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내전 Гражданская война в России Russian Civil War | |||
러시아 내전 몽타주[1] | |||
기간 | |||
1917년 11월 7일~1923년 6월 16일 | |||
장소 | |||
구 러시아 제국 영토, 몽골, 페르시아 북부, 투바 | |||
원인 | |||
볼셰비키의 정권 독점에 따른 반볼셰비키 세력 중심의 전국적 반발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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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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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적군 5,498,000명 \ [[틀:깃발| ]][[틀:깃발| ]][[마흐노우슈치나| ]] 103,000명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70,000명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17,961명 | [[틀:깃발|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70,000명 [[틀:깃발| ]][[틀:깃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 50,000명 | ]][[틀:깃발| ]][[틀:깃발| ]] 1,023,000명[[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100,000명 [[틀:깃발| ]][[틀:깃발| ]][[폴란드 제2공화국| ]] 950,000명 [[핀란드| ]][[틀:국기| ]][[틀:국기| ]] 90,000명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547,000명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24,000명[95] [[오스만 제국| ]][[틀:국기| ]][[틀:국기| ]] 20,000명 [[튀르키예| ]][[틀:국기| ]][[틀:국기| ]] 20,000명 [[틀:깃발| ]][[틀:깃발| ]][[서러시아 의용군| ]] 50,000명 [[틀:깃발| ]][[발트 독일인| ]][[틀:깃발| ]] 10,500명 | |
피해규모 | |||
적군 259,213명 전사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일본 제국군| ]] 6,500명 전사 [[틀:깃발| ]][[틀:깃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 13,000명 전사 | ]][[틀:깃발| ]][[틀:깃발| ]] 127,000명 전사[[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폴란드군| ]] 57,000명 전사 [[틀:깃발| ]][[틀:깃발| ]][[핀란드군| ]] 3,500명 전사 [[틀:깃발| ]][[틀:깃발| ]][[독일 제국군| ]] 500명 전사 | ]][[틀:깃발| ]][[우크라이나 인민군| ]] 15,000명 전사|
군인, 민간인 합계 7,000,000~12,000,000명 사상 1,000,000~2,000,000명 백계 러시아인 탈주 | |||
결과 | |||
적군 승리 - 소비에트 연방 수립 일부 분리주의 세력 승리 -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독립 성공.[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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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내전의 전개 |
볼셰비키가 러시아 공화국 정권을 탈취한 1917년 11월 7일을 내전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에는 이견이 없지만 끝은 그 견해에 따라 다르다. 실질적인 끝은 콜차크의 러시아국이 붕괴한 1920년 2월로 보지만 백군 일파인 표트르 브란겔의 남러시아 정부나 몽골의 미친 남작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같은 경우 1921년까지 버텼으며 공식적인 종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프리아무리예 임시정부가 망한 1922년 10월 25일으로 본다. 최후의 백군이 사라진 날은 1923년 6월~10월쯤이며 일본이 북사할린에서 철수한 것을 기준으로 따지면 1925년이다.
러시아 내전은 그 특성상 여러가지 이념들이 모두 혼합된 복잡한 정국이었다. 물론 주요 양대 교전 당사자는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사회주의 볼셰비키의 적군 VS 군주제, 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 민주주의 세력 등이 느슨하게 연합하여 형성된 백군이었기에 좌우 갈등으로 볼 수 있겠지만, 조금 더 파고들어가보면 상황은 훨씬 혼란스러웠다.
좌파 내부에서도 비혁명 좌파 정당들은 무력으로 볼셰비키 정권을 세우는 데 극렬히 반대하고 러시아 공화국을 해체시킨 10월 혁명을 부정했는데 단순한 혁명의 연속이나 발전이 아닌 볼셰비키의 반란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중도좌파인 트루도비키(및 우파 SR)나 카데트, 멘셰비키 우파 일부는 초기 백군에 가담하게 되었고[97] 볼셰비키 독재에 항거하는 몐셰비키 좌파, 좌파 SR, 아나키스트들은 백군, 적군을 모두를 적으로 간주하면서 독립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틈을 타 원래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3국,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이 독립을 시도하며, 적군 및 백군 세력과 모두 싸웠다. 공산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제1차 세계 대전의 협상국 측인 미국, 대영제국, 캐나다,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 중화민국, 프랑스 제3공화국은 물론 독일 제국 등 동맹국 역시 백군 측과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3국 등의 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했다.
그래서 러시아 내전을 단순히 적군과 백군의 대결로 볼 수는 없다. 볼셰비키도 처음에는 여러 좌파 정당이나 전선을 회유했으나 백색테러나 내전 상황을 명분으로 일당 독재를 확립했고, 이를 혁명의 배반으로 간주한 사회혁명당 좌파였던 파니 카플란은 레닌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2. 명칭
한국에서는 적백내전이라는 별칭으로도 많이 불렸다. 내전의 주축이었던 볼셰비키 정부군과 대항군이 각각 적군(Красная Армия, Red Army), 백군(Белая Армия, White Army)이라고 불렸기 때문이다.하지만 '백군'은 적군측에서 모욕적으로 부르는 이름이었는데, 하얀색은 프랑스 부르봉 왕가를 상징하는 색으로 군주제에 대한 반동적인 애착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헌의회(차르가 아니라)의 권위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했던 '백군' 지도자 중 누구도 자기들 세력을 백군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게다가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의 독재와 두마 폐쇄에 실망한 네스토르 마흐노의 남우크라이나 흑군[98], 알렉산드르 S. 안토노프가 이끈 좌파 사회혁명당의 청군[99], 그리고 피지배 민족의 분리주의 세력[100]도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적백 대립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최근에는 러시아 내전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추세다.
3. 발단
러시아 내전(적백내전)의 초기 배경.
1917년 10월 혁명 이후 군대의 상당수는 볼셰비키의 휘하에 들어갔지만 군대에 남아 있는 병사보단 집에 간 병사가 훨씬 많았다. 볼셰비키 정권이 지주의 토지를 분배하고 있었으므로 농민 출신의 병사들은 집에 가야만 자기 몫의 토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농촌을 장악하러 간 공산당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혁명 시점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중심 도시들만 장악했을 뿐이었고 지방엔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들이 상당했다.[101] 때문에 위협을 느낀 볼셰비키 정권이 제헌의회를 해산하자 반볼셰비키 진영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을 기점으로 러시아 전역에서 반란이 터졌다.
그 결과 각 세력은 자신들의 지역정권을 수립해 군웅할거에 들어갔다. 여기에 폴란드, 카자크, 각 지역 부농들의 사병이나 타타르인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이슬람 등 종교적 봉기와 발트, 캅카스 지역의 민족주의 봉기 세력까지 겹치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직들이 적군에 대항했다. 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이전에는 독일군이 이들을 계속적으로 지원했다. 게다가 협상국 역시 종전을 전후하여 볼셰비키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독일군과 계속 싸우는 정권을 세울 목적으로 반볼셰비키 세력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엎치락 뒤치락을 반복하고 있었다.
4. 전개
내전 초기에는 중앙 라다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하고 돈-쿠반 지역의 카자크도 반기를 들었다.[102] 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싸웠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적군이 강제로 무장해제시키려고 들었다가[103] 오히려 그들을 자극하여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한 시베리아 철도를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장악해버림으로써 시베리아가 백군에게 통째로 넘어가는 등의 불리한 전황이 계속되었다.여기에 협상국은 러시아에 지원했던 장비와 물자, 그리고 협상국 내에 남아 있던 러시아 지원용 물자를 백군에게 넘겼는데 이를 통해 백군의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콜차크의 시베리아 백군은 서쪽으로 점차 모스크바를 향해 오고 있었다. 자세한 건 시베리아 내전 참고. 하지만 백군은 단 한번도 적군보다 장비 면에서 우세한 적이 없었다. 적군은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당시 이름), 툴라 조병창, 이브제스크 조병창 등 제국 시절의 핵심 총기, 야포, 탄약 생산 시설을 대부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군은 내전 내내 장비 면에서 불리했다. 경제가 이미 붕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적군이라고 해서 장비가 풍요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전황이 워낙 다급한 나머지 적군은 백군이 차르를 되찾을까 우려해 1918년 7월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니콜라이 2세 일가를 전원 처형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104]
5. 절정과 반전
5.1. 적군
5.1.1. 최악의 위기
1919년 적군에게 최악일 뻔했던 전황.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거의 60km 앞까지 백군이 진격해 모스크바 함락이 눈 앞이었지만 얼마 안 가 반격했다.
1918년 말엔 적군이 사방에 공세를 취했으나 공세는 얼마 안가 막히게 되었고 이후 백군이 동쪽에서부터 거센 반격을 한지라 한때는 적군이 이대로 망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내전 초부터 시베리아는 물론이고 유럽 러시아도 절반 이상 날아간 상황이었다. 유데니치의 발트 백군 때문에 페트로그라드의 함락이 눈 앞이라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긴 것도 이때. 게다가 백군은 전차와 항공기를 소수나마 장비했고 각 부대의 훈련 및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계도 잘 잡힌 편이었다.
그러나 적군이 가장 몰렸을 때도 모스크바 등지의 주요 도시와 거점은 적군이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으며 각 거점도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 점은 사방에서 몰려들고는 있었지만 각지에 분산돼서 통일된 명령체제가 없는 백군보다 확실하게 유리했다.
