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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의 서방 공세

1918~1919년 소비에트의 서방 공세
Soviet westward offensives of 1918–1919
파일:sovietwestwardoffensive.jpg파일:23243727359_9aa6c36058.jpg
1. 개요2. 배경3. 공세
3.1. 에스토니아 방면3.2. 라트비아 방면3.3. 리투아니아 방면3.4. 벨라루스-폴란드 방면3.5. 몰도바-루마니아 방면3.6. 우크라이나 방면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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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8년 11월 18일에서 1919년 3월까지 이루어진 볼셰비키 붉은 군대의 공세로, 벨라루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등은 볼셰비키와 불가피하게 독립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또한 루마니아 왕국도 구 러시아 제국령인 몰도바와 통일을 추구했기 때문에 볼셰비키의 공세에 직면했고, 이외에도 볼셰비키의 서진을 경계한 바이마르 공화국발트 3국에 의용군을 보내 볼셰비키와 싸웠다.

물론 볼셰비키가 동유럽에서만 깽판을 친 것은 아니다. 애초에 볼셰비키 입장에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단순한 전술적 후퇴에 불과했으며, 이 조약으로 잃은 영역은 당연히 되찾아야 할 곳으로 여겨졌다. 북유럽에서는 핀란드 내전에 개입했다가 패배하고, 캅카스 방면에서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국을 공격하여 모두 멸망시켰다. 위치상으로 보면 북유럽과 캅카스 모두 훗날 소비에트 연방의 서쪽 변경에 해당하나, 여기서는 동유럽 평원 방면으로 펼쳐진 1918~1919년의 공세만 설명한다.

2. 배경

러시아 혁명러시아 내전을 거쳐 소비에트 러시아독일 제국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였고, 그 여파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여러 국가들이 독일 제국의 괴뢰국으로나마 독립한다. 그런데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면서 이 국가들은 실제로도 독립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혹시 있을지도 모를 볼셰비키의 공세를 막아줄 독일군이 동유럽에서 모두 철군함에 따라 이 나라들은 모두 공중에 붕 떠버린 처지가 되었고, 이때 소비에트 러시아는 잃었던 땅을 되찾기 위해 신생 국가들에게 선빵을 날리며 대대적으로 공세를 시작한다.

독일 11월 혁명 발발 이틀 뒤인 1918년 11월 13일, 볼셰비키 정부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파기를 선언하고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발트3국, 폴란드에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을 위해 붉은 군대에 진군을 명령했다. 11월 16일 편성된 서부전선군은 바로 다음날부터 독일군이 철군한 지역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3. 공세

3.1. 에스토니아 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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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분만에 보는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1918년 11월 말, 에스토니아 방면 공세의 주력을 맡을 붉은 군대 제7군이 에스토니아 방면으로 이동했다. 22일 제7군이 에스토니아 북동부 나르바 시의 독일군 부대를 공격하여 에스토니아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에스토니아 독립전쟁의 전선은 크게 북부와 남부로 나뉜다. 북부 전선에서 7군 소속 제6소총사단은 12월 24일 에스토니아 육군 소속 신편 4연대와 5연대가 방어하는 타파를 점령하고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불과 34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했다. 남부에서는 17일 붉은 군대 제49라트비아인소총연대가 발가를 점령하고[1] 24일 타르투도 점령했다. 29일에는 에스토니아 볼셰비키 지도자 얀 안벨트가 친소 꼭두각시 정부인 에스토니아 노동 인민 코뮌을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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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에스토니아 남부 발가의 에스토니아 육군 장갑열차
에스토니아 육군은 1919년 1월 2일부터 5일까지 전 전선에서 붉은군대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에스토니아군은 1월 7일 반격을 개시했다. 북부전선의 에스토니아 제1사단은 제6소총사단의 후방에 상륙한 핀란드 의용군 1천명의 지원 하에 18일 나르바를 수복했다. 이후 북부 전선은 나르바 강에서 안정화되었다. 제7군은 봄에 1사단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남부 전선에서는 1월 31일 에스토니아군 특공대인 타르투마 파르티잔 대대가 제49라트비아인소총연대를 발가에서 몰아냈다. 붉은 군대는 남부 전선에 주력을 집중했고 2월 16일 반격하여 에스토니아 점령을 재차 시도했다. 3월 15일 오늘날 에스토니아 남동부 세토마, 바스첼리나, 래피나가 제7군에 점령되었다. 에스토니아 2사단은 28일 반격하여 페체리를 수복했다. 오늘날 북부 라트비아에 해당하는 아이나지-스트렌치-알룩스네 전선에서도 에스토니아군과 라트비아 붉은 군대 소속 북부집단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에스토니아는 대대적으로 병력을 확충하고 러시아 백군, 라트비아와 협력하며, 영국과 독일 등의 지원을 받아 붉은 군대를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5월 이후로는 오히려 러시아와 라트비아 영내로 대대적인 역공을 벌여 붉은 군대를 격퇴하고 라트비아의 독립군을 지원했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 에스토니아는 독립에 성공했고, 볼셰비키의 에스토니아 방면 공세는 실패했다. 이후로도 볼셰비키는 에스토니아 점령을 위해 무익한 시도를 여러번 했으나 실패했고 1920년 2월 2일 타르투 조약을 체결하여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의외의 사실로, 에스토니아는 발트 3국 중 영토가 제일 작고 인구도 제일 적지만 동원한 병력은 7만 4,500명으로 6만 9,000명을 동원한 라트비아, 2만 명을 동원한 리투아니아보다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 에스토니아군은 자국에서 붉은 군대를 격퇴할 뿐만 아니라 라트비아의 독립전쟁도 원조하는 저력을 보였다.

