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1-26 16:03:48

김형욱


파일:나무위키+유도.png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은 김형욱(화제인물)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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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군 장교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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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金炯旭 | Kim Hyong-uk
파일:external/img.hoop8.com/pmLGrsCG.jpg
코리아게이트 미 하원 청문회 당시
출생 1925년 1월 16일
황해도 신천군
(現 황해남도 신천군)
실종/사망 1979년 10월 7일(54세{?})
프랑스 파리
본관 김해 김씨
봉산(鳳山)·산남(山南)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49~1963년 10월 13일
재임기간 제4대 중앙정보부장
1963년 7월 12일~1969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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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신영순
자녀 子 김정한
종교 불교
임관 육군사관학교 (8기)
최종계급 준장
학력 경희대학교(정치외교학 / 학사)
의원선수 1
의원대수 8 }}}}}}

1. 개요2. 생애
2.1. 5.16 군사정변 이전2.2. 5.16 군사정변과 군정 시절2.3. 중앙정보부장2.4. 민주공화당 국회의원2.5. 망명 이후
3. 최후에 관한 여러 설
3.1. 국정원의 조사 결과3.2. 부실조사 논란3.3. 절충설
4. 기타5. 연기한 배우들

1. 개요

"트럭 천 대만 징발해서 그놈들(대학생들) 싹 다 무인도에다 격리시켜 버리면 되잖아!"
6.3 항쟁[1]을 보고받고 (출처: 남산의 부장들 다큐)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그리고 대한민국 제3공화국 시절 중앙정보부장을 맡은 인물. 대한민국 정보기관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2] 재임한 기관장이다. '남산 멧돼지', '날으는 돈까스', '공포의 삼겹살' 등의 별명으로도 유명하다.[3]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치공작을 벌였지만, 후에 버림받고 미국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된다. 이후 미국에서 박정희를 디스하는 회고록을 집필하고, 미 의회 청문회에 나가서 박정희에 불리한 증언을 하는 등 반정부활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후 1979년 프랑스 파리에 갔다가 실종되었다. 생사불명으로 처리되었다가 1991년 법원의 실종선고를 받아 법적으로 사망처리 되었다.

2. 생애

2.1. 5.16 군사정변 이전

황해도 신천군에서 태어났다. 국민학교 졸업이었으나, 해방 이후 혼란기에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하였다. 사실 이 기수는 한국전쟁 당시 초급장교였기 때문에[4], 많은 수가 전사했지만 김형욱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뚜렷한 전공보다는 1951년 이후 동부전선(강원도)에서 활약했다는 데 주목할 정도. 이러한 경험 때문에 회고록에서 자신은 박정희보다 애국자를 강조했다.[5]

2.2. 5.16 군사정변과 군정 시절

5.16 군사정변 당시엔 중령으로 쿠데타에 참가하였으며, 36세의 나이로 국가재건회의 최고위원이 된다. 참고로 당시에도 김형욱은 단순 무식한 이미지로 정평이 나있었다고 한다. 5.16 군사정변을 준비하면서 육사 8기와 9기가 서로 명단을 교환할 때, 9기쪽에서 김형욱의 이름을 보고 "저런 '쓸모없는 돌대가리'를 왜 포함시켰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2.3. 중앙정보부장