5.1.2. 레프 트로츠키의 등장
5.1.2.1. 병사: 징병제 → 500만 병력
이에 더해 레프 트로츠키가 대대적으로 적군 조직을 전선군과 사단 단위로 개편하고 1918년 6월에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이전까지 적군의 주축은 혁명의 지지기반이었던 도시 노동자였으나 이후에는 농민에 대해서도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근대국가에 익숙하지 않은 농민들의 징병제에 대한 반대는 무력으로 억눌렀다. 탈주자는 재판 없이 총살되었으며 탈주한 병력이 발생한 부대는 고대 로마에서도 제대로 집행한 적이 없었던 10분의 1형을 실시하여 병사 10명 중 1명을 무작위로 총살하는 등 폭력과 권위주의에 의해 통제되는 군대를 만들었다. 최종적으로는 5백만에 육박하는 병력을 편성해 물량 공세를 펼칠 수 있었다.5.1.2.2. 지휘관: 구 제국 출신 친소 장교들 영입
그리고 고질적인 지휘관 부족 및 군사적 능력 보충을 위해 과거를 묻지 않고 구 제국 장교들을 대거 영입했다(228호 명령).[105] 또, 일부 장교들은 백군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해외(영국, 일본, 폴란드 등등)의 개입을 러시아에 대한 침공으로 해석했고 이들은 '해외의 침공을 받는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적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상급대장이다. 브루실로프 장군의 경우 붉은 군대에 가담했던 외아들이 반혁명군에 처형당했던 개인적 이유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그를 움직인 것은 바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었다. 브루실로프는 아예 트로츠키의 군사고문으로 활동하다가 20년대에 은퇴한 후 자연사했다. 그 외에 알렉세이 쿠로팟킨[106] 대장도 적군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백군의 참가 권유를 거부하게 만드는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후 대숙청의 일환으로 혐의점이 의심되는 여러 장교들이 숙청되거나 감시에 시달렸다.5.1.2.3. 수송력 보유: 철도 장악
이렇게 적군의 전투력이 개선되자 전황은 적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적군은 통일된 군사력에 철도도 장악했으니 부대를 이곳 저곳으로 재배치하는 데 확실히 유리했다.5.2. 백군
5.2.1. 이념
극초기 백군은 입헌민주당 등 사회자유주의나 및 사회혁명당 우파나 멘셰비키 우파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있었다. 즉 전러시아 임시정부는 극좌 독재[107]에 반대하는 중도좌파 자유민주주의자들의 모임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콜차크의 쿠데타 이후로 숙청되었다. 콜차크는 러시아국을 설립했고, 그 후 백군은 보수주의 성향을 가진 장교들이 이끌었다.하지만 그 후에도 백색운동의 이념은 적극적인 사상운동과 방계 파벌 숙청을 통해 레닌주의와 사회주의로 완전히 통일시킨 적군과 달리 하나로 통합되지 않았다. 백군 내부에서는 왕당파와 공화파가 나뉘었으며[108] 친독파와 친협상파로 나뉘었다.[109]
소련 및 서방 역사가들은 백군을 단순히 반동주의와 왕당파로 여기고 적군과 같은 이념 성전으로 보았지만, 사실 백군의 장군들은 이념 전파와 사상적 통일 활동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데니킨과 같은 소수는 의회선거를 약속하기는 했지만, 백군 일부의 의회개최 약속에 대해서 반볼셰비키 사회주의자들은 타당하게 의심했으며 실제로 보통선거는 실시되지 않을 예정이었다.
백군을 구성하는 대다수 제국 출신 장교들은 신앙, 차르 그리고 조국을 외치는 보수주의자, 그중에서 보수적 포퓰리스트에 가까웠다.[110] 그외의 주된 이념은 내셔널리즘과 반유대주의였으며, 내셔널리즘은 러시아 정교회와 근왕주의를 비롯한 보수주의와 결합해서 서로를 보완했다. 백군 사이에서 반유대주의는 일반적이었으며, 유럽에서 대규모로 유대-볼셰비즘 음모론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이러한 내셔널리즘과 반유대주의, 우익 포퓰리즘 등으로 백군이 파시즘의 시초라는 의견이 있지만[111], 파시즘의 핵심인 대규모 대중 선동이 부재하여 파시즘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처럼 백군은 보수주의, 반동주의, 파시즘 중 하나만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었다.
백군을 구성하는 대표적 지도자들은 시베리아 정부(러시아국)의 콜차크와, 남부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에 분포했던 지원군을 이끌던 데니킨과 브란겔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지원군은 백군 중에서 가장 잘 조직된 축에 속했다.
데니킨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자유주의)이나 마흐노의 군대와 협력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모두 거부했다. 그나마 데니킨은 백군 중에서는 온건했고, 구 입헌민주당에서 온 조언가들도 두고 있었다.[112] 또한 아스트로프 같은 온건파, 입헌파가 있었지만, 그들의 주장은 반동주의 장교들에 의해서 무시되었다. 그 상황에서 농민들은 신분제를 재도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데니킨을 믿지 않았으며, 실제로도 남러시아에서는 제정과 같은 방식이 운용되었다. 또한 발표에서 데니킨은 러시아인들은 새로운 주인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스스로 차르가 되려는 의도를 보인 것으로 비춰졌다.
데니킨의 후임 브란겔 역시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비록 브란겔은 토지 개혁의 의지를 보였으며 공화정을 수용하는 입장을 취했지만, 근본적으로 군주주의자였기에 차르 치세로 돌아가려는 의도를 명확히 했다.
그나마 백군 지도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지지자들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관용적인 편에 속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대부분 장교들의 성향과 농민들이 지원군에게 실제로 느낀 데 비추어보면 백군은 특정 사상에 의한 반공 '세력'이라기보단 반동주의 '현상'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113]
5.2.1.1. 백색 운동의 모호함
몇몇 학자들은 반볼셰비즘 운동과 백색 운동을 동일시해서, 우파 SR, 우파 멘셰비키, 입헌민주당 등을 백색 운동으로 분류한다. 실제로 영어 위키백과의 White movement 문서에서는 이러한 관점을 반영해 아예 (반볼셰비키) 좌익 민주사회주의자들이나 심지어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 등 반볼셰비키 진영 좌익들도 백색운동의 일부로 존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도 비슷하게 서술되어 있다.다만 이는 착각이라는 비판도 있다. 초기의 전러시아임시정부(우파 회의와 옴스크 회의 등)[114], 코무치[115], 시베리아 공화국, 우랄 공화국 등은 분명 초기의[116] 반볼셰비키 운동이었지만 이는 목표가 볼셰비키와 그 동조자들[117]에 의해서 해산된 제헌의회의 복구를 촉진하는 민주주의 운동이지 제정 부활이나 군사독재를 주장하는 반동주의 현상이 아니었다. 이는 중후반의 콜차크, 데니킨, 브란겔 등이 이끄는 백색 운동과 구분된다.**
5.2.2. 구심점(최고사령관) 부재
백군 측은 적군에게 대항한다는 점만 빼면 이념이나 지도자가 모두 다른 집단이었다. 왕당파조차 입헌군주파와 전제정 옹호파가 섞여 있었고 여기에 공화제 지지자들도 있었다.[118][119] 심지어 백군의 한 축이었던 사회혁명당 우파가 주축이 된 코무치(제헌의회 의원 위원회)와 시베리아 임시정부가 우랄-시베리아 지역의 통제권을 두고 서로 싸우는 바람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그 중재안으로 우랄 임시정부를 세우기도 하는 등 자기 편끼리도 주도권 투쟁을 벌였다.볼셰비키는 백군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던 니콜라이 2세 일가를 모조리 학살하여 후환을 제거했으며, 백군은 끝까지 단일한 지휘체계를 이루지 못했다. 콜차크가 명목상 최고지도자이긴 했지만 다른 지역에 명령을 내릴 방법은 전무했다. 이는 적군에게도 큰 문제긴 했지만 체카란 무자비한 정보기관의 존재,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모은 위원회를 통해 해결했다. 전투가 끝나고 후에 명령에 불복종하면 공포를 통해서 적군계 군벌들을 통제했고 공산주의 계열 인사들은 위원회 내에서 언제든 일선 병력들에게 보낼 전략적인 명령을 결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명령을 전달할 수단은 백군과 비슷한 수준으로 희박하긴 했으나 최소한 전략적인 명령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전략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
1920년 콜차크가 붙잡혀 처형당하자 백군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5.2.3. 병사: 70만 병력
<rowcolor=white> 백군의 반볼셰비키 선전 및 자원 입대 포스터 |
5.2.4. 지도층 불신
백군 지도층 상당수는 황족, 귀족, 지주, 자본가 등 구(舊) 지배계급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목적도 혁명 전 체제 복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과 가난으로 지칠 대로 지친 노동자, 농민 출신 병사들의 호응을 받기 어려웠다. 게다가 사병들은 카자크·중산층 출신 의용병도 있었지만 대부분 징집을 통해 강제로 군인이 된 이들이었다. 이로 인해 사병들의 불만이 많았고 군 기강도 전반적으로 해이한 편이었는데 볼셰비키 정부의 백군 사병들의 불만을 겨냥한 선무 공작에 상관 살해 및 투항, 탈영 등이 빈번히 일어났으며 사병들이 장교들을 붙잡아 넘기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다반사였다.5.3. 내전의 국제화
자세한 내용은 소비에트의 서방 공세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
백군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적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도 깨졌으니 우크라이나[120], 폴란드[121], 핀란드, 발트 3국[122], 캅카스 3국[123] 같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국가들을 재흡수하고 국제주의 이념에 따른 공산화를 시도했고 이는 조약 체결 당시부터 레닌의 계획대로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닌의 의도와 달리 러시아로부터 막 독립을 쟁취하려던 신생 독립국에게는 정권만 바뀐 러시아의 재정복 시도이자 볼셰비키 정부의 야욕으로 비춰졌다.
소비에트의 서방 공세로 알려진 적군의 동유럽 침공은 1918년 말에 개시되어 구 러시아 제국령 위에 세워진 모든 신생국가가 대소전쟁에 휘말렸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시도는 발트해 국가들이 간섭군과 함께 적군을 몰아내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군이 기적적인 반전에 성공하는 등 도처에서 대패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멸망시켜 벨라루스의 절반,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을 점령하여 괴뢰국을 수립하는 성과는 얻었다.
적군은 1920년 말 자캅카스 방면으로도 침공을 개시했다. 자캅카스 점령은 1921년 초면 끝나 동유럽에 비하면 훨씬 수월하고 단기간에 이루어졌다. 조지아[124]만이 적군과 1달간 격렬하게 싸워 수천의 사상자를 강요했을 뿐 아제르바이잔와 아르메니아는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거의 무혈입성에 가깝게 점령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점령이 신속하게 이뤄졌을 뿐이지 현지 민심이 볼셰비키에 딱히 호의적인 것은 아니라서, 점령된 국가들 모두 반소 봉기를 일으켜 볼셰비키에게 떼죽음을 당하는 등 1920년대 중반까지 처절하게 저항한다.
