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15:34:50

이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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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91919><tablecolor=#373a3c,#ddd><width=20%> 1950
더글라스 맥아더
미 육군원수 ||<width=2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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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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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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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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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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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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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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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제2훈련소장
제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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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가
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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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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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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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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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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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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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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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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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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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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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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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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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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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우
제3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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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대
정화언
제3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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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훈련소장
제39대
문판생
제40대
이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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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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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평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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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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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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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
제9보병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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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장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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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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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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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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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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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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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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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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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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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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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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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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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일
제48대
안병석
제49대
김동호
제50대
김진철
제51대
정광웅
제52대
박진원
제53대
-
제54대
-
제55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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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3대 제5군단장
이성가
李成佳 | Lee Seongga
파일:이성가 장군.jpg
<colbgcolor=#1d2088><colcolor=#FFF> 출생 1922년 10월 9일
중화민국 지린성 퉁화시
사망 1975년 12월 1일 (향년 53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선동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2묘역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9
경력 주 멕시코 대한민국 대사
주 터키 대한민국 대사
주 오스트리아 대한민국 대사
제9대 국회의원
상훈 태극무공훈장 (1953년)
군사 경력
임관 난징군관학교
군사영어학교 (1기)
복무 화평건국군 육군
1943년 ~ 1945년
국민혁명군
1945년 ~ 1946년
대한민국 육군
1946년 ~ 1962년
최종 계급 소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육군대학 학장
주요 보직 주 베이징 한국광복군 군사부장
제1연대장
제13연대장
제8보병사단장
제9보병사단장
제7보병사단장
육군제2훈련소장
제7보병사단장제3군단장 직무대리
제5군관구사령관
제3군단장
제5군단장


1. 개요2. 일생
2.1. 광복 전까지2.2. 대한민국 국군 참여
2.2.1. 숙군에 기여
2.3. 6·25전쟁
2.3.1. 강릉 전투2.3.2. 영천·신녕전투2.3.3. 토산 전투와 군사재판 회부
2.4. 제2훈련소장 재임기2.5. 퇴역 및 그 이후
3. 약력4. 백선엽의 회고5. 여담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군인, 정치가 및 외교관이다.

2. 일생

2.1. 광복 전까지

신흥무관학교 1922년 칠도구 분교장, 서로군정서 의용대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관석 장군(1870~1942)의 아들로 만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경화.

중일전쟁 발발 후 왕징웨이 정권의 난징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43년 3월 화평건국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1944년 7월 소교가 되어 12군 인사참모로 부임하였다.

1945년 5월 베이징 출장 중 남의사의 베이징지역 책임자 진영륜 소장을 알게 되어 남의사의 정보요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7일 왕징웨이군에서 탈출하여 베이징 주재 국민혁명군 11전구로 투신하였다.[1]

1945년 8월 12일 한국광복군 제3지대 화북지구 특파원인 배여성, 이용기와 접선하였고, 이후 3지대장 김학규 장군으로부터 베이징 주재 임정대표부 군사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2. 대한민국 국군 참여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하얼빈에 수감되었다가 해방 후 석방되어 베이징에 와 있던 유해준(베이핑 잠편지대 정훈부장), 광복군 김영오(베이핑 잠편지대 군수부장) 씨 등과 육로로 북한을 거쳐 귀국하였으며 같이 귀국한 유해준과 함께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2월 3일 국방경비대 부위(중위)로 임관하였다.[2] 군번은 유해준 부위 00036, 이정일(이성가) 부위 00037.

