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08 23:52:18

정병주

정병주(鄭柄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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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 1988년
복무 대한민국 육군
기간 1950년 ~ 1980년
임관 육사 9기
최종계급 소장
최종보직 특수전사령관
1. 소개2. 일생
2.1. 12.12 군사반란때 행적2.2. 부하들의 배신
2.2.1. 박희도의 배신2.2.2. 최세창의 배신2.2.3. 장기오의 배신2.2.4. 반면 지조를 지킨 윤흥기 준장과 김오랑 소령
3. 죽음에 대한 논란4. 국립서울현충원 안장5. 미디어에서6. 관련 문서

1. 소개

1926 ~ 1989 3.4
대한민국군인. 최종 계급은 소장.

2. 일생

본관은 봉화(奉化). 삼봉 정도전의 방계후손이다.

1926년 경상북도 영주군 이산면 용상1리 배해마을[1]에서 태어났다.

영주공립보통학교(현 영주초등학교), 안동공립농림학교 졸업 후 1949년육군사관학교 9기로 입교해서(드라마 제5공화국에는 육사 6기로 잘못 나왔다) 6.25 전쟁 당시 1연대 소대장으로서 참전하였다. 1967년에 제1공수특전단장이 되었고, 1974년 소장으로 진급, 대통령경호실 차장을 거쳐 그 이듬해에 특전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1979년까지 죽 특전사령관을 지냈다. 그야말로 1970년대 대한민국 특전사의 대부격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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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드라마)를 열심히 본 사람이라면 여단장 및 참모 목록에서 낯익은 이름들이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2.12 사태와는 관련없지만 11공수특전여단장인 최웅 준장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진압으로 유명했던 그 11공수특전여단의 지휘관 맞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진압을 주도하는 최순기 준장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추정.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2.1. 12.12 군사반란때 행적

1979년 12월 12일, 그 유명한 12.12 군사반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서울 근방 부대 중 쿠데타에 반기를 든 딱 세명 뿐인 장성[2]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로 정병주 자신에게는 그야말로 군인으로서 가장 상상하기 싫은 최악의 상황을 맞고 말았다...

1979년 12월 12일, 그 유명한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보안사하고 하나회 소속 장교들은 12.12가 일어나기 1주일전부터 만나 정승화 육군 총장을 불법체포하고 친정승화계열의 군인들인 정병주, 김진기, 그리고 장태완등이 저항하지 못하게 술자리에 초대했다. 그리고 12월 12일이 왔다. 정병주 사령관은 김진기, 그리고 장태완과 술자리를 같이하다가 전두환이 안와서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승화 총장이 납치되었다는걸 듣게 된다. 그들을 술자리에서 일어나 각각 수방사, 육군본부 그리고 특전사로 돌아갔지만 돌아가서 보았을때는 이미 태반이 보안사쪽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정병주도 특전사령부로 돌아와서 누가 이런 일들을 벌이고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기가 가장 아꼈던 부하들 박희도 제1공수 여단장, 최세창 제3공수 여단장, 그리고 장기오 제5공수 여단장이 반란을 일으킨 보안사와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충격을 먹었다. 육사후배들(전두환, 노태우등)에게도 배신당했고, 자기 직속부하인 여단장들에게까지 배신당해서 충격이 컸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잡고 대응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는 특전사 부사령관 이순길 준장을 시켜 1공수를 막으려 했다. 또,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병력출동을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믿을 수 있는 병력이 현재 없다.'라고 전화하자 정병주는 "나에게는 9공수가 있다. 9공수 윤흥기 준장하고 참모장은 갑종출신이라서 그들하고 연줄이 하나도 없다. 9공수라도 빨리 출동을 시키겠네."라고 하고 곧바로 9공수 윤흥기 준장에게 보안사와 경복궁에 있는 30경비단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9공수는 출동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은 하나회/보안사가 알게되고 그냥 놔두면 자신들의 반란이 성공하지 못 할거라는걸 직감했다. 그리고 그들은 제 3공수여단장인 최세창에게 정병주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최세창은 그래도 자기 상관인 정병주를 어떻게든 회유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0분후, 박종규 중령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3] 특전사령부 사령관실이 3공수내에 있었고 특전사령관 직속 전투병력이 없어서 박종규와 체포조는 아주 쉽게 사령관실을 공격할 수 있었다. 김오랑 소령은 하나회의 회유를 거부하고 단신으로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사령관실로 정병주를 피신시켰다. 그리고 반란군들이 특전사령관실에 도착했고 김오랑은 권총으로 반란군과 교전 중 전사하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반란군에게 체포당한다. 그때, 9공수는 자기들의 사령관이 피격당했다는 사실을 모른체, 보안사와 경복궁 30경비단을 공격하기위해 갔다가 신사협정에 속은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돌아간다. 반란이 끝난 후, 정병주는 강제예편 당하게 된다.