5.3.1. 극동의 협상국 진출
자세한 내용은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 문서 참고하십시오.미국과 영국이 원정군을 파견하거나 일본 제국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리에 의해 7만 명을 동원하여 시베리아를 공격하는 등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125]하여 러시아 동부 해안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하고 이르쿠츠크 지역까지 진출했으나 기나긴 전쟁을 이미 치른 터에 새로운 전쟁을 하기엔 어려운 처지였던데다 간섭군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터져나왔다. 미국의 경우 일본이 러일전쟁을 정산할 요량으로 원래 주둔해야 할 블라디보스토크를 벗어나 북진하자 크게 반발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다. 여하간 1920년 러시아국 해체를 계기로 백군의 조직적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고 이에 명분을 잃은 간섭군은 동시베리아의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철수했다. 일본은 계속 버티다가 적군의 트랴피친 부대와 충돌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트랴피친 부대는 일본계와 러시아계 지역 주민들을 대규모로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일으켜 적군 지도부가 보낸 체카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것을 니콜라옙스크 사건(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이라고 부른다.
5.4. 번외: 제3혁명
제3혁명이란 적군에 참여한 사회혁명당 좌파와 멘셰비키 좌파(정통 마르크스주의자, 중도 마르크스주의자), 아나키스트 및 백군에 참여한 사회혁명당 우파가 일으킨[126] 반볼셰비키, 반 백군 봉기를 총칭하는 말이다.우선 제헌의회 해산 직후 중도좌파 성향의 입헌민주당은 트루도비키, 멘셰비키 우파와 함께 돈 지역에서 돈 카자크의 수장인 알렉세이 칼레딘이 일으킨 최초의 백군 봉기를 지지했고 이에 소비에트는 입헌민주당을 인민의 적으로 선포하고 금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트루도비키와 멘셰비키 우파에 대해서는 회유를 시도했다. 한편 아나키스트들 역시 친볼셰비키파와 반볼셰비키파로 분열되었는데 친볼셰비키파가 더 우세를 점했다. 비볼셰비키 좌파에 대한 탄압은 1917년 시점까진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오히려 제헌의회 해산에서 레닌을 지지한 아나키스트들 중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분파에 대해 우파들의 백색테러가 최초로 자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체결되자 사회혁명당 좌파가 대거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당시 전황에 대해 낙관에 가까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 조약의 체결 결과로 독일이 동부전선에 있던 병력을 대거 서부로 돌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독일의 승리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결과적으로는 틀린 판단이었지만 그 시점에서 러시아에서 독일이 전쟁에서 질것이라 확신한 사람은 오직 레닌밖에 없었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결국 연정을 파기했고, 5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볼셰비키가 다수파가 되자 볼셰비키의 일당 독재와 브레스트-리프토크스 조약에 대해 항의했으나 묵살되었다. 심지어 사회혁명당 일부 조직에서는 우크라이나에 진입한 독일 제국군을 공격하는 시도도 일어났는데 트로츠키가 이들을 뜯어말렸으나 소용없었다.
한편 이 시점에서 트루도비키와 멘셰비키 우파와의 타협이 요원하다는 것을 깨달은 볼셰비키는 그들을 축출하고는 반혁명 세력으로 지정해 체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회혁명당 좌파는 정식 법 절차를 통한 사형 집행은 사법살인(?)이라며 반발했는데 이는 당시 체카에서 주 위치를 차지했던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한 것이라고 한다.
1918년 4월 재생연합(The union of regeneration)이 조직되었다. 이 조직은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사회혁명당 민중사회주의파[127], 사회혁명당 우파, 멘셰비키 방어주의자[128]로 구성되었으며 볼셰비키가 맺은 독일과의 평화조약을 비난하며 독일-볼셰비키의 멍에로부터 러시아를 구한다는 목적 하에 자유, 애국, 민족의식에 기초한 러시아 국가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한편 트루도비키는 이것의 연장선상으로 1918년 5월 8차 당 평의회를 열었다. 이들은 러시아를 볼셰비키로부터 구하기 위해서는 계급적 이해를 초월해야 한다며 제헌의회 재설립을 목표로 백군에 가담하기로 결정했다. 1918년 5월 말-6월 초 시베리아, 우랄, 볼가 지역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볼셰비키 지배를 전복시켰고 그들의 활동 중심지는 그리로 옮겨졌다. 1918년 6월 8일 제헌의회 의원 다섯 명이 사마라에서 전러시아 제헌의회의원위원회(일명 코무치)를 만들고 코무치가 러시아의 새로운 최고 권위체라고 선언했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봉기가 일어나면서 1918년 6월 29일 SR-멘셰비키 우파의 임시 시베리아 정부가 만들어졌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독일과의 평화조약 파기에 실패하자 혁명적 수단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체카를 움직여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 빌헬름 폰 미르바흐를 암살하고는 체카 분견대를 이끌고 기습을 가해 크렘린을 장악해 사회혁명당 좌파가 권력을 장악했다는 전보를 전국에 뿌려 독일과의 조약 체결에 반감을 가진 대중들의 반볼셰비키 봉기를 유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또 그들은 페트로그라드, 볼로그다, 아르자마스, 무롬, 야로슬라블, 벨리키우스튜크, 리빈스크 등의 도시에서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다. SR 당원이었던 동부전선 사령관 미하일 무라비요프는 SR 좌파가 모스크바를 장악했다는 전보를 받고 독일군을 공격하겠다며 심비르스크를 점령해 반란군을 지원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병력을 진군시켰다. 한편 적군 지배 지역에 지하에 남아 있었던 사회혁명당 우파도 이 봉기를 지원했다.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인민 봉기가 일어나자 레닌은 “대중 테러를 도입”하라는 전보를 보냈고 군대가 식량을 징발해 가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펜자의 농민들을 “분쇄하라”고 지시했다. 결과적으로 사회혁명당 좌파의 봉기는 실패했고 이후 크론시타트 반란 등 사회혁명당 소속 당원들이 일으킨 반란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났으나 모두 실패하고 사회혁명당은 불법 정당으로 규정되었다. 한편 1920년 8월에는 소비에트 정부가 독일과의 평화협상을 체결하며 독립하게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서 백군에 가담하는 자원병들이 구성되어 페트로그라드로 곧장 진격하기 시작하자 레닌은 소비에트 혁명군사위원회 부의장인 에프라임 스클랸스키에게 적군을 녹군, 즉 사회혁명당의 병력인 것처럼 위장해 접근한 뒤 일망타진하고 그 지역 및 그들에게 가담했던 쿨라크(부농), 지주, 성직자를 모조리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심지어 한사람을 교수형시킬 때마다 10만 루블의 상금까지 내걸기도 했다.
트루도비키가 세운 코무치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지지했고 볼가강-카마강에 이르는 지역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시베리아와 우랄의 대부분 지역은 소수민족, 카자크, 군벌, 우파 자유주의 성향의 지방정부들 등으로 누더기 같은 상태였고[129] 이들 집단은 코무치와 지속적인 충돌을 일으켰다. 그래도 코무치는 1918년 8월까지 정상 기능하면서 의원이 90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1918년 9월 상황이 가능해졌을 때 제헌의회를 복구하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삼는 임시 전러시아 정부(PA-RG)가 만들어져 볼가강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지역의 모든 반볼셰비키 지방정부를 대표했다. PA-RG가 만들어진 후 코무치는 실권이 없어졌지만 PA-RG는 코무치에 대한 지지를 약속했다.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는 처음에는 이 약속을 받아들였다. 당시 SR 중앙위원회는 당내 우파인 니콜라이 압크센티예프와 블라디미르 젠지노프가 대표했고 PA-RG에 당원 다섯 명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1918년 9월 19일 사마라에 도착한 트루도비키의 당수 빅토르 체르노프는 PA-RG가 너무 보수적이고 거기서 SR이 할 수 있는 권한이 너무 작다고 생각했고 PA-RG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도록 중앙위원회를 설득했다. 그 결과 PA-RG는 정치적으로 허공에 떠 버렸고 두 달 뒤인 1918년 11월 SR-멘셰비키 우파의 임시정부는 쿠데타로 전복당한다. 11월 16일 옴스크로 돌아온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새로운 최고지도자가 되었고 콜차크는 스스로를 제독으로 승진시켰다. 11월 18일 아타만 I. N. 크라실니코프가 이끄는 카자크들이 지도부의 SR 당원들을 체포했다. 나머지 내각 각료들은 콜차크를 정부수반으로 추대하고 그에게 독재적 권력을 부여했다. 체포당한 SR 당원들은 시베리아에서 추방되어 유럽으로 갔다. PA-RG가 이렇게 망하고 나자 체르노프는 볼셰비키와 우파 백군에게 모두 반대하는 "제3의 길"을 조직했다. 그러나 사회혁명당 좌파의 봉기가 실패한 이후 스스로를 하나의 독립된 세력으로 만들려는 트루도비키의 시도도 실패했고 언제나 분열적이었던 SR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SR 우파의 압크센티예프와 젠지노프는 콜차크의 허가 하에 외국으로 떠났고, 봉기를 일으켰던 SR 좌파 일부는 볼셰비키에 투항했다. 러시아 국내에 남은 SR 지도부는 콜차크에게 궐석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체르노프는 콜차크의 축출을 꾀하여 1918년 12월 22일 옴스크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카자크들에 의해 진압되었고 거의 500명이 처형당했다.
1919년 1월 살아남은 SR 중앙위원회는 볼셰비키가 백군에 비하면 그나마 차악이라고 보고 볼셰비키에 대한 무장 투쟁을 포기했다. SR은 볼셰비키와 협상을 시작했고 1919년 2월 SR 인민군이 노농 적군에 참여했다. 2월 25일 볼셰비키는 반혁명 행위를 계속 직간접적으로 지지한 자들을 제외한 SR 당원들을 다시 받아들였다.
그러나 유화책을 실시하는 동시에 탄압도 계속되어 아스트라한에서는 파업을 일으킨 노동자 및 병사들 수백 명이 바지선에 태워져다가 목에 돌이 매달린 채 볼가강에 밀어넣어져 수장당했다. 1919년 3월 12일에서 14일 사이에 2천 명에서 4천 명이 사살되거나 수장당했다. 또 부르주아들도 600명에서 1천 명가량 죽은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발견된 문서들에 따르면 여기서 발생한 학살이 크론시타트 반란 이전에 볼셰비키가 노동자들에게 행한 최대 규모의 학살임을 시사한다.