1963년 7월 김종필, 김용순, 김재춘에 뒤이어 제4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생긴지 얼마 안되어 조직이 덜 갖춰졌고, 김종필이나 김용순, 김재춘은 재임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조직에 그다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다다음 후임자 이후락처럼 온갖 악습을 중앙정보부(이후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까지)에 심은 사람이다. 김형욱은 박정희 휘하에서 정치공작을 도맡았다. 박정희한테 토사구팽을 당했다는 것 때문에 동정표를 사기도 하지만, 김형욱은 결코 선량한 인물은 아니었다. 박정희의 정적인 김영삼을 암살하기 위한 일명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도 그가 지시한 일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가 재직하던 시절에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유럽 간첩단 사건, 그리고 국제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동백림 사건이 있다. 1969년에는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여당 국회의원 김용태 등을 강압적으로 끌어들여서 3선 개헌에도 일조했다. 이때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도 일으켰다. 또한 3선 개헌에 찬성하되 선행 조건으로 자신과 이후락의 경질을 요구한 이만섭도 테러하려 들었다. 중앙정보부가 무서운 조직으로 찍힐 때는 이 사람이 한 몫 했다. 나중에 김계원중앙정보부장을 맡을 때, 박정희가 "김형욱이처럼 팰 필요는 없다"고 하는 주장도 있을 정도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의 조사과정에 참여하여 관련자 김중태를 신문하다가 겪은 일이 참으로 가관이다.
김형욱 : “자네가 그 악명 높은 김중태야? 경상도 사람이 왜 경상도 대통령반대하냐?"
김중태 : "이북 사람김일성이나 지지할 것이지, 왜 남쪽으로 내려왔냐?"
그렇게 충성을 바쳤으나, 1969년 3선 개헌이 성공하자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버림을 받게 되었다.자신의 인척(조카사위)이자 제1책사였던 김종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알다시피 김형욱은 이후락, 박종규처럼 부정부패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나중에 망명 생활에서 꽤 도움이 되었다.

2.4.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이후 김형욱은 1971년 쥐약 격인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거치기도 했으나, 그 이듬해 1972년 10월 유신 선포로 국회가 해산되는 동시에 국회의원직 마저 잃어버렸다.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 명단에도 들지 못했다. 그는 이미 권력에서 밀린지 오래였고, 중앙정보부장일 때 전횡이 워낙 심했던지라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다. 공공의 적

공화당 실세인 김성곤[6], 길재호를 비롯한 많은 사람을 적으로 뒀다. 생전에 김형욱은 보복을 많이 두려워했다. 당시 일기장에 "대통령이 난데없이 날더러 쉬라고 했다. 지난 6년간 악역을 다 도맡아 했는데 미칠 것만 같다."고 적혔다.[7]

2.5. 망명 이후

1973년 4월 먼저 대만으로 출국했고, 거기에서 귀국하지 않고 바로 미국으로 갔다. 김형욱의 존재가 부각된 것은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 포스트가 한국 정부가 로비스트 박동선을 통해 미국 관리들에게 수백만달러를 뇌물로 제공했다고 폭로하면서부터였다. 이것이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사건이다. 사건이 시작된 직후인 11월 말 대외적으로는 주미한국대사관의 참사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앙정보부의 미국활동조직 부책임자였던 김상근이라는 사람이 미국으로 망명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상근은 과거 김형욱의 비서였으며, 망명 과정에서도 김형욱의 도움을 받았다. 박정희 밑에서 가장 좋은 관운을 자랑했다던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김상근의 망명으로 1976년 12월 4일,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신직수의 후임이 바로 김재규였다. 김재규의 첫번째 임무는 김형욱을 귀국시키는 일이었다. 1977년 1월 17일자로 김재규는 김형욱에게 정중히 예를 갖춘 편지를 보내 귀국을 종용했다. 박정희 정권의 김형욱 귀국공작은 1977년 6월 6일과 7일 이틀에 걸쳐 뉴욕 타임스가 김형욱과의 독점 인터뷰 내용을 대서 특필함으로써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 기자 회견에서 김형욱은 박동선을 활용한 공작에 대해 자세히 폭로하고, 박정희는 하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그는 미국의 재미언론인 줄리 문(문명자)와 손잡고[8] 1977년 6월 미국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9]에 출석하여 유신 정권의 비밀스러운 사건들을 거침없이 폭로하였다. 김형욱은 이 청문회에서 "박정희씨 개인에게 설사 인간적인 배신자가 되는 것을 감수한다 하더라도 국민과 역사 앞에 배신자가 될 수는 없다고 믿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0]