2.2. 부하들의 배신

옛말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듯이 믿지 말아야 할 종자들을 자식이라고 믿은 죄이다.

2.2.1. 박희도의 배신

그가 자식처럼 돌봐주었고 진급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던 제1공수특전여단장 박희도 준장은 1여단장에 처음 부임한 1978년 11월에 3명의 무장공비가 1여단 지역을 마음껏 돌아다니다가 복귀에 성공한 사건이 발생해서 이 때문에 보직해임을 당하게 생겼는데, 이 때 정병주 본인이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직접 이세호 당시 육군참모총장에게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겨우 보직해임을 모면했었다.[4] 하지만 은혜를 갚기는커녕 12.12 당일 무단으로 여단 병력을 동원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는 핵심 역할을 한다. 정병주를 배신한 박희도는 전두환 정권하에서 진급을 거듭하여 6년 후인 1985년에는 26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 전두환의 군맥 제거 차원에서 바로 보직해임 후 현역 부적합 전역했다.

2.2.2. 최세창의 배신

제3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 준장의 경우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부하인 박종규 중령을 시켜 직속 상관인 정병주 소장을 직접 체포하는 하극상을 저질렀다. 특전사령관이 근무하는 특전사령부(본부)는 3공수특전여단의 영내에 있었으며, 사령관이 있는 사령부 본부 건물엔 사령부 직속의 무장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그 후 특전사령관이 된 박희도는 자기도 똑같이 당할까봐 두려워한 나머지 제707특수임무대대를 창설했다.[5] 그 역시 똑같이 승진을 거듭하여 합동참모의장과 국방부장관(제6공화국)을 지냈다.

2.2.3. 장기오의 배신

제5공수특전여단장 장기오 준장의 경우 쿠데타에 가담하기는 하였으나 효창운동장에서 대기하다 끝났다.

2.2.4. 반면 지조를 지킨 윤흥기 준장과 김오랑 소령

전술한 3명의 공수특전여단장 모두 정병주 소장을 배신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자식이 현재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데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어 준 아버지에게 총구를 들이댄 격이다. 공수특전여단장들 뿐 아니라 자신이 특별히 아끼던 육사 후배인 전두환과 노태우, 정호용 등 모두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했고, 그 아픔이 어땠을지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유일하게 육본 측의 명령을 받고 출동했다가 회군했던 제9공수특전여단의 윤흥기 준장만이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반란군이 윤흥기 준장을 포섭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정규 육사가 아닌 갑종 출신인데다 참모장 역시 갑종 출신이라 연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우직한 성격도 한 몫 했다. 실제로 9공수특전여단의 출동은 반란군의 마음을 가장 졸이게 만든 요소였고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쿠데타의 실패와 아군 특전부대끼리의 유혈 충돌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윤흥기 준장은 12.12 사태 종료 이후 곧 경질된다.[6]

이때 특전사령부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홀로 사령관 곁을 지키다 그의 육사 2기수 선배이자 한 부대에서 함께 근무한 경험도 있으며 같은 군인아파트 위아랫집에 살던, 한마디로 형제와 다름없던 박종규 중령의 흉탄에 사살당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고#(훗날 김오랑 소령은 중령으로 추서됨), 정병주 소장 본인도 총상을 입은 채 연행되어 강제 예편당하고 말았다.