1919년 3월 16일 체카가 푸틸로프 공장에 들어닥쳐 파업 노동자 900명 이상이 체포되었는데 그 중 200명 이상이 재판 없이 처형당했다. 1919년 봄 툴라, 오룔, 트베르, 이바노보, 아스트라한 등지에서 수많은 파업이 벌어졌다. 굶주리던 노동자들은 적군 병사들에게 지급되던 식량을 요구함과 동시에 공산당원의 특권 폐지, 언론의 자유, 자유 선거를 요구했다. 체카는 이 모든 파업을 체포와 처형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볼셰비키는 SR 중앙위원회가 모스크바에서 재건되어 1919년 3월 당보를 재발행하기 시작한 것을 일단 내버려 두었다. 볼셰비키의 8차 당대회가 끝난 뒤 SR은 3개 파벌로 분열되었다. 하나는 친볼셰비키였고 하나는 친백군이었고 다른 하나는 볼셰비키와 백군에 모두 반대하는 파벌로 빅토르 체르노프가 이끌었다. 이를 핑계로 SR에 대한 탄압이 다시 개시되어 SR 중앙위원회 위원들이 체포당했다. 이 시점 이후로 체카는 빈번하게 다른 당 지도부를 체포하기 시작했고 이는 볼셰비키 이외의 합법 정당의 활동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으며 또한 타당의 당원 명부 등 문서 대부분이 볼셰비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체르노프는 지하로 숨어들었다가 결국 러시아를 떠났다.
체포된 SR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1922년 6월 8일 재판에 넘겨졌다. 피고 34명 중 극소수는 무죄, 14명이 사형, 나머지는 길고 짧은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한편 멘셰비키 우파는 조지아를 장악해 그곳의 트루도비키와 함께 조지아 민주 공화국을 건국했다. 이들은 백군에 가담했고 볼셰비키들을 탄압하고 오세티야, 압하지야 등 소수민족에 대한 잔학행위를 벌였으며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아르메니아와 전쟁을 시작했다. 조지아는 1921년 2월 25일 볼셰비키에 의해 무력 탈환되었다. 레닌은 조지아 지식인과 소상공인들과의 관계 양해 및 노에 조르다니아를 비롯한 조지아 멘셰비키들과의 연정을 권유했다. 이후 멘셰비키들에 대한 사면은 이루어졌지만 연정 따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쨌거나 멘셰비키 지도부는 프랑스 파리로 도망갔다. 한편 멘셰비키 좌파의 경우 볼셰비키 편을 들었으나 볼셰비키의 일당 독재가 점차적으로 진행되자 비공식적인 탄압이 지속되다 결국 율리 마르토프를 비롯한 지도부가 국외로 망명하고 나머지는 볼셰비키에 입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극동의 멘셰비키 우파의 경우 극동의 트루도비키들과 비슷한 운명을 맞아 조직이 와해되었고 결과적으로 멘셰비키는 붕괴되었다.
아나키스트이자 과거 적군 지도자였던 네스토르 마흐노는 흑위대 및 그 후신인 우크라이나 혁명반역군을 조직하고 1919년 우크라이나 남부 및 크림반도를 장악했다. 마흐노의 흑군은 일단 백군이 거악이라는 인식 하에 볼셰비키와 적군을 도와 싸웠고 백군을 패배시키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보기에 이들 아나키스트들은 볼셰비키가 독점한 정치운동에 있어 이질적인 존재들이었다.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들 역시 1918년 5월 이래로 체카와 적군이 체포, 구금, 처형 등의 수단으로 아나키스트 해방구들에 대한 공격을 행했기에 적군을 불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흐노는 모스크바와는 독립적인 “자유 노동자-농민 소비에트”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농촌 아나키스트였던 마흐노는 볼셰비키를 인민들과 더 이상 소통하지 않는 도시 독재자들로 간주했고 볼셰비키가 통제하는 비밀경찰 체카 및 그와 유사한 강제적 권위 및 징계기관들에 반대했다. 마흐노는 “표현,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주장했고 그 실천으로서 "아나키스트 혁명군사평의회" 및 "아나키스트 집단 연합의회"(NABAT)가 자신들이 장악한 마흐노우시치나의 사실상 정부로 기능하면서도 지역 농민들의 자치를 허용했다. 흑군 역시 강제징집이나 약식처형을 사용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적군만큼 광범위한 규모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흑군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모든 정당이 금지되었고 볼셰비키의 체카와 마찬가지로 라제드카와 코미시야 프로티마흐보브스키흐 델이라는 비밀경찰이 운영되었다.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일부 위원들은 마흐노의 자유지상주의적 해방구 실험을 허용할 생각도 했지만 정부수반인 레닌 및 군부수반인 트로츠키는 격렬히 반대했다. 백군이 격퇴되자 트로츠키는 마흐노의 아나키스트 흑군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적군의 흑군에 대한 공격이 멈춘 것은 백군이 기세를 회복해서 적군을 다시 위협했던 잠깐의 기간뿐이었다. 1920년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은 체카는 마흐노를 암살하기 위해 공작원 두 명을 파견했다. 크림에서 최후의 백군 장군 브란겔이 패배하자 트로츠키는 그 즉시 마흐노주의 동조자들에 대한 대량 처형을 명령했고, 1920년 11월 마흐노의 휘하 사령관들 및 마흐노의 참모부에 대한 총체적 청산이 뒤따랐다. 1921년 8월이 되면 마흐노와 흑군 잔당들은 결국 우크라이나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고 마흐노는 프랑스에서 노동자로 살다가 1934년 영양실조로 인한 결핵으로 죽었다.
6. 결말
볼셰비키를 주축으로 한 적군이 승리했고 백군과 간섭군은 패배했다. 그리고 민족주의 세력 일부[130]도 결국 분리독립에 성공했다. 볼셰비키가 세운 각 소비에트 공화국들은 1922년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을 결성했다. 1921년에 외몽골에 잔존했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까지 적군에게 패배했고 이때 외몽골이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중화민국에서 독립하면서 두 번째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최후의 백군은 태평양 연안의 아야노마이스키 구에 주둔하던 아나톨리 페펠랴예프의 군대였으나 1923년 6월 17일에 패배했다. 페펠라예프는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가 1938년에 처형당했다. 참고 러시아 바깥에서는 러시아 조계지였던 중동철도의 드미트리 호르바트 장군이 하얼빈과 중동철도를 장악하고 있었으나(하얼빈 혁명) 외부 지원도 다 끊긴 상황에서 동북군벌도 이기지 못할 약소 세력으로 전락한 상황인지라 중화민국이 소련을 승인하면서 가차없이 중국군에게 축출당했다. 다만 호르바트는 신강으로 달아났다가 소련으로 송환당한 다른 백군 장군들과 달리 북경에서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마지막 외부 간섭군이었던 일본군도 1925년 초 북사할린에서 철수했다. 일본 육군은 당초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진격하지 않겠다고 협상국에게 약속했지만 이내 북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 등에 이어 시베리아 오지의 바이칼 호수 동부까지 점령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바이칼 호수 서쪽의 이르쿠츠크까지 점령지를 확대했다. 일본이 파견한 병력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수십 배 많았으며 다른 간섭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시베리아에 계속 주둔하면서 점령지에 괴뢰국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은 협상국들도 일본의 행동에 '저것들이 땅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실제로 미군과 일본군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했고.
허나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음에도 광대한 시베리아를 통제하기는 불가능했고 따라서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는데 급급하여 그 빈 공간에는 적군과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이 매복해있다가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단독 혹은 백군과 협동으로 이들을 진압했고 자국군이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게릴라전의 배후 마을을 불태웠으나, 이는 오히려 일본군이나 반혁명세력에 대한 지지만을 더욱 더 떨어뜨렸다. 그리하여 점점 민심은 공산당 정부 쪽으로 향했고 1920년 반혁명세력이 시베리아에서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적군의 공세로 붕괴하자 일본군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131]
중앙아시아에서 민족주의 세력을 비롯한 부농, 무슬림 등 러시아 제국 시대부터 통치받다가 독립한 세력은 바스마치 운동을 일으켜 30년대 초중반까지 산발적인 싸움을 계속했다. 하지만 대세는 기울어서 적군과 이후의 소련군에게 진압되었다.
7. 영향
러시아 내전은 백군의 완벽한 패배와 신생 강대국 소련의 성립으로 끝났다. 러시아 내전에선 적군은 '군대'라고 부를 만한 규모의 병력과 패권을 획득했으나 백군은 완전히 찢어져 군벌 집단으로 변해 버리고 결국 러시아 백군 파벌 인사들은 도망가거나 죽었거나 추방당했다. 내전 중 백군 인사들이 유럽 국가들로 대규모 망명을 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맹목적인 공포에 가까운 수준으로 유럽의 반공주의를 강화시켰고 이를 넘어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소련군 포로들이나 반공 러시아인들을 긁어모아 만든 러시아 해방군 등의 친독 부역자 세력들은 백군을 자신들의 선조로 여기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소련은 소련 나름대로 이때 세계 열강들의 침공을 일시에 받은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두고두고 자본주의 국가들의 침공을 우려하게 되었는데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광적으로 공업화에 집착하였다. 또 사회주의 혁명의 확산 실패와 러시아 내전의 위기는 트로츠키의 사회주의 혁명 확산론을 좌절시키고 자국 공업화 및 생존을 주장한 스탈린의 주장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이게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불러들여 많은 폐해를 일으켰다.
