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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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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심재철(沈在哲)
출생일 1958년 1월 18일 ([age(1958-01-18)]세)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시 금남로5가동[6]
종교 천주교(세례명: 베드로)
본관 청송 심씨
학력 광주제일고등학교 -1 ([[졸업]])
서울대학교 -1 ([[영어교육과|외국어교육학(영어)]] / [[학사]])
중앙대학교 -1 (사회복지학 / [[석사]])
소속 자유한국당
지역구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을
의원선수 5
의원대수 16, 17, 18, 19, 20
소속위원회 기획재정위원회
현직 제20대 국회의원
경력 제16~20대 국회의원
국회 부의장
새누리당 최고위원
한나라당 정책위원회 의장
한나라당 경기도당 위원장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원내수석부대표
한나라당 홍보기획본부장
한나라당 부대변인
MBC 보도국 기자
동대문여자중학교 영어교사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1. 개요2. 생애
2.1.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관련
2.1.1. 전문가의 평가
2.2. 서울대 프락치 사건 주동 후 책임 전가2.3. 교육 및 언론활동2.4. 정계 입문
3. 정치 활동4. 논란
4.1. 국가 재정정보 무단 유출 논란4.2. 국회부의장 시절 특수활동비 논란4.3. 국회 세금으로 배우자 업체에 일감 몰아주기
5. 선거 이력6. 여담7. 둘러보기

1. 개요

파일:external/www.nocutilbe.com/art_14962966430247_c8969d.jpg 파일:3dK1zMA_o.jpg
2008년에 찍힌 공식프로필 사진 현재 언론에서 보이는 모습[7]

대한민국언론인 출신 정치인. 비박이면서 범 친이계로 분류되나, 자유한국당 비박의 좌장으로 여겨지는 김무성, 홍준표와는 딱히 협력하고 있지 않다.

1958년 전라남도 광주시(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으며, 정양석, 조훈현, 신보라(정치인)와 더불어 광주전남(光州全南) 출신 자유한국당 의원이다.[8]

2. 생애

1958년 광주 금남로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4학년때 돌아가셨다. 어려운 형편 속에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7남매를 키우셨다.

가난한 형편임에도 공부를 잘해 1974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광주일고를 졸업한 1977년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에 입학했다. 광주일고 시절부터 유신반대 시위를 이끌었던 심재철은 서울대 입학 후 운동권이 되었으며 77학번 동기인 유시민과 함께 서울대 학생운동의 중심에 섰다.

1980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되었고, 당시 '서울의 봄' 정국에서신군부에 맞서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학생운동 세력의 대표인물로 떠올랐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앞에는 서울대, 고려대 등 전국 18개 대학에서 온 학생 10만 명이 모여 신군부애 대해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하였는데, 심재철은 이때 대학 총학생회장단 대표를 맡았다. 해가 저물면서 시위대는 철야농성을 하느냐, 아니면 자진해산을 하느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 신계륜은 철야농성을 주장했지만, 심재철은 서울대 학생처장 이수성의 권유에 따라 자진해산을 주장했고, 결국 10만 시위대는 자진 해산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다.

'서울역 회군' 직후 심재철은 지명수배 되었고, 약 두 달 동안 숨어다닌던 끝에 6월 30일 치안본부 특수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 후 수경사 33헌병단으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가담자로 몰린 그는 군법회의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2.1.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관련

24인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피의자 중 대부분은 5월 17일에 연행되었다. 나머지는 6월 15일 이석표 체포, 6월 16일 이신범 체포, 6월17일 전국에 심재철 지명수배령이 내려지고 6월 18일 설훈, 송기원 체포, 며칠 후 이해찬, 조성우 체포, 6월 30일 심재철이 체포되었다.

