 사용해 만들었다. 이 과정 역시 크나 큰 병크가 아닐 수 없는데, 총기에서 가장 비싼 부속은 총열이고 그 중에서도 기관총 총열은 더욱 비싸고 성능이 뛰어나다. 이런 물건을 갖고 장난감 같은 싸구려 볼트액션 소총을 만들 게 아니라 나머지 부속은 급조해서라도[11] 기관총(자동 화기)을 한 정이라도 더 만들 생각을 하는 게 정상이다.

파일:1_Walther-VP_right.jpg
  • 여기에 더불어 아예 부무장 마저도 저가형으로 생산하려 했는지 국민권총이라는 물건도 만들어냈다.

더구나 국민돌격대 전용의 저가형 총기들 역시 생산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이권 다툼이 발생하는 바람에, 대량 생산이 가능한 상황에서도 지방 정당 지도자와 그 당수가 후원하는 기업체들끼리 자재를 사이에 두고 싸우고, 독일 국방군을 위한 생산 시설을 멋대로 뜯어가는 등의 삽질을 연발한 끝에 제대로 생산조차 못 하고 국방군을 위한 무기 생산까지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제식도 아닌 온갖 외국제 노획 무기들도 지급했다.
  • 이탈리아군을 무장해제하면서 얻은 소총 등을 억지로 독일의 7.92mm탄을 쓸 수 있게 개조하기도 했는데, 이러니 탄창은 쓸 수가 없고 총열은 억지로 넓혀 명중율은 극악으로 떨어진 단발총이 돼버렸다나.
  • 기타 여러 점령지에서 징발한 무기를 사용할수 있는대로 조달했으며, 그 중에는 덴마크군의 크라그-에르겐센과 폴란드군의 RKM wz. 1928또한 있었다. 당시 일부 북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7.92mm 마우저탄을 사용했기 때문에 손쉽게 노획하여 무장할 수 있었다. 물론 탄약을 날릴 수 있는 물건이라면 뭐든 써야 했기에 마우저탄이 아닌 물건들도 많이 노획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런 노획 무기도 보급 1순위는 정규군이었는데다 이미 많은 숫자를 손망실해버려 실제 지급은 개미 눈물만큼 이뤄졌다.

덕분에 국민돌격대는 무장 자체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나마 판처파우스트 같은 대전차화기는 비교적 충분히 지급되었다. 말하지만 비교적이다. 이것도 선전사진 찍을 때는 근처 군 부대에 빌려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만 판처파우스트를 들어서 그 숫자가 많게 보이는 훼이크를 썼다고 한다. 물론 촬영 끝나면 반납. 잘 보면 사진 뒤편의 잘 안보이는 군중들은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는 것이 보인다. 그래도 히틀러 유겐트 따위가 이거 들고 쏴댔다는 걸 감안하면 지급은 된 것 맞다.

다만 소련군을 조금이라도 더 막아내야하는 동부전선의 상황은 나은편이어서 국민돌격대 인원들도 멀쩡한 Kar98K 소총이나 MG42 등 그들 기준으로 꽤나 중무장한 사진도 종종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부전선에서 소모되는 병력수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이것도 사망한 정규군의 무기를 쥐어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육군도 모자라 국민돌격대를 태워 연합국 공군을 물리친다는 계획하에 국민전투기라는 발상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것도 제트기 He 162로. 시제기가 나오고 전투비행단도 하나 꾸렸지만, 정작 이 기체는 국민돌격대가 몰기엔 난이도가 너무나도 높았기 때문에, 일부 유소년기에 항공 클럽 등에 가입했던 일종의 예비 조종자원인 소년병 몇을 빼면 그냥 정규 공군에서 운용했다. 국민전투기에 대한 자세한 내역은 불타는 하늘 - 그레이트 워 플레인 - 독일공군 항목의 He162 항목을 참조하도록 하자.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된 데는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의 캐삽질이 겹치고 겹친 것이 가장 주효했다. 특히 앞에서 언급했듯 나라가 다 망한 시점에서도 지방 정당 지도자(가우라이터 Gauleiter)와 군수기업체, 지방 유지들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갖은 삽질에 삽질을 거듭한 탓에 생산 가능한 무기조차 제대로 생산하지 못해 국민돌격대의 무장 자체가 실현되지 못했던 것. 어떤 의미로는 덕분에 독일인이 훨씬 덜 죽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삽질이었다.