김형욱의 증언은 박정희에게 치욕을 안겨주었으나,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다. 증언을 마친 김형욱이 1977년 6월 말에 착수하여 실종되기 직전인 1979년 9월 말 완성할 때까지 몰두한 것은 회고록의 작성이었다. 이것이 바로 훗날 알려진 이른바 '김형욱 회고록'이다. 김형욱은 청문회에서 박정희의 여자관계를 비롯하여 중요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회고록에 더 주목했고, 당시 청문회에서 프레이저 의원은 김형욱이 자신이 아는 사실을 충분히 진술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그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김형욱이 미국으로 빼돌린 2천만 달러 이상의 막대한 재산 문제를 치고 들어갔다. 1977년 7월 11일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2차 증언을 마친 김형욱은 7월 15일 '국민과 역사 앞에 참회합니다'라는 제목의 특별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자신이 "박정희씨를 인간적으로 비하시키는 개인적인 부덕을 강력 자제해 왔다"면서, 오랜 기간 정보기관의 책임자였던 자신은 "박정희씨에 대하여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있다"고 강조했다. 김형욱은 "박정희씨가 유치한 방법으로 나를 계속 중상한다면 이를 천하에 폭로할 작정"이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앞서 언급된 대로, 그 즈음 김형욱은 당시 유학생이었던 김경재[11]와 함께 그 유명한 "김형욱 회고록"(부제: 혁명과 우상)을 펴내는 것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김형욱 회고록의 존재를 알게 된 박정희는 회고록의 원고를 넘기는 조건으로 김형욱과 흥정을 벌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 해외담당 차장으로 있던 윤일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미국에 가서 김형욱을 설득하라고 지시한다. 윤일균이 "준비되는 대로 가겠다"고 하자 박정희는 당장 가라며 서둘렀다고 한다. 미국으로 달려간 윤일균은 권총을 탁자에 꺼내놓는 김형욱을 상대로 사흘 밤낮을 설득하여 복사지 2천장 분량의 방대한 회고록 원고를 건네받는 데 성공했다. 그 대가로 50만 달러를 제공하고 김형욱의 여권 문제를 해결해 주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이때 김형욱은 이중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원고의 일부가 김형욱에 의해 일본으로 빼돌려졌고, 이는 일본의 '창'이라는 작은 출판사에서 축약 평론판으로 80년대에 출판되기도 했다.[12] 한국에서는 당연히 금서였다. 물론 지금은 정식으로 출판됐으니 맘놓고 봐도 된다. 어쨌든 당시 여러 인사들에 의해 각종 회유와 귀국 종용을 받은 김형욱은 앞서 언급된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13]으로부터 원고료로 거액을 준다는 말을 듣고서 그와 만나 돈과 원고를 교환했고, 이후 프랑스 파리로 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1979년 10월 1일 김형욱은 파리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곳에서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최후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현재까지 아무 것도 확증된 바 없다. 실종되었을 때가 54세다.