2.2.1. 숙군에 기여

1946년 11월 제1연대장으로 부임하자마자 구 일본군 헌병 출신인 김창룡 소위를 연대 정보 주임 보좌관으로 등용하여 정보소대를 맡기고 연대 내 숙군을 단행하였다.# 왕징웨이군 - 국민혁명군, 남의사 활동을 통해 이념 및 사상사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의 감에서 나온 활동이었다.
본격적인 숙군작업은 여수반난이후 시작됐다. 전후 4차에 걸쳐 장교 1백26명, 사병 1천1백70명을 숙청하면서 그중 다수를 총살처분했다.
그러나 이같은 전군적인 숙군작업에 앞서 서울의 태능에 주둔한 제l연대(연대장 이성가소령)에서는 자체적으로 숙군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비록 군내 일부의 부분적인 좌익제거작업이긴 하지만 본격적인 숙군작업의 선도적 모델이 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연대장 이성가 소령은 수도 서울에 주둔한 국군의 선발부대격인 제1연대에 좌익조직이 침투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여 그 색출작업에 나섰다.
이 작업의 챔피언으로 발탁된 것이 3기생인 일본 관동군 헌병오장출신의 김창룡 소위였다. 이성가 소령은 김 소위를 연대 정보주임보좌관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정보소대를 편성케하여 연대 내의 사상사찰을 전담시켰다.
일찍이 장개석군·왕정위군에 소속되어 군내에서의 사상 사찰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성가 소령이 체험을 통해 얻은 소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김창룡 소위는 일제 하에서 경찰관이나 헌병을 지낸 경험자들을 특채하여 정보소대를 구성하여 우선 연대 내의 좌익 색출에 나섰다. 이 정보소대 요원들이 나중에 창설되는 육군특무대(후에 방첩대·보안사로 발전)의 주축을 이루었다.
김창룡 소위는 우선 연대의 선임 대대장인 이병주 소령의 동향을 수상히 여겨 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원들을 개성·문산·포천·의정부·인천·수원 등에 배치하여 충남 출신의 2기생인 노재길 등 연대 내 좌익계 일당 8명을 검거하고 그들이 문산의 다리밑에 숨겨두었던 무기들을 압수했다.
조사결과 배후 인물은 이병주 소령임이 밝혀졌다. 이 소령은 47년 3월 18일자로 대대장에서 군기대장(헌병)으로 전임되어 있었다.
김소위는 이병주소령이 5월21일자로 청주의 제7연대 연대장으로 전출명령을 받자 대원들을 이끌고 청주에 가 있다가 부임하는 이소령을 검거하여 서울로 압송했다.
이들은 미 군정재판에 회부되어 이병위는 5년형을 선고받아 47년 10월 파면됐고 나머지 일당은 3년형을 선고 받았다.
47년 8월 15일 광복2주년 기념행사에 재1연대가 시가행진을 하게됐다. 연대 내의 좌익계 잔당들은 행진에 참여할 병력이 수통에 물을 준비해 나갈것이라고 예상하고 15일 아침 연대 우물에 독약을 타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김창룡의 정보소대가 이 정보를 입수하여 최희섭 일병을 극렬한 좌익분자로 위장시켜 좌익조직에 침투시졌다.
최 일병은 거사 계획과 관련자 전원을 탐지해 내어 8월12일 검거함으로써 독살극을 미연에 방지했다. 최 일병은 후에 장교로 임관하여 6·25때 소령으로 전사했다.
이처럼 1연대에서는 이성가 연대장의 과감한 조처와 김창룡 소위의 민완한 활동으로 연대 내의 좌익조직이 일찍이 제거되어 큰 소요 없이 6·25를 맞게됐다.
다른 연대에서는 연대 정보과(S2)에서 사상사찰 문제를 맡고 있었으나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어 결국 대숙군을 겪어야했다.
《중앙일보》 1983년 3월 19일자 〈육사졸업생들〉 (118) 숙군의 시작
배진영의 기무사(機務司) 비록 ① 특무대의 탄생과 김창룡의 시대 (월간조선 2016년 5월)

서울역 앞에서 거적을 덮어쓰고 노숙하던 김창룡은 1946년 5월, 만주에서 알고 지내던 박기병(예비역 육군소장) 소위와 조우했다. 계획을 묻는 박기병에게 김창룡은 말했다. “나는 공산당에 쫓겨 사선(死線)을 넘어왔소. 공산당을 때려잡으려면 무슨 일을 하면 좋겠소?”

국방경비대에 입대한 김창룡은 5연대를 거쳐 3연대 정보하사관으로 근무하다 1947년 1월 경비사관학교 3기로 입교했다. 입교 당시 면접을 본 심사장교 백남권 중위는 일본 헌병 출신인 김창룡을 좋게 보지 않았다. 떨어뜨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그에게 김창룡은 고함을 질렀다.

“해방이 되어 조국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조국을 위해 일본군에서 배운 군사지식을 쏟아내 헌신하겠습니다!”