만약 국민돌격대에 충분한 무기가 주어졌다면 도망칠 명분조차 없으니 계속 싸워야 했을 테고, 어차피 조직도 엉망이고 수적으로도 적에 밀리는 상황이라면 적에게 피해를 주기보다는 아군의 군수 지원 능력에만 부담을 주어 독일 국방군 전체의 몰락을 몇 달은 더 앞당기는 한편, '훨씬 많은 전사자와 더불어 멀쩡한 민간인 대부분을 소련군 및 복수심에 불타는 동유럽인들의 손에 넘겨주었을 가능성조차 존재한다. 참고로 이 때 희생되지 않고 살아서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조기 석방된 서방 지역 억류 독일군 포로들과 더불어[12] 전후 독일 사회의 주축이 되었고, 나중에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내게 된다.

4.2. 피복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군복이었다. 만약 총기만 없다면 동부전선은 몰라도 서부전선에서는 포로수용소로 가서 거기서 일 좀 하고 전쟁 끝나면 나오면 그만이였다. 그러나 만약 군복이 없이 잡히면 그 사람은 군인이 아니므로 제네바 조약에 의한 포로로서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심하면 테러리스트로 간주되어 처형되어도 군말할 수 없다는 소리다. 정규군에게 줄 군복도 모자란 판에 예비군이라 하기도 뭣한 집단에게 옷을 나누어 줄 수도 없었기에, 결국 나치는 완장을 제작하여 나누어 주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72px-Volkssturm_armband.svg.png
완장의 디자인 도안, 독일 국민돌격대 국방군이라는 뜻이다. 대다수가 사복 차림이라는 것을 감안, 표시를 용이케 하기 위해 1인당 2개씩 지급해 양팔에 모두 두르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완장이 있으면 준군사조직으로 간주돼서 국제법상으로 교전권이 있다고 인정되므로 사로잡히면 포로취급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13] 다만 간부 대원들은 계급장 형태를 쓸데없이 SS 방식으로 만드는 바람에 포로가 되면 필요 이상으로 욕을 볼 수도 있었다.

그나마 이 완장의 장점이라면,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의 눈을 피하려면 번거롭게 군복을 벗을 필요없이 완장만 팔에서 쏙 빼서 주머니에 숨겨버리면 될 정도로 간편했다는 정도다.

사실 국민돌격대가 전혀 군복을 지급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나치가 막장이었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군인인데 군복은 입혀 줘야 하지 않겠냐?"는 목소리가 높았고, 실제로 소수지만 군복을 지급받은 인원들도 있다. 다만, 정말 소수만이 지급받았고 그 조달 방식도 실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새 군복은 앞서 말했듯 정규 군인들 주기에도 모자랐으므로, 우선 정부는 민간에게서 군복류를 기증(...)받았다. 당시 민간에는 전사한 가족의 유품이나 전상으로 군복무가 불가능해 퇴역한 군인들이 집에 갈 때 입고 온 군복, 혹은 폐지되어 더 이상 입지 않은 군복[14], 제1차 세계대전 시기나 바이마르 공화국 때의 구형 군복 등을 보관하고 있는 경우가 제법 됐고, 이것들을 기증받아 동네 아줌마들을 동원해 부착물들을 제거하는 등의 개량을 하여 지급했다.

물론 이 피복들도 수요에 비해 한참 모자랐으므로, 최소 분대장 이상의 계급장이 있는 간부 대원[15]들에게 지급했고, 나머지는 그냥 위와 같이 완장만 주고 땡이었기에 대부분은 대충 입고 총들고 싸워야 했다. 그나마 지급한 군복들도 시기나 소속 등에 따라 차이가 커서 누구는 회색 누구는 황색 같은 식으로 뒤섞여 있었다. 심지어 사진 중에는 오래전에 숙청당한 나치 SA 유니폼을 입고 나온 경우도 있다. 아주 운 좋은 극소수는 지급 중단으로 창고에 쌓여있던 육군 병사용 정복에서 부착물을 제거하고 주머니를 다는 개조를 한, 대전 말기 물자 부족으로 재질이 구려진 정규 전투복보다 훨씬 좋은 원단으로 된 군복을 입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또한 공군 부대에서 훈련받은 소수의 인원들에게 공군의 작업복용 검정색 커버올[16]#이 지급된 사례도 있다.