3. 최후에 관한 여러 설

납치되어 곧바로 살해당했다는 것이 정설이긴 하지만, 누가, 어디서, 어떻게 죽였냐를 놓고는 주장이 분분하다.
  • 1980년대에는 대한항공 특별기(화물기)편으로 청와대 지하실로 실려와 박정희가 직접 M1 카빈을 머리에 대고 쏴 처형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신상옥 감독의 영화 <증발>은 이 설을 따랐다.
  • 김형욱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납치, 스위스 제네바 근교에서 살해하였고 그 시체를 파리까지 옮긴 뒤 외교화물로 위장하여 한국으로 공수했다라는 설도 있다. 다른 설들과는 다르게 이 설은 프랑스의 르몽드일본문예춘추에서만 보도가 된 외국발 설이다. 이 기사를 보도한 일본 기자는 한국의 어느 지위 높은 사람으로부터 들었다고 주장했다.
  • 카지노 마피아들에게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설은 별다른 증언이 없다.
  • 김재규의 지시를 받은 파리 현지의 조직폭력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중정 고위 간부 출신인물의 주장을 월간조선이 받아서 보도한 것이다.
  • 김형욱이 최종적으로 행방불명이 된 곳은 프랑스 파리가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설도 있다. 이는 2005년 5월 20일에 해제된 국무부 비밀전문에 나온 내용인데, "김형욱은 한인 남성 한 명과 10월 9일 파리를 떠나 스위스 취리히를 경유해 사우디아라비아 다란으로 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행적이 묘연하다"라고 적혀있다. 기존의 추정 실종 날짜인 10월 7일보다 이틀 뒤인 10월 9일이라고 특정된 것이다. 다만 이 내용은 일본 외교부가 파리 경찰을 상대로 김형욱 실종 사건에 관한 정보를 끈질기게 요구해 얻어낸 결과를 다시 주미 일본 대사관을 거쳐 미국 국무부에 전달했고, 국무부에서 이를 다시 주한 미국 대사관에 내려보낸 자료라고 한다. 일단 전언이 네단계이며, 한국 중앙정보부와의 교차 검증이 되지 않은 주장이라는 점이 약점이다.
  • 한편 MBC PD수첩의 2005년 5월 3일 방송분에서 위의 '양계장 닭모이 암살설'을 방송한 적이 있었는데, 결론은 '그랬을 가능성이 낮다' 였다. 당시 취재진은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했던 이 모씨와 함께 일본, 프랑스로 검증 차원의 동행취재를 수행했고, 당시 중형 닭모이 기계가 보급되지 않았다는 점, 이 모씨가 제대로 된 장소를 특정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어 '닭모이 암살설'은 신빙성이 낮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인 2005년 7월 23일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당시 실제 프랑스에 중형 닭모이 기계가 보급이 되고 있었다는 증언을 확인했으며, 시사저널 측에서도 PD수첩의 보도를 반박하는 장문의 기사를 내는 등 당시 한동안 이런저런 논쟁이 계속되었다. 결국 결론이 제대로 나지 않고 흐지부지 되었다.



이상의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명확히 증명된 바가 없다.김형욱 미스터리, 누구 말이 맞나

3.1. 국정원의 조사 결과

2005년 5월 26일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진실위)는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지시로 권총으로 암살 당했다는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참고로 진실위의 국정원 쪽 간사를 맡았던 사람이 나중에 국정원장이 되는 김만복 당시 기조실장이었는데, 그는 이 사건 조사를 자신했다고 한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지시에 의해 프랑스에서 연수중이던 중정요원에 의해 납치 살해당했다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정보부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 김만복 실장은 김형욱을 살해한 요원들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고, 이미 그들에 대한 설득 작업도 진행중이었다. 당시 이들은 상당한 정도 사건의 진상을 털어놓았다. 문제는 해당 사건 관련자들이 당시 그들에게 '작전'을 직접 지시했던 전 프랑스 공사 겸 중앙정보부 프랑스 거점장 이상열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이상열이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있었기 때문이다.[16]

어쨌든 발표된 조사 결과는 이러했다.
당시 이상열 주 프랑스 공사중앙정보부 프랑스 거점장을 겸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현지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던 A요원, B요원이 담당했다. 이들은 동유럽 출신 협력자 2명을 10만 달러에 고용했다. 김형욱 전 부장은 이상열 공사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 공사는 전주를 소개시켜주겠다며 10월 7일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A요원과 협력자 2명이 나타나 이 공사의 승용차를 이용해 김형욱을 납치해서 파리 근교로 끌고 갔다. 협력자가 소련제 소음권총 7발을 발사해 살해했다. 살해한 시신은 낙엽으로 덮어두었다. 이상열 공사는 A요원에게 관저에서 결과를 보고받았다. 그는 김형욱 부장의 여권과 지갑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소지품을 철저히 인멸한 뒤 귀국할 것을 지시했다. A요원은 귀국 후 10월 13일 김재규 부장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김재규는 직접 A요원을 불러 거액의 돈 봉투를 쥐어주며, 앞으로의 근무나 생활의 편의를 봐주겠다고 약속했다.

