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320><tablebordercolor=#fff,#191919><tablebgcolor=#fff,#191919> | 한국자산관리공사 역대 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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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대 조성진 | 3대 유길상 | 4대 임천순 | 5대 배민홍 | 6대 신관섭 | |
| 7대 김재일 | 8대 이언직 | 9·10대 명동근 | 11·12대 이재전 | ||
| 13대 정도영 | 14대 장석규 | 15대 최창현 | 16대 박경상 | 17대 문헌상 | |
| 한국자산관리공사 사장 (1999~현재) | |||||
| 18대 정재룡 | 19대 연원영 | 20대 김우석 | 21대 이철휘 | 22대 장영철 | |
| 23대 홍영만 | 24대 문창용 | 25대 문성유 | 26대 권남주 | 27대 정정훈 | }}}}}}}}}}}} |
| 국군보안사령부 참모장 | |||
| <colbgcolor=#153a75><colcolor=#ffffff> 제13대 한국자산관리공사 사장 정도영 鄭棹永 | CHUNG DO YOUNG | |||
| | |||
| 출생 | 1935년 4월 21일 | ||
| 경상북도 문경군 | |||
| 사망 | 2010년 7월 24일 (향년 75세) |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2묘역-131호 | ||
| 본관 | 동래 | ||
| 재임기간 | 국군보안사령부 보안처장 | ||
| 1979년 ~ 1981년 | |||
| 국군보안사령부 참모장 | |||
| 1981년 ~ 1985년 | |||
| 제13대 한국자산관리공사 사장 | |||
| 1989년 10월 12일 ~ 1992년 3월 6일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53a75><colcolor=#ffffff> 배우자 | 권수자 | |
| 자녀 | 아들: 정연태, 정현철 딸: 정희진 | ||
| 학력 | 문경고등학교 (졸업) 육군대학교 (졸업) 도미 군사교육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 석사) 국방대 대학원 경영관리과정 (졸업) 서울대학교 (경영학/최고경영자과정 수료) | ||
| 경력 | 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사회정화위원 위원장 대한부동산신탁 사장 자유총연맹 사무총장 민주자유당 국책자문위원 신한국당 국책자문위원회 위원 성업공사 사장 | ||
| 종교 | 불교 | ||
| 신체 | 키 165cm / 체중 68kg / A형 | ||
| 군사 경력 |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14기) |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 1959년 ~ 1985년 | |||
| 최종 계급 | 소장 (대한민국 육군) | ||
| 최종 보직 | 국군보안사령부 참모장 | ||
| 주요 보직 | 도미 군사교육 국군보안사령부 제215보안부대장 국군보안사령부 대공처 공작과 과장 국군보안사령부 대공2과 과장 국군보안사령부 102부대장 국군보안사령부 510부대장 국군보안사령부 1002부대장 국군보안사령부 보안처장 국군보안사령부 참모장 | ||
| 참전 | 베트남 전쟁 | }}}}}}}}} | |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군인.2. 생애
1935년에 태어나 문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14기로 임관했다.2.1. 군인 시절
임관 후 도미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베트남 전쟁에서 맹호부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이후 국군보안사령부 소속 제215보안부대장, 보안사 대공처 공작과 과장, 대공2과 과장, 102부대장, 510부대장[1], 1002부대장을 맡았다.#1979년 12.12 군사반란에 가담했으며, 당시 계급은 대령으로 직급은 보안사령부 보안처장(1처장)이었다. 반란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던 우국일 참모장을 대신하여 그의 역할을 수행했는데[2], 보안사 예하 파견인원들에게 직접 지시[3]를 내리기도 했고, 진압군 지휘관 간의 통화를 감청해 전두환에게 보고했는데, 대표적으로 30사단 박희모 소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1공수의 행주대교 통과를 묵인하도록 회유한 것과 정병주 사령관 몰래 특전사령부 보안부대를 통해 9공수여단에게 '출동지시는 무효'라는 전통문을 보내 9공수 출동저지를 시도하였다. 덤으로, 윤흥기 준장이 9공수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로 먼저 출동 후, 남은 인원들을 규합하여 선발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부대를 정비하여 출동준비를 하던 신수종 참모장 앞으로 9공수 영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화가 빗발쳤는데,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이 전화세례 또한 정도영 보안처장이 주도한 것으로 추정된다.[4][5]
쿠데타 성공 후 공로를 인정받아[6] 1980년에 준장으로 진급하고 노태우가 영전하고 난 뒤에 보안사령부 참모장을 역임했으며 1985년에 소장으로 예편했다.
당시 12월 14일에 가담자들끼리 찍은 단체사진에서 고명승과 장기오 사이에 있다.