파일:external/media.iwm.org.uk/standard.jpg
(국민돌격대 대대장의 전투복, 폐지되어 지급되지 않고 남은 육군 사병용 예복을 개조, 본래 예복에 없던 가슴 주머니 등을 추가로 재봉한 것이라 주머니 원단 색이 다른 부분들과 다르다.)
파일:external/ona.c.blog.so-net.ne.jp/m_Volkssturm20company20leader.jpg 파일:external/i10.tinypic.com/2qntsfl.gif
코트를 입은 국민돌격대 중대장 오른쪽 제복 입은 사람은 이들을 인솔하는 소방경찰관[17]이다.
물론 대부분의 대원들은 제복이고 계급장이고 그런 것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동부전선의 소련군에겐 무의미한 조치였는데, 독일군의 전쟁범죄로 인해 워낙 쌓인 게 많다보니 일단 조질 생각부터 하고 이유를 찾았기 때문. 소련군은 포로에게 아무 표식이 없으면 제네바 조약 위반으로 조졌고 독일군 표식이 있으면 독일군이라서 조졌다(...)

나중에는 소련군도 국민돌격대가 최소한의 훈련도 못 받고 전장으로 내몰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는 몰라도 이들에게 정규군 대우를 해야되지 않느냐는 의견이 독일이 항복한 후에 나오기는 했다. 감정적인 문제 외에도, 포로란 존재는 빈약하나마 피복과 급식, 주거를 제공하고 통제를 위한 인원 등 유지비가 막대하게 들기 때문에, 강제노동에도 못 써먹을 노인네나 애들까지 굳이 자비 들여가며 떠안는 건 경제적으로 타산이 안 맞는다는 점도 있었다. 소련군은 국민돌격대 뿐 아니라 베를린 전투우체부철도원, 일반행정직 공무원[18] 등 제복 입은 사람은 닥치는대로 다 잡았다가 결국 군인이 아닌 사람들은 실제 군인처럼 굴려졌던 경찰 정도를 제외하곤 금방 풀어줬다.

4.3. 여성 부대원

심지어 여성들도 징집되어 국민돌격대에 배속된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일부 광신적인 지휘관들이 자신의 직권으로 벌인 일로 당시 독일은 아무리 상황이 막장이었어도 여성들까지 공식적으로 징집하지는 않았다. 2차대전 당시 여성은 여전히 남성보다 한 등급 아래로 취급되는 존재였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실업률을 낮추겠다고 여성들에게 결혼을 장려하고 전업주부로 만들던 시절인데 이들을 군에 징집하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이렇게 국민돌격대에 배속된 여성들도 대부분 의무병이나 보급병, 대공포병 등으로 동원되었을 뿐이다. 소총을 들고 직접 전투에 투입한 경우는 드물다.

이대영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를 비롯해 국민돌격대 여성부대원들이 위안부 성노예로 굴려졌다는 의혹이 제기되지만 일단은 독일군은 국민돌격대 내부에 여성들을 위안부로 삼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폴란드나 러시아 등지에서 납치하거나 강제/반강제로 끌고 온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은 경우는 많았다.

5. 국민척탄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국민척탄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매체

베를린 전투 때 국민돌격대의 비참함이 등장하는 영화는 몰락이 있다. 투입되자마자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소련군에게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보다 못한 방어사령관 빌헬름 몽케가 지휘권자인 괴벨스에게 철수를 요청하자, 괴벨스는 그 유명한 "그들은 우리에게 위임했지. 그리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야"라는 허탈한 대사로 화답한다.