후에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상열은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와의 면담에서 자신의 개입 사실 자체는 시인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내 면담 조사는 노(No)라고 기록해 달라"고 말할 정도로 철저히 함구했다고 한다. 이상열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약 1년 뒤인 2006년 4월 3일에 사망했다. 작전을 직접 수행했던 A요원은 그 후 산에 오르다 사찰이 보이면 법당 앞으로 가서 절을 하며 김형욱의 극락왕생을 빌면서 살았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3.2. 부실조사 논란

하지만 김형욱의 유족들은 이 결과를 믿지 않았으며 조사 결과 조차도 매우 부실하다고 주장해서 부실 조사 논란이 있다. A요원과 B요원의 진술에는 분명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용한 총기는 분실했다고 주장하며, 시신을 낙엽으로 덮어두었다고 하는데 이 것은 매우 부실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첫째, 명색이 암살까지 했다는 요원이라는 사람들이 총기를 분실했다는 아마추어나 할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다. 오히려 총기를 분해해서 여기저기 버렸다는 등으로 증거 인멸을 하는 것이 요원들 본인에겐 더 유리한 진술이기 때문. 만약 분실한 총기가 제3자에 의해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 둘째, 시신을 낙엽으로 덮어두었다는 게 시신 처리 방법으로선 매우 부실한 주장에 가까운 데다 그 낙엽으로 인한 사체는 무풍지대가 아니고서야(...) 누군가에 의해서 발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경찰도 사체는 찾을 수 없었으므로, 낙엽으로 시신을 덮어두기만 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 오죽하면 닭모이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질까 특히 살해과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진술한 당시 중정 요원이 김형욱의 사체를 버린 장소가 생각나지 않는다며 진술을 회피했던 점도 석연치 않다.
  • 셋째, 10월 9일에 파리를 떠나서 취리히를 경유해 사우디로 갔다는 미 국무부의 보고서가 공식적으로 있는데 파리 근교에서 10월 7일에 죽었다는건 말이 안 된다.[17]

한편 김형욱은 파리에만 머물지 않고 스위스에도 방문했었으며, 이 당시에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매우 화가난 상태로 전화를 했었다고 김형욱의 맏며느리가 주장한다. 그리고 유족들은 국정원의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서울로 납치·송환 되어 피살당했다거나 사우디로 끌려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파리에서 살해당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 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지금 와서 사건 관계자들의 입을 열 방법은 사실상 없다는 것이 문제다.

3.3. 절충설

  •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의 발표와 중앙정보부 관계자의 직접적 증언을 인용한 보도 사이에는 몇 가지 일치하는 점이 있다. 김형욱이 파리 근교에서 중정 요원, 혹은 중정의 고용인들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살해 직후 시신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건의 세부 내용은 조금씩 다를 지언정, 대략적인 얼개는 일치하는 셈이다.
  • 한편 남산의 부장들을 집필한 김충식 전 기자는 한 방송에 나와 '양계장 암살설'을 긍정하며 "정부의 입장으로 그걸 발표할 경우에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에서 일종의 부채를 공식화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냥 사체를 낙엽에 파묻고 말았다라고 처리를 발표한 것으로 추정한다"라고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4. 기타

실제 인물은 사망이 아닌 실종이기 때문에 1982년 박정희 정권하 반국가행위자의처벌에관한특별조치법[18]에 따른 궐석재판으로 반공법[19], 국가보안법[20], 형법[21]에 의해 영혼이 징역 7년 및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다. 결국 1996년이 되어서야 유가족측의 항소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반국가특조법 문서 참고.

김형욱의 실종에서 겨우 1달도 안돼서 일어난 초대형 사건으로 인해 김형욱에 대한 관심이 하필 그 타임에 묻혀버려서 김형욱의 행적을 밝힐 수 없게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10.26 이전에 잠시 월북설이 돌기도 했다. 80년대는 생존설로서 남미에 숨어산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하지만 결국 2002년 미국 뉴저지의 한 공동묘지에 가족에 의해 가묘가 세워졌다.

