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박관현(朴寬鉉[1]) |
출생 | 1953년 6월 19일 |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 |
사망 | 1982년 10월 12일 (향년 29세) |
전라남도 광주시 광주교도소 | |
가족 | 아버지 박정한, 어머니 이금녀 남동생 4명, 여동생 3명 |
민주화의 새벽 기관차.[2]
나는 보았습니다 / 낮이고 밤이고 일 년 삼백예순 날 / 햇살 한 줄기 제대로 못 구경하던 그들이 / 푸르고 푸른 오월의 하늘 아래서 / 입이 째지도록 하품을 하고 /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돋친 듯 기지개를 켜는 것을 //(……) 당신의 죽음으로 박관현 동지여 / 우스운 당신 한 사람의 죽음으로 / 만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싸우는 인간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김남주,「한 사람의 죽음으로-박관현 동지에게」
김남주,「한 사람의 죽음으로-박관현 동지에게」
1. 개요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2. 일생
2.1. 유년시절
1953년 6월 19일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의 빈농 가정에서 아버지 박정한과 어머니 이금녀 슬하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불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로 유학하여 광주동중학교와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2.2.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육군 병장으로 복무하였으며, 만기전역 한 후 1978년 3월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한 박관현은 1978년 12월부터 2개월 동안 광주시 서구 광천동 지역의 노동실태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들불야학에서는 윤상원과 함께 노동자와 학생들을 가르쳤다.2.3. 서울의 봄과 5.18
[
제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이올시다. 이 우레와 같은 박수와 여러분의 함성이 전 국토와 민족에게 다 들릴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외쳐봅시다.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대행진을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수습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며, 꺼지지 않는 횃불처럼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광주시민, 아니, 전남도민, 아니, 우리 민족 모두가 이 횃불을 온 누리에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 민족민주화성회 연설
10.26 사건 이후 서울의 봄이 오면서 전국의 각 대학들은 다시금 활발하게 민주운동과 학생운동에 나섰다. 전남대학교 또한 그 변화의 물길 가운데 서 있었다. 박관현은 1980년 4월의 총학생회 선거에서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총학생회장으로서 그는 한 달 후에 있던 민족민주화성회를 주도했다. 거기서 박관현은 일장 연설을 한 후 "휴교령이 발동되면 정오에 도청 앞 광장에 모이자"고 말했다.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 민족민주화성회 연설
하지만 곧 신군부가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그를 포함한 학생지도부는 검거 대상으로 들어갔다. 박관현은 동지들과 함께 급히 도피했다. 그는 먼저 전남 여수로 갔다가 서울의 동생 집을 통해 인근 친척집에서 은신하게 된다. 제수의 소개로 한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기도 했다.
신군부에게 잡히지 않고 박관현은 1년 정도 버텼다. 하지만 그는 5.18 때 죽어간 친구들을 떠올리며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숨어서 사는 놈'이라는 독백도 자주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현상금을 노리는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1982년 공장으로 출근하던 길에 체포되었다.[3]
2.4. 투옥과 단식투쟁
박관현은 재판에서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1982년 7월부터 "5.18 진상규명, 재소자 처우 개선"을 외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50일 간 3차에 걸친 단식투쟁이 이어졌고, 끝내 그는 급성심근경색과 급성폐부종 증세를 보이며 1982년 10월 12일에 29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그의 유언은 이러했다.
3천만 우리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면 내 목숨을 바치겠다. 재소자 2천 명의 처우가 개선되도록 하였으니 내 할 일은 다 했소. 어머니, 나는 죽어도 좋아요.
그가 사망한 후 10월 13일부터 11월 초까지 전남대에서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항의시위가 크게 열렸으며, 서울의 여러 대학들도 이에 동참하여 박관현의 사인을 규명하라고 외쳤다. 광주교도소의 양심수 40여명도 단식농성을 벌이며 신군부의 폭력성을 규탄하기도 했다.2.5. 이후
2015년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묘를 참배하고 방명록에 '5·18 정신은 우리 민주주의 역사이자 희망입니다'라고 적었다. 박 소장은 1995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직후인 1996년부터 2년 가량 광주지방검찰청 부장검사를 역임했다.법률신문시간이 지난 2022년, 박관현기념재단은 오전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40주기 추모식을 열었다.#
고(故) 박관현 열사의 유족 9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이 7월 6일 첫 변론을 열었다. 이후 2022년 10월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15부는 박관현 열사의 누나인 박행순 씨 등 유족 9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사건번호: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가합586903) # 이 때문에 비슷한 재판인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가합586873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위자료 지급 판결이 나왔다. [판결] 법원 "국가,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1018명에 위자료 477억 지급하라"
1990년 8월 개정된 옛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5·18 보상법)은 유공자 등이 보상금 지급에 동의한 경우 ‘재판상 화해’ 효력이 있다고 명시해 국가를 상대로 더 이상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했다. 이에 대해 헌재는 “5·18 보상법 조항에 ‘보상금을 산정할 때 정신적 손해를 고려할 수 있다’는 내용이 없다”며 “정신적 손해에 대한 적절한 배상이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3. 기타
조기조[4]가 쓴 시도 있다. 제목은 역시 '박관현'. 1992년 '전국노동자문학회'의 망월동 대동제에서 발표되었다.한 남자가 묘지 앞에 앉아 있었네 죽어서 이름조차 없이 빗돌에 새겨진 무명열사의 묘 한 남자가 빗돌을 쓸며 앉아 있었네 그 남자 묘지 앞에 울고 있었네 살아서 부끄러운 이름으로 무명열사......그 이름 한 번 불러보지 못하고 그 남자 빗돌을 쓸며 울고 있었네 그 남자 무덤 속으로 들어가 누웠네 밤마다 찬 이슬 찬 서리 저리 내리는 무덤 속으로 들어가 누운 그 남자 그 이름 이제 누구에게나 성스럽네. |
4. 참고자료
- 들불7열사 박관현, 5·18 전남대 총학생회장
- <새벽기관차 박관현 평전>, 최유정, 사계절, 2014
- <시민 민주역량 결집한 '광주의 아들' 박관현 전 전남대 총학생회장>, 김재영, <서울신문>, 1998년 9월 17일자
- <1980년대 민주화운동> 제2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87, 920~923쪽
-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편> 제1권,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3, 164~1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