3.2. 라트비아 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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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6일 당시 라트비아 독립전쟁의 전세.
핑크색이 붉은 군대가 점령한 곳이다.
라트비아는 에스토니아와 달리 실제로 수도를 빼앗기고 나라가 멸망 직전으로 몰렸다. 1918년 12월 1일 볼셰비키는 라트비아를 침공했다. 당시 라트비아 침공군은 대부분 붉은 라트비아인 소총병(Red Latvian Riflemen)이라 불리는 라트비아인 붉은 군대 장병들이었다. 때문에 침공은 더욱 쉽게 진행되었고 라트비아 대부분은 별다른 저항 없이 볼셰비키의 수중에 넘어갔다. 북부에서는 12월 7일 알룩스네, 18일 발카, 23일 체시스가 점령되었고, 남부에서는 9일 다우가우필스, 17일 플랴비냐스가 점령되었다. 수도 리가는 이듬해 1919년 1월 3일 점령되었고 13일 라트비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물론 에스토니아 코뮌처럼 이 라트비아 SSR도 볼셰비키의 지령을 받는 괴뢰정권이었다.

1월 15일 붉은 군대의 공세에 무력하게 털리던 라트비아는 리엘라우체에서 최초로 적군의 진격을 막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라트비아와 연합한 독일군이 아우체에서 패하는 바람에 또다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달 말 라트비아 임시정부와 잔여 독일군부대는 라트비아 서단의 리에파야로 후퇴하였고 라트비아-볼셰비키 전선은 벤타 강에서 안정화되었다. 22일 붉은 군대는 벤타 강변에 교두보를 형성하여 스크룬다를 점령했으나 29일 라트비아군의 반격에 밀려 교두보를 다시 내주고 패배했다. 이후 붉은 군대의 공세는 중단되었다.

라트비아는 2월 중순 반격을 개시했다. 정부는 18일 에스토니아와 협정을 체결하여 에스토니아 영내에서 북부라트비아인여단을 창설했다. 3월 3일 라트비아-독일 연합군이 붉은 라트비아인을 상대로 반격을 개시했다. 15일 투쿰스가, 18일 옐가바가 볼셰비키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4월 16일 발트 3국의 지배를 획책한 발트 독일인 귀족들이 리에파야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임시정부를 내쫓고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임시정부는 리에파야 항구에 정박한 영국 해군의 함선으로 피신하였다.

5월 22일 리가는 자유군단에 점령되었고 이후 대대적으로 진행된 빨갱이 사냥으로 최소 174명에서 최대 5천명이 사살되었다. 이후로도 자유군단과 독일계 부대는 독일인의 현지 지배를 목적으로 깽판을 부리다가 체시스 전투에서 에스토니아-라트비아 연합군에 참교육을 당하고 협상국의 개입 하에 라트비아 영내에서 철수했다. 이후 라트비아는 남쪽에서 밀고 올라온 폴란드 제2공화국과 협력하여 남동부 다우가우필스를 해방하고 1920년 8월 11일 리가 조약[2]을 체결하여 독립을 인정받았다.

