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02 16:12:00

김형욱


파일:나무위키+유도.png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은 김형욱(화제인물)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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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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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천 대만 징발해서 그놈들(대학생들) 싹 다 무인도에다 격리시켜 버리면 되잖아!"
- 6.3 항쟁[1]을 보고받고 -[2]

1. 개요2. 생애
2.1. 5.16 군사정변 이전2.2. 5.16 군사정변과 군정 시절2.3. 중앙정보부장2.4. 민주공화당 국회의원2.5. 망명 이후
3. 최후에 관한 여러 설
3.1. 공식적인 조사결과
3.1.1. 부실조사 논란
4. 기타5. 연기한 배우들

1. 개요

金炯旭 출생 1925년 1월 16일 ~ 실종/사망 1979년 10월 7일?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체구가 커서 별명은 남산 멧돼지.

제3공화국 시절 중앙정보부장을 맡은 인물. 대한민국 정보기관 역사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기관장이다. 자그마치 6년 3개월.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해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치공작을 벌였지만, 후에 박정희에게 버림받고 미국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된다. 이후 미국에서 박정희를 디스하는 회고록을 집필하고, 미 의회 청문회에 나가서 박정희에 불리한 증언을 하는 등 반정부활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후 1979년 프랑스 파리에 갔다가 실종되었다. 생사불명으로 처리되었다가 1991년 법원의 실종선고를 받아 법적으로 사망처리 되었다.김형욱 미스터리, 누구 말이 맞나

2. 생애

2.1. 5.16 군사정변 이전

황해도 신천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이었으나, 해방 이후 혼란기에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하였다. 사실 이 기수는 한국전쟁 당시 초급장교였기 때문에[3], 많은 수가 전사했지만 김형욱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뚜렷한 전공보다는 1951년 이후 동부전선(강원도)에서 활약했다는게 주목할 정도. 이러한 경험 때문에 회고록에서도 늘 자신은 박정희보다 진짜 애국자를 강조했다.[4]

2.2. 5.16 군사정변과 군정 시절

5.16 군사정변 당시엔 중령으로 쿠데타에 참가하였으며, 36세의 나이로 국가재건회의 최고위원이 된다.

2.3. 중앙정보부장

1963년 7월 김종필, 김용순, 김재춘에 뒤이어 제4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생긴지 얼마 안되어 조직이 덜 갖춰졌고, 김종필이나 김용순, 김재춘은 재임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조직에 그다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다다음 후임자 이후락처럼 온갖 악습을 중앙정보부(이후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까지)에 심은 사람이다. 김형욱은 박정희 휘하에서 온갖 정치공작을 도맡았고, 이 때문에 국민들에게 원성을 샀다.

그의 재임시에 선거 때만 되면 간첩 사건이나 용공분자 사건이 빠짐없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예가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5]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유럽 간첩단 사건, 그리고 국제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동백림 사건이 있다.[6] 1969년에는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여당 국회의원 김용태 등을 강압적으로 끌어들여서 3선 개헌에도 일조했다. 이때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도 일으켰다. 또한 3선 개헌에 찬성하되 선행 조건으로 자신과 이후락의 경질을 요구한 이만섭도 테러하려 들었다. 중앙정보부가 무서운 조직으로 찍힐 때는 이 사람이 한 몫 했다. 나중에 김계원중앙정보부장을 맡을 때, 박정희가 "김형욱이처럼 팰 필요는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의 조사과정에 참여하여 관련자 김중태를 신문하다가 겪은 일이 참으로 가관이다.
김형욱 : “자네가 그 악명 높은 김중태야? 경상도 사람이 왜 경상도 대통령을 반대하냐?"
김중태 : "이북 사람이 김일성이나 지지할 것이지, 왜 남쪽으로 내려왔냐?"[7]

그렇게 충성을 바쳤으나, 1969년 3선 개헌이 성공하자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버림을 받게 되었다. 자신의 인척(조카사위)이자 제1책사였던 김종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알다시피 김형욱은 이후락, 박종규처럼 부정부패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나중에 망명 생활에서 꽤 도움이 되었다.