1988년 5공청문회때 심재철은 청문회에서 자신이 검찰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 거짓 자백을 했으며 한통련사건과 관련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은것은 검찰측 증인으로 나온 간첩의 증언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9] 실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피의자중 대부분이 이때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책을 써 자신들이 고문에 굴복하지 않을수 없음을 고백했다. [10]

심재철이 수배중이었던 6월 17일 이미 계엄사령부는 김대중의 학생운동 총책인 이해찬의 조종을 받아 심재철이 전국의 학생운동을 진두지휘했다고 발표하였으며 심재철이 체포된 후 이미 발표된 내용에 꿰맞춰서 그는 고문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의 거짓 진술에 의한 조작에 꿰맞춰지기 위해 심재철은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고문받던 다른 피의자들과 달리 치안본부 특수대에 끌려가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청와대 경비를 맡고 있던 33헌병단 군인들(최하가 무술 유단자로 구성된)에게 고문을 받았으며, 내란음모사건 피의자중 가장 혹독하게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11]

여권 인사들이 진영논리에 치우친 비난을 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심재철이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기 전에는 아무도 심재철을 배신자로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복학 이후 복학생협의회에 참여했고 1988년 5공 청문회 당시에도 야당 측 증인으로 증언했다. 심재철은 1995년에도 5.18 단체들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5.18 진상조사를 요구하며 당시 5.18 단체와 교류했다. 결론적으로 심재철이 이후 보수정당으로 갔다고 비판하는 것은 자유지만, 1980년의 행적을 가지고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볼 수 있다.

2.1.1. 전문가의 평가

5.18 민주화운동의 대표적 권위자인 김영택 박사의 저서인 '5월 18일, 광주 -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에서 김영택 박사는 서울역 회군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신군부의 정권 탈취 음모를 피한 것으로 서술하기도 했고 심재철을 전혀 배신자로 서술하지 않았다.

진보 성향의 한인섭 교수도 심재철에게 잘못이 없다고 설명했다.
[유시민, 심재철, 1980]
전두환이 권력장악의 완성수순으로 5.17. 비상계엄 확대하고, 예비검속하여 재야, 정치, 학생들을 엄청 잡아갔고, 어마어마한 고문과 장기불법구금을 자행했다. 그때 조서도 작성하고, 자술서도 쓰게 한다. 말이 자술서이지, 강제타술서와 실질적으로 같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민주화된 뒤에, 그때 자술서는 뭐라 썼던 법정증거로 배척된다. 고문과 강압에 의해 쓴 것이므로.
그런데, 그때 그 자술서에 뭘 담았느냐, 혹 동료를 고자질한 게 아니냐고 뜬금없이 논란되고, 옆에서 불불이는 사람도 있다. 정리한다.

1. 그 자술서는 강제타술서임. 자발성 전혀 없음.
2. 어떻게 썼던 당시 학생, 정치, 재야운동의 동향은 전두환 군부의 정보망에 이미 다 들어 있었음.
3. 그 자술서대로 사건윤곽 잡은 게 아니고, 첨부터 군부가 짠 프레임에 억지 끼워 맞추는 것이었음. 유. 심이 뭐라 주장하든 상관없음. 신군부집권에 가장 유리한 프레임대로.
4. 민주화 이후 재심과정에서, 1980 서울의봄, 5.17, 5.18과 관련된 모든 구속.유죄건은 무죄판결로 바뀌었음. 그때 고문정권은 내란죄로 단죄된 것이고.
5. 그러니 거기서 뭘 썼던, 그런 것 갖고 상대 흠집내기나 비난할 게 전혀 못됨.

마지막으로 남는 건, 그때 한 글자도 쓰지 않고 버텨야지, 동료 이름은 절대 쓰지 말아야지... 그래야 투사이고, 민주화운동가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그런 아쉬움의 찌꺼기 같은 것... 그런데 그건 사람이 아니라 감각 없는 좀비인간. 기계인간이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둘 다 극도의 폭력과 위축감 속에서 나름 최선을 다하려 애썼다고 본다. 몇십 년 뒤의 정치노선 갖고, 소급해서 그때 누가 잘못했니 하는 비난자료로 쓰지 말 일이고.