그해 4월 소위로 임관한 김창룡은 제1연대로 배속됐다. 1연대장은 이성가(예비역 육군소장) 소령이었다. 중국군 출신인 이성가 소령은 이념문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김창룡 소위를 연대 정보주임 보좌관으로 임명해 부대 내 좌익세력을 색출해 내도록 지시했다. 김창룡은 정보과 사무실 내에 야전침대를 갖다 놓고 일에 매달렸다.

2.3. 6·25전쟁

1953년 5월 20일 이성가(李成佳) 육군 소장에게 수여된 훈기번호 제112호의 태극무공훈장 공적서의 공적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0년 6월 25일 제8사단장으로서 북한군을 남침을 강릉, 주문진지구에서 저지 지연시키는가 하면, 9월 10일 영천전투에서는 적 제15사단의 주력을 궤멸하고 이어진 반격작전에서 파죽지세로 의성, 영천을 탈환하였으며, 예천과 풍기에서 퇴각하는 적을 섬멸하였다. 뿐만 아니라 1951년 1월에는 제7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양구 송현리-송정동 전투에서 901고지와 883고지 등을 완전 점령, 아군의 진격을 유리하게 하였다.

2.3.1. 강릉 전투

이성가 대령이 지휘하는 제8사단은 2개 연대로 편성되어 동해안 지역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제10연대는 38도선에 그리고 제21연대를 예비로 삼척에 배치하였다. 사단의 방어지역은 진흑동~기사문리의 26㎞로서 적이 남침하면 강릉 고수를 위해 제21연대를 좌일선에 투입하여 2개 연대로 38선에서 저지.격멸하며, 이를 위해 38도선 남쪽의 고지군에 경계진지를 편성하고 광원리-오대산-연곡천에 주저항선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6월 중순에 사단은 공비토벌을 위해 각 연대에서 1개 대대씩 2개 대대를 오대산과 계방산 일대에 투입함으로써 적의 남침시 실제 가용병력은 4개 대대 규모에 불과하였다.
반면 북한군 제5사단은 양양-강릉의 해안도로 축선에 주력을 투입하여 북쪽에서 제10연대를 정면공격하고 제766 유격부대와 제549 육전대를 정동진과 임원진으로 상륙시켜 제21연대의 증원을 차단함으로써 2개 연대를 각개 격파하고 강릉을 남북으로 협공하려 하였다.
이러한 계획하에 적 제1경비여단이 6월 25일 04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주문진으로 진격하자, 38도선을 경계하던 제10연대의 전방부대들은 적의 포병화력에 압도되어 분계선 남쪽의 저지진지로 철수하였으나 저지진지도 점령하지 못하고 제2대대는 주문진으로 그리고 제1대대는 광원리 부근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한편 강릉 남쪽 정동진리 등명동에 상륙한 1개 연대 규모의 적의 육전대는 삼척-강릉간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밤재를 점령한 후 1개 대대는 강릉을 향해 북상하고, 또 다른 1개 대대는 옥계 방향으로 남하하였다. 또한 07시경에는 임원진에 제766유격부대가 상륙하여 1개 부대는 태백산맥으로 침투하고 1개 부대는 삼척 방향으로 북상하였다.
강릉비행장에 본부를 둔 제8사단 이성가 대령은 상황보고를 접하고 제10연대로 하여금 적을 최대한 저지하게 하고, 삼척의 제21연대를 강릉으로 이동시켜 주저항선인 연곡천-사천선에서 적을 격퇴하기로 하였다.
육 군본부에 대한 증원요청이 좌절되자 이성가 사단장은 전쟁의 장기전을 예견하고 6월 25일 10시를 기해 작전지역 내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군수품의 소산과 군경 가족의 피난, 공공기관의 소개 등 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민간 차량의 징발을 통해 기동력을 확보하였다.
제10연대장 고근홍 중령은 적의 후방상륙에 대처하기 위해 57㎜ 대전차포중대와 제4중대를 강릉 남쪽의 안목-안인진 일대로 급파, 안인진 해변에 접안을 시도하던 적의 선단을 격퇴하였으며, 제4중대는 안인진 서쪽 대포동의 방어진지에서 북상중이던 1개 중대 규모의 적을 격멸함으로써 위급한 국면을 타개하였다. 그러나 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남쪽에서 협공하는 적에 대비하기 위해 강릉 남쪽 군선강에 방어진지의 급편을 결정하고 제10연대장에게 그 임무를 지시하였다.