그에게는 아들인 김정한이 있었는데, 그는 10대 초반에 아버지인 김형욱을 따라 사냥을 나갔다가 6.25 전쟁 당시에 숲속에 뿌려졌던 발목지뢰를 밟는 바람에 한 쪽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는 한동안 치료를 위해 미국에 머물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하게 되었고, 김형욱은 이 일을 평생토록 한스러워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김정한은 아버지가 실종된지 약 23여년 후인 2002년에 지병인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의 가묘가 있는 공동묘지에 함께 묻혔다.

1994년 신상옥 감독은 그의 출세와 몰락을 증발이라는 영화로 만들었고 에 출품했다. 이 영화 때문에 오랫동안 국내에 못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있다.[22]

당연히(...) 북한에서도 영화에 나오는데 민족과 운명 3편 홍영자편에서 박정희의 애첩이자 중정의 1급 요원 홍영자의 유일한 사랑으로 나온다. 홧김에 미국 망명을 했으나 미국에 망명중인 차홍기의 설득으로 반박정희 운동에 뛰어든다는 것. 홍영자의 활약으로 서울로 이송해서 박정희의 총에 맞아 죽는다.(...) 이 충격으로 회의를 느낀 홍영자는 북한으로 망명한다는 스토리.

드라마 끝없는 사랑에서는 미국으로 망명한 전 중정부장이라는 빅베어가 등장하는데 김형욱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드라마상의 배경은 박정희 치하가 아닌 전두환 치하이지만.

김종필의 증언에 의하면 인간성에 문제가 있어서 육영수도 그것을 박정희에게 지적했다고 한다.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는 김종필이 5.16 초반부에 김형욱의 폭언, 폭행에 대한 뒷수습을 하는 걸로 묘사되고, 계급이 두 단계 위였던 장경순 준장한테 장군이면 다냐고 폭언을 하다가 따귀를 맞는 사건도 묘사되었다.

김형욱과 함께 회고록을 쓴 김경재 (회고록 필명 박사월)는 DJ밑에서 정치를 하다가 국회의원까지 되었으나,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지지선언을 하였다.

'내부자들'을 감독한 우민호 감독이 김형욱을 소재로 영화화한다. 원작은 김충식의 저서인 남산의 부장들로 이 중 김형욱 실종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스토리 라인이라고 한다. 김규평 역에 이병헌, 박용각 역에 곽도원, 박정희 역에 이성민이 출연할 예정으로 사건의 중심에 있던 김규평(김재규)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한다.