영화 지옥의 영웅들에서는 비무장한 국민돌격대 노인들이 히틀러 초상화와 피켓을 들고 미군 주인공 분대 앞을 가로막는다. 그들은 셋 셀 때까지 해산하지 않으면 쏘겠다는 미군의 경고에도 아랑곳않고 히틀러 만세를 외친다. 하지만 빡쳐버린 미군의 경고 사격에 그들은 그대로 굴복하며 해산한다.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의 소련군 시나리오는 임무가 진행되면서 베를린으로 진격하다가 마지막 임무는 아예 베를린에서 싸워 적으로 등장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다만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고 더미 데이터로 남았으며 그 흔적만이 Eviction 미션 인트로, 빅토르 레즈노프의 대사[19]로 언급된다. 정작 이들 대신 등장하는 건 나치 독일 최정예부대 SS 의장대, 제국 의사당까지 소련군이 처들어 왔음에도 항복은 커녕 죽어라 저항한다.(다만 이전 미션 까지는 다르게 대부분의 병사들이 몸이나 머리에 붕대를 둘러서 등장한다. 즉 부상을 입어도 끝까지 싸우는 모습이긴한데 결국엔 스킨이라 싸우는 실력은 다 똑같다.)

7. 유사 사례

독소전쟁 때 소련군은 모스크바가 함락 위기로 몰리는 등 막장 상황 때 10대 청소년과 노인들까지 동원해 노동 사단을 편성했으나, 이름부터 노동사단이었으므로 독일군 앞에 총알받이로 내몬 것이 아니라 참호 건설이나 물자 운반 등의 작업을 시켰고, 이후 전황이 나아진 후에는 대부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청년~장년 남자인구가 징집되어 전쟁터에서 갈리는 동안 후방의 산업 일선에서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가 징집연령이 되면 다시 징집되었다.

영국군은 독일의 프랑스 침공 이후 영국 본토가 침공 위기에 몰렸을 때 40대 이상 중년 및 입대 불가 판정된 젊은 남성 자원자들로 이루어진 민병대 성격인 홈가드를 조직한 적이 있다. 물론 강제 징집은 아니었고 대부분 자발적으로 지원한 조직이었으며, 오히려 나라를 지키겠다는 열의가 지나쳐 소소한 사고를 일으켰을 정도[20]로 애국심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영국 정부도 "Home guard" 라는 이름 그대로, 후방 방어의 일부를 맡겼을 뿐이지[21] 총알받이로 전장에 몰아세운 적은 절대 없고 동남아시아 지방의 홈가드들은 정규군의 만류도 뿌리치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 용맹하게 싸웠으니 국민돌격대와 홈가드를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홈가드에 지원한 용사들과 영국 정부에 대한 크나큰 실례이다.