2.2. 예편 이후
1985년에 소장으로 예편한 후 국방대학교 대학원 경영관리과정과 서울대학교 경영학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제6대 사회정화위원장, 대한부동산신탁 사장, 자유총연맹 사무총장을 지냈고 1992년 민주자유당 국책자문위원장을 맡았다.문민정부 출범 후 반란죄 혐의로 고발당하자 오히려 맞고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12.12 가담자들과 달리 불기소되었으며 1995년에 신한국당 국책자문위원회 위원장과 성업공사 사장을 맡았다.
2010년 7월 24일에 사망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12.12 군사반란 당시 진압군이었던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정도영 바로 옆에 안장되어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7]
3. 여담
- 우국일과 더불어 방첩부대에서 쭉 생활한 전형적인 보안통이다.
- 정도영은 1981년 남웅종 참모장이 예편하기 전까지 국군보안사령부 1처장, 즉 국방부, 국방부 직할부대 및 기관과 각급 부대에 대한 인원, 시설, 문서, 통신자재 보안지원을 총괄하는 보안처장으로 복무하였다. 그러므로 정도영은 지금까지 행적이 불분명한 심재국 대령[8]에 관한 자세한 인적사항 및 1980년 11월 이후의 행적을 알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다.
4. 대중매체
- 제5공화국에서 김명현이 연기했다. 준장으로 나온 제4공화국과 달리 대령으로 정확히 나왔으나, 12.12 당시의 행적은 허화평이 가져가서 허화평와 허삼수를 보좌하는 최측근 정도로만 나왔다.
-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이성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나 제5공화국 처럼 12.12 당시의 행적은 허화평을 모티브로 한 문일평이 가져가서 영화 후반부 단체사진에서 잠깐 등장하고 끝났다.
5. 둘러보기
| 12.12 군사반란 반란군 가담자 |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ff | |
| 1979년 12월 14일 12·12 군사반란 성공 기념사진 국군보안사령부 청사 앞 | |
| 준장 남웅종※✞P · 중령 김호영? · 중령 신윤희 · 중령 최석립 · 대령 심재국? · 대령 허삼수 · 대령 김진영 · 대령 허화평 · 대령 이상연✞ · 대령 이차군※✞ · 준장 백운택✞P | |
| 소장 박준병✞P · 대령 이필섭 · 대령 권정달※ · 대령 고명승 · 대령 정도영✞ · 준장 장기오 · 준장 우국일※✞ · 준장 최예섭※✞ · 대령 조홍✞ · 대령 송응섭✞ · 대령 장세동 · 중령 김택수※✞ | |
| 준장 이상규✞ · 준장 최세창 · 준장 박희도 · 소장 노태우✞ · 소장 전두환✞ · 중장 차규헌✞ · 중장 유학성✞ · 중장 황영시✞ · 소장 김윤호✞ · 소장 정호용 · 준장 김기택✞ | |
| ※ 사진 인물 배치 순서상 표기 ✞: 사망 / ?: 신원 및 행방불명 / P: 합성사진 ※ 우국일[A] 준장, 남웅종[B] 준장, 최예섭[C] 준장, 권정달[D] 대령, 이차군[E] 대령, 김택수[F] 중령은 군사반란 가담자로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다. | |
| {{{#!folding [ 각주 보기 ] |
[A] 국군보안사령부 참모장 자격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 우국일 준장이 12.12 군사반란 당시 한 일은 연희동 요정에서 접대업무를 맡았을 뿐 접대를 제외한 모든 상황에서 그는 결백한 인물이었다.[B] 국군보안사령부 대공처장 자격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 그는 서빙고분실 관리를 맡으면서 12.12 군사반란에서 철저히 배제되었으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수사는 모두 남웅종의 부하인 대공수사과장 이학봉 중령이 주도하였다.[C] 국군보안사령부 기획조정실장 자격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 10.26 사건 발생 직후,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에 의해 10월 27일 부터 1980년 4월 13일까지 중앙정보부에 파견 근무를 갔다.[D] 국군보안사령부 정보처장 자격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 육사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하나회 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12.12 군사반란에서 철저히 배제되었고, 오히려 당시에 허삼수에게 자신의 직책을 사칭당했다. 다만 반란 이후 전두환의 정치 공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E] 국군보안사령부 군수처장 자격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 육사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하나회 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12.12 군사반란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F] 육군특수전사령부 제606특공부대장 자격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을 경호하였으나, 이는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하기 위해서가 아닌, 10.26 사태로 인하여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소장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정식 보직명 :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하였기 때문에 경호가 시작된 것이었다.
