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10:08:50

박종규(1944)

<colbgcolor=#34632a><colcolor=#ffffff>
박종규
朴琮圭 | Park Jong-Gyu
출생 1944년
충청남도 대전부 (現 대전광역시)
사망 2010년 12월 7일 (향년 66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학력 대전고등학교 (졸업)
육군보병학교 (졸업)
육군대학 (졸업)
임관 육군사관학교 (23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67년 ~ 1993년
최종 계급 소장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제3공수특전여단 15대대장
제30보병사단 91연대장
제56보병사단
병과 보병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전 육군 예비역 소장이며 12.12 당시 김오랑 비서실장을 살해한 주범이다. 대통령 경호실장을 역임한 피스톨 박과 동명이인이다.

2. 생애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1967년 육군사관학교(23기)를 졸업했다.[1]

1979년 12월 12일, 육군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 15대대장으로서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라는 최세창 여단장의 지시를 받고 본인과 사적으로 친했던[2] 특전사령관 부관 김오랑 소령을 살해한 후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했다.

1980년 5.17 내란 때 3공수여단은 서울 국립묘지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신군부는 항쟁 3일째인 5월 20일에 3공수여단을 광주로 내려보낸다.[3] 이렇게 그는 12.12 군사반란에 이어 또 다시 역사에 영원한 오명을 남기고 만다. 본인 역시 시위대가 무장하기 전인 20일 밤[4] 광주역에서 시위대를 향해 직접 권총을 발사했다고 시인했다.[5]

1993년 제56보병사단장(소장)으로 있다가 문민정부하나회 숙청으로 강제 전역했다. 그는 하나회 회원도 아니었으며, 직속상관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직속상관보다 서열이 높은 특전사령관을 체포한 이상 군사반란 행동대장에 가까운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지라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내란죄 등 혐의로 이희성, 주영복, 신윤희, 이원조와 함께 불구속 수사를 받았고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사면되었다.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군인연금을 포함한 모든 예우를 박탈당했고, 부인이 동대문시장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수입으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풍문에 의하면 이때 전두환이 징역을 마치고 나온 박종규를 불렀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전두환의 성격상 갔으면 꽤 큰 보상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6] 본인은 군인으로 명령을 따랐을 뿐 전두환을 위해 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걸 지키고 싶었던 듯 하다.

2009년 12월 9일, 김오랑추모사업회에 전화를 걸어 '나에게도 지난 30년은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자신이 지금 식도암 4기 등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하늘의 벌'이라면서 12.12에 참여했던 자신과 자신의 부하들을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자업자득인 면도 있다만. 2005년 MBC PD수첩과의 인터뷰에서도 "김오랑 생각하면 내가 오래 살면 안되지. 내가 오래 안 사는 게 걔에 대한 보답이야"라는 등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7]

2010년 12월 7일 식도암으로 투병 중 66세로 사망했다.

3. 대중매체

최세창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절친 김오랑을 사살하기는 했지만 이후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았다는 증언들을 반영해 박종규가 김오랑의 시신 앞에서 멘탈이 붕괴되는 묘사가 필수요소로 들어간다.
  •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정병주의 체포에 처음에는 반대 의견도 냈으나 결국 명령에 따랐고, 정병주 체포 과정 중 순국한 김오랑을 발견한 뒤 오열하는 장면이 나오며 이후 김오랑 소령의 장례식에서도 눈물을 참지 못한다.
  • 백무현 화백이 그린 <만화 전두환>에선 김오랑이 저항하자 "이 새끼가!"라고 욕을 퍼부으며 쏴죽이고 부상을 입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연행하라고 고함을 지르는 등 현실이나 영상 매체에 비해 악랄한 모습을 보인다.[8]
  •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박수종'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배우는 이승희. 총격전이 벌어지기 전 문 밖에서 '형이다'라고[9] 속삭이면서 회유하지만 잠깐 놀란 오진호(김오랑)는 다시금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이후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오진호가 사망하자 시신을 보며 망연자실해하지만 뒤이어 들어온 김창세(최세창) 여단장이 사령관님 모시라고 명령하자 동시에 냉정하게 뒤돌아서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1] 동기들 중 유일하게 미국 특수전교육을 수료했다고 한다.[2]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적도 있으며, 이후에도 같은 군인아파트 위아랫층에 살아서 부인끼리도 알고 지내며 밥도 같이 먹는 사이였다고 하며 12.12 군사반란 이전까지는 주위에서도 피가 이어지지 않은 형제라고 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김오랑 소령의 아내 백영옥 씨가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박종규에게 "군인이 반란 일으키라는 걸 명령대로 하나 보죠?"라고 일갈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당연히 이후 백영옥 씨에게 절연당했고 유족들은 "제압하면 될 것을 총을 발포해서 죽일 필요까지 있었냐"며 분노를 표출하였다.[3] 3공수여단은 이미 전날 19일 새벽에 광주에 투입하기로 결정한 상황이었고 20일 새벽에 광주로 기차를 통해 이동했던 것이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3공수여단은 11, 12, 13, 15, 16대대였다.[4] 시위대가 최초로 무장한 시점과 장소는 다음날인 21일 오후 1시 30분경, 나주 남평지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전남지방경찰청 2017)[5] 조갑제 "조갑제의 광주사태", 조갑제닷컴 2013.[6] 근데 이 말 자체가 웃긴 게 당시 전두환은 추징금도 제대로 납부가 안된 상태였다. 즉, 이때 불러서 갔는데 돈 따위를 줬다면 그것도 추징 대상인 불법축재자금이다.[7] 당시 인터뷰에는 3공수여단 모 중령이라고 나왔다.[8] 사실 백무현 화백이 군사정권에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 더군다나 책이 나올 당시에 박종규는 용서를 빌지도 않았고, 인터뷰 역시 모 중령이라고만 소개되었으니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묘사를 넣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9] 근데 정작 박종규와 김오랑 소령의 실제 나이는 1944년으로 동갑이다. 다만 박종규가 육사 2기수 선배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