5. 연기한 배우들


[1] 1964년 6월 한일협정에 반대해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시위. 결국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병력을 동원해서 진압했다.[2] 자그마치 6년 3개월[3] 김형욱 본인도 이런 '단순, 무식, 과격'한 이미지의 별명에 대해 잘 알고있었던 듯 하다. 김형욱은 1971년에 펴낸 '대지의 가교'라는 책에서, 스스로 "이 모든 나에 대한 '닉네임'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4] 김형욱은 회고록에서"총알받이 소위"라고 표현했다.[5] 8대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도 전쟁 당시 전방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대표적으로 황간 전투에서 한국군 2대대장이 바로 김재규였다. 당시 박정희는 남로당 경력이 들통나 군복을 벗고 보국 문관(대한민국 군무원)으로 연명하다가 북한군 동향보고를 확인해 이들이 조만간 남침한다는 보고서 작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상부에 제출해 이는 군당국으로부터 사상전향을 인정받아 전쟁이 터지자 장교로 복직이 되었던것이다. 하지만 이후락, 김종필 처럼 보직 상 후방의 보급장교로 있었다.[6] 길재호, 김진만, 백남억과 함께 소위 4인방으로 공화당을 주도하고 있던 김종필계를 밀어내고 3선개헌을 성사시키는데 앞장 선 인물이다. 하지만 3선 개헌 이후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신한 나머지 10.2 항명 파동을 일으켰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지금으로 치면 여당대표가 대통령한테 대들었다고 국정원장이 문제삼아 끌고가 고문당한거다. 당시 항간에는 김성곤이 생으로 수염이 뽑히고 실신하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박정희 집안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고 당시 쌍용그룹 회장이자 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 정권의 비자금을 관리하던 인물이었다.[7] 실제로 경질 직후부터 김형욱에 대한 온갖 협박과 저주의 전화가 들끓기 시작했다.[8] 나중에는 갈라섰다.[9] 프레이저 하원의원이 주도했기에 프레이저 청문회[10] 다만 원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기 전, 김형욱은 박정희의 난잡한 여자관계도 폭로하려고 했으나 그 전에 박정희 측에서 김형욱한테 사람을 보내서 "제발 그것만은 말하지 말아달라. 각하 뿐 아니라 국가의 체면이 실추된다."라고 애걸복걸하여 김형욱도 박정희의 여자관계 폭로는 하지 않았다.[11] 박사월이라는 필명을 썼으며, 후에 귀국하여 새정치국민회의(15대)와 새천년민주당(16대)에서 각각 국회의원을 역임한다. 웃긴건 18대 대선때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면서 한화갑, 한광옥과 함께 새누리당에 입당한다.[12] 원래는 일본의 유명 출판사인 고단샤에서 출판하기로 되어있었으나, 한국 정부에서 고단샤에 이권을 주고 출판을 저지했다고 한다.[13] 훗날 중앙정보부장 직무대행을 역임.[14] 목을 꺾고 마취제를 입에 집어넣었다고 주장했다.[15] 이 내용은 김경재가 쓴 '혁명과 우상'에도 언급된다. 단, 여기서는 마취시킨게 아니라 목을 부러뜨리고 넣었다고 적혀있다. 어찌됐든 잔혹하게 죽은건 마찬가지지만.[16] 이상열은 예전부터 김재규와는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김재규가 과거 3사단 부사단장을 지낼 때, 이상열이 그의 부관이었고,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을 지낼 때도 함께 보안사에 근무했으며, 김재규의 동생 김항규와 이상열은 젊은 시절부터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17] 물론 이 보고서의 정보 소스가 일본 정부-주미 일본 대사관-미국 국무부-주한 미국 대사관이라는 4단계 전언이라는 점은 상당한 약점이다.[18] 사실상 김형욱 때문에 만든 법으로, 훗날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효력을 상실했으며(헌재 1996. 1. 25. 95헌가5 결정), 1999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19] 법률 제643호, 제4조 제1항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 이후 1980년 12월 31일에 반공법은 폐지되고 그 내용은 국가보안법에 통합되었다.[20] 제7조 제2항 국외공산계열의 활동을 찬양·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자[21] 제127조 공무상기밀누설죄, 제104조의2 제1항 내국인이 국외에서 대한민국 또는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모욕 또는 비방하거나 그에 관한 사실을 왜곡 또는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대한민국의 안전·이익 또는 위신을 해하거나, 해할 우려가 있게한 때[22] 조지 타케이가 맡은 박정희(극중 이름은 한성태)는 색마 그 자체이고 일본에 몰래 요원을 보내서 야당 인사를 바다에 처넣는 일을 서슴치 않고 하고 있다. 한국어를 못하는 조지 타케이의 목소리는 이강식이 맡았다. 이 영화에서 조지 타케이는 쿠데타 부분은 선글라스를 끼고 나오지만 국정과 밤일에 전념하는(..) 부분에서는 맨얼굴이 그대로 나온다. 사실 영화가 워낙 마이너한지라 해외에서도 그가 여기 나왔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신상옥 감독은 김형욱과 친분이 있었으며 홍콩에서 납북되기 며칠 전에 미국에 있었을때 이 때 김형욱의 집에서 김형욱과 같이 식사를 했다고 한다. 이 식사 자리에서 김형욱은 자신의 회고록의 원고를 보여주며 거액의 인세를 받게 되었다고 자랑했었다고 한다. 결국 신상옥 감독은 민주화가 되고 시간이 꽤나 지난 2000년에 한국으로 귀국한다.[23] 23화에서 국회의원 암살 지시를 내릴 때, 감칠맛 나는 욕설과 구수한 이북 사투리를 구사한다.[24] 영화 《내부자들》을 감독한 우민호 감독의 연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