이건 여담이지만 김형욱은 김종필을 굉장히 싫어했는데, 이유는 김종필이 과거 좌익 운동을 한 경력이 있는데다 경찰이 잡으러 다니니까 군대로 도망갔으며, 박정희처럼 공개적으로 전향을 하지도 않아서 크레믈린(크렘린)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자라는 이유에서였다.출처

2.4.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이후 김형욱은 1971년 쥐약 격인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거치기도 했으나, 그 이듬해 1972년 10월 유신 선포로 국회가 해산되는 동시에 국회의원직 마저 잃어버렸다.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 명단에도 들지 못했다. 그는 이미 권력에서 밀린지 오래였고, 중앙정보부장일 때 워낙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다. 공공의 적 실제로도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일 때 전횡이 심했다.

공화당 실세인 김성곤,[8]길재호를 비롯한 많은 사람을 적으로 뒀다. 생전에 김형욱은 보복을 많이 두려워했다. 당시 일기장에 "대통령이 난데없이 날더러 쉬라고 했다. 지난 6년간 악역을 다 도맡아 했는데 미칠 것만 같다."고 적혔다.[9] 거기에 박정희에 대한 배신감까지 겹쳐 해외망명을 결심했다.

2.5. 망명 이후

1973년 4월 먼저 대만으로 출국했고, 거기에서 귀국하지 않고 바로 미국으로 갔다.

1977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미국의 재미언론인 줄리 문(문명자)와 손잡고[10] 미국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11]에 나가 박정희유신 정권의 비밀스러운 사건들을 거침없이 폭로하였고, 당시 유학생이었던 김경재[12]와 함께 "김형욱 회고록"(부제: 혁명과 우상)을 펴낸다. 이 김형욱 회고록의 존재를 알게 된 박정희는 회고록의 원고를 넘기는 조건으로 김형욱과 흥정을 벌이기도 했다. 원고는 김경재가 가지고 있었으나, 일부는 김형욱에 의해 일본으로 빼돌려졌고, 이는 일본에서 축약 평론판이 80년대 출판되었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금서. 물론 지금은 정식으로 출판됐으니 맘놓고 봐도 된다.

그동한 여러 인사들에 의해 귀국종용을 받은 김형욱은 79년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13]을 만나 회고록 원고료로 거액을 준다는 말을 듣고, 거기에 속아 프랑스 파리로 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1979년 10월 1일 김형욱은 파리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행방불명되었다. 여러 설이 있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확증된 바 없다. 실종될 때가 54세다.

3. 최후에 관한 여러 설

1979년 이미 납치되어 곧바로 죽었다는 게 사실상의 결론이나, 누가 그리고 어떻게 죽었냐를 놓고 많은 설이 나왔다.
  • 1980년대에는 대한항공 특별기(화물기)편으로 청와대 지하실로 실려와 박정희가 직접 M1 카빈을 머리에 대고 쏴 처형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14]
  • 김형욱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납치, 스위스에서 살해하였고, 그 시체를 한국으로 공수했다라는 설도 있다. 다른 설들과는 다르게 이 설은 프랑스의 르몽드일본문예춘추에서만 보도가 된 외국발 설이다.
  • 카지노 마피아들에게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 2005년 자신이 김형욱을 죽였다고 주장하는 이 모씨가 있었다.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1979년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납치 당일 김형욱을 마취시킨 뒤[16] 반쯤 의식불명이 된 김형욱을 산 채로 머리부터 양계장 대형 믹서(해머밀)에 넣어 갈아 죽였다고 한다. 즉, 시신은 모이가 된 것. 이 내용은 김경재가 쓴 혁명과 우상에도 나온다. 단, 여기서는 마취시킨게 아니라 목을 부러뜨리고 넣었다고 적혀있다. 어찌됐든 잔혹하게 죽은건 마찬가지지만. 폐차장이나 다른 방법과는 다르게 시신의 흔적조차 찾기가 불가능한 방식이므로, 일반인들 역시 이 설을 사실로 알고있는 경우가 많다.

