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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7년 8월 26일 |
경상남도 창녕군 | |
사망 | 2013년 5월 23일 (향년 86세) |
부산광역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246호 |
군사 경력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1950년 ~ 1980년 | |
임관 | 갑종간부후보생 (1기) |
최종 계급 | 소장 (대한민국 육군) |
최종 보직 | 대한민국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
주요 보직 | 제27보병사단 연대장 제2군단 참모장 제3야전군사령부 작전처장 제7보병사단장 제1야전군사령부 참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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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2. 생애
1950년 갑종 1기로 육군종합학교를 졸업하여 6.25 전쟁에 참전한 후 철의 삼각지 전투와 무명고지 탈환전을 경험했다. 1968년 제27보병사단의 연대장을 지낸 후 1971년 제2군단사령부 참모장, 1973년 제3군사령부 작전처장, 1975년 제7보병사단 사단장, 1978년 제1군사령부 참모장을 역임했다.1979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임명되어 직무를 수행 중 197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이 발생하자 수도경비사령부에서 진압을 논의하던 중 보안사에 의해 하나회 소속 신윤희[1]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부단장의 병력이 들이닥치자 "뭐야, 웬 놈들이냐"라고 말하며 권총을 뽑았지만 헌병 중대장 한영수[2] 대위의 M16 총탄에 왼쪽 폐가 관통 당하는 중상을 입고[3] 3개월에 걸쳐 수술과 치료를 받은 끝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치료 후 보안사에서 수사를 받고 1980년 2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 전역조치 후 풀려났으며 이후 가택연금을 당해 그의 집에 4개월간 보안사 요원이 상주했었다.
1993년 7월 정승화 예비역 대장 등과 함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 12.12 주도 세력 34명을 반란죄 등으로 고소했다. 2002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보상위원회에 의해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지정되기도 했으며 예편 후 교통안전진흥공단 이사장을 역임했었다. 2013년 5월 23일 향년 86세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3. 여담
- 갑종장교 중 최초로 장성이 된 인물이었고 이후 갑종장교단을 조직하였다.
[1] 쿠데타 당시 중령이었으며 1992년 육군 소장 예편.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열린 12.12 사태 및 5.18 민주화운동 관련 재판에서 반란 모의 참여 주요 임무 종사 등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사면되었다. 2012년에는 ‘12.12는 군사반란인가’라는 자기 변명과 말도 안되는 논리를 펴는 책을 발간했다.[2] 신군부에 의해 무공훈장을 받게 되고 대위 예편 후 1981년 경위 특채로 경찰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총경의 자리까지 올라간 후 2009년 홍천경찰서장에 취임하고 2011년 정년퇴직했다.[3] 드라마 제 5공화국에서는 전두환에게 포섭된 신윤희 중령의 권총에 맞는 걸로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