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 민주화 운동 이외의 일반적인 뜻: 민병대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암흑시대의 기본 보병: 검병(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1. 개요
- [ 시민군 사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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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시위진압용 보호구로 무장한 시민군들 전남도청 복도에서 경계근무 중인 시민군 복면을 쓴 시민군 M1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광주 시민군 금남로 전남 도청앞에서 열리는 시민군 초궐기대회에서 경비중인 시민군 시민군 BAR 사수[1]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5.17 내란을 일으킨 신군부의 무자비한 폭동적 시위진압에 대항해 헌정질서 보호등을 위하여 저항권, 자위권을 발동한 시민들 사이에서 독자적으로 조직된 무장 항쟁세력.
2. 배경
1979년 신군부는 10.26 사건 수사를 구실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수도경비사령부, 특전사령부, 육군본부, 국방부 등 주요 시설을 장악하여 반란을 성공시켰다. (12.12 군사반란)1980년대 5월 초 민주화 요구 열기가 뜨거워지자(서울의 봄) 신군부는 북한의 남침설을 유포해 사회를 불안하게 한 후 최규하 대통령과 내각 등을 '강압적'으로 협박하면서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5월 17일 국회를 강제적으로 해산하고, 정치인들을 체포하고, 학생회를 무력화한 신군부(5.17 내란)는 18일에 특전사 부대들을 전두환 반대시위를 진행하고 있던 광주에 보내 폭동적 시위진압을 진행했다. (5.18 민주화운동)
3. 전개
자세한 건 5.18 민주화운동/전개 문서 참고.5월 21일 오후 1시 정각 즈음 계엄군이 전남도청에서 나오는 애국가를 신호로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하고 있던 시민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하자 시민들은 "이대로 가다간 다 죽는다"고 느껴서 경찰서와 예비군동대의 무기고, 아세아자동차, 화순 탄전 등을 점령, 카빈소총과 군용 차량, TNT 등 무기를 탈취해서 무장저항권을 발동시켰다.
오후 3시쯤에 시민군이 결성되어 계엄군과 교전하고[2][3] 전남대학교 병원 옥상에 LMG 2정을 설치하는 등 거의 내전에 준할 정도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 수준의 저항권을 행사했다. 당연히 시민들로 급조된 이들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인한 피해 속에서 처절하게 대응하면서 저항을 이어갔다.
오후 8시 30분경 시민들의 유례없는 대규모 저항에 결국 계엄군은 광주 외곽으로 후퇴했다.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시민군은 광주를 지켜냈다. 계엄군은 겉으로는 시민군과 협상하면서도 시민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계엄당국이 보낸 프락치[4]들을 보내는 등 위기도 많았다.
5월 26일, 학생과 미필에 대한 무기 반납 운동이 벌어졌으며 예비역 위주로 재편된 특별기동대가 창설되었다. 특별기동대는 70여명 정도였으며 시내 내부 치안유지와 계엄군의 도청진입을 막는 임무을 부여받았다.
5월 27일 새벽 3시 "상무 충정작전"을 발동한 계엄군은 전차부대를 앞세워 광주 외곽에서 시내로 쳐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전남도청과 YWCA, 계림국민학교, 월산동, 광주공원 등 시내 요지를 장악하고 있던 시민군은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과의 압도적인 화력 차이로 인해 결국 오전 5시에 시내 주요 시설을 빼앗기고 궤멸/붕괴되었다.