3.1. 공식적인 조사결과

2005년 5월 26일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진실위)는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지시로 권총으로 암살 당했다는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이상열 주 프랑스 공사중앙정보부 프랑스 거점장을 겸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현지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던 A요원, B요원이 담당했다. 이들은 동유럽 출신 협력자 2명을 10만 달러에 고용했다. 김형욱 전 부장은 이상열 공사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 공사는 전주를 소개시켜주겠다며 10월 7일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A요원과 협력자 2명이 나타나 이 공사의 승용차를 이용해 김형욱을 납치해서 파리 근교로 끌고 갔다. 협력자가 소련제 소음권총 7발을 발사해 살해했다.

이 공사는 A요원에게 관저에서 결과를 보고받고, 김형욱 부장의 여권과 지갑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소지품을 철저히 인멸한 뒤 귀국할 것을 지시했다. A요원은 귀국 후 10월 13일 김재규 부장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3.1.1. 부실조사 논란

하지만, 김형욱의 유족들은 이 결과를 믿지 않았으며 조사 결과 조차도 매우 부실하다고 주장해서 부실 조사 논란이 있다.

A요원과 B요원의 진술에는 분명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용한 총기는 분실했다고 주장하며, 시신을 낙엽으로 덮어두었다고 하는데 이 것은 매우 부실한 주장이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 첫 째, 명색이 암살까지 했다는 요원이라는 사람들이 총기를 분실했다는 아마추어나 할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다. 오히려, 총기를 분해해서 여기저기 버렸다는 등으로 증거 인멸을 하는 것이 요원들 본인에겐 더 유리한 진술이기 때문. 만약 분실한 총기가 제3자에 의해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 둘 째, 시신을 낙엽으로 덮어두었다는 게 시신 처리 방법으로선 매우 부실한 주장에 가까운 데다, 그 낙엽으로 인한 사체는 무풍지대가 아니고서야(...) 누군가에 의해서 발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 경찰도 사체는 찾을 수 없었으므로, 말이 안 되기 때문. 오죽하면 닭모이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질까

10월 7일에 사망했다는 주장 조차 맞지 않는다. 이 글에 의하면,
  • 10월 9일에 파리를 떠나서 취리히를 경유해 사우디로 갔다는 미 국무부의 보고서가 공식적으로 있는데 파리 근교에서 10월 7일에 죽었다는건 말이 안 된다.
  • 김형욱은 파리에만 머물지 않고, 스위스에도 방문했었으며, 이 당시에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매우 화가난 상태로 전화를 했었다고, 김형욱의 맏며느리가 주장한다. 그리고, 유족들은 서울로 납치·송환 되어, 피살당했다거나, 사우디로 끌려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파리에서 살해당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 했다고.

하지만 지금 와서 사건 관계자들의 입을 열 방법은 사실상 없다는게 문제.

거기다가 결정적으로 김재규는 10월 26일박정희를 살해했다. 이 당시 김재규는 따라서, "이 때 김재규는 김형욱이 처참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박정희에게 등을 돌렸다. 10.26이 일어난 까닭은 이 것 때문일 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 이후락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물론 박정희에게 버림받은 뒤부터 평범한 사람으로 산 덕분이었다.

4. 기타

실제 인물은 사망이 아닌 실종이기 때문에 1982년 박정희 정권하 반국가행위자의처벌에관한특별조치법[17]에 따른 궐석재판으로 반공법[18][19][20], 국가보안법[21], 형법[22]에 의해 영혼이 징역 7년 및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다. 결국 1996년이 되어서야 유가족측의 항소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반국가특조법 문서 참고.

