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肅軍군대 숙청. 군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군 내부의 부정이나 불상사와 관련된 불순분자들을 인사 조치하는 일.
군대는 한 국가 내에서 가장 집단화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이기 때문에 국가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정부에서 설정한 국가의 방향성에 군대가 절대 복종하도록 통제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정상적인 국가라면 정부에 반하는 무력행사를 법정 최고형으로 다스리며 군부의 인사권을 민간정부가 쥐고 있고 군인들의 세금도 국가 재정에서 나오므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격언처럼 군부 내 야심을 품은 인물들이 권력욕에 눈멀어 모국의 정신이나 질서를 위협하는 사례들도 많았다.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앙권력은 군 내 불순분자들을 제거함으로써 기강을 바로잡고 군에 대한 국가의 우위를 확보하려 시도하곤 하였으며 이를 통칭하여 숙군이라고 한다. 문민통제와도 밀접한 방식이다.
2. 역사적 사례
역사적으로 숙군 작업은 대개 큰 전쟁 직후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대규모 전쟁을 치르다 보면 군대가 팽창하면서 군 간부들의 위상이 자연스럽게 올라가고 이에 따라 권력에 대한 야심을 품은 군인들이 등장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정복·반란·혁명 등을 통해 정치체제가 급변한 직후에도 기존 체제에 충성하던 군인들이 새로운 체제의 이념에 부합하는지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상검증을 통한 숙군 작업이 이루어지곤 하였다.전근대 동북아시아의 여러 통일 왕조들은 건국 및 통일 과정에서는 적국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야 하므로 필연적으로 군부에 힘을 실어주었지만 안정기에 접어들면 공신·호족들을 쳐내는 등 숙군 작업을 진행하곤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토사구팽의 고사로 알려진 한신이며 명나라의 주원장도 공신 숙청으로 유명했다. 보통 '혼란기'의 반복은 숙군 작업에 실패하여 지방 군벌들이 난립하고 이로 인해 차기 군주의 왕권이 위협받거나 내란이 발생하여 심하면 왕조가 교체되곤 하였다. 송나라의 태조 조광윤은 제위에 오른 이후 피를 보지 않기 위해 군권을 가진 장수들을 조용히 불러 숙군 작업을 마친 것으로 유명하며 이를 인용한 고사로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 있다.
한국사에서는 삼국통일전쟁을 마무리한 후 통일신라의 신문왕이 김흠돌을 중심으로 한 전쟁 공신 세력, 고구려의 잔재인 보덕국을 숙청하여 신라의 전성기로 평가받는 중대 왕권을 확립했다. 고려 태조 왕건 사후 광종대에, 그리고 조선 태조 이성계 사후 태종 이방원 대에 대규모 숙군 작업에 성공하여 조정의 우위를 확립하였다. 이처럼 동북아에서 "창업에는 무(武), 수성에는 문(文)이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처럼 받아들여져 왔으며 이러한 문민통제와 숙군 작업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망했던 것이 바로 일본 제국이다.
세계사로 범위를 넓혀 보면 이오시프 스탈린 시기 소련에서 대숙청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던 숙군 작업이 유명하다. 프랑스 혁명이 나폴레옹에 의해 탈취, 변질되어가는 과정을 뚜렷히 지켜본 혁명가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투사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혁명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분명한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소련은 러시아 내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러시아 제국 출신 장교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였는데 이들은 당연히 본질적으로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집단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부의 입장에서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물론 대숙청기 숙군 작업은 스탈린의 편집증적인 의심으로 인해 현실적 필요를 훨씬 넘어서는 수준으로 벌어졌으며 직후의 독소전쟁 초기 소련이 크게 밀려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반대편에 위치한 나치 독일도 전쟁 준비·진행 과정에서 나치즘에 충성하지 않는 군인들을 예편시키는 등 군에 대한 통제권 장악에 주력했고 대전 말기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진 후에는 대규모 숙군 작업을 단행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이 도래하면서 제1세계와 제2세계 모두 추축국에 복무했거나 파시즘 성향을 가진 군 간부들을 대거 숙청하였으며 동시에 자본주의 진영은 공산주의자(라고 여겨지던 군인)들을, 공산주의 진영은 자본주의자(라고 여겨지던 군인)들을 군 내부에서 색출하여 내쫓았다. 물론 매카시즘 분위기 속에서 단지 좌파에 우호적이라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로 몰린 사례도 있었는데 그나마 민주국가들은 자정이 가능해서 좀 덜했지만 공산권에서는 당중앙의 심기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극좌·극우 모험주의자로 낙인찍히거나 부르주아 반동분자로 여겨져 예편, 심하면 숙청당한 사례가 많았다. 당장 6.25 전쟁 이후 김일성이나 마오쩌둥이 군부를 장악하고 절대권력을 손에 넣기까지의 과정이 그러했고 현대 중국에서도 시진핑 집권 이후 반부패 드라이브를 명목삼아 대규모 숙군이 진행 중이며 2017년까지 8명의 장성급 장교가 자살하였는데 이 중 2명은 한국군의 대장에 상당하는 상장[1]이었다.
