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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deded><colcolor=#000> | |||
출생 | 1926년 11월 6일 | ||
경상북도 영주군 안정면 묵동 노루모기마을 (現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묵리)[1] | |||
사망 | 2022년 4월 23일 (향년 95세) | ||
서울특별시 | |||
본관 | 창원 황씨[2] | ||
재임기간 | 제24대 육군참모총장 | ||
1981년 12월 16일 ~ 1983년 12월 15일 | |||
제11대 감사원장[3] | |||
1984년 6월 28일 ~ 1985년 4월 15일 | |||
제12대 감사원장[4] | |||
1985년 5월 16일 ~ 1988년 7월 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ededed><colcolor=#000000> 부모 | 아버지 황분현 | |
형제자매 | 형 황영운[5], 황영도[6], 황영후[7], 황영익[8] | ||
배우자 | 최옥영 | ||
자녀 | 아들 황인락[9], 황윤락[10] 딸 황인숙[11], 황인경[12] | ||
학력 | 안정공립심상소학교 (졸업) 육군기갑학교 (졸업) 육군보병학교 (졸업) 육군고급부관학교 (졸업) 육군포병학교 (졸업) 육군대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 ||
종교 | 개신교 | ||
경력 | 제11,12대 감사원장 민주자유당 특임촉탁위원 신민주공화당 특임촉탁위원 자유민주연합 특임촉탁위원 | ||
군사 경력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10기)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1950년 ~ 1983년 | |||
최종 계급 | 대장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 육군참모총장 | ||
주요 보직 | 육군3사관학교장 육군제1군단장 육군참모차장 제3야전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 ||
참전 | 6.25 전쟁 베트남 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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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2. 생애
1926년 11월 6일 경상북도 영주군 안정면 묵리 노루모기마을에서 아버지 황분현(黃賁鉉)의 5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마을 서당에서 공부했고 안정공립심상소학교(현 안정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45년 광복 후 안정국민학교 용산분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50년 육군사관학교 10기로 입학했고[13] 1951년 임관해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주월한국군사령부 참모장, 육군3사관학교장을 거쳤다.1979년 1군단장 재임 중 12.12 군사반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당시 쿠데타 가담자 중에 전두환보다 선배 장성은 황영시와 함께 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이 있었는데 이 중 반란 작전을 사전에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황영시 혼자였다고 한다. 신군부 세력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추천되었지만 최규하 전 대통령이 반대했고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대신 육군참모차장으로 영전해 이희성을 견제했고 대장으로 진급하여 요직인 제3야전군사령관을 거쳐 1981년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
본격적으로 전두환이 제5공화국을 세우던 육군참모차장 시절 군 내 강경 분위기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다. 19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도 무력 진압을 지시했으며 육군기갑학교장[14] 이구호 준장에게 "전차에 철조망을 달고 돌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철조망을 달고 가면 궤도에 꼬이는 건 물론이요, 전차가 나타나면 시민들이 드러눕는다"라고 하자 "전차포를 쏘고 밀고가면 되는 것 아니냐"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구호 준장이 "시민에게는 포를 쏠 수 없다"며 명령을 거부했다. JTBC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전투교육사령부 부사령관 김기석에게 전차와 무장 헬기를 이용해 신속히 진압 작전을 시행하라고 지시했음을 1996년 검찰의 5.18 민주화운동 진상 규명 수사때 인정했다고 한다. 김기석은 해당 지시가 전차의 발포와 무장 헬기에 의한 기총소사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밝혔다.쿠데타의 주역이자 전두환 정부 핵심이지만 개성이 강하고 권위 의식이 강한 편이라 육군참모총장 재임 시절 전두환이 속으로 탐탁지 않아했다고 한다.[15] 그런 탓인지 1983년 임기를 2년 채운 후 1년 더 유임할 줄 확신했으나 물러나게 되었으며 전두환의 동기 정호용이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육사 11기 육군참모총장이 탄생하게 된다. 이후 자기 편 사람을 철저히 챙기는 전두환에 의해 감사원장[16]을 지냈다가 문민정부 당시 12.12 군사반란으로 재판을 받게 되고 1997년 징역 8년을 선고받았으나 12월에 사면되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조사대상으로 선정한 신군부 5인 중 한 명으로, 2022년 4월 23일 사망하였다.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한영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배우 안내상이 연기했다.[18][19] 영화에서의 역할은 전두광[20]보다 선배 장성인 현치성, 배송학과 함께 위기 상황 시 징징거리기 + 책임 떠넘기기 등으로 반란군 입장에선 진압군의 육군본부 측 장성 못지 않은 트롤.[21] 그래도 영화내 전두광 선배 장성들 중 가장 존재감은 돋보이는 편인데, 권위 의식이 강하다는 말마따나 후배 전두광의 반란 계획에도 이것저것 직설적으로 물어보며 가장 딴지를 거는 편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나서서 전두광에 대한 지지 의사를 명확히 밝히며[22], 재가를 받으러 최 대통령에게 장성들이 간 자리에서도 대통령이 재가를 거부하자 불만을 대놓고 말하며 일종의 하극상을 저질러 전두광조차 깜짝 놀라 불충한 언행을 하여 죄송하다고 대통령에게 사죄할 정도였다.[23] 정우성이 연기한 진압군 측의 이태신[24] 수경사령관에게 '형님은 거기서 뭐하시냐'며 일갈을 듣는다.[25]
5. 둘러보기
12.12 군사반란 반란군 가담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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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4일 12·12 군사반란 성공 기념사진 국군보안사령부 청사 앞 | |
준장 남웅종 · 중령 김호영 · 중령 신윤희 · 중령 최석립 · 대령 심재국 · 대령 허삼수 · 대령 김진영 · 대령 허화평 · 대령 이상연 · 대령 이차군 · 준장 백운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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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인물 배치 순서상 표기 ※ 단 우국일 준장은 군사반란 가담자로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국군보안사령부 참모장 자격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A] | |
{{{#!folding [ 각주 보기 ] |
[A] 비 하나회였던 우국일 준장이 12.12 군사반란 당시 한 일은 연희동 요정에서 접대업무를 맡았을 뿐 접대를 제외한 모든 상황에서 그는 결백한 인물이었다.