4. 지휘관
- 위원장 김종배(항쟁 당시 26세) - 업무총괄
- 내무담당 부위원장 허규정(항쟁 당시 26세) - 도청 내부문제, 대민, 장례업무
- 외무담당 부위원장 정상용(항쟁 당시 30세) - 계엄사와의 협상업무
- 대변인 윤상원(항쟁 당시 29세) - 기자회견 및 지도부 공식 발표업무
- 상황실장 박남선(항쟁 당시 26세) - 시민군 조직 등 군사업무
- 기획실장 김영철(항쟁 당시 32세) - 제반 업무 및 기획
- 홍보부장 박효선(항쟁 당시 26세) - 궐기대회 및 제반 홍보업무
- 민원실장 정해직(항쟁 당시 29세) - 제반 대민, 장례업무
- 조사부장 김준봉(항쟁 당시 21세) - 치안업무(치안질서 위배 조사)
- 보급부장 구성주(항쟁 당시 25세) - 식량 조달및 식사업무
- 기동타격대장 윤석루(항쟁 당시 24세)[5]
- 기동타격대 부대장 이재호(항쟁 당시 33세)
-기획위원 이양현(항쟁 당시 30세)
-기획위원 윤강옥(항쟁 당시 29세)
5. 무장
사진 등의 자료에서 찾을 수 있는 소화기는 대부분 무기고에서 탈취한 30구경 카빈총을 사용했으나 일부는 자동화기로 브라우닝 자동소총이나 M16A1도 운용했고 M1 개런드를 사용한 인원도 있었다. 기관총으로는 30구경 LMG, M60 기관총과 50구경 중기관총을 사용했다. 45구경 군용 권총이나 소량의 수렵용 혹은 진압용 산탄총을 노획하거나 탈취해 사용하기도 했다.#기갑차량은 아세아자동차에서 탈취한 KM900 장갑차나 K-111을 제외하면 없다 보니 주로 현대 포니, 현대 HD1000 등의 민수용 차를 사용했다. KM900 장갑차는 시민군이 4대를 탈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게 가능했던 원인으로 광주에 아시아자동차 공장이 있었고 차륜형 장갑차인 KM900의 조종이 화물차 운전과 비슷하기 때문이다.[6] 물론 차량은 시위에도 큰 도움이 된 만큼 총기와 함께 주요 관리 대상이라 주로 수송용으로 사용됐으며 일부 차량 중에는 특수기동대의 경우 철판을 덧댄 테크니컬도 있었다.
6. 이후
1993년 대법원은 시민군의 행동들을 헌정질서를 지키려고 행동한 정당한 저항권 행사라고 못박았으며 그들을 진압한 계엄군들과 하나회 신군부들을 폭동적 시위진압 및 반란과 내란을 행한 사실상의 반란군으로 인정했다. 5.17 내란으로 입법부와 행정부의 권리행사를 비합법적으로 못하게 한 것도 신군부와 계엄당국이었으며 시민들을 불법적으로 학살, 강간, 처형한 자들도 계엄군이었다.[7]시민들은 계엄군, 즉 사실상의 반란군으로부터 대한민국의 헌정질서와 자신들의 생명, 재산, 고장을 위해 무장했을 뿐 극우 왜곡세력들이 말하는 무장폭동이나 북한의 사보타주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저항권을 정당하게 행사한 몇 안 되는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시민군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분통터지게도 시민군을 진압한 최세창은 노태우 정부 시절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 되었다. 다행히 위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으면서 결국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1] '김 군'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동명의 영화 포스터에 쓰인 사진이 바로 이것이다.[2] 도청부근, 전남대, 노동청등 그야말로 광주 전체가 교전지역이었다.[3] 허나 후술하겠지만 시민군 자체가 급하게 조직된 단체여서 체계적이지 못하였고 아무리 군필자가 다수였다고 한들 현역 특수부대까지 포함된 계엄군에 비하면 확실히 불리하기는 했다.[4] 보안사가 "편의대"라는 이름으로 조직해 보안사 소속 군장병들로 광주로 침투해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내부 시설, 체포 대상자로 삼을 주요 인사들을 사진으로 촬영하는 일을 했다.[5] 19세의 청소년이었다는 증언도 있다.[6] 다만 정호용 장군의 진술 실수로 인한 트롤짓으로 인해 편의대가 주도한 일들도 꽤나 있는 모양이다.[7] ...5·18내란 행위자들이 1980. 5. 17. 24:00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강압을 가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일어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행위가 아니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난폭하게 진압함으로써,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보다 강한 위협을 가하여 그들을 외포하게 하였다면, 그 시위진압행위는 내란행위자들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강압하여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이하생략)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