나는 독재시대 재판자료, 변론자료 많이 정리하고 책도 내고 했다. 자술서도 자주 들여다봤다. 그러면서 자술서에 타인에게 불리한 내용이 가득 들어 있으면, 그 사람도 별수 없네, 이렇게 독해하지 않는다. 그 분이 얼마나 고초에 시달렸으면, 안 쓰고 견딜 수 없었구나. 이 고문한 나쁜 놈들... 이렇게 판독하면서, 그때 그의 고통을 같이 느껴보려 애쓴다. 자술서의 내용은 고문의 심각성을 재는 바로미터다. 유, 심의 강제타술서에 뭔가 마뜩잖은 몇 줄을 찾아낸다 해도, 그건 고초/고문의 정황증거이지, 그들이 밀고자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자술서 다 공개해서 대중에게 판단 받으라는 말도 한다. 30년 전의 타술서를, 당시의 공포스런 수사환경도 잘 모르면서, 사건 맥락도 모르면서, 정치공격용으로만 악용될 그 자료를 호기심의 먹이로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양심에 반해 강제로 쓴 글로 당시 피해를 봤는데, 다시 30년 뒤 반양심분자로 공격하기 위해 그자료를 공개하라고? 이중의 참혹함이요, 안 될 말이다.

난 1980년 때 대학4학년이었고, 대학신문 기자였으므로, 유/심의 활동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었다. 둘 다 훌륭했고, 멋있었고, 닥쳐올 고난의 불안 속에서도 각오하고 임한 학생리더였다. 1980.5.17 이전의 그들의 행적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이후 수사.법정에서의 태도에 대해서는 그 고초에 대해 함께하지 못했음에 미안하고, 그리고 이후의 정치행적은 각자 판단받을 대목이다.

요컨대, 1980년 정보부, 보안사에서 쓴 강제타술서는 개개인의 인간됨 여부를 평가할 자료 자체가 될 수도 없는 것이고, 타술서를 강제한 군부집단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참혹한 인권유린자였는지 확인하는 자료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한인섭, 유시민, 심재철, 1980 #

심재철의 '자백' 자체는 고문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인권 기준상 비난 받야할 이유가 전혀 없기도 했고, 실제 전문가들에게 비난 받지도 않았다.

2.2. 서울대 프락치 사건 주동 후 책임 전가

정작 서울역 회군의 주동자 심재철은 군사정권 당시 독재와 싸운다는 미명하에 서울대 학내에서 프락치로 의심되는 자교 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생 등 4명을 붙잡아 가두고 폭행했다. 이 사건 때문에 당시 서울대복학생협의회 회장이었던 유시민이 그 폭력 행위를 행했다는 누명을 쓰고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2006년 유시민의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가 지명되어 임명을 위한 청문회를 앞두고 이때 프락치로 몰려 고문을 당했던 전기동(당시 관악구청 소속 공무원)이 "나를 프락치로 몰았던 사람이 장관이 되면 안 된다"며, 1인 시위를 하여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에서 이 사건에 주목했다. 이에 한나라당에서는 전기동을 유시민 인사청문회 증인으로 신청하였는데, 거부당하자 대신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때 한나라당 의원들이 "유시민에게 폭행당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라"고 하자, 전기동은 "유시민은 폭행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럼 누가 폭행했냐"고 묻자 "현직 한나라당 의원이자 서울역 회군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심재철 의원이 폭행에 가담했다"고 증언했다. 이에 당황한 한나라당 이성구 의원이 즉시 기자회견을 중단시키고 전기동을 돌려 보내며, 이 사건은 어영부영 끝나 버렸다.

당시 전기동의 주장은 "나는 (가짜 서울대생이었지) 프락치가 아님에도 여러 사람이 나에게 폭행을 가했고, 유시민은 폭행이 일어날 때마다 자리를 피했다가 끝나고 나타나는 등, 교묘하게 뒤에서 지시하였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 나를 보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폭행 가담자들에게 나를 돌려 보내라고 지시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볼 때 폭행을 뒤에서 조종한 자가 유시민이 확실하다는 주장이다. 다만 직접 폭행을 가한 사람은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이라고... 덕분에 서로 할 말이 없어, 마타도어가 가장 난무하는 선거 때도 심재철 측이건 유시민 측이건 이 건에 대한 마타도어는 이후 전혀 없다.

2.3. 교육 및 언론활동

이후 1985년 교사에 임용되어 동대문여자중학교[12]에서 영어교사로 지내다가 MBC에 입사하였다. MBC방송국 보도국 기자를 지냈으며 1988년 방송사 최초 MBC노조를 만들어 초대 전임자를 지냈고 1992년 MBC방송민주화 투쟁 중 업무방해·노동쟁의조정법, 징역8월·집유2년 (1993.1.20)을 선고받는다.[13]

당시의 상황은 이미 군부 독재 시절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결정적으로 집행유예는 말 그대로 집행을 안 한다는 뜻이니 미결수로 구치소에 수감된 시기를 옥고를 치른 것으로 한 셈이다.