[1] 창원 황씨와 순흥 안씨의 집성촌이다.#[2] 공희공계 20세 永(영) 항렬.[3] 정식 취임 전까지 감사원장 서리 수행(1984년 4월 9일 ~ 1984년 6월 27일)[4] 취임 전까지 감사원장 서리 수행(1985년 4월 16일 ~ 1985년 5월 15일)[5] 黃永運.[6] 黃永道.[7] 黃永厚.[8] 黃永益.[9] 黃仁樂.[10] 黃允樂.[11] 黃仁淑.[12] 黃仁卿.[13] 11기부터 4년제가 되었다.[14] 현 육군기계화학교.[15] 같은 이유로 전두환은 정호용도 껄끄러워했다고 한다. 사실 황영시는 전두환보다 육사 1기수 선배고 독불장군 스타일이라 전두환이 불편해했으며 정호용은 전두환과의 마찰보다는 쓰리허나 이학봉 등 청와대 참모들과 5.18, 충정훈련, 녹화사업 등 여러가지 문제로 마찰이 심해서 전두환이 교체를 여러차례 고민했었다고 한다.[16] 사실 감사원장은 부총리급 예우를 받고 육군참모총장은 장관급 예우를 받기 때문에 더 높은 자리로 영전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 의전서열상 그러할 뿐 군사독재정권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실질적 권력에선 차이가 있었다. 감사원장은 부총리급 예우를 받는 헌법기관장인데다가 공직자에 대한 직무감찰과 회계검사를 담당하는 감사원의 업무 특성상 다른 권력기관장인 국정원장(당시엔 국가안전기획부장), 검찰총장, 경찰청장(당시엔 내무부 치안본부장), 국세청장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요직이다. 그렇지만 제5공화국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위세는 그보다 더 이상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군사독재정권이었고 여러 권력기관장들 뿐 아니라 5공화국 대부분의 요직들을 군부, 특히 육사 출신의 하나회에서 독차지하여 군부의 권위가 지금보다 훨씬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육군참모총장의 상급자들인 국방부 장관과 합동참모의장의 권한도 그다지 세지 않아서 군령권과 군정권을 모두 행사하는 육군참모총장이 대한민국의 정권을 차지한 군부에서도 최고 실세의 자리였다. 일례로 12.12 군사반란 당시 하나회의 군부 장악을 위한 목표가 국방장관 노재현이나 합참의장 김종환이 아니라 참모총장 정승화였고 황영시 다음으로 육군참모총장이 되는 정호용은 하나회에서 전두환, 노태우 바로 다음가는 3인자였다.[17] 황영시가 장로로 출석했던 경동교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약칭 기장)의 대표적인 교회이다. 기장은 성공회와 함께 진보 교단으로 알려졌으며 술과 담배에 관대한 편이다. 경동교회는 같은 교단의 향린교회 정도는 아니지만 과거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18] 황영시 본인과 최대한 닮아보이기 위해 배우가 증량을 한 것이 눈에 띈다.[19] 참고로 안내상은 군사정권 시절에 우상호, 우현, 안치환 등과 함께 전두환 정부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적이 있다. 즉, 반대 성향인 인물 배역을 맡은 셈.[20] 전두환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21] 물론 진압군 측의 노재현과 윤성민이 트롤을 넘어선 패작에 가까운 짓을 저질러서 묻히긴 하지만 한영구와 배송학도 반란 진영에서 만만찮은 발암 캐릭터로 등장한다. 열받은 전두광이 "저봐라 저봐라 배짱이라곤 하나도 없는 양반들이 와 우째 장군들이 되셨을까 우리 각하는 누가 또 쿠데타 일으킬까 봐 어데서 저런 등신들한테만 별을 달아줘가지고"라고 돌려깔 정도.[22] 전두광/노태우보다 계급이 높은 중장 3인방 중에 가장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했다. 무력 충돌 이후 전두광이 문을 열고 "가실 분은 가시라"고 하실 때 가장 태클을 많이 걸던 한영구가 마치 나가려는 듯 문으로 걸어가지만, 조용히 문을 닫고 "전 장군. 우리가 뭘 해주면 되겠소?"라고 묻자 분위기가 바뀐다.[23] 하지만 직후 대통령이 또 육참총장 체포 동의서 재가를 거부하자 본인도 빡쳐서 재가서류를 책상에 소리나게 탁 하고 놓으며 재가해주실 때까지 여기 있겠다며 대통령을 겁박한다.[24] 장태완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25] 실제 고증과는 반대로 한영구는 이태신과 통화를 하지만, 염동헌이 분한 배송학은 이태신과 통화를 시도하다가 '뇌가 썩어빠져 문드러진 인간'이라는 발언을 들었다. 이는 5공화국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로 원래는 유학성 → 황영시 순서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