한편 삼척의 제21연대장은 북평의 제1대대 수색대와 제1중대가 옥계 부근에서 남하하는 적 1개 중대를 기습공격하여 궤멸적 피해를 가함으로써 적의 상륙과 또한 적의 주력이 밤재를 차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릉으로 이동명령을 받은 제21연대장은 이로 인해 북평-백복령-삽당령-구산리로 우회 이동, 주력은 26일 10시 30분경 군선강 방어진지를 인수하였고 제3대대는 강릉으로 행군 본대와 합류하였다.
전투편성을 완료하고 제10연대에 배속되어 연곡천 주저항선 진지를 점령한 사단 공병대대는 전방대대인 제10연대 2대대의 철수를 효과적으로 엄호할 수 있었고, 제21연대의 군선강 배치완료 후 연狙?방어배치를 조정하면서 반격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제10연대 2대대가 6월 26일 밤 주저항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천마봉을 공격 탈취하여 주문진 공격의 발판을 마련하자 사단은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적이 27일 4시경 제8사단의 주문진 공격보다 1시간 앞서 공격준비사격을 천마봉에 집중하자 제2대대는 천마봉을 포기하고 분산철수 하였으며, 상황보고를 받지 못한 아군은 측방으로 접근하는 적을 아군으로 오인함으로써 주저항선이 돌파되고 말았다.
이때 증원된 제21연대 3대대가 사천선에 투입되어 분산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고 적을 저지함으로써 최고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제18야전포병대대는 포 단위 사격을 계속하여 주저항선을 돌파한 적의 진출을 결정적으로 지연시켰으며, 이로 인해 철수병력이 사천선에 저지진지를 편성할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한편 제8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전 전선의 전황을 알 수가 없자 일단 대관령으로 물러나 상황 추이에 따라 반격을 가하기로 결심하였다. 27일 14시를 기해 사단은 철수를 개시하여 대관령을 넘었고, 사단사령부와 제10연대는 유천리에 그리고 제21연대는 횡계리에 집결하였다. 이리하여 적은 21시 50분경 강릉에 진입하게 되었다.
사단장은 2개 연대의 재편성 상태를 점검한 후 강릉탈환을 결심하고 공격명령을 하달, 28일 아침 제21연대가 공격을 개시하고 제10연대 1대대도 구산리 동측 칠봉산에서 공격제대를 측방 엄호하였으며, 포병은 대관령 동편 보광리 입구에서 화력지원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제6사단사령부로부터 “원주로 철수하라”는 육본의 명령을 받은 제8사단은 공격을 중지하고 대관령으로 철수, 29일 원주로 향했으나 횡성 피탈 사실을 피난민으로부터 확인한 사단장은 목표를 제천으로 변경하였다.
제8사단장은 강릉에서 철수한 후 남한강 남안에 2개 연대를 배치하여 북한군 제8사단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아군은 적 사단의 전방지휘소는 물론이고 도하를 시도하는 적에게 공격을 가해 막대한 타격을 주었으나 적으로부터 배후의 위협을 받고 죽령으로 철수하여 저지진지를 점령한 채 방어에 돌입하였다.
제8사단은 이 지역에서 6일 동안이나 방어선을 유지함으로써 충주 방면의 북한군 제12사단이 단양 점령을 위해 전환투입되게 하여 전력운용의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고, 반면에 아군은 서부전선에서 저지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획득하였다.

다만 동해안 축선에서 8사단이 벌인 전투는 "북한군은 동해안축선의 기동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3]는 소련군 군사고문단 보고서 분석 논문의 지적대로 개전 초 북한군 공세작전에서 가장 부차적이었으며, 유일하게 최우선 목표인 서울 점령과도 관계 없는 축선이었다. 북한군의 주공이 집중된 서부전선이나 작전적 포위기동을 실시하기 위해 북한군 2군단 주력이 유입된 6사단 정면과는 임무의 중요성도, 투입된 전력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8사단을 공격한 북한군은 정규 보병사단이 아니라 1개 보병연대로 증강된 제1경비여단이었다.