이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전훈은 소련식 기동전에 대한 교리가 정립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이때 러시아 내외의 반볼셰비키 세력을 제거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첩보 능력이 발달해 냉전 시기 소련의 첩보전 능력에 일조하기도 했다. 강제수용소가 처음 설치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지만 당시 수용자들은 내전 후 대부분 석방되었다.[132] 또 소비에트 적군이 실전을 거치면서 기존 군 내의 합의적·민주적 분위기가 약화되고 일사불란한 군대식 관료체제가 대세가 된 것도 이 시기로 여겨진다. 그래서 연구자에 따라 러시아 내전이 볼셰비키의 성격을 바꾸었고 이것이 소련의 관료독재화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일본은 이 전쟁을 계기로 연해주 일대와 중국 일대에서 자기들의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때까지 일본의 뒤를 봐주던 미국의 반감을 사게 되어 1930년대에는 미일관계가 전쟁만 없을 뿐이지 서로를 가상 적국으로 상정하게 되었고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7.1. 한국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
<rowcolor=white> 적군의 제식 군모인 부됸노프카를 쓴 홍범도 장군 |
또 이 전쟁은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진영의 분열을 일으킨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자유시 참변. 당시 좌우 할 것 없이 수많은 독립군들이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다. 이후 국민혁명군과 대한민국 육군의 장성으로서 중일전쟁과 6.25 전쟁에서 일본군과 북한군을 상대로 큰 공을 세우는 김홍일 중장도 불과 21세의 나이로 적군에 가담해 대한의용군을 지휘하며 시베리아 전역에서 백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지연 철수전을 수행했다. 다만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적군에 가담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서 자유시에 독립군들이 집결하니 휘하 병력을 데리고 자유시로 가라는 명령을 받아 움직이고 있었지만 중간쯤 왔을 때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근처 러시아 한인촌에서 백군측에 일본군이 합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적군에 가담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당파 싸움을 일삼고 소련측이 한국 독립운동을 영 돕지 않자 배신감에 치를 떨며 미련 없이 러시아를 떠나 중국 국민혁명군에 가담했다.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 위에 언급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선박으로 귀국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이 상당량의 군사 장비를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 측에 매각하였다.
8. 백계 러시아인 유민
이 시기에 반볼셰비키 세력들이었던 러시아 귀족들과 기존의 지주층, 러시아 정교 사제, 반공산주의자들이 난민이 되어 이스탄불, 파리, 베를린, 뉴욕 등 전 세계 각지로 망명했다. 이들은 당연히 극도의 반소·반공 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유럽, 미국의 반공 정서 형성에 기여했다. 일부 학자들은 나치를 지지했던 반공주의의 기원을 여기에서 찾기도 한다. 일부 백군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이유로 나치 독일을 지지하기도 했으며 독일이 조직한 러시아인 부대에 입대하기도 했다. 일례로 백군 장군 중 하나인 표트르 크라스노프는 백군이 망하자 독일로 탈출했고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SS 카자크 군단을 지휘했다.그 외에 살아남은 백군과 반공주의자들은 소련 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했던 중앙아시아나 몽골, 시베리아 등지로 숨어들어서 도적이 되거나 중화민국의 땅이었던 만주와 신장 중가리아로도 많이 넘어갔다. 이들을 '백계 러시아인'이라고 하며 중화민국에만 8만 명이 넘게 망명했다.[133] 전직 백군 출신들은 중국 군벌들의 용병이 되어 중국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는데 특히 장쭝창이 이들을 편애하였다. 백계 러시아인 여성들은 이들의 정부나 첩이 되기도 했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에도 백계 러시아인들 묘사가 나온다. 만주 최대 도시였던 하얼빈에는 이들만 거주하는 디아스포라가 형성될 정도였다.[134] 성스차이가 장악한 신장성에서는 소련군 장교가 백군 출신 병사들을 지휘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백계 러시아인은 만주 전략 공세 작전, 국공내전으로 중국이 공산화될 때 다시 제3국으로 피난가거나, 일부는 국공내전 전후 소련으로 송환되었고 남은 사람들은 러시아계 중국인이 되었지만[135]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중화민국에서 살다 죽은 어떤 백군 장군의 묘비는 수십 년 후 문화대혁명 당시 지나가던 홍위병들에게 뜬금없이 폭파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어떤 백계 러시아인들은 인도네시아, 호주, 뉴질랜드나 멀리멀리 떨어진 아프리카 영국 식민지까지 가는 등 세계로 탈출한 백계 러시아인들은 결국 무국적자로 떠돌아야 했다. 일부 백계 러시아인 난민들은 일제강점기 조선까지 들어왔는데[136] 상당수는 다시 미국이나 호주 등지로 떠났으나 일부는 조선 땅에 그대로 남아 생활하였다. 1936년 당시 서울에 73명을 포함해 전국에 203명이 거주했는데 주로 약장수, 화장품 장수, 양장점을 운영하거나 포수로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 지역에 있었던 이들은 모두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소련으로 송환되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서울에 남아 있던 러시아인들은 6.25 전쟁 때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자 얼핏 생각하기에 모두 소련으로 보내졌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압록강변의 만포로 끌려갔다가 종전협정 직후 1954년에 교환으로 8명[137]이 남한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때 돌아온 백계 러시아인들은 거의 미국 등지로 이민갔지만 1961년까지 서울에 남아있던 찌호노프 노인 같은 경우도 있었다.
당시 함경도 사람들의 증언 중[138]에는 한반도 북부 함경도까지 와서 함경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구걸하는 것을 실제로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다. 딱하게 여긴 함경도 사람들이 고등어를 갖다주자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날것으로 먹었다고 할 정도라 했고 처음 보는 새파란 눈을 가진 하얀 사람들을 보며 놀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으며 파란 눈이 이쁘다는 말을 했다던 사람도 있었다 했다. 이후에는 함경도에서 밍기적거리며 지내다가 돌아가거나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이후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자 소련이 내려와 눌러앉아 살던 백계 러시아인들을 잡아갔다는 증언도 있다.#
당시 한국 문학계의 '소냐' 니 어쩌니 하는 러시아계 백인 여성들이 나오는 작품들도 백계 러시아 피난민들의 영향이다.
9. 대중문화
9.1. 게임
- 배틀필드 1: 차르의 이름으로 DLC의 맵 중 2개의 맵이 러시아 내전을 다루는 맵이다. 볼가강, 차리친[139]이 등장한다.
- 라스트 트레인 홈: 러시아 내전 와중에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봉쇄된 서부 대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다룬 게임이다.
9.2. 소설
- 닥터 지바고
- 고요한 돈강
- 기병대
- 백위군
- 대체역사소설 한국 독립 전쟁에서는 히틀러가 암살당하자 물밑 암투 끝에 괴링이 권력을 차지한 독일은 폴란드 침공을 단념하고 독일이 폴란드에게 소련을 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대가로 단치히 회랑을 받아오며 폴란드가 소련을 치면서 독소전이 일찍 터진다. 이 와중에 스탈린의 뻘짓으로 소련이 1차 폴소전쟁보다 더 심하게 발리면서 모스크바가 폴란드에 의해 함락되고, 트로츠키와 불류헤르가 만주국과 손잡고 세운 제4인터내셔널(고려 인민공화국)로 인해 2차 적백내전이 발생하고, 소련군의 장성들이 하나둘씩 투항하며 소련군의 노원수 세묜 부됸니가 (자칭) 패튼 성기사단의 단장 조지 S. 패튼과 모스크바에 입성하면서 소련은 해체되고 소비에트 총선거를 통해 아나스타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러시아 공화국으로 개편된다.
- 대체역사소설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조선이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저지른 반정부단체 '인민의 의지'를 자멸시키는 걸 본 러시아와 서구 열강이 반정부단체를 양지로 끄집어내 자중자란으로 무너지게 하는 방식을 본받으면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러시아 공산당->소련 공산당)이 당국의 감시 하에서 양지 활동이 허가된다. 이후 소싯적 인민의 의지 사태로 조선에 왔던 레닌이 일찍이 공산당이 당당히 원내 3대 정당으로 정착한 조선의 수정공산주의(일명 마르크스-전봉준 노선)를 본받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대립이 정반대로 발생하며, 볼셰비키가 주도권을 잡은 뒤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 순탄한 개혁을 해내고, 니콜라이 2세가 소싯적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인 정착민들이 격쟁을 일으켜 '노국 황태자 전하'에게 꿇어 업드려 애원하며 충성을 다짐한 일을 떠올리고 대치하던 군인들에게 사격금지 명령을 내리고 시위대의 의견을 수용해 두마를 설치함에 따라 피의 일요일 사건이 없어[140] 여론도 유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개혁을 못마땅해하던 보수 귀족들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차르를 납치하고 러시아 공산당을 비롯한 적(赤)군과 충돌하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난리통으로 만들 뻔 했지만 니콜라이 2세가 멈춰세우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전이 벌어지는 것은 막았다. 이후 귀족들은 키예프로 황가를 이끌고 천도하고 그 결과 러시아 구 귀족과 수정 마르크스주의[141]자들에 의해 적백내전이 발발하고 이것을 빌미로 독일이 키예프 정부를 지지하고 프랑스와 영국이 반발하면서 1차 세계대전, 대전쟁이 터진다. 이후 우크라이나가 SSR로 재편되자 차르 일가의 안전을 우려한 백계 러시아 측에서 차르 일가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적군에 항복해 러시아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소비에트 자유국 연방, 줄여서 소련으로 재편된다. 졸지에 붉은 일요일 사건에서 어느 무지렁이가 외친 '신께서 보우하시는 차르 폐하 아래의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가 진짜로 실현된 셈...
9.3. 만화, 애니메이션
- 코르토 말테제 시리즈: 이 시리즈 중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배경이다.
- 아나스타샤: 니콜라이 2세의 4녀 아나스타시야 공주가 살아남았다는 가설을 토대로 만들어진 20세기 폭스사의 만화영화.
9.4. 영화
- 고요한 돈강: 원작은 미하일 숄로호프의 소설이다. 소련 시절에 제작되었으며 CG 사용 없이 대규모 인원이 투입되었다. 주인공은 카자크족 청년 그리고리 멜레호프로 우크라이나 돈강 부근 시골 마을의 생활상을 보여주며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는 총 3부작으로 한 편당 3시간인데 러시아 내전 파트는 2부부터다.
- 적과 백: 내전에서 적군 편으로 가담한 헝가리 의용군들이 주인공이다. 전투에서 패한 후 백군 카자크에게 포로로 잡혀 처형당하기도 하고 백군이 거점을 함락시킨 뒤 러시아인 포로들만 처형하고 헝가리인 포로는 풀어주기도 한다. 백군 지휘관이 헝가리인 포로에게 "이건 우리들의 전쟁이다"라면서 끼어들지 말고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142] 타이르는 장면도 있다.
- 콘트리부치야: 마지막 백군 지휘관 아나톨리 페펠랴예프가 주인공이다.
