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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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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무공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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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원수 ||<width=2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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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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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대장 ||<width=2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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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在美
1917년 12월 27일[1] ~ 2008년 9월 8일 (향년 90세)

1. 소개2. 군 경력3. 생애4. 4.19 혁명5. 기타6. 관련 문서

1. 소개

6.25 전쟁 당시 활약한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본관은 김제(金堤)[2].

4.19 혁명의 일화로도 알려져있다.

2. 군 경력

3. 생애

1917년 12월 17일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아버지 조만섭(趙蔓燮, 1897. 10. 30 ~ 1950. 8. 16)과 어머니 달성 서씨 서화자(徐華子, 1895. 9. 26 ~ 1977. 12. 6)[5] 사이에서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3년 4월 고창사립고등보통학교(現 고창고등학교)에 입학했고, 1940년 8월 신상묵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훈련소에 제1기 생도로 입소해 일본 제국 육군에서 복무했다.

1947년 8월 국방경비사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 제2기생[6][7]으로 입교한 후 그해 12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에는 홍익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기도 했다.#

개전 이전에는 제5보병사단 3연대 2대대장을 맡아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에 참여하였으며[8], 개전 직전에는 당시 광주에 주둔 중이던 5사단 15연대 부연대장으로 재직,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당시 타격을 입고 남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던 제1보병사단에 전력 보충을 위해 합류하였다. 그렇게 백선엽 장군 휘하에서 낙동강 방어~중공군 개입 때의 전쟁 중기까지 15연대[9][10]소속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51년 1월에 경북 문경에 있던 제2보병사단으로 옮겼는데 강등이나 진급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최전방에 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인해 전력이 약화 된 부대 중 하나였던 2사단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비교적 온전했던 1사단으로부터 전력보충 차 옮긴 것으로 보인다. 2사단 32연대장으로서 전력보충, 안동지구공비섬멸 작전 및 이후의 반격작전 등에 참여하였으며 재직 중 휴전을 맞았다. 이후 대한민국 육군본부로 전보되었다가 준장으로 진급한 후 1958년 제15보병사단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5.16 군사정변 후 육군본부 민사군정국장 등으로 재직하였고 1963년 준장을 끝으로 예편, 1967년 대한통운주식회사[11] 이사 등 국영기업체에서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2008년 90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4. 4.19 혁명

1960년 4.19 혁명 당시 서울 지역 담당 계엄군이었던 제15보병사단의 사단장이었다.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 육군참모총장과 같이 군부의 수뇌였던 김정렬 국방부장관유재흥 제1야전군사령관 모두 정부에 불만이 있었던 터라 진압에 미온적이었고, 이로 인해 몇몇 과정을 통해 조재미 준장으로부터 아래와 같은 방침이 예하 부대에 지시되었다.
  • 상관의 허가 없이 시위대에 무단으로 발포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가 건물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간인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받는 것을 금지한다.

결과적으로 계엄군은 강경하게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과는 달리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어 유연하게 시위대에 대처했다.

그리고 19일 저녁 시위대가 고려대학교 캠퍼스에 수세로 몰리게 되어 대치한 시위대 측과 군경 간의 대규모 유혈 사태가 예상되자 그는 놀라운 행동을 보여준다. 바로 그날 새벽에 무장 없이 부관과 특무대장만을 대동하고 캠퍼스 내로 진입한 것. 그리고 태극기로 덮인 희생자들의 시신을 대하고는 정중하게 조의를 표하자 시위대는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후 조 준장과의 담판을 통해 연행·해산되었다.

다만 그가 처음부터 시위대에 온건했다기 보다는 실탄 지급을 고려하거나 시위대의 대표들을 깡패로 대했다는 발언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저 군인답게 진압이라는 임무와 상관의 명령에 충실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시위대가 계엄군을 대하는 태도와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그 또한 마음을 돌리게 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는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의 하야를 시민들에게 직접 알리기도 했다.