기자 시절 영상

2.4. 정계 입문

MBC 기자를 거쳐, 1995년 12월에 신한국당 부대변인, 안양 동안 갑구 지구당 위원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 부분부터 심씨의 행보가 손가락질 받기 시작하는데 군부 정권 아래에서 모진 고문과 거짓 자백 강요를 받았던 인간이 그 후신에 투신한다는 것이 납득이 안 갔기 때문이다.[14]

3. 정치 활동

  • " 대통령 재검표를 요구하는 집회에 사용한 플래카드에 북한에서 사용하는 광명체와 흡사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
  •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 특위’(불법 사찰 국정조사)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4개월 동안 단 1차례도 회의를 열지 않고 방치하면서 월 600만 원씩 1년간 받았다고 한겨레신문이 2013년 8월에 보도했다.# 하지만 이에 아무런 반응도 안 하고 4개월 후, 특위 설립 16개월간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특위 활동을 종료하기 위해 모여 5분 만에 회의를 마치며 특위를 해산했다. 이에 중앙일보에서 "1년 반 동안 21분 회의하고 해산한 국회 민간인사찰특위"#라는 비판적 기사를 게재하자 뒤늦게 활동비 9천만 원을 반납했다고 주장했다.
  • 광우병에 걸린 로 만든 등심 스테이크는 먹어도 절대 안전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네티즌들이 반발하자 "'절대'라는 단어는 뺀다"고 궁색한 변명을 하였다.# #
  • 이후 MBC <PD수첩>이 '광우병' 방송을 내보내면서 자신의 발언을 비방할 목적으로 악의적으로 보도해 명예가 훼손됐다며 5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으나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했다.#
  • 신라대 대학생들이 뽑은 '(만우절을 맞아 국회의원 중 성실한 의정활동과 정직한 정치로 국민들의 귀감이 될 만한 거짓말 안 하는 정치인 BEST 5) 거짓말 안 하는 정치인'으로 선정되었다.#
  • 세월호 참사 유가족에 대한 모욕적인 유언비어를 담은 카카오톡 메세지를 보내다 걸린 적이 있다. 본인은 "남에게 받은 것을 확인한 것"이라고 하였고 직접적인 사과는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신문 만평 #
  • 2008년 한 인터넷 카페에서 '배신의 역사 심재철'이라는 글이 올라오자, 스마일이라는 대화명의 유저가 "허위사실 유포"라며 "사이버경찰에 신고한다"는 댓글을 달았다. 이때 다른 유저가 스마일의 대화명을 클릭하자 심재철의 공식 블로그로 연결되어, 네티즌들로부터 "본인이 댓글 알바하냐"고 조롱을 당했다. 아예 후원금이라며 18원을 보내는 운동이 벌어졌을 정도.#
  • 2013년 3월 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누드 사진을 보고 있는 모습이 본회의를 취재하던 기자에게 포착된 적이 있다. 심재철 의원은 '누가 카카오톡으로 뭔가를 보내줘 이게 뭔가하고 열어봤더니 그런 사진이었다'고 해명했지만, 본인이 직접 '누드 사진'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는 모습을 찍은 기자도 있었기 때문에 얼마 안 가 거짓말임이 들통나고 말았다. 기사 공교롭게도 심재철 의원은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소속이었는데(...) 이 일로 윤리특위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훗날 이 사건이 잠깐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는데,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자유한국당이 6.13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내홍에 휩쓸렸을 때 심재철 의원이 당시 당 대표 권한대행도 겸하고 있었던 김성태 원내대표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서자, 김성태 원내대표가 대놓고 "2013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여성의 누드 사진을 보는 모습이 언론사 카메라에 노출됐을 때 막아주지 않았느냐. 나한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또 그걸로도 모자라 "당의 혜택을 받아 국회부의장을 하면서 특수활동비를 받았는데, 밥 한 번 산 적이 있느냐"고 비난하기도 했다고(...) *
  • 2001년 3월 29일자 여러 신문의 1면에 등장하였는데, 그 방법이 매우 전형적인 언론 이용의 행태라 하여 손석희에게 지적당했다.#
  • 2017년 11월 28일 문재인 대통령을 내란죄로 형사고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기사 이에 대해 여당 지지층은 "문 대통령에 대해 정녕 형사고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본인이 직접 하면 되지, '해야 한다'고만 주장하고 정작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무슨 생각인 거냐"는 비판을 던졌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를 향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짓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게 모범적인지는 둘째 치고 일부 보수층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른 자유한국당 의원보다 심재철이 조금이나마 낫지 않냐는 의견이다. 일단 본인이 DJ, 노무현 정부 시절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는 의원 중 한 명이었기도 하고. 물론 본인이 역관광 당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 6.13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이 참패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홍준표가 대표직에서 사퇴하자 당권을 잡으려는 듯이 몸풀기를 하고 있다.
  • 최근 들어서는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 함께 문재인 퇴진 집회(태극기 집회)에 참여하였다.
  •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피해자)로 인정돼 정부 보상금이 지급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라”고 주장해왔던 심재철 의원이 정작 자신이 5·18피해자로 인정돼 보상금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표리부동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기사[15]