9.5. 음악
10. 기타
-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지고 러시아 내전이 진행되면서 모스크바가 볼셰비키에 장악당하고 백군 잔존세력은 극동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쫓겼는데 이들에 의해 몇 개월간 블라디보스토크가 제4의 로마로 추대되기도 했다. 제1 로마→제2 콘스탄티노폴리스→제3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러시아인들의 정통성 계보에 따른 것이다.
- 당시 개발된 무기 중엔 테크니컬의 조상뻘 되는 무기도 존재했다. 타찬카(Тачанка)라고 불리는 민간의 건초 달구지나 이동용 마차를 징발해 PM M1910 같이 당시로는 거치식으로만 사용 가능하던 초기 기관총을 달아 소나 말이 끌게 한 물건으로, 러시아에선 네스토르 마흐노에 의해 개발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마흐노의 마차'라는 별명이 있다. 생각보다 기동성이 좋아 쏠쏠하게 써먹었다고 하며 무려 독소전쟁 때까지 잘 사용되었다.
- 흥미롭게도 위키백과의 적백내전 항목은 영어판보다 독일어, 루마니아어, 러시아어판이 더 자세하다. 특히 독일어 항목이 그렇다. 러시아어판은 자국의 역사이자 러시아사의 중요 사건 중 하나라서 그렇게 특이한 일은 아니며 루마니아어판도 루마니아와 가까운 곳에서 발생한 데다 자기들도 베사라비아 문제로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사건이므로 역시 특이한 일은 아니지만 독일어권 국가들[145]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 때문에 의외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독일어권의 경우 독일이 레닌을 직접 보내기도 했고 내전 전후로 꽤 많은 독일계 사회주의자들이 활동했기 때문에 연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 김경천, 한용운이 이끈 소수의 조선 독립군은 러시아 내전에 참전한 적이 있다. 이들은 적군 편에서 싸웠는데 백군에 일본군이 있기 때문이었다. 적군에 가담한 독립군들은 조선 이민자가 많은 연해주 일대에서 게릴라전과 테러, 첩보 활동 등을 해 적군을 도왔다. 그러나 이 참전용사들은 스탈린 정권이 들어선 이후 호전적으로 굴던 일본 제국과 만주국의 압박[146]과 당시 이뤄지던 소수민족 박해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한마디로 토사구팽.
-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웃 국가였던 핀란드에서도 내전이 발발했는데 러시아와는 반대로 백군이 승리했다. 핀란드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이 대단한 지도력을 보여줬으며 장비와 실전 경험이 풍부한 독일 제국군이 부대를 파견해 백군과 같은 편에서 참전하는 등 적군에게 불리한 요소가 많이 작용하였다.
11. 관련 인물
- 백군
- 알렉산드르 콜차크: 시베리아
- 블라디미르 카펠: 시베리아
- 표트르 브란겔: 남러시아
- 안톤 데니킨: 남러시아
- 라브르 코르닐로프: 남러시아
- 미하일 알렉세예프: 남러시아
- 표트르 크라스노프: 돈 공화국
- 니콜라이 유데니치: 에스토니아
- 미하일 드로즈돕스키: 남러시아
- 그리고리 세묘노프: 극동
-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몽골
- 아나톨리 페펠랴예프: 시베리아, 극동
- 분리주의 세력
12.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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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1839 ~ 1842, |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 ||
제1차 아편전쟁 ,1840 ~ 1842, | 청나라 | ||
영국-시크 전쟁 ,1845 ~ 1849, | 시크 왕국 | ||
크림 전쟁 ,1853 ~ 1856, | 러시아 제국 | ||
태평천국의 난 ,1850 ~ 1864, | 태평천국 | ||
제2차 아편전쟁 ,1856 ~ 1860, | 청나라 | ||
영국-페르시아 전쟁 ,1856 ~ 1857, | 이란 숭고국 | ||
세포이 항쟁 ,1857 ~ 1858, | 세포이 반란군 무굴 제국 | ||
사쓰에이 전쟁 ,1863 ~ 1864, | 사쓰마 번 | ||
시모노세키 전쟁 ,1863, | 조슈 번 | ||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1878 ~ 1880, |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 ||
줄루 전쟁 ,1879, | 줄루 왕국 | ||
제1차 보어 전쟁 ,1880 ~ 1881, | 트란스발 공화국 | ||
마흐디 전쟁 ,1881 ~ 1899, | 마흐디국 | ||
영국-이집트 전쟁 ,1882, | 아라바 파샤 반란군 | ||
영국-잔지바르 전쟁 ,1896, | 잔지바르 술탄국 | ||
파쇼다 사건 ,1898, | 프랑스 제3공화국 | ||
제2차 보어 전쟁 ,1899 ~ 1902, | 트란스발 공화국 | ||
의화단의 난 ,1900 ~ 1901, | 의화단 청나라 | ||
티베트 침공 ,1903 ~ 1904, | 청나라 | ||
제1차 세계 대전 ,1914 ~ 1918, |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오스만 | ||
러시아 내전 ,1918 ~ 1920, | 소비에트 러시아 극동 공화국 | ||
아일랜드 독립전쟁 ,1919 ~ 1921, | 아일랜드 공화국 | ||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1919, |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 ||
터키 독립전쟁 ,1919 ~ 1923, | 튀르키예 대국민회의 | ||
제2차 세계 대전 ,1939 ~ 1945, | <colbgcolor=#012169> 서부 전선 ,1939 ~ 1945, |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1943 | |
북아프리카 전역 ,1940 ~ 1943, | 이탈리아 왕국 나치 독일 비시 프랑스 | ||
동아프리카 전역 ,1940 ~ 1941, | 이탈리아 왕국 | ||
영국-이라크 전쟁 ,1941, | 이라크 왕국 | ||
페르시아 침공 ,1941, | 이란 제국 | ||
태평양 전쟁 ,1941 ~ 1945, | 일본 제국 태국 버마국 자유 인도 임시정부 | ||
그리스 내전 ,1944 ~ 1948, | 그리스 공산당 | ||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1945 ~ 1946, | 인도네시아 | ||
말레이시아 비상사태 ,1948 ~ 1960, | 말레이시아 공산당 | ||
6.25 전쟁 ,1950 ~ 1953, | 북한 소련 중국 | ||
제2차 중동전쟁 ,1956, | 이집트 | ||
제1차 대구전쟁 ,1958 ~ 1961, | 아이슬란드 | ||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대치 ,1963 ~ 1966, | 인도네시아 | ||
아덴 비상사태 ,1963 ~ 1967, | NLF FLOSY | ||
베트남 전쟁 ,1964 ~ 1975, | 북베트남 | ||
제2차 대구전쟁 ,1972 ~ 1973, | 아이슬란드 | ||
제3차 대구전쟁 ,1975 ~ 1976, | 아이슬란드 | ||
포클랜드 전쟁 ,1982, | 아르헨티나 | ||
걸프 전쟁 ,1990 ~ 1991, | 이라크 쿠웨이트 공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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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 의화단의 난 ,1900 ~ 1901, | <colbgcolor=#f5f5f5,#191919> 의화단 청나라 | ||
베네수엘라 위기 ,1902 ~ 1903, | 베네수엘라 합중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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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D2939>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895 ~ 1896, | 에티오피아 제국 | ||
의화단의 난 ,1900 ~ 1901, | 의화단 청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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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1489> 제1차 세계 대전 ,1914 ~ 1918, | <colbgcolor=#f5f5f5,#191919>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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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96> 신해혁명 ,1911 ~ 1912, | 청나라 | ||
계축전쟁 ,1913, | 국민당 | ||
호국전쟁 ,1915 ~ 1916, | 중화제국 북양군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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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혁명 ,1926 ~ 1928, | 북양군벌 봉천군벌 직예군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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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 ,1931 ~ 1932, | 일본 제국 | ||
영릉가 전투 ,1932, | 일본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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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사변 ,1933, | 일본 제국 만주국 | ||
경박호 전투 ,1933, | 일본 제국 만주국 | ||
사도하자 전투 ,1933, | 일본 제국 만주국 | ||
흥경성 전투 ,1933, | 일본 제국 만주국 | ||
동경성 전투 ,1933, | 일본 제국 만주국 | ||
대전자령 전투 ,1933, | 일본 제국 만주국 | ||
복건사변 ,1934, | 중화공화국 | ||
쿠물반란 ,1931~1934, | 소련 신강군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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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1941 ~ 1945, | 일본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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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04172>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 ~ 187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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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f0f0f><colcolor=#fff> 러시아 내전 1917 ~ 1922 | <colbgcolor=#0f0f0f><colcolor=#fff>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1918 ~ 1920 |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에스토니아 노동 인민 코뮌 독일국 발트 향토방위군 ~1919 | |
라트비아 독립전쟁 1918 ~ 1920 |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라트비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서러시아 의용군 독일국 발트 향토방위군~1919 | ||