3.3. 리투아니아 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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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nlistment_in_the_Lithuanian_Army,_Panemunė,_Kaunas_1919.jpg
1919년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리투아니아군에 입대하는 사람들
폴란드 분할로 러시아 제국령에 속한 리투아니아는 1차대전 당시 독일 제국에게 전 영역이 점령되었다. 1918년 2월 16일 리투아니아 국가평의회(Lietuvos Taryba)는 독일과 러시아에 모두 독립을 선포했다. 3주 후 볼셰비키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조인하여 리투아니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다. 얼마 안가 독일도 서부전선에서 패배하여 리투아니아는 완전히 독립을 쟁취했다. 독일군은 리투아니아에서 물러났지만 동쪽의 볼셰비키와 남쪽의 폴란드가 독일군의 빈자리를 노렸다. 12월 16일에는 리투아니아 공산당이 볼셰비키의 괴뢰정권인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했다.[3]

볼셰비키의 서부전선군은 후퇴하는 독일군으로부터 10~15km의 간격을 유지하면서 그들의 뒤를 따랐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다급하게 병력을 모으는 한편 독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아냈다.[4] 1918년 12월 12일 리투아니아 동부에 도착한 서부전선군 병력은 3개 사단 1만 8천~2만 명이었다. 그 가운데 리투아니아인은 5천명이었다. 당시 리투아니아군의 병력은 3천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훈련되지 않은 지원병들뿐이었다. 서부전선군은 22일 자라세이와 슈벤치오니스, 23일 우테나, 27일 로키슈키스를 점령했다. 이듬해 1919년 1월 5일에는 수도 빌뉴스, 9일 우크메르게와 파네베지스, 15일 셰울레이, 25일 텔셰이를 추가로 점령했다.[5] 이때까지 붉은 군대가 점령한 리투아니아 영토는 전체의 2/3에 달했다. 전선은 라트비아군과 독일인 부대가 벤타 강에서 붉은 군대를 막아선 후에야 안정화되었다. 독일은 후퇴하는 자국군과 볼셰비키 간의 전투를 막기 위해 1월 18일 협정을 체결하여 일시적인 휴전선을 긋고 카우나스에 대한 공격을 금지했다.

물론 볼셰비키는 협정을 지킬 생각은 딱히 없었고 2월 7일 중부 카우나스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붉은 군대는 카우나스의 북쪽과 남쪽으로 진격하여 도시를 포위, 점령할 계획이었으나 리투아니아군과 독일군의 격렬한 반격으로 15일 실패로 돌아갔다. 볼셰비키의 공세에 경악한 독일은 셰울레이 여단(Brigade Schaulen)을 파병하였다. 그달 말 리투아니아군과 독일인 부대는 반격을 개시하여 3월 중순까지 북서부 셰울레이, 셰두바, 요니슈키스 등을 해방시켰다.

남부에서도 3월에 개시된 폴란드군의 반격 공세에 호응하여 4월 초 리투아니아군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폴란드군은 4월 21일 빌뉴스를 해방시켰다. 폴란드군은 붉은군대를 두들겨 패 동쪽으로 밀어붙였고 리투아니아와 볼셰비키 간의 전선은 매우 줄어들었다. 즉 리투아니아에 대한 볼셰비키의 위협은 줄어든 반면에 폴란드의 위협은 오히려 증가했다. 볼셰비키는 폴란드 전선에서 리투아니아의 지원을 얻을 목적으로 1920년 7월 12일 리투아니아와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리투아니아 점령의 꿈은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으며, 7월 14일 빌뉴스를 재점령한 후에도 리투아니아로 반환하는 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리투아니아 점령을 다시 한번 획책했다. 볼셰비키는 8월 바르샤바 전투에서 옥수수가 털린 후에야 빌뉴스를 리투아니아에 양도했다. 그러나 빌뉴스는 군사반란을 가장한 폴란드군의 침공점령된다.[6]

여담으로 리투아니아를 지원한 독일인 군대는 독일계에 의한 발트 3국 지배를 획책했다가 에스토니아군과 라트비아군에 패배하고 1919년 7월 중순까지 리투아니아에서 모두 물러났다.

3.4. 벨라루스-폴란드 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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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024px-PL-RU_war_1919_phase_I.svg.png 파일:1024px-PL-RU_war_1919_phase_II.svg.png
1918~1919년 소비에트의 발트 3국 및 벨라루스 방면 공세
빨간색 화살표가 붉은 군대의 진로이다
1919년 발트 3국 및 폴란드의 반격
흰색 화살표는 에스토니아-라트비아 연합군, 검은색 화살표는 리투아니아군, 파란색 화살표는 폴란드군의 진로이다
1918년 초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총리 안톤 루츠케비치가 블라디미르 레닌과 회담하여 소비에트 헌법을 벨라루스에 적용하는 댓가로 벨라루스의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할 것을 제안했다. 물론 레닌은 독일군이 동유럽에서 등돌리기만 하면 그 지역을 그대로 수복할 생각이었으므로 좆까라고 대답했고 11월 벨라루스 침공을 개시하였다. 붉은 군대는 11월 21일 폴로츠크, 22일 드리사, 로가초프, 24일 즐로빈, 28일 보브루이스크, 12월 3일 보리소프, 8일 슬루츠크, 9일 이구멘을 점령했다. 10일 붉은 군대는 무저항 상태의 민스크를 점령하여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을 멸망시켰다.