2.3.2. 영천·신녕전투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이 3개 사단을 집중한 주공이 패퇴하고 8월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대구 북방 다부동 공격에 참가했던 북한군 15사단은 당시 8사단이 방어하던 영천 방면으로 전환 투입됐다. 영천은 대구와 경주 양방향으로 진격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만약 영천 방면으로 돌파한 북한군이 서쪽으로 향한다면 6사단과 1사단이, 동쪽으로 향한다면 수도사단과 3사단이 측후방을 위협받게 됨으로써 방어선이 연쇄적으로 무너질 위험성이 컸다.

이 상황에서 8월 공세를 저지한 유엔군, 특히 미 극동군 사령부와 미8군 사령부는 피아 전투력비가 완전히 역전되어 북한군이 공세종말점에 도달했다고 판단하고 인천 상륙작전으로 대표되는 공세이전 계획 수립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대구 북방에서의 공세가 실패한지 열흘만에 다시 총공격을 가해왔다. 9월 공세의 시작이었다. 미 2사단이 담당하던 영산 낙동강 돌출부에서는 주요 고지를 탈취당해 일시적으로 사단 책임구역이 둘로 양분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미 25사단도 함안을 빼앗기고 수세에 몰렸다. 위기는 미군이 담당하던 낙동강 서부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미 1기병사단 구역은 물론 한국군이 담당하고 있던 동부전선에서도 북한군의 전면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것은 영천이었다.

잡다한 잔존 병력 및 766부대를 배속받아 증강된 북한군 15사단은 8사단이 맡고 있던 영천 방면을 공격하여 일시적으로 놀랄만한 성공을 거둔다. 9월 5일경 영천 동북쪽의 고경면 단포동을 점령함으로써 착잡한 산악지형이 연속되는 특성상 대부대의 기동과 보급이 어렵다고 여겨지던 영천 북방에서 8사단의 저항을 무너뜨린 데 이어, 9월 6일에는 영천 시내 전체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낙동강 전선에 이 정도 크기의 돌파구가 뚫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국이 한반도를 포기하고 서사모아 제도에 망명정부를 세우는 'New Korea Plan'을 준비하기 시작할 정도였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8사단은 육본 지시로 1군단 예하에서 2군단 예하로 소속이 변경된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전선을 유지하던 1사단과 6사단에서 증원병력을 동원하기 위한 조치였다. 2군단장 유재흥 준장은 이성가 대령에게 8사단 병력을 영천 동남쪽 금호강변에 배치하여 15사단의 남진을 저지토록 한 후, 1사단 11연대와 6사단 19연대를 차출하여 7사단 주력[4]과 함께 영천 시내로 역습을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이후 3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공습 위협과 지형상의 문제로 2제대가 후속하지 않았던 북한군 15사단의 공세탄력은 완전히 꺾이고 만다. 그리고 9월 9일 2군단장 명령에 의거, 영천 일대에 낚싯바늘 형태로 포진한 한국군 6개 연대가 일제히 공격에 나섰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완전히 둘러싸인 북한군 15사단은 4,000명 이상의 손실을 입으며 와해됐고, 한국군은 영천 시내는 물론 북방의 고지군까지 장악하면서 13일 경에는 원 방어진지를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 영천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붕괴 위기를 드라마틱한 승리로 바꿨다는 점에서 '대회전'으로 평가된다.

2.3.3. 토산 전투와 군사재판 회부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후퇴하던 1950년 12월, 8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사단 주력을 예하 16연대장 유의준 중령이 인솔하도록 맡겨놓고 차량 대열과 동행하여 연천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보로 이동하던 사단 주력이 황해도 토산 신장리의 임진강 좌안에서 도섭을 실시하다 북한군 패잔병 2개 대대의 기습적인 포위공격을 받아 병력과 장비의 1/3을 상실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패배가 알려지자 이성가 준장은 1951년 1월 적전 직무유기 및 군무이탈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2군단장 유재흥을 비롯한 여러 장성들의 탄원으로 무기로 감형된 후 다시 참모총장 정일권과 국방장관 신성모의 지시로 선고유예를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 후 1951년 1월에 7사단장으로 부임해 동부전선의 백석산 전투 등을 이끌었다.

