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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오(1920)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20년 2월 9일
경기도 진위군 청북면 후사리 156-1번지
(현 경기도 평택시 청북읍 후사리)
사망 1993년 6월 26일 (향년 73세)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449호
학력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전문부 (법과 / 졸업)
육군사관학교 (8기 / 졸업)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8기)
복무 한국광복군
1944년 11월 ~ 1946년
대한민국 육군
1949년 ~ 1956년
최종 계급 대령 (대한민국 육군)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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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한국광복군 출신의 군인. 1963년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고,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

2. 생애

1920년 2월 9일 경기도 진위군 청북면(현 평택시 청북읍) 후사리 156-1번지에서 태어났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제국대학 전문부 법과졸업했다.

1944년 중화민국으로 망명했고, 그해 3월부터 한국광복군 화북지구 공작책인 김광언(金光彦)과 접선했고, 그의 권유를 받아 5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왕징웨이 정권 치하의 북평시에서 해동학우(海東學寓)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한 뒤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국민혁명군 중앙군 유격대에 입대하여 활동하기도 했으며, 그해 11월에는 김광언의 도움으로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정식 입대했다. 이후 북평시·톈진시 지구 지하공작원에 임명되어 초모공작, 군자금 모금, 반정공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고, 제3지대 본부 군수과장에 발령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한국광복군 북평지구 군사특파단 정보참모에 선발되어 다른 단원들과 함께 중국인들로부터 조선인 교포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고, 질서를 유지해 무사히 대한민국으로 귀환토록 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일본 제국 육군 부대 내에 억류되어 있던 조선인 사병들을 인수하여 한국광복군에 편성하는 임무 또한 수행했다. 1945년 10월 군사특파단이 제2지대 판사처와 통합되어 화북한교선무단(華北韓僑宣撫團)으로 개편되었고, 이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화북지역판사처로 개편되었다. 이때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직할대대가 북경 잠편지대로 격상되자, 김광언, 유해준, 이성가, 최춘선, 정래정과 함께 잠편지대에 보임되었고, 김영오는 잠편지대 군수과장에 임명되었다. 1946년 유해준, 이성가와 함께 육로로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 미군정청 조사연구소 조사과장으로 근무했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에 8기로 입교하여 1949년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했고, 1956년 1월 30일 김창룡 암살 사건 당시에 특무대 지역 대장으로 근무하였는데 각 지역 특무대장들 회합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당시 회합 자리에 있었던 허태영, 이진용 대령이 사건과 관련되기도 하였다. 이후 같은 해 대령으로 예편했다.

예편 후 한국전력주식회사 서울지점장을 지내다 1964년 1월 상무이사임명되었다. 이후 한국전력 육상단한국전력 배구단의 단장을 맡기도 하였다. 1968년 박영준 사장이 해임되자 함께 상무이사직에서 해임되었으며, 그 후 한국석유공업 감사 및 고문 등 기업체 간부를 역임하다가 1993년 6월 26일 오후 6시 45분에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유해는 1993년 6월 2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