1919년 1월 1일 붉은 군대는 스몰렌스크에서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했다. 하지만 아직 벨라루스 서부에서는 볼셰비키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폴란드인과 벨라루스인 민병대가 활동하며 현지 볼셰비키들과 교전을 지속했다. 1919년 1월에는 빌뉴스에서 현지 폴란드인 민병대가 소련 서부전선군의 공세에 패배해 후퇴했다. 이에 폴란드와 볼셰비키 모두 벨라루스 서부에 증원부대를 파견하였다.

12일 붉은 군대 최고사령부는 네만 강을 목표로 한 작전을 선언했고, 2월 12일 현 폴란드 동부를 흐르는 부크 강으로 목표를 변경했다. 당시 볼셰비키의 목표를 두고 의견이 갈리는데 첫째는 동유럽의 모든 독립국을 분쇄하고 중유럽으로 진출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혁명을 지원하는 것이었다는 주장이고, 둘째는 단순히 동유럽 현지에 제대로 된 독립국이 자리잡기 전까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영토를 최대한 넓히는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어쨌거나 둘 다 당시 볼셰비키가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하루살이 정권으로, 그들 사이의 국경을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로 여긴다.

1919년 2월 중순, 폴란드군은 오늘날 벨라루스 서부 베레자 카르투스카와 모스티에서 현지 볼셰비키 부대를 격퇴했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발발이었다. 붉은 군대의 공세는 2월 말에 중단되었다. 4월 붉은 군대는 그로드노와 빌뉴스를 폴란드군에 빼앗겼다.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폴란드 동부를 휩쓴 전쟁 끝에 볼셰비키는 1921년 3월 18일 리가 조약을 체결하여 폴란드의 독립을 인정했다.

3.5. 몰도바-루마니아 방면

1917년 12월 15일 러시아 영토였던 베사라비아러시아 공화국의 일부로서 몰다비아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에 휩쓸린데다 현지 볼셰비키 세력의 준동으로 혼란을 제어할 수 없었던 몰다비아는 1918년 2월 6일 독립을 선포하고 4월 8일 루마니아 왕국과 통일했다. 또한 부쿠레슈티 조약에서 루마니아는 동맹국 진영으로부터 베사라비아와 통일을 인정받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통일을 인정하지 않고 베사라비아 수복을 시도했다. 현지 볼셰비키 세력은 잦은 봉기를 일으켜 베사라비아 일대의 권력 장악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루마니아 측에게 제압당했다. 또한 러시아 볼셰비키는 헝가리-루마니아 전쟁에서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을 지원하려 시도했으나, 루마니아가 방어를 잘 갖춰서 아무 이득도 보지 못했다.

3.6. 우크라이나 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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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과

볼셰비키의 서방 공세는 동유럽의 독립국가 건설 시도를 억누르는 데 대부분 실패하였으며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는 벨라루스였다.

공세에도 어찌저찌 살아남은 폴란드발트 3국은 각각 1939년 독일과 소련에, 1940년 소련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이 공세는 피했지만, 폴란드와의 전쟁과 볼셰비키와의 전쟁을 버티지 못하고 1921년 리가 조약에 따라 반으로 분단되었다.


[1] 타파와 발가 모두 철도가 분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서유럽에 비해 교통이 후진적이고 철도 밀도가 낮은 동유럽에서 철도 분기점은 중요한 요충지였다.[2] 1921년 3월 체결된 리가 조약과 다르다.[3] 1919년 2월 27일 리투아니아-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로 병합됨.[4] 주로 작센 지방에서 많이 왔기 때문에 독일인 지원병을 '작센 지원병'이라 부르기도 한다.[5] 빌뉴스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현지 폴란드인 민병대와 서부전선군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6] 현지 폴란드군 부대가 "독단"으로 빌뉴스를 점령하고 공식적으로 폴란드 중앙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것이 폴란드의 실권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짠 각본대로 움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