김형욱의 실종에서 겨우 1달도 안되서 일어난 초대형 사건으로 인해 김형욱에 대한 관심이 하필 그 타임에 묻혀버려서 김형욱의 행적을 밝힐수 없게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10.26 이전에 잠시 월북설이 돌기도 했다. 80년대는 생존설로서 남미에 숨어산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하지만 결국 2002년 미국 뉴저지의 한 공동묘지에 가족에 의해 가묘가 세워졌다,

그에게는 아들인 김정한이 있었는데, 그는 10대 초반에 아버지인 김형욱을 따라 사냥을 나갔다가 6.25 전쟁 당시에 숲속에 뿌려졌던 발목지뢰를 밟는 바람에 한 쪽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는 한동안 치료를 위해 미국에 머물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하게 되었고, 김형욱은 이 일을 평생토록 한스러워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김정한은 아버지가 실종된지 약 23여년 후인 2002년에 지병인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의 가묘가 있는 공동묘지에 함께 묻혔다.

1995년 신상옥 감독은 그의 출세와 몰락을 <증발>이라는 영화로 만들었고 에 출품했다. 이 영화 때문에 오랫동안 국내에 못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있다.[23][24]

당연히(...)북한에서도 영화에 나오는데 민족과 운명 3편 홍영자편에서 박정희의 애첩이자 중정의 1급 요원 홍영자의 유일한 사랑으로 나온다. 미화쩌네요 홧김에 미국 망명을 했으나 미국에 망명중인 차홍기의 설득으로 반박정희 운동에 뛰어든다는 것. 홍영자의 활약으로 서울로 이송해서 박정희의 총에 맞아 죽는다.(...) 이 충격으로 회의를 느낀 홍영자는 북한으로 망명한다는 스토리

드라마 끝없는 사랑에서는 미국으로 망명한 전 중정부장이라는 빅베어가 등장하는데 김형욱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드라마상의 배경은 박정희 치하가 아닌 전두환 치하이지만.

김종필의 증언에 의하면 인간성에 문제가 있어서 육영수도 그것을 박정희에게 지적했다고 한다.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는 김종필이 5.16 초반부에 김형욱의 폭언, 폭행에 대한 뒷수습을 하는 걸로 묘사되고, 계급이 두 단계 위였던 장경순 준장한테 장군이면 다냐고 폭언을 하다가 따귀를 맞는 사건도 묘사되었다.

김형욱과 함께 회고록을 쓴 김경재 (회고록 필명 박사월)는 DJ밑에서 정치를 하다가 국회의원까지 되었으나,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지지선언을 하였다.

'내부자들'을 감독한 우민호 감독이 김형욱을 소재로 영화화한다. 원작은 김충식의 저서인 남산의 부장들로 이 중 김형욱 실종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스토리 라인이라고 한다. 김규평 역에 이병헌, 박용각 역에 곽도원, 박통 대통령 역에 이성민이 출연할 예정으로 사건의 중심에 있던 김재규[25]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한다.