2.1. 대한민국
자세한 내용은 1946-1950년 한국군의 숙군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하나회 숙청 문서 참고하십시오.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해방정국에서 대한민국 국군 내 친소, 친공 성향 군인들을 솎아낸 일, 그리고 민주화 이후인 문민정부 시절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 출신들을 대거 경질시킨 일 등이 대표적인 숙군 사례로 꼽힌다.
아직 남북분단이 고착화되지 않았던 1940년대 중후반기에는 남북간 이념대립을 일시적인 것으로 보고 금방 통일이 이루어지리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에 따라 군인들도 국가보다는 이념에 따라 충성의 대상을 찾곤 했다. 때문에 명목상으로는 대한민국 조선경비대[2]가 엄연히 북한의 보안대와 대치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좌익 군인들은 심정적으로 북한에 동조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졌으며 실제로 여러 탈영, 월북, 항명 사태가 일어나곤 했다. 때문에 대한민국 국군의 입장에서는 유사시 적과 내통하여 문제를 일으킬 만한 장교나 사병을 찾아내 처리할 필요가 있었고 그 결과 대부분의 불순분자들을 잡아낼 수 있었다. 숙군으로 인해 당시 장교진의 5% 정도가 군에서 축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3] 하지만 당시 숙군이 남로당 계열만 정확하게 골라내서 날린 게 아니라 다소 불분명하게 이루어졌고[4] 중도나 우익 계열임에도 단지 이승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같이 날아가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으며 그 빈자리를 서북청년단 등 극우 집단으로 채우면서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이러한 숙군은 주로 육군이 대상이었다.[5]
한편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국가정세가 급변하자 다시금 숙군의 조짐이 불었다. 당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은 10.26 사건 수사에 전권을 틀어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을 역임하며 점차 권력을 넘보는 월권 행위를 보였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충돌하기도 했다. 정승화는 최대한 정권의 민간이양을 추구하는 후임 최규하 대통령의 뜻에 따라 전두환을 숙군하기로 결심했는데 박정희라는 거대한 빽이 없는 지금의 상황이 최고의 적기라고 판단했다. 정확한 공식 자료는 남은 게 없지만 당시 많은 관여 인물들이 정승화가 전두환을 한직이나 다름없는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좌천'할거란 소문이 돌았으며 최종적으론 하나회도 숙군할 거란 관측이 우세했다. 이에 전두환을 위시한 하나회 세력들이 반기를 들어 일으킨 사건이 바로 12.12 군사반란이다. 다시 말해 12.12 사건 및 전두환의 집권 자체가 실패한 숙군의 최종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정승화 계열이 역으로 숙군당하게 되었다. 정승화부터 육군참모총장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굴욕을 당하고 추가로 고문까지 당했으며 김재규의 내란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을 받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사건을 한국식 명칭보다 숙군 쿠데타(粛軍クーデター)로 칭하기도 한다.
한편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 세력을 조사·처벌하는 과정에서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존재가 드러났다. 오직 국가의 명령에만 충성해야 하는 군 내부에 공식적인 지휘 체계 이외의 사조직이 존재한다는 것은 문민통제에 크나큰 위협이었으며 실제로 5.16 군사정변과 12.12 군사반란 등 연이은 쿠데타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받은 전적이 있는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를 가능한 빠르게 숙정(肅正)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까지는 여전히 대한민국 군부의 입김이 강했기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비선을 동원하여 기습적으로 군 내 대규모 인사를 단행하여 하나회 요인들을 요직에서 예편, 제거하였다. 박근혜 정부 시기에 김관진을 중심으로 한 독사파 등이 잠깐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에서 문민통제는 그럭저럭 잘 지켜지고 있는 편이다. 다만 제2의 하나회라고 할 수 있는 알자회가 드러난 일도 있었다.