파일:external/library.419revolution.org/41901-156.gif
김경재 전 의원의 김형욱 회고록에서는 이기붕 대한민국 부통령의 사저로 시위대가 향하자 이를 저지하던 부대의 중대장이 대처를 묻는데, 이에 송요찬 사령관의 지시인 '적당히 조치하라'만을 되풀이하는 우유부단한 인물로 나온다. 이에 중대장인 모 대위는 질문 끝에 욕설을 내뱉고는 시위대를 방치, 이후 전역해버렸다고 하는데 김형욱 씨가 5.16 군사정변에 참여한 정군파 인물인 것과 김경재 전 의원의 배경 및 확실치 않은 모 대위의 존재 등 복합적인 관계를 모두 고려하여 판단하자.

5. 기타

6.25 전쟁 당시의 다른 군인들처럼 전쟁간에 굉장한 쾌속 진급을 한편이다. 소위 임관 당시에 나이가 30대로 비교적 많았던 점이나 일제강점기동안 군인으로서의 경력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점, 군사영어학교 시절에 입교하지 않고 그 후신인 국방경비사관학교에 비교적 늦게 입교한 점 그리고 주요한 전력(戰曆)을 쌓은 제1보병사단소속 시절 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의 스타일이 크게 전과를 올리기보다는 착실하게 꾸준한 전과를 올리는 편이었던 점 등 쾌속 진급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조건에도 47년 소위 임관후 50년 6월 대위였던 계급이 50년 10월에는 대령이 되었기에.

다만 전후에는 대령에서 준장으로 승진한 것 외에는 거의 승진이 없었다. 전후 당시 국군이 비대해진터라 인사적체가 굉장히 심했었고[13]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박정희 파의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물론 현재 한국군의 일반적인 장교들의 진급에 비하지는 말자. 10여년만에 소위에서 준장 되기

6. 관련 문서


[1] 김제조씨대동보 중권 637~638쪽에는 8월 13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 첨지중추부사파(僉知中樞府事派) 21세 재(在) 항렬.[3] 박정희 전 대통령, 김재규, 한신 등과 동기이다.[4] 1952년 9월에 수송교통관리단장을 맡았다고 되어 있는 서술이 많은데, 시기상 제2보병사단 제32보병연대장 및 제2보병사단 부사단장을 지내던 시기라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묘비의 약력에도 이 직책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5] 서대호(徐大浩)의 딸이다.[6] 박정희 대통령과 동기이다. 다만 입교 전의 군인 경력은 하늘과 땅 차이다.[7] 그런데 같은 육사 2기생으로 소개됨에도 조재미 준장은 1947년에 입교해 졸업했다고 되어 있는데 반해 박정희 대통령은 1946년에 입교해 졸업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8] 이에 대한 민간인희생 사건 707의 주요한 관련자이다. 당시 주도한 부대가 3연대 정보과와 2대대였다. 이 사건에는 당시 사단장 김백일 대령 및 휘하 3연대장 함준호, 연대 정보과 소속 김시곤, 류근창, 2대대 정보장교 정해운, 5중대장 김용, 6중대장 김응록, 8중대장 지정풍 등이 모두 연루되어있다. 다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최근에서야 알려졌다.[9] 1사단에 합류할 때에는 15연대가 아닌 기존 1사단 소속이던 13연대였으나 낙동강 방어전 도중에 개칭했다.[10] 평양에 먼저 입성한 그 연대 맞다. 당시 50년 10월에 막 중령으로 승진하여 연대장이 된 그는 덕분에 대령으로 특진하였다. 즉 한달동안에 소령-중령-대령을 모두 거친 것.[11]CJ대한통운. 1945년부터 1968년까지 정부관리기업체였다.[12]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직접 알리는 조 준장. 이후에 시민들과 함께 만세를 외치기도 했으며 일설에 의하면 이 발표로 인해 이기붕 부통령만 쳐내고 지위를 유지하려 했던 이 대통령의 의도가 좌절됐다고도 한다.[13] 여기에 백선엽파, 정일권파 등 군내 파벌 싸움도 심했는데, 여기에 속하지 못한 군인들은 이하 생략.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불만이 5.16 군사정변의 배경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