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17 23:04:33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

리투아니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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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
Republika Litwy Środkowej
파일: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 국기.svg 파일: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 국장.svg
국기[1] 국장
파일: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 지도.png
1920년 ~ 1922년
수도 빌뉴스
정치체제 공화제
국가원수 상원 의장
언어 폴란드어
성립 이전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멸망 이후 폴란드 제2공화국에 흡수
1. 개요2. 역사
2.1. 배경2.2. 젤리고프스키의 반란2.3. 중재 노력과 실패
3. 여파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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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기에우워, 호드키에비치, 미츠키에비치, 피우수트스키와 나 같은 사람은 리투아니아'인(Litwini)'들이고, 당신들 (독립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지도층) 같은 사람들은 리투아니아'족(lietuvisy)'일 뿐이오.[2]
미하우 유츠크니에비치 (Michał Juckniewicz). 빌뉴스 병합 문제를 두고 리투아니아 측과 논쟁하던 중 한 발언.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은 전간기 1920년 10월 폴란드 장군 루치얀 젤리고프스키(Lucjan Żeligowski)의 반란[3]으로 전통적인, 그리고 현 리투아니아의 수도 지역인 빌뉴스와 그 주변 지역에 수립된 폴란드 제2공화국괴뢰국이었고, 1922년 폴란드에 합병되며 멸망한다.

2. 역사

2.1. 배경

빌뉴스는 예로부터 전통적인 리투아니아의 수도였으며 그 주변 지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절부터 리투아니아의 땅이었다. 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분할 후 러시아의 지배를 거치며 이 지역은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의 땅이 되었다. 1916년 독일 인구조사에서 빌뉴스 시의 인구 구성은 폴란드계와 유대계가 각각 50.2%와 43.5%로 대다수를 점하고 리투아니아인은 2.6%에 불과하였다. 빌뉴스를 제외한 중앙리투아니아 지역의 경우 89.8%가 폴란드계였으며 리투아니아계는 4.3%에 불과했다.

하지만 위 조사에서 감안해야할 점은 1916년 인구조사를 포함한 당대 인구조사 상당수는 인구의 언어에 따라 분류했다는 점이다. 이 당시까지 폴란드어는 민족 정체성과 관계없이 동유럽 지식인층의 링구아 프랑카였고 이것은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부터 이어지던 것이었는데, 이러한 까닭으로 폴란드어 화자이되 리투아니아인 정체성을 가진 이들도 해당 조사에서는 폴란드계로 분류되었던 것. 이는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의 해당 인구조사에 대한 유효한 반박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예일 대학교 교수이자 역사학자 티모시 스나이더는 관점에 따라 (언어 분류에 따른) 폴란드계는 빌뉴스 지역의 다수민족일 수도 있지만 민족분류 그 자체가 아닐 수도 있다고 평했고 당대 폴란드어를 화자로 동화되는 것은 폴란드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단순히 명망있는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고 덧붙였다.[4] 더군다나 빌뉴스 지역의 유대인들 대다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분쟁에 별 의견이 없었으나 일부[5] 유대인들은 훨신 크고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폴란드보다 리투아니아를 선호했다.

이러한 민족분쟁에 따라 1919년 러시아독일 제국, 오헝제국이 몰락하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독립하자 갈등이 빚어지게 된다. 우선 독일 제국이 소비에트 러시아와 맺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빌뉴스 지역은 신생 리투아니아에 귀속되었지만 이 당시 폴란드는 이런 조약 따위를 준수할 국가가 아니었다. 123년간의 지배 이후 독립한 폴란드는 국경이 분명히 정의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당시 폴란드 정부는 확장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다. 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은 라트비아, 루마니아를 제외한 나머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나라들과 모두 국경분쟁을 겪었고, 독립 직후 영토분쟁으로 전쟁만 3번 치른 나라였으며, 독립 직후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재건하자는 주장(...)도 정식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호전적인 나라였다.