2.4. 제2훈련소장 재임기

1952년 9월 소장 진급과 함께 제2훈련소(육군훈련소) 소장으로 발령받는다. 과거 왕징웨이 군과 남의사 정보요원 활동으로 중국군 교리에 매우 밝았고, 전쟁기에도 이를 십분 활용해 전적을 매우 올렸다보니 이 경험을 신병훈련에 접목시켜 중공군/북한인민군을 상대로 효율적인 전투능력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훈련소장 시기 업적으로는 신병훈련 실전화와 훈련병 면회제도 실시, 훈련소 내 우체분국 설치 등이 있었다. 이 시기에는 7사단장 시기의 공훈을 인정받아 미국으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런 성과 때문에 이성가 소장은 박병권 소장, 한신 소장 등과 함께 육군훈련소 초기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때 한가지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참모장인 진 모 준장과 이성가 소장의 관용 지프가 행사 당시 촬영되었는데 참모장 진 모 준장의 지프 시트에는 가죽커버가 없고, 이성가 소장의 지프 시트에는 가죽 커버가 씌워져 있었다고 한다.

2.5. 퇴역 및 그 이후

육군대학 총장으로 있다가 5.16 군사정변 이후 전역했다. 그 후 주 멕시코 대사, 주 터키 대사, 주 오스트리아 대사를 거쳐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5년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이성가 장군의 유해는 2009년에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2묘역에 안장되었다.

3. 약력

1922.10.9 중국 봉천성 통화현 출생
1940.1 중국 베이징중학교 졸업
1940.4 중국 난징중앙군관학교 입교 (왕징웨이 정권)
1943.3 중국 난징중앙군관학교 졸업
1944.7 중국 왕징웨이군 소교
1945.5 중국 국부군 정보조직 남의사 베이징책임자 진영륜 소장과 접선
1945.8 중국 국부군 11군으로 투신
1945.8 광복군 베이징주재 군사부장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이 임명)
1946.2 군사영어학교 졸업 (중위/부위 임관). 제1연대 1대대 13중대 선임장교 부 (대대장 채병덕 참령)
1946.4 정위(대위) 진급
1946.11 제1연대장 (소령진급과 동시 부임)
1947.12 제1여단 참모장
1948.6 제13연대장
1948.8 제4연대장 (여수순천 4.14연대 반란사건 토벌작전)
1948.11 제6여단 참모장
1949.1 제2여단 참모장
1949.3 대령 진급
1950.6 제8사단장 (강릉지구 전투, 단양지구 전투, 영천대회전 지휘)
1950.9.1 준장 진급
1951.1 안동전방지휘소 소장
1951.3 제9사단장
1951.4 태백산지구 전투사령관
1951.9 제7사단장 (백석산, 883고지,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승리)
1952.9 소장진급. 제2훈련소장
1953.8 미 육군 참모대학
1954.6 제7사단장. 3군단장 대리 (54.11~55.7)
1955.7 제5관구 사령관
1956.6 제1군 부사령관
1956.9 제3군단장
1957.7 제5군단장
1960.6 육본 정보참모부장
1960.10 육군대학 총장
1962.3 육군소장 예편
1962.4 주 멕시코 대사
1966.9 주 터키 및 오스트리아 대사
1973. 제9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국회의원)
1975.12.1 심장마비로 사망

4. 백선엽의 회고

영천전투의 영웅, 李成佳 장군

이성가(李成佳·1922~1975) 장군 하면 ‘영천전투’가 떠오른다. 그는 5군단장을 역임한 전형적 야전군인이다. 전쟁 발발 당시 강릉-동해안을 담당하는 8사단장으로 전투를 치렀다. 그는 낙동강전선에서 북진까지 8사단장으로 내리 부대를 지휘했다.

특히 전쟁 초기 강릉-주문진 전투에서 8사단 장병들을 잃지 않아 대관령에서 6사단과 함께 지연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그의 8사단은 낙동강 방어선의 영천전투에서 북한군 15사단의 주력을 궤멸시켜 대구와 경주를 거쳐 부산을 점령하려는 김일성의 기도(企圖)를 좌절시켰다. 그는 7사단장으로 백석산전투에서도 전공을 세웠다.

1922년 만주 퉁화(通化)에서 출생한 그는 신흥무관학교 칠도구분교장(七道溝分校長)을 지낸 부친 이관석(李寬錫)의 유언에 따라 중국 남경군관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중국 왕정위(王精衛) 군대에 들어갔다.