일본 제국 역시 2차대전 말기에, 결호작전에 대비해 10대 청소년과 노인, 심지어 여성까지 긁어모아 '국민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만든 적이 있다. 웃긴 건 국민돌격대는 그나마 진짜 인력이 부족해서 만들었다는 핑계라도 있지만 이쪽은 인력이 충분한데도 그 짓을 했다는 거다.[22] 이쪽은 국민돌격대보다도 사정이 훨씬 안 좋아서 국민돌격대는 그나마 총이라 할 만한 것과 부족한 수량이나마 대전차무기를 지급받았지만, 이쪽은 무라타 소총 같은 구식 소총조차 지급하지 않았고 무기는 징집자들이 자체 구비해 사용해야 했는데, 일본도 같은 도검류를 챙길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고 같은 농기구, 심지어 죽창까지도 동원되었다. 국민돌격대가 '한 명이라도 죽이고 죽어라'라는 식이라면 이쪽은 그냥 죽으라는 식. 그러나 징집된 이들로써는 다행히, 일본은 본토 결전 없이 원자폭탄 두 방을 맞고 항복해 실제로 전투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1] 사람들이 들고있는 무기는 MG34, 판처파우스트, Kar98k[2] 흑기사 이야기에서는 바우어가 이를 두고 "민족의 폭풍?"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Volkssturm은 해석하기에 따라 정말 '민족의 폭풍'으로도 읽힐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한 언어유희.[3] 물론 여기에는 이념적 이유 이상으로 각 분야의 수장들(괴링, 힘러, 룀 등등)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충실히 하려는 목적이 컸다. 이념적 이유는 사실은 핑계에 불과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4] 소련군 포로가 되었다가 티푸스에 걸려 죽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포로 8만여 명도 당연히 여기 포함된다. 참고로 연합국 포로가 된 뒤 사망한 독일군은 1950년대 중반 석방이 완료될 때까지 3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 중 4분의 3이 소련군 포로 사망자들이다.[5] 2차대전 전체 사망자는 43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독일 본토의 민간인 사망자는 주로 폭격 사망자 위주로 50만 안팎이다. 군 사망자와 실종자. 포로 사망자는 전쟁 전체를 통틀어 320만여 명. 그리고 나머지 60만 명은 해외 거주 독일인들이 점령지역의 전쟁통에 피살되거나 현지인들의 보복으로 학살당한 것이다.[6] 실제 1945년까지 독일군은 무리한 전투 와중에 동서 양쪽에서 연합군에 추가 인명 손실을 꽤나 강요했지만 그 대가로 50만여 명의 전사자를 더 냈는데, 부상자 비율까지 감안하면 남는 병력이 없게 된다. 1945년 4~5월 시점에 연합군이 상대한 독일군 대다수가 국민돌격대와 이미 장년층이 된 30대 후반 예비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게 그 증거다.[7] 독일은 실제 항복할 경우 연합국이 아예 전면적인 농업국가화와 완전한 국가 해체.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의 전면적인 회수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그나마 연합국 중에 가장 목소리가 큰 미국이 국가 해체의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고 봐서 끝까지 반대했기에 좌절된 것. 여기에 더해서 소련이 정부 차원에서는 생각보다 상황 파악을 이성적으로 하고 전후 독일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오더-나이세 선의 영토조정만 하는 선에서 청산을 끝내버렸다. 즉 독일인들이 항복할 경우 독일 국가 자체가 파멸할 거라 여겼던 것은 적어도 2차대전 때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8] 문서 맨 윗사진에 나온 국민 돌격대원들 중엔 MG34를 든 남성도 여럿 보이는데, 시기가 44년 11월이라 이건 국민 돌격대 차출 초기이기도 하고, 괴벨스가 직접 사열한 거라 선전상 무장을 좀더 충실히 쥐어줬던 것 같다.[9] 여기까진 그나마 헌병 등 후방 주둔 정규군 일부도 쓰던 물건이거나 정규군의 물건에 비해 성능은 별 차이가 없으므로 차라리 나았다.[10] 전쟁 후기에 루프트바페는 사실상 사라졌다. 기관총을 달 항공기가 없으므로 이 총열들은 그저 재고 물자에 불과했다.[11] 신뢰성만 어느정도 확보한다면 편의성은 희생할 수 있는 상황이니만큼[12] 실제로 서방 측은 전쟁범죄자만 아니면 독일군 포로들을 의외로 쉽게 풀어줬다. 물론 프랑스나 덴마크처럼 독일 포로들을 전후 복구에 적극 동원하여 이거 저거 건설한 사례도 있긴 하다.[13] 같은 이유로, 일본이 조직한 국민의용대도 완장을 사용했다.[14] 개전 직전부터 육군은 중사 이하 군인에게 정복 착용 및 지급을 중단시켜 피복비 절감을 추진했는데, 이전에 받은 사람들 혹은 민간 행사에서 꼬까복으로 입으려고 자비로 맞춘 군인들이 가진 정복류도 꽤 많이 있었다.[15] 주로 장교나 부사관 등 군 장기 복무 경험자들 중에 선발했다.[16] 공군에선 항공기 정비 특기들이 많이 입었으나, 육상 전투 훈련 등을 할 때에도 많이 착용했다.[17] 당시 독일에선 독립된 소방 조직이 없고, 경찰 내에 소방경찰이 존재했다.[18] 제3제국 정부는 타국에선 사복 근무했을 행정 공무원들에게까지 제복을 지급했다.[19] "적들은 이제 노인, 어린아이, 허약한 자까지 나오고 있다!"[20] 독일군 첩보원인줄 알고 등산하던 사진가를 때려눕혔다던가(...)[21] 도버 해협을 건너오는 독일군 항공기를 감시하는 견시라든지. 그나마도 본격적인 전투임무는 어지간해서는 맡기지 않았다.[22] 2차대전 당시 일본은 아시아 국가 답게 고령화 비율은 4% 안팎으로 매우 낮은 편이었고 유소년 인구의 비중도 높았으며 국가가 전반적으로 젊은 축이었다. 출산율이 높아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도 이후 경제성장을 남은 생존자들만으로 별 어려움 없이 끌어갔을 정도다. 게다가 태평양 전쟁 특성상 일본군은 온갖 삽질과 뻘짓을 하고도 사상자는 정작 독일보다 적었다. 물론 유럽 열강들에 비해 교육 수준이 낮은 것은 감안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