[1] 12.12 군사반란 이후 촬영된 반란군 단체사진에 등장하는 심재국 역시 510부대장을 역임하였고, 해당 510부대는 국군보안사령부 소속 전주 보안부대로 알려졌다.[2] 참모장 문서를 정독하면 잘 알겠지만, 지휘관의 지시를 각 예하부대장에게 직접 하달하며, 예하부대에서 사고사례가 보고될 경우 먼저 참모장이 먼저 내용을 잘 조정해서 지휘관에게 사후보고를 하는 위치에 있는 보직이 참모장이라고 나와있다. 즉, 사령관의 분신이자 오른팔이다. 12.12 군사반란 당시에 우국일을 패싱하고 정도영이 직접 전두환의 오른팔 역할을 수행했다는거다. 왜냐하면 우국일은 하나회 회원이 아니었기 때문.[3] 특전사에 파견나가있는 보안부대장 김정룡 대령에게 특전사 참모장 신우식 대령과 둘이서 함께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 시 휘하 병력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도록 지시를 내렸다.[4] 당시 전화한 인원들이 본인의 소속과 관등성명을 밝히지 않아서 정도영 대령이 주도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만, 당시 전화 발신지가 국군보안사령부라는건 확실하다. 상식적으로 진압군의 심장인 육군본부에서 갑자기 출동저지를 이유로 전화폭탄을 하였을리는 없고, 굳이 그 늦은 시간에 9공수로 연락을 할 타 부대도 없으며, 9공수의 상급부대인 특수전사령부는 그무렵 최세창의 3공수 병력이 사령관 체포를 위해 총격전이 발생한 전쟁터여서 전화가 불가능하였다. 물리적으로 보자면 송파에 위치한 특수전사령부에서 반란군 측 인원인 김정룡 보안부대장이나 신우식 특전사 참모장이 그 짧은 시간안에 인천에 위치한 9공수로 이동하는건 불가능하므로, 정황상 박희모 소장을 회유한 정도영 보안처장 및 1처 휘하 부하들이 직접 전화를 하였을것으로 추정 중이다. 참고로, 9공수의 회군은 신수종 대령의 후발대가 출동하지 못한 상황에서 윤흥기 준장이 계엄사령부 부사령관의 명령을 받들고 선발대를 철수시키면서 진행된다.[5] 시간상으로 보면 21:20경 1공수가 출동하다가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회군명령에 일단 21:45경 여단으로 복귀한다. 이후, 특전사령부에서는 부사령관 이순길 준장과 인사처장 강리건 대령을 전령으로 김포에 보내서 1공수 통제를 시도한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23시에 최세창 3공수여단장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를 명령내리고, 13일 자정 쯤에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체포되어버린다. 비슷한 시각, 박희도 준장이 이순길 부사령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12일 23:55경 부대를 직접 출동하였으며, 10분 후에 13일 00:05경 윤흥기 준장이 9공수 1개 대대를 이끌고 출동함과 동시에 1공수는 행주대교를 통과한다. 이후, 육군본부의 신사협정에 의하여 00:20경 9공수가 부천IC에서 회군하게 된다. 정도영 보안처장이 활약한 시각은 22:00 이후부터인데, 반란군 장성들은 2차 대통령 재가(21:30)에 실패하자 소격동 보안사령부로 이동하여 보안사 전채널을 가동해 회유와 도청을 통하여 반란군에 유리하게 만들었다.[6] 1979년 12월 14일 촬영된 기념사진을 보면 정도영은 전두환의 바로 뒷자리에 서있다. 물론 앞 열부터 계급순으로 배치되어있는걸 고려하더라도 반란군 수뇌부에 장소제공으로 가장 큰 역할을 한 장세동이나, 병력을 이끌고 고려대로 진주한 송응섭에 비해 자신의 부대에 배속된 전차들을 회군시키기만 하고[9] 오히려 지휘관 자리를 비운 탓에 사령관 장태완의 밀명으로 33경비단 병력 중 일부 중대가 사령부가 위치한 필동으로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했던 김진영은 중령라인인 맨뒷줄에 서있다는 점과 정도영의 위치가 준장 4명과 나란히[10][11], 그것도 전두환 바로 뒤에 서있는 위치를 생각하면 그의 중요도를 알 수 있다. 비슷한 예시로, 박희도는 망설임 없이 1공수 전원을 출동시켜 국방부와 육군본부 장악에 기여하여 단체사진 촬영에 전두환 바로 옆에 앉은 것에 더불어 자신과 달리 이미 소장이었던 12기 동기들인 박세직과 박준병을 제치고 먼저 대장 진급을 이뤄내며 전두환 정부에서 육군참모총장에까지 승진하며 승승장구한다.[7] 이건 사망일자 순서대로 모시는 현충원의 방침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정도영이 2010년 7월 24일 사망했는데 장태완은 이틀 뒤인 2010년 7월 26일에 사망했기 때문이다.[8] 심재국은 1980년 1월 13일부터 동년 11월 21일까지 전라북도 전주에 위치한 510보안부대의 부대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국 국가폭력 고문 피해 실태 조사(2차)』, 2021. 11., 97~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