다만 아무 근거없이 폴란드가 혼자서 전쟁광에 확장주의적이고 볼 순 없고, 기본적으로 저렇게 폴란드계가 절대 다수이며 이웃 다른 신생국들과 클레임 분쟁이 걸린 르부프, 빌노 같은 지방도 무슨 애초에 그럴만한 강력한 중앙 권력도 없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에 폴란드계가 무슨 인종청소를 해서 그리 된 것도 아니고, 원래는 리투아니아어도 쓰고 리투아니아적 정체성이 강했던 현지 토착 엘리트들이 수백년간 천천히 나머지 연방 전체의 문화적, 정치적 주류 언어였던 폴란드어로부터 시작해서 점차적으로 동화되면서 20세기 시점에선 '폴란드인'이 되어버렸던 것이라 아예 폴란드만 멋대로 남의 나라 침략하고 다녔다고 봐선 안된다. 폴란드가 계승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워낙 중동부 유럽의 거대 국가였던 만큼 폴란드인들의 역사적 지분도 그만큼 커서 분쟁이 많았던 것이고, 비슷한 류의 전형적인 근현대적 민족관념 따윈 존재하지도 않았던 중세, 근세 왕국들의 역사를 맘대로 민족주의적으로 해석해 우리 민족만 살아야 할 우리 땅이다라고 주장하며 비슷한 처지의 이웃 신생국들과 분쟁이 끊임없었던 건 비단 폴란드 뿐만 아니라 헝가리-루마니아 간 트란실바니아 분쟁부터 남쪽으론 이탈리아-유고슬라비아 간 피우메/리예카 분쟁, 터키-그리스간 영토와 민족 분쟁까지 베르사유 체제 전체의 문제였다.

이 와중에 폴란드는 상술한 폴란드-리투아니아라는 전근대적 전신 자체의 비중이 워낙 컸고, 19세기 초반부터 유럽 전역의 낭만주의적 민족주의 혁명운동을 주도했던지라 당장 신생 폴란드의 군사지도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본인부터 그랬고, 정치적 정체성은 폴란드인이지만 원래 집안의 기원은 리투아니아/중세 루스/독일계/유대인으로서 정체성도 자각하며 협소한 의미에서 베르사유 체제적 폴란드 민족국가가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독일과 소련 사이 중간세력으로 중동부 유럽을 다시 묶을 수 있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자체의 재건을 주장하는 세력의 지분이 강력했다. 신생 폴란드 정계 내부적으로 보면 오히려 이들의 주장에 정면 반대하며 협소한 의미에서의 폴란드인들만 살며 왠만한 민족분쟁 걸린 국경 지방은 떼줘도 된다는 로만 드모프스키가 이끄는 민족민주주의 세력이 이들과 강력하게 대립하고, 사회 내적으론 대외적으론 이렇게 확장주의적인 연방재건주의자들이 오히려 내부 사회정책상으론 적어도 일관성은 있게 폴란드 내에 사는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같은 소수민족에게 관용과 자치 보장을 주장하는 등 나름 진보적인 면이 있었다.

신생 폴란드 내부 정치적 대립이 이러하니 피우스트스키가 이끄는 주로 군부에 집중되어 있었던 연방재건파 다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 대외적으로 다른 신생국들과 전쟁을 하여 '폴란드인들의 땅'을 '회복'하는건 필수적인 정치적 모험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중세, 근세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리투 연방이 어쨌든간에 본인들은 이제 전혀 다른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라트비아, 슬로바키아인 등으로 독자적 정체성을 가지게 된 다른 민족들 입장에선 이런 폴란드 내부의 팽창주의적 다민족주의 vs 협소적 단일민족주의 논쟁 따윈 알 바 아니었고, 현지 폴란드인들의 존재와 과거 폴리투 연방 시절의 역사를 빌미로 쳐들어오는 폴란드는 단순한 침략자일뿐. 이런 식으로 200년간 베를린, 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제 군주들이 다스리기만 했던 나라와 민족들이 새로 신생 민족국가가 되면서 서로 배타적인 역사에 기반한 영토 주장을 타협할 여지도, 이걸 중재할 초월적인 외부 권력도 없으니 결국 베르사유 체제 아래 중동부 유럽의 민족영토분쟁은 끝도 없이 혼란을 야기하다 결국 2차대전이라는 파국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어쨌든 당연히 폴란드계가 다수를 점하고 있던 빌뉴스 지역을 리투아니아에 넘어가도록 둘 생각은 없었으며 이는 폴란드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재건을 부르짖으며 리투아니아와의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하지만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이로 인한 자금 부족 및 경제적 압박, 그리고 국제사회의 따가운 시선(그리고 이어지는 국제연맹의 중재)으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은 폴란드가 빌뉴스를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별 소득없이 수바우키 협정에서 국경조정만으로 끝나게 된다.