4. 논란

4.1. 국가 재정정보 무단 유출 논란

심재철 국가 재정정보 무단 유출 논란 문서 참조.

4.2. 국회부의장 시절 특수활동비 논란

국가 재정정보 무단 유출 논란의 전개 과정 속에서 정작 심재철 본인은 과거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부의장 시절 특수활동비(일명 특활비)로 6억 원을 받아간 사실이 드러나면서 내로남불식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또한 특활비 6억 원 외에도 19대 국회 민간인불법사찰국조특위가 운영될 시기에 단 두 번 회의를 열고 활동비 명목으로 9,000만 원이나 받았다가 비판여론에 반납한 사건도 재조명 받고 있다. 박범계 "심재철, 회의 두 번 하고 9천만 원 받아간 사람이…"

이에 대해 비판여론이 일었고, 6억 원의 사용처를 밝혀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2018년 10월 3일 오전 2시 20분 현재 약 2.5만 명이 동의를 한 상태다.

이 같은 논란에 대해 심재철은 "제가 받은 급여를 정당하게 활용했다"면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지난달 30일 청와대의 업무추진비 집행이 부적절했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마치고 기자들과 만나 “부의장 활동비(특수활동비)가 6억 원이라고 했는데,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액수”라고 밝혔다. 또한 “명목이 무엇이든 개인에게 지급한 것은 개인이 자기 맘대로 쓰는 것은 당연한 거다. 문제는 청와대 사람들은 남의 돈을 가지고 마치 자기 돈처럼 쓴 것이다. 그래서 그게 세금 낭비고 잘못”이라고 덧붙였다. 특활비가 개인 급여?…심재철 “개인에게 지급한 돈 맘대로 쓰는 것 당연”

하지만 애초에 특활비 자체가 '국민들의 세금'으로 만들어지고 배정된 비용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미 개인에게 지급된 비용이기에 개인 급여'라는 논리는 상당히 어폐가 있으며, '개인 급여'이기에 문제가 없다는 말은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결국 논란이 더욱 확산되어가자, 심재철은 "특활비가 개인 급여라는 말은 실수"라고 정정하며 국회부의장 시절 받은 특활비를 공개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심재철 "부의장 시절, 특활비 공개"…의장 측 "개인 판단"

4.3. 국회 세금으로 배우자 업체에 일감 몰아주기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 동안 갑) 신한국당 18,222 (24.7%) 낙선 (2위)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 동안) 한나라당 62,108 (49.12%) 당선 (1위) 초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 동안 을) 한나라당 41,838 (50.99%) 당선 (1위) 재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 동안 을) 한나라당 39,453 (61.23%) 당선 (1위) 3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 동안 을) 새누리당 42,405 (51.68%) 당선 (1위) 4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 동안 을) 새누리당 36,148 (41.46%) 당선 (1위) 5선[16]