3. 죽음에 대한 논란

그렇게 강제예편된 이후 그는 꾸준히 12.12 사태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해 왔었다. 그러다가 1988년 10월 16일 밤 10시에 그는 행방불명되었고 결국 실종 139일 만인 이듬해 3월 4일에 송추 인근 야산에서 목매달아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당국은 그가 자살한 것으로 사건을 종결지었으나, 정병주 소장과 친분이 깊었던 장태완 소장은 계속해서 그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는 주장을 해 왔다. 고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가톨릭 교리에서 자살은 용서받지 못 할 큰 죄 중 하나이다. 살벌한 제5공화국 때에도 장태완 소장에게 '12ㆍ12의 진상규명에 조력하겠으며,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남아야 하니 서로 몸 조심하자'고 말하는 등 # 자살을 택할 인물도, 정황도 아니었다는 것이 그 이유.

민주화 이후 군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에서도 재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조사 결과 자살로 분류하기에는 의문점은 있지만 당시 증거물이 거의 없어서 사실상 뚜렷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발표했다.

김오랑 중령의 부인 백영옥 여사가 남편의 죽음에 충격으로 쓰러져 실명하고 고생이 많을 때 그나마 정병주는 손수 찾아가 위로하면서 남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다음에는 백영옥 여사가 뜻을 이어받겠다고 나섰지만 그녀마저도 1991년 6월 28일에 갑자기 추락사했다. 백영옥 여사가 살아생전 한 여성지 인터뷰에서 그나마 정병주 장군께서 위로하던 게 위안이라고 슬픈 마음을 달랬는데 겨우 몇 년 뒤에 이런 일로 그가 죽었을지 알았을까.

4. 국립서울현충원 안장

고인의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고인의 무덤은 백비. 비석의 내용이 없이 그냥 이름만 적혀있다. 무명 용사들도 공적을 기리는 한 줄의 비문이 항상 적혀 있게 마련인 무덤에서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으로, 이는 유족들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인들이 상관에게 총질을 하고도 버젓이 활보하는 세상에 고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는 뜻. 그 장군에 그 가족이다.

5. 미디어에서

제4공화국(MBC)에서는 성우 황일청씨가, 제5공화국(MBC)에서는 배우 민욱씨가 정병주 역을 맡았다.[7]

6. 관련 문서


[1] 봉화 정씨 집성촌이다. 유수호 전 국회의원은 용상2리 출신이다.[2] 다른 2명은 장태완 수경사령관, 그리고 김진기 헌병감.[3] 처음에는 반신반의 했지만 결국 명령에 따르고 만다.[4] 실제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세호 대장은 당시 이 사태에 크게 노해서 박희도를 문책하고 군복까지 벗겨버리라고 길길이 날뛰었다.[5] 물론 쿠데타세력이 군을 완전히 장악한 상황이 굳어져서 더 이상의 하극상의 우려가 없어진 후에 707특임대는 본연의 대테러부대 임무에 전념하는 부대가 된다.[6] 그 자리를 채운 게 신군부측 인사인 이진삼이었다. 이후 이진삼은 육군참모총장까지 승진하는 등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이 이진삼은 천안함 침몰 당시 군번줄 발언 경례 불량 발언과 함께 짬밥을 내세워서 국방부장관과 현역 장성들에게 호통을 쳤던 작자다. 이 양반은 현역에서나 전역해서나 똥군기 세우기로 유명한 양반인데 2011년 지역구 행사 때 육군에 연락해 육군 헬기를 타고 나타난 양반이다. 전관예우라나 뭐라나. 더 기가 막힐 사건은 2011년 국방위원회 국감장에서 있었던 일인데 당시 참석했던 XXX 준장은 과거 이진삼의 부관이었던 사람이었다. 근데 이진삼은 하라는 국정질의는 안 하고 뜬금없이 그 사람에게 공격 준칙을 외우게 시켜 더듬거리자 이게 우리나라 육군의 현실이라고 비아냥거리며 국회의원 및 기자(라고 해봤자 몇 명 없었지만)들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주변의 몇몇 미필 국회의원들은 실소를 내뿜었지만 군필자들은... 정작 이진삼도 YTN 돌발영상을 통해 육군참모총장 시절 개판경례하던 장면이 공개되면서 욕만 처먹었다. 결국 다음 총선에서 육사 후배인 김근태에게 쳐발리고 국회의원 자리를 빼앗겼다.[7] 4공화국에서는 최세창에게 욕설과 함께 호통을 쳤지만 5공화국에서는 서로 좋은 인연이 아닌거같다면서 한탄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