그는 중국군 소령으로 진급, 12군사령부 인사참모를 지냈다. 광복 무렵 중국 정보기관인 남의사(藍衣社) 북경책임자 진영륜 소장 권유로 그 밑에서 정보기관원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 귀국한 그는 1946년 6월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육군부위(중위)로 임관했다. 1연대 창설요원, 4연대장을 지냈고, 여순반란사건을 진압하고 1949년 10월 태백산지구전투사령관으로 공비토벌을 했다. 이형근 장군 후임으로 8사단장이 됐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38선을 방어하는 10연대에 적을 저지하도록 하고, 삼척에 주둔하고 있는 21연대를 강릉으로 이동시켜 주(主)저항선인 연곡천-사천선에서 ‘천연장애물’인 하천을 이용해 북한군을 저지했다. 그는 강릉지구 전투 전공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육본은 이성가 대령에게 “원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고, 단양에서 남한강 남안(南岸)에 2개 연대를 배치해 북한군 8사단의 남진을 6일간 막았다.

어쩔 수 없게 된 북한군은 충주방면 12사단을 이 지역에 투입하게 됐고, 아군이 서부전선에서 저지선을 만들 시간적 여유를 벌어주었다.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자, 그의 사단은 1950년 9월 영천지역을 통해 대구와 경주로 진출하는 북한군 15사단의 주력을 궤멸시켜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반격작전 때는 유재흥 장군이 지휘하는 2군단에 배속돼 희천-묘향산 지역까지 진출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눈물을 삼키며 38선으로 철수했다.

7사단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강원도 양구지역에서 중공군과 백석산, 크리스마스고지에서 접전을 벌여 승리를 맛봤다. 휴전 이후 1군사령부 부사령관, 3군단장, 5군단장,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 육군대학 총장을 거쳐 1962년 3월 육군소장으로 예편했다.

지휘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이나 큰 전공에 비해 관운(官運)은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1975년 3월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5. 여담

백선엽의 평대로 운이 없다. 물론 이성가의 업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6.25전쟁 초기 8사단은 북한군 특수부대[5]가 포함된 병력을 차단하고 심지어 역습까지 해 강릉을 탈환했다는 것, 그 덕분에 6사단은 후방걱정없이 전방에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과, 또한 제대를 그대로 유지 퇴각하였는데 그 6사단도 퇴각도중 일부 병력과 중화기를 손실했으나 8사단은 차량을 징발하여 병력과 중화기 거의 그대로 보존했다는 것이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6.25전쟁사에서도 가장 견실한 부대운영이란 평가를 받는다. 또한 영천 전투에서 북한군 1개 사단 주력 섬멸에 일익을 맡아 아군의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백선엽이 운이 없다고 한 이유는 김종오는 많이 알려졌지만 이성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이다.

6.25 개전 당시 사단장 중 유일한 중국군/광복군 계열이다.[6]

김재규가 박정희를 향해 쏜 발터 PPK가 육군대학 부총장으로 있던 1960년 당시 육군대 총장이던 이성가 장군으로부터 선물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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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는 육군본부 발행 "영천대회전". 부작의 상장의 부관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부작의 상장은 11전구가 아닌 12전구 사령관이었다.[2] 당시 신성모의 추천으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해준 장군이 광복군으로서의 보증을 해 주었다는 얘기도 있다.[3] 최용호 (2001).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 분석. 군사(43), p.43[4] 5, 8연대와 공병대대[5] 지금처럼 스페셜포스가 아니라 오토바이기동대대와 같은 부대를 말한다[6] 1사단장 - 백선엽, 2사단장 - 이형근, 3사단장 - 유승렬, 5사단장 - 이응준, 6사단장 - 김종오, 7사단장 - 유재흥, 8사단장 - 이성가, 수도 - 이종찬. 50년 6월 10일 인사조치 전에 7사단장은 중국군/광복군 계열의 이준식 준장이었으나 육사 교장으로 전보되었다.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이준식 장군은 이범석 전 국방장관(당시) 계열로 분류되기도 했다. 당시의 7사단은 수도사단이 개칭된 사단으로 지금의 수도사단과는 다르다. 중국군/광복군 출신으로 군사영어학교 동기이기도 했던 유해준 장군은 6.25당시 중령으로 연대장에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