6. 여담

당 성향상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정의당심상정 전 대표와 가까운 종친이다. 실제로 둘 다 운동권 출신이었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출신이다. 심상정이 사석에서는 지금도 친하다고 한 발언하였으나 이는 그저 아는 사이라는 뉘앙스로 실제 멘트는 다음과 같다.
안양시민 여러분, 새누리당에 옐로카드를 뽑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지역기호 1번 심재철 후보님 저랑 종친입니다. 사석에서 만나면 종친이라서 서로 가까이 지냅니다. 심재철 후보님 이 지역에서 16년 동안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지난 16년 동안 이 안양시 발전을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 우리 안양시민 여러분이 냉정히 평가해주시기 바랍니다.[17]
이 외에 심상정은 다음과 같은 발언도 했었다.
하루는 여학생 휴게실에 앉아 있는데, 학생회장 후보였던 심재철이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와서는 외투를 홱 집어던지며 소파에 몸을 던졌다. 운동을 한다는 자만심과 우월감이 배어나는 행동이었다. 속이 뒤틀려, 던져진 외투를 심재철의 가슴에 처박으며 내쫓아버렸다. 그러고는 서울대 여학생회를 결성했다. (월간중앙, 2005. 3.24)

의정활동이나 지역사회 시찰에 나설 때 항상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MBC 기자로 활동하던 시절인 1993년 6월 30일 올림픽대로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8개월간 병원에 입원하는 중상을 입었다. # 그 후유증 때문에 아직도 다리가 불편해서 지팡이가 필요하다고.

색소폰 연주실력이 꽤 능숙하다. 그가 총선 유세때하고 지역행사가 있으면 색소폰을 들고 연주한다.

7. 둘러보기

파일:Seal_of_gyeonggi_little.png 경기도 제20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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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혜 추경호 한선교 함진규 홍문종
홍문표 홍일표 홍철호 황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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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양시 동안구 갑 선거구의 제15대 국회의원이다.[2] 안양시 동안구 을 선거구의 제15대 국회의원이다.[3] 안양시 동안구 갑 선거구의 제17대 국회의원이다.[4] 안양시 동안구 을 선거구의 제17대 국회의원이다.[5] 안양시 동안구 선거구의 제16대 국회의원이다.[6]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5가[7] 애초에 위의 사진은 10년 전인 2008년(당시 50세)에 프로필 사진으로 찍어 지금도 쓰이는 것이며, 지금은 나이가 60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얼굴도 같이 늙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비슷한 케이스로는 한선교하고 안철수, 박광온이 있다. 즉, 오신환이 사기캐인 거다.[8] 예전 새누리당 시절에는 이정현과 정양석, 전북 출신의 진영이 있었는데 2016년 초 진영은 탈당하여 더불어민주당으로, 12월 27일 정양석이 바른정당에 합류, 2017년 1월 2일 이정현이 새누리당을 탈당하면서 그 시점부터 2017년 11월까지는 자유한국당에 남은 마지막 국회의원이었다. 하지만 11월 중순 전남 보성 출신인 정양석 의원이 자유한국당에 복당했다.[9] 출처: 김영진, 충정 작전과 광주항쟁(上) P126, 「동광출판사」[10] 2000년 10월 이문영, 한승헌, 이해동, 송기원, 설훈 책머리에서 (문이당,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의 진실, 2002) 中 "1980년에 취조받았을때 무죄한 김대중 씨를 내란의 괴수로,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내란자로 허위자백한 것입니다. 혹독한 고문에 의한것이지만 비록 죽더라도 안 한 것을 안 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 약함입니다."[11] 김종완, 군화발에 짓밟힌 민주화의 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진실, 문이당, 2002</ref><ref>김상현, 내가 겪은 80년, 그리고 광주 p219,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의 진실, 문이당 2002[12]동대문중학교. 2003년부터 남녀공학이 되었다.[13] 개인 홈페이지 참고.[14] 여기에 대해서는 5.18 특별법 제정과 15대 총선을 앞두고 이루어진 민정계 의원들의 공천 대거 탈락 등으로 인해 신한국당을 민정당의 후예로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15] 1998년 광주시에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신청’을 한 뒤 심사를 거쳐 ‘연행·구금’ 분야 피해자로 인정됐다고[16] 전반기 국회부의장[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