5. 연기한 배우들


[1] 1964년 6월 한일협정에 반대해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시위. 결국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병력을 동원해서 진압했다.[2] 출처는 남산의 부장들 다큐.[3] 김형욱은 회고록에서"총알받이 소위"라고 표현했다.[4] 8대 중정부장인 김재규도 전쟁 당시 전방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대표적으로 그 유명한 황간 전투에서 한국군 2대대장이 바로 김재규. 김형욱이 박정희를 깔보는 이유가 당시 박정희는 남로당 경력이 들통나 군복을 벗고 정보국 문관(군무원)으로 연명하던 처지였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이 터지자 군문에 복귀하긴 하지만 이후락, 김종필 처럼 보직 상 후방의 보급장교로 있었다. 육영수 지프차 루머 등 전쟁 당시 행적은 논란거리가 많다. 따라서, 한국전쟁 당시에도 박정희의 행적은 논란이 많다.[5] 이후 김형욱의 밑에서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냈던 신직수가 나중에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1974년 2차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일으켜서 그 이듬해 8명이 사형당했다.[6]베를린 사건을 한자로 적은 것. 천상병, 윤이상을 비롯한 예술계 인사들이 엮여서 곤란을 겪었다. 당시 독일(서독)에서도 말이 많았던 듯. 이것 때문에 윤이상은 고국에서 추방된다.[7] 실제로, 김형욱은 실향민 출신이다.[8] 길재호, 김진만, 백남억과 함께 소위 4인방으로 공화당을 주도하고 있던 김종필계를 밀어내고 3선개헌을 성사시키는데 앞장 선 인물이다. 하지만 3선 개헌 이후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신한 나머지 10.2 항명 파동을 일으켰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강제로 정계에서 은퇴당했다.(..) 지금으로 치면 여당대표가 대통령한테 대들었다고 국정원에 끌려가서 고문당한거다 -_-;;; 이들이 어찌나 심하게 고문당했는지 야당인 신민당에서 이들 네 사람은 정권에 의해 타살된 것이라며 문제를 제기할 정도였다. 당시 항간에는 김성곤이 생으로 수염이 뽑히고 개처럼 두들겨 맡다가 실신해서 변을 지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정황상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이 사람 박정희 집안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고 당시 쌍용그룹 회장이자 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 정권의 비자금을 관리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마저 고문당한 것.[9] 실제로 경질 직후부터 김형욱에 대한 온갖 협박과 저주의 전화가 들끓기 시작했다.[10] 나중에는 갈라섰다.[11] 프레이저 하원의원이 주도했기에 프레이저 청문회[12] 박사월이라는 필명을 썼으며, 후에 귀국하여 새정치국민회의(15대)와 새천년민주당(16대)에서 각각 국회의원을 역임한다. 웃긴건 18대 대선때 박근혜지지를 선언하면서 한화갑, 한광옥과 함께 새누리당에 입당한다.[13] 훗날 중앙정보부장 직무대행을 역임.[14] 신상옥 감독의 영화 <증발>은 이 설을 따랐다.[15] 이 설은 만화 박정희에서도 볼 수 있다.[16] 목을 꺾고 마취제를 입에 집어넣었다고 주장했다.[17] 사실상 김형욱 때문에 만든 법으로, 훗날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효력을 상실했으며(헌재 1996. 1. 25. 95헌가5 결정), 1999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18] 법률 제643호[19] 제4조 제1항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20] 이후 1980년 12월 31일에 반공법은 폐지되고 그 내용은 국가보안법에 통합되었다.[21] 제7조 제2항 국외공산계열의 활동을 찬양·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자[22] 제127조 공무상기밀누설죄, 제104조의2 제1항 내국인이 국외에서 대한민국 또는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모욕 또는 비방하거나 그에 관한 사실을 왜곡 또는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대한민국의 안전·이익 또는 위신을 해하거나, 해할 우려가 있게한 때[23] 조지 타케이가 맡은 박정희(극중 이름은 한성태)는 색마 그 자체이고 일본에 몰래 요원을 보내서 야당 인사를 바다에 처넣는 일을 서슴치 않고 하고 있다. 한국어를 못하는 조지 타케이의 목소리는 이강식이 맡았다. 이 영화에서 조지 타케이는 쿠데타 부분은 선글라스를 끼고 나오지만 국정과 밤일에 전념하는(..) 부분에서는 맨얼굴이 그대로 나온다. 사실 영화가 워낙 마이너한지라 해외에서도 그가 여기 나왔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24] 신상옥 감독은 김형욱과 친분이 있었으며 홍콩에서 납북되기 며칠 전에 미국에 있었을때 이 때 김형욱의 집에서 김형욱과 같이 식사를 했다고 한다. 이 식사 자리에서 김형욱은 자신의 회고록의 원고를 보여주며 거액의 인세를 받게 되었다고 자랑했었다고 한다.[25] 작중에서는 김규평으로 나온다.[26] 23화에서 국회의원 암살 지시를 내릴 때, 감칠맛 나는 욕설과 구수한 이북 사투리를 구사한다.[27] 영화 《내부자들》을 감독한 우민호 감독의 연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