핀란드 내전 1918 ~ 1920 |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 | ||
1924년 에스토니아 쿠데타 시도 1924 | 에스토니아의 공산주의자들 소련 | ||
에스토니아-소련 국경분쟁 1938 | 소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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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발트 3국 점령 1941 ~ 1944 | 소련 | ||
발트 3국 게릴라전 1944 ~ 1953 | 소련 | ||
노래 혁명 1986 ~ 1991 | 소련 | ||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2003 ~ 2014 | 탈레반 | ||
이라크 전쟁 2003 ~ 2009 | 이라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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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왼쪽 위에서부터 백군 돈 카자크 병사들, 시베리아 임시정부의 군대(시베리아군), 크론슈타드 반란, 블라디보스토크의 미군 주둔 사진, 크림반도의 적색테러 피해자들, 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볼셰비키가 교수형시킨 희생자들, 모스크바의 붉은 군대[2] 담딘 수흐바타르가 볼셰비키 적군의 지원을 받아 백군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폭정에 저항했다.[3] 나로드니키 좌익파, 사회혁명당 우파는 초기 백군에 가담했다.[4]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 멘셰비키 우파는 초기 백군에 가담했다.[5] 네스토르 마흐노의 우크라이나 혁명반역군(통칭 '흑군')이 설립한 아나키즘 코뮌 연방체. 처음에는 볼셰비키와 연대해 백군과 싸웠지만 결국 적군의 배반으로 몰락했다.[6] 보통은, 그리고 좁게는 사회혁명당 좌파를 이루는 말이며 크게는 러시아 나로드니키 농민, 노동자 반란군 전체를 이루는 세력이다.[7] 사회혁명당 좌파 및 사회적 아나키스트들의 연대 및 비볼셰비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일으켰던 크론시타트 혁명을 이끈 비볼셰비키 좌파 혁명군[8] 2월 혁명 직후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무너뜨리려던 쿠테타를 실패하고 도망친 라브르 코르닐로프가 창설한 세력으로 이후 카자크 원주민들이 합류했다. 붉은 군대는 가장 강력하다에 등장하는 '검은 남작' 표트르 브란겔이 유명하다.[9] 정식명칭은 '전러시아 제헌의회의원위원회'. 볼셰비키의 제헌의회 해산에 반발한 제헌의회파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봉기를 등에 업고 우랄 지역에서 선포한 정부다. 이후 러시아국에 흡수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특이한 점은 코무치의 지휘관 중 하나였던 블라디미르 카펠은 왕당파였다.[10] 표트르 크라스노프가 독일 제국의 지지를 받아 돈 지역에 건국한 돈 카자크의 공화국. 남러시아와 함께 적군을 위협했지만 결국 패망했고 이후 표트르 크라스노프는 나치에 합류했다 2차대전 이후 소련으로 넘겨져 사형당했다.[11] 카자크 출신인 그리고리 세묘노프 장군의 부대로, 주로 극동 지방에서 할거했다. 명목상 러시아국 소속이었지만 알렉산드르 콜차크와 이견을 보이며 자주 충돌했고 사실상 지휘권도 마음대로 휘둘렀다. 특히 러시아국이 망한 뒤에도 일본의 도움을 받아 존속했기 때문에 따로 분류한다. 이들 부대는 학살과 방화, 열차 약탈로 악명이 높았고 그리고리 세묘노프 본인도 극도로 포악한 성격이었다. 몽골의 미친 남작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도 독자적으로 움직였지만 세묘노프 휘하의 부대다. 일본이 적군과 협정을 맺고 빠지자 버림받은 세묘노프 부대는 결국 적군에게 멸망했다.[12] 1918년 10월 17일 봉기한 오렌부르크 지역의 카자크 군대. 알렉산드르 두토프가 지휘했으며 1920년까지 활동했다.[13] 1918년 8월 코무치와 시베리아 임시정부 사이에 우랄 지역의 관할을 놓고 갈등이 생기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이를 중재해 예카테린부르크에 세운 정부. 당해 10월에 러시아국에 흡수되었다.[14] 1918년 1월 28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회혁명당 소속 시베리아 지역 제헌의회 의원들의 주도로(시베리아 지역은 입헌민주당이 보이콧하는 바람에 SR이 휩쓸었다) 만든 임시정부. 가장 빠르게 만들어진 백군 정부 중 하나였으며, 서시베리아 임시정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러시아국이 성립되면서 해체되었다.[15] 1918년 6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봉기 이후 옴스크 지방에서 사회혁명당의 주도로 구성된 정부. 콜차크 쿠데타 이후 붕괴했다.[16] 1918년 6월 투르크멘인 철도 노동자들로 구성된 투르크멘 국민군단이 볼셰비키 지배를 전복시키고 설립한 임시정부. 아슈하다드 위원회라고도 한다. 흔치 않게도 멘셰비키가 주도해 사회혁명당이 참여하는 형태였으며, 물자부족 등의 문제로 인해 점점 데니킨의 남러시아군에 의존하게 되다 1920년 적군이 이 지역을 탈환하며 멸망한다.[17] 1921년 5월 27일 성립해 연해주 지방에 존재한 백군 국가로, 최후의 백군 임시정부 중 하나이다. 시베리아 출병 상태였던 일본군의 보호를 받았으나 일본이 전격적으로 철군을 결정하자 급속도로 무너졌고, 1923년 멸망했다.[18] 아르한겔스크와 무르만스크 등 러시아 북서부 지방을 장악한 임시정부로, 북부 최고 행정부의 후신이다. 사회혁명당의 주도로 설립되었으나 이후 명목상 콜차크의 지배를 인정했다.[19] 1921년 9월 야쿠트인 자치주에서 200명의 백군 주도로 설립된 임시정부로, 백군 최후의 정부조직이다. 무려 1923년까지 항쟁하다 패했다.[20] 몽골의 미친 남작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군대다.[21] 1919년 1월 22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통합했다.[22] 극동의 우크라이나 민족 자치 구역으로 백군의 보호를 받았다. 이외에도 우크라이나 민족 자치 구역들이 있었다.[23] 중앙아시아, 러시아 일부 지역에서 일어난 튀르크 민족주의, 이슬람주의 운동으로 이 세력은 러시아 내전 시기부터 시작해서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기인 1934년까지 저항운동을 벌였다가 소멸되었다.[24] 니콜라옙스크 사건의 주범.[25] 볼셰비키 정치인으로, 초대 국방장관이었다.[26] 러시아군 장교 출신으로 혁군평의회 2대 총사령관이 되었다.[27] 라트비아인이었다. 라트비아식 이름은 유쿰스 바치에티스(Jukums Vācietis).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의 러시아 제국군 장교였으나 혁명 후 자신의 부대와 함께 볼셰비키에 가담했고 이후 초대 혁명군사위원회 총사령관직을 맡아 트로츠키를 보좌했다. 그러나 지휘력에 의문을 제기받으며 다른 볼셰비키들에게 비판받자 해임됐고 배반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지만 곧 복권되어 프룬제 군사학교의 교수로 일했다. 후일 대숙청에 휘말려 라트비아와 내통해 파시스트 테러 조직을 결성했다는 거짓 죄목으로 처형되었다.[28] 초대 해군장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연인이었고 대숙청 때 처형되었다.[29] 해군 총사령관.[30] 베사라비아 출신이며 루마니아계였다. 루마니아식 이름 표기는 Serghei Lazo이며 발음은 같다. 일본 제국군에 생포되어 백군에 넘겨졌고 기관차 화로에서 분살당했다.[31] 미하일 베렌스의 형.[32] 라트비아인이었다. 라트비아식 이름은 야니스 유딘시(Jānis Judiņš).[33] 라트비아인이었다. 라트비아식 이름은 야니스 라치스(Jānis Lācis).[34]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의 지도자.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소련으로 망명하여 활동했으며 대숙청 시기 숙청당했다.[35] 카자흐인이었다.[36] 아제르바이잔인이었다. 아제르바이잔식 이름은 내리만 캐르배라이 내리마노프(Nəriman Kərbəlayi Nəcəf oğlu Nərimanov).[벨로루시SSR]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38] 라트비아인이었다. 라트비아식 이름은 빌헬름 "빌리스" 크노린시(Vilhelms "Vilis" Knoriņš).[벨로루시SSR]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SSR]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SSR]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42] 불가리아인이었다. 불가리아식 이름은 흐리스티얀 라코프스키(Христия́н Георги́ев Рако́вски)이며, 본명은 크러스티요 스탄체프(Кръстьо Георгиев Станчев)였다. 대숙청에 휘말려 수감되었다가 1941년 독소전쟁 중 NKVD에 의해 처형되었다.[우크라이나SSR]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SSR]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SSR]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SSR]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SSR]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SSR]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49] 극동 공화국의 지도자. 본명은 아브람 크라스노시초크(Абра́м Моисе́евич Краснощёк)였다.[50] 핀란드 내전 당시 핀란드 백군에 의해 처형되었다.[핀란드SWR]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핀란드SWR]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핀란드SWR]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핀란드SWR]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55] 헤르손 녹군 지휘관.[56] 탐보프 녹군 지휘관.[57] 트리필랴(러: 트리폴례, Триполье) 녹군 지휘관.[58] 워낙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소련 정부도 바로 숙청하지 못했고 독소전쟁 중이던 1941년에 처형하였다.[59] 1917년에 체카 요원이 되었고 내전 후 볼셰비키로 전향했지만 스탈린 집권기에 튀르키예로 가서 트로츠키를 만나고 왔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당시 트로츠키를 만나고 오던 사람들이 하도 많아 이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트로츠키의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서였다.[60] 원래 사회혁명당 소속이었지만 극우파가 되었다는 이유로 당에서 제명당했고 러시아국에 합류했다.[61] 부랴트인이었다. 부랴트식 이름은 가르만 우르진.[62] 표트르 스톨리핀 내각의 농업부 장관. 브란겔에 의해 남러시아 정부 수반이 되었다.[63] '브란겔의 함대' 지휘관.[64] 독일식 이름은 아나톨 폰 리븐 후작(Anatol Leonid Fürst von Lieven)이었다.[65] 아나톨리 페펠랴예프의 형.[66] 예브게니 베렌스의 동생. '브란겔의 함대'에 소속되기도 했다.[67] 이름이 똑같은 그의 아들은 세묘노프 휘하에 있었다.[시베리아군] [시베리아군] [바이칼] 바이칼 카자크[71] 콜차크의 시베리아 정부와 브란겔의 남러시아 백군 정부 붕괴 후 현재의 러시아 극동 지역을 장악하고 적군에 저항한 최후의 백군 군벌. 1938년 처형되었다.[바이칼] 바이칼 카자크[바이칼] 바이칼 카자크[바이칼] 바이칼 카자크[바이칼] 바이칼 카자크[북부] 북부 임시정부[북부] 북부 임시정부[78] 프리아무리예 임시정부의 2대 수반이었다.[프리아무리예] 프리아무리예 임시정부[프리아무리예] 프리아무리예 임시정부[81] 세르게이 네차예프와는 아무 상관 없으며 폴란드 입헌왕국 출신의 폴란드인이다. 