2.2. 독일
자세한 내용은 독일 연방군의 과거 청산과 전통 문서 참고하십시오.독일연방공화국의 역사에서 재무장은 복잡한 길이다. 이는 결국 1945년 이전의 과거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 가치로의 새로운 지향점을 설정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방식으로의 건군은 위험이 없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1955년이나 1960년 당시에는 1969년 이후의 철저한 개혁 정책이 실제로 단행될 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혁이 없었다면 연방군과 독일연방공화국의 성격이 어떠했을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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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Wiederbewaffnung steht für einen komplizierten Weg in der Geschichte der Bundesrepublik, schließlich ging es darum, an die Vergangenheit von vor 1945 anzuknüpfen und zugleich eine neue Richtung hin zu demokratisch-freiheitlichen Werten einzuschlagen. Die Aufstellung von Streitkräften war in dieser Form nicht ohne Risiken, da man 1955 oder 1960 nicht voraussehen konnte, dass eine dezidierte Reformpolitik nach 1969 tatsächlich eingeleitet werden würde. Ohne diese Reformen ist das Profil der Bundeswehr und der Bundesrepublik heute nicht zu denken.}}}{{{#!folding [ 독일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 독일 정치학자 데틀레프 발트(Detlef Bald).#
2.3. 프랑스
프랑스는 특이하게도 제1차 세계 대전 도중에 숙군을 벌였다. 다른 사례와 달리 군의 질서가 아니라 지휘관의 무능을 평가하여 가차없는 숙군 작업을 벌였는데, 이런 무능한 지휘관을 주로 리모주로 보냈기에 일명 리모자주라고 불렸다. 이렇게 해서 교체된 장교가 자그마치 80%가 넘었다.제1차 세계 대전은 이전의 전쟁과 달리 전투기간이 엄청나게 길어지는 특징이 있었고, 현장의 지휘관들은 장기간의 스트레스를 견디는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보니 많은 문제가 일어났다. 지휘관들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무너진 상태로 제대로 지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고위 장성들은 말을 못 타게 되는 심각한 문제점이라던가[6] 장군이 장병들 앞에서 펑펑 울거나 두려움에 떠는 등 먼저 사기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을 정도니 당시 상황이 얼마나 개판이었는지는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제프 조프르는 당대 전쟁장관이였던 메시미의 동의를 얻어 능력이 떨어진 이런 지휘관들을 가차없이 숙청시키는 리모자주 숙청 체계를 만들었다. 숙청을 하다 보니 지휘관의 무려 80%가 해임되거나 후방으로 좌천되었기에 이런 상황에서 두각을 드러낸 페르디낭 포슈, 에밀 파욜, 프랑셰 데스페레, 필리프 페탱 등은 초고속으로 진급했다.
물론 지휘관이 너무 자주, 빠르게 바뀌어 효율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지만, 이런 숙청 작업으로 프랑스군은 전쟁 초반의 추태에서 벗어나 효율적이고 건강한 군대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숙청당한 지휘관도 거기서 커리어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방에서 어느정도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뒤, 다시 전선으로 복귀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런 숙청 체계를 만든 조제프 조프르는 이런 문제로 인해 정치적으로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고, 숙청당한 장군들 가운데서는 정치가와 연줄이 있는 장군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조프르는 끊임없이 정치적 공격에 시달렸고, 결국 조프르의 전술적 무능함을 빌미로 그도 마지막으로 숙청당하고 만다.
2.4. 소련
자세한 내용은 대숙청 문서 참고하십시오.3. 관련 문서
[1] 장양, 왕젠핑[2] 미군정의 주도 하에 창설된 공식 군사조직으로,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이다.[3] 하사관과 병사,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 회의감을 느껴 전역한 이들까지 감안하면 10%에 달했다.[4] 이 탓에 창군기 시절 장교들의 회고록을 보면 공산주의랑 상관 없는 부하를 잡아가는 숙군의 주먹구구식 집행에 대해 비판하는 늬앙스를 풍기거나 김창룡에 대해서 치를 떠는 서술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5] 다만 해군은 육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이지 당시 해군에겐 귀중한 알짜배기인 기술장교들이 적지 않게 모가지가 날아갔다(...).[6] 당시 통신수단의 부재로, 가장 빠르게 명령을 전달할 방법은 말을 타는 것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 장교들은 당연히 승마의 달인들이었고, 말을 못 타는 장교는 곧 무능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