2.2. 젤리고프스키의 반란[6]

하지만 이것만으로 포기할 폴란드 제2공화국이 아니었으니 당시 리투아니아 출신 폴란드 장군 루챤 젤리고프스키를 앞세워 폴란드군의 리투아니아 점령지에서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선포하게 하였다. 1920년 10월, 젤리고프스키는 "리투아니아의 압제에 고통받는 빌노를 해방하기 위해" 빌뉴스 지역을 침공, 지역의 독자적인 의회를 설립하여 분쟁을 해결하겠다 선언한다. "반란"이라는 명분이 무색하게 젤리고프스키는 폴란드군에게서 14,000명의 병력과 병참 지원을 받았고 장비로도 숫적으로도, 그리고 빌뉴스의 폴란드인들의 반발도 막아야 했던 리투아니아군에 손쉽게 우위를 점했다. 또한 원래 목표는 빌뉴스 지역 뿐이었으나 협상에서 리투아니아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카우나스에도 위협을 가해야 한다고 여겼던 젤리고프스키는 10월 국제연맹의 휴전 협정을 무시하고 11월 중순까지 카우나스로 진격하지만 11월 19일에서 21일 사이 리투아니아가 수성에 성공하여 11월 20일 휴전 협정이 맺어진다.

2.3. 중재 노력과 실패

휴전 이후 1923년까지 국제연맹은 리투아니아와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간 국경지대에 비무장지대를 설정했다.

리투아니아와 국제연맹은 리투아니아 본국과 연합안[7]도 제시했지만 제안은 결렬되었다. 결국 국제연맹이 다시 이 두 나라의 분쟁에 개입했다. 국제연맹은 두 나라에 이러한 타협안을 제시했는데,
  • 리투아니아와 중앙리투아니아(그리고 폴란드)는 모두 각자의 독립을 인정한다.
  •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은 리투아니아 본국과의 연합 '리투아니아 연합'을 가입하고 다민족국가로서 독립적인 정부, 언어, 사법권 등을 가지지만 빌뉴스에 세워질 연합정부의 지배를 받는다.
  •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모두 중앙리투아니아에 각자의 위원회를 설치하여 중앙리투아니아의 경제와 법령들에 영향력을 갖는다.
  •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방위조약을 맺는다.
  •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에 자국 항구들의 자유로운 사용권을 보장한다.
하지만 이런 국제연맹의 타협안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모두에게 거절당하였으며 결국 1922년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 총선 이후 동유럽에 강력한 동맹들을 구축하고자 하던 프랑스 제3공화국의 비호 아래 폴란드는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을 합병하고 이 '빌뉴스 위기'라고 불렸던 분쟁은 폴란드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국제연맹에서 논의되던 폴란드에 대한 제재도 프랑스의 반대로 흐지부지되어 1923년, 국제연맹도 현상유지를 채택하기로 결정한다.