폴란드식 이름은 콘스탄틴 피에트로비치 니에차예프(Konstantin Pietrowicz Nieczajew).[82]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 카자크 부대를 이끌었으며 1947년 크라스노프 등과 함께 소련에 송환되어 처형되었다.[83]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러시아인 장군. 1919년 콜차크의 러시아국에 합류.[84]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해군 지휘관.[85] '자수옷 입은 바실'이라는 뜻의 별명이다.[서우크라이나] [서우크라이나] [서우크라이나] [서우크라이나] [90] 녹우크라이나의 지도자.[91]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얀카 세라다(Янка Серада)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으며 본명은 이반 세라다(Іван Мікітавіч Серада)였다.[92] 조지아 민주 공화국이 멸망한 후 폴란드로 망명하였다. 폴란드 침공 당시 제16보병사단 부사단장으로써 독일과 싸웠고, 이후 소련으로 신병이 인도되어 카틴 학살로 처형되었다.[93] 본명은 가레긴 테르하루튜냔(Գարեգին Առաքել Եղիշեի Տեր-Հարությունյան)이었다.[94] 튀르키예 공화국에서 성씨사용법이 통과된 이후 킬리길이라는 성씨를 사용했다.[95] 작센 의용군 10,000명 + 자유군단 14,000명[96] 베사라비야는 루마니아에 편입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멸망하고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국 형식으로 흡수되었다.[97] 다만 콜차크의 반동적 군대가 1918년부터 독재정권을 수립하면서 숙청되었다.[98] 남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즘 무장 단체. 녹군의 일파로 간주된다.[99] 탐보프 등지에서 봉기한 농민군을 위시로 한 반볼셰비키 농민 반란군. 흑군과 함께 녹군의 한 갈래로 여겨진다.[100] 폴란드 제2공화국,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조지아,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아제르바이잔, 쿠반 인민공화국, 돈 공화국, 몰다비아 민주 공화국, 바스마치 운동.[101] 1917년 11월 두마 선거에선 사회주의 계열의 사회혁명당(나로드니키)이 농촌 지대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40%의 지지율로 제1당이 되었다. 볼셰비키는 주요 도시 공업 지대에서 승리하면서 24%의 지지율로 제2당이 되었다.[102] 이들은 같이 적군에 맞서 싸웠으나 백군 간의 갈등 또한 만만치 않았다.[103] 레프 트로츠키는 당시 유럽 서부 전선에 파견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기 중이던 체코 군단에게 적군에 동참하거나 무장해제 후 수용소로 돌아가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일방적인 통첩을 내렸다. 당연히 이들은 반발했고, 이는 볼셰비키 정부를 위험에 빠트렸을 뿐만 아니라 이후 스탈린이 트로치키를 축출할 때 내세운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에서 트로츠키의 실수로 평가받는다.[104] 니콜라이 2세의 4녀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가 이때 몰래 빠져나와 살아남았다는 소문이 꽤 오랫동안 퍼졌다. 자신이 아나스타시야 공주라고 주장한 여성도 있었고 폭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이 애니메이션은 디즈니의 작품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만화영화 <아나스타샤>도 만들어졌지만 아나스타시야 공주의 유해가 발견되면서 소문은 거짓으로 밝혀졌다.[105] 하지만 볼셰비키는 이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포섭된 백군 출신 장교는 가족이 인질로 잡혔고 불온 행동 시 본인과 가족을 총살하겠다는 협박 아래 입대가 이루어졌으며 정치장교와 비밀경찰을 통해 행동을 통제당하고 감시받았다.[106]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 총대장이었다.[107] 이때는 아나키스트들이나 좌파공산주의(후일 노동자 반대파를 이끄는)자들 및 좌파 사회혁명당도 적군편이었다.[108] 하지만 실제로는 백군 승리 이후 계획에서 전제군주제와 입헌군주제는 있었지만 공화주의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09] 이는 나중에 백군의 주 이념인 내셔널리즘과 친독일의 모순으로 갈등이 생기게 된다.[110] 당시 러시아에서 보수주의란 사실상 (차르)전제정을 뜻한다.[111] 특히 2차 세계 대전 이후 반공과 파시즘 활동을 결부시킨 소련 관영학자들이 많이 주장했다.[112] 다만 이 시기 입헌민주당 출신 조언가들은 대게 더 이상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보수주의자였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113] The ideology of the white movement[114]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성립 이전의 러시아 연방 공화국의 정식 후계를 표방했던 국가, 콜차크의 쿠데타 이후로 러시아국으로 바뀐다.[115] 역시 강제해산된 제헌의회 의원들(주로 중도좌파들)이 설립한 임시정부[116] 1917년에 반동적인 현상으로 대두된 코르닐로프의 쿠데타와, 그를 이은 최초의 백색 운동인 남러시아 정부를 제외하면[117] 좌파 SR, 좌파 멘셰비키(멘셰비키 국제파), 아나키스트들[118] 표트르 브란겔의 경우 제국을 지지하긴 했지만 공화정을 수용하는 입장이었으며 블라디미르 카펠은 제국을 지지했음에도 코무치의 지휘관이 되었다.[119] 이들은 내전에서 패배한 후 파시즘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일례로 제정복고 단체 믈라도로시 연합도 소련의 공작에 의해 좌경화되기 전까지는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단체였다.[120] 당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121] 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122]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123]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124] 조지아 민주 공화국. 자캅카스 연방 붕괴 후 조지아의 멘셰비키 세력이 선포한 국가로, 처음엔 독일의 보호국이 되는 대가로 독일의 후원을 받았으나 독일의 몰락 후엔 조지아를 남러시아 전선의 교두보로 활용하려는 영국의 지원을 받았다. 멘셰비키 정부는 볼셰비키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으나 1921년 볼셰비키의 침공으로 붕괴되고 자캅카스 SSR에 흡수되었다.[125]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해 신한촌 사건을 일으켰다. 신한촌 사건에서 한국의 지도자급 위치에 있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이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했다.[126] 멘셰비키 우파(사회민주주의자)는 콜차크 쿠데타 이후 세력이 금방 와해되었고, 나머지는 조지아 민주 공화국이 볼셰비키에 의해 붕괴한 이후 추방되었다.[127] 당시 사회혁명당 좌파에 흡수된 상태였다.[128] 멘셰비키 우파 내에서도 케렌스키를 적극 지지했던 당 내 최우경적인 파벌이었다.[129] 사회혁명당 우파가 세운 정부만 해도 옴스크의 시베리아 임시위원회, 노보시비르스크의 서시베리아 임시위원회, 방금 언급한 코무치가 있었고 이외에 오렌부르크에서 할거하는 카자크 군단과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구성된 트루도비키-입헌민주당의 연합체 우랄 임시정부에, 볼가-우랄 지역의 타타르인, 볼가 독일인, 추바시인, 바시키르인이 세운 이델-우랄국 등등... 여기에 하나 더해 아르한겔스크를 위시로 한 백해 인접 북시베리아 지역엔 트루도비키가 세운 북부 임시정부도 있었다. 어쨌든 셀수도 없이 많은 백군 군벌들과 임시정부들이 난립했는데 이것도 모자라 서로 주도권을 두고 싸우기까지 했다.[130] 폴란드, 핀란드, 발트 3국. 몰다비아는 독립했다가 투표를 거쳐 루마니아 왕국에 병합.[131] 이후에도 일본은 계속 러일전쟁의 정산을 노렸으나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러일전쟁을 정산하려는 생각을 포기했다.[132] 당시 적군에는 구 제국의 장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이들 중 볼셰비키의 이념에 공감해서 지원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많은 수는 기회주의자거나 잠재적 반역자라고 볼 수 있었다. 실제로 내전 시기에 구 제국 장교들에 의한 적군에 대한 반란 내지 사보타주 행위는 결코 적지 않았고, 이런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정치장교의 배치는 필수적인 사항이었다.[133] 만주 일대는 북만주철도와 남만주철도, 포르트아르투르를 위시로 하여 한때 러시아가 자국으로의 병합을 계획했을 정도로 러시아가 많은 노력을 기울인 땅이다. 하얼빈은 러시아가 지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134] 731 부대 희생자 상당수가 백계 러시아인이었으나 일본에서는 이들을 마치 전쟁 포로인 것처럼 날조, 왜곡했다.[135] 사실 이들은 거의 신강 지역에 산다.[136] 미국의 유명 영화배우 율 브리너의 가족들도 이때 조선 땅으로 피난와 잠시 생활한 적이 있다.[137] 납북될 때 몇 명이었는지는 모른다.[138] 1912년생. 사망.[139] 볼고그라드의 옛 명칭[140] 시위 참가자들이 적기(赤機)를 들어서 시위 이름도 '붉은 일요일 사건'으로 바뀌었다. 한편, 시위 도중에 누구는 의회를 외치고, 누구는 헌법을 외치고, 그리고 누군가는 '신께서 보우하시는 차르 폐하 아래의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를 외쳤다.[141] 작중 세계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딸인 엘레노어 마르크스가 전봉준과 결혼해 조선으로 오면서 '마르크스-전 노선'이 탄생하고, 레닌이 인민의 의지 사건으로 조선과 인연이 있었으며, 공산당으로서의 정통성이나 성과나 세계에서 으뜸가는(독일 사회민주당이 원내 5당에 만족할 때 만민공산당은 첫 참의원 선거에서 당당히 과반을 넘긴 원내 제1당이 되어 후일 만민공산당-자유당-개화당의 3당 구도가 형성되었고, 나중엔 공산당에서 총리 자리까지 차지했다.) 조선의 만민공산당의 영향을 받아 근왕파 공산주의(!)라는 사상이 생겨나 볼셰비키에서 채택되었다.[142] 이는 지휘관 개인의 생각일지 몰라도 백군은 세력별로 협상국과 동맹국 등 세계 각국의 지원을 받았고 외국군의 주둔을 허용해 외세의 꼭두각시라고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물론 초기에는 적군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인해 '외세에 무릎꿇은 반역자'라고 까였지만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계기로 이런 인식은 뒤집히게 된다.[143] 백군이 망하자 독일로 도망가 나치 SS 카자크 군단의 지휘관이 되었고 전후 소련군에 송환되어 전범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144] 러시아 내전 적군 지휘관 중에서도 대숙청을 피하고 독소전쟁 시기에도 장군이 되어 지휘했으며 1963년까지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145] 독일,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벨기에.[146] 당시 조선계 이민자들 다수가 극동 지역에서 활동했는데 만주군이 독단으로 이러한 명분을 들고 소련을 공격할 수 있었다.[147] 녹군을 이끌었던 사람의 대부분은 사회혁명당 좌파였다. 그래서 둘을 동일시하는 사람도 있는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