3. 여파

폴란드에 의해 수도를 잃은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은 어쩔 수 없이 카우나스를 임시수도로 삼았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인 폴란드 침공으로 소련이 동부 폴란드를 점령한 후에야 빌뉴스를 되돌려받을 수 있었으며, 폴란드에 의해 세워진 괴뢰국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과 이의 병합은 한때 한 연방을 이루기도 했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관계를 되돌릴 수 없는 수준으로 망가뜨려 놓았다. 1938년 나치 독일소련의 위협이 눈앞에 들이닥치고 나서 폴란드가 전쟁 최후통첩을 보내고 나서야[8]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정식으로 수교했으며 그 전까지 두 나라는 철로나 우편 같은 것도 연결되지 않은 철저한 단교 상태였다.

이 탓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형제의 나라에서 한동안 적대관계로 변모하였고, 20세기 후반에 나란히 소련치하에서 다시 고생했던지라 다시 동병상련격의 처지가 되었지만, 어쨌든 이 시기 때문에 리투아니아에서는 폴란드에 대해 미묘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과 관련된 위기에서 70년 이후, 소련 해체가 임박한 1990년, 갓 재독립을 선언한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인근 지역에서 리투아니아의 폴란드인들이 "폴란드계 자치 지역"을 선포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구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 지역의 일부에 빌뉴스 시를 완전히 에워싼 모양새의 이 자치 지역은 발트 3국의 독립을 막고자 했던 소련의 암묵적 지지를 받았고 동폴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설립을 주장하던 얀 치에차노비츠가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독대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과거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과는 다르게 이 폴란드계 자치 지역은 갓 민주화를 해내고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지지하던 레흐 바웬사 정부에게 무시를 당하였고 이어지는 1991년 리투아니아 정부가 이러한 자치지역 수립 시도를 위헌이라 규정, 자치지역 수립에 참여했던 평의회들을 전부 해산하면서 끝난다.

4. 같이 보기



[1] 참고로 이 국기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기처럼 폴란드계를 상징하는 문양, 리투아니아를 상징하는 문양을 섞고 그 위에 빌뉴스 시를 상징하는 문양을 추가했다. 다수 폴란드계의 국가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폴란드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재건 야욕을 어느 정도 반영한 셈이다.[2] 원문에서 전자는 폴란드어리투아니아인을 뜻하는 'Litwini'란 단어를 사용했고, 후자는 리투아니아어 자체로 리투아니아인을 뜻한 'lietuvisy'란 단어를 썼는데, 문화나 정치의 지배어로서 역사가 짧았던 리투아니아어에 기반한 정치적, 문화적으로도 단절된 정체성을 고집하는 쪽은 편협하고 맹목적인 지엽적 민족주의자들일 뿐이고, 리투아니아계 정체성도 분명 가지고 있지만 보다 더 문화적으로 역사가 깊고 영향력이 큰 폴란드쪽 정치적 정체성을 주장한 자신들이야 말로 진짜 자랑스러워할만한 '문화인'으로서 리투아니아인이란 뉘앙스이다.[3] 반란이라 부르기는 하나 실상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명령으로 이뤄진 전형적인 '가짜 깃발 작전' (false flag operation)이었다.[4] 원문: Depending on one's point of view, Polish was either the dominant nationality in and around Wilno or not a nationality at all: assimilation to Polish language was regarded not so much as joining a distinct national society as joining respectable society[5] 주로 좌익 계열[6] 리투아니아 독립 전쟁의 일부로도 여겨진다.[7] 오늘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비슷한 연맹으로 리투아니아계 서 리투아니아(혹은 사모기티아)와 다민족 빌뉴스로 나뉜 국가.[8]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외교관계 재수립은 리투아니아가 사실상 새 국경을 인정한다는 것을 뜻했기에 리투아니아는 외교 관계 재수립을 계속 거절하였다. 그래서 1938년 3월 17일, 48시간 안에 폴란드와의 외교관계를 재수립하지 않으면 침공하겠다고 폴란드가 위협하자 전쟁에서 이길 자신은 없던 리투아니아는 어쩔 수 없이 폴란